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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한국문인협회가 제정한 조연현문학상의 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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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성의 히,스토리] 일제강점기 20대 남자 친일파로 맹활약한 조연현

▲ 조연현 ⓒ 한성대학교 미디어위키

10대와 20세 전후는 3·1운동, 4·19혁명, 6월항쟁과 2016년 촛불혁명 등에서 큰 역할을 했다. 이 세대는 결정적인 순간마다 역사의 물꼬를 트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일찍부터 기득권을 편들며 세상의 발전을 저해하는 이들이었다. 일제강점기 막판에 20대 남자 친일파로 맹활약한 조연현도 그런 사람이었다.

유관순이 18세 나이로 순국하기 2개월 이틀 전인 1920년 7월 26일 경상남도 함안군에서 출생한 조연현은 함안공립보통학교·배재중학 등을 거쳐 혜화전문학교(훗날의 동국대)에서 수학한 뒤 시인·비평가·언론인으로 성장했다.

그는 18세 때인 1938년에 배재중학을 졸업한 뒤, 친일파 방응모가 창간한 대중잡지인 <조광>에 ‘하나의 향략’이란 시를 발표했다. 이렇게 문단에 데뷔한 다음, 스무 살을 갓 넘은 시점부터 문학비평 분야에서 친일파로 두각을 나타냈다.

그가 출생한 함안군 바로 위쪽에 창녕군이 있다. 여기서 1929년에 출생하고 한국 친일파 연구의 토대를 닦은 임종국은 한일협정 이듬해인 1966년에 발간된 <친일문학론>에서 조연현 또래의 문인들을 일제강점기 말기의 ‘신진 작가들’로 묶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전쟁(대동아전쟁)이 발발했다. 이 시기를 전후해 활동을 개시한 문인들이 임종국이 말한 신진 작가들이다. 임종국은 이들의 특징과 관련해 “1941년 전후로부터 등장한 작가들이 기성 작가들과 구별되는 가장 근본적이요 뚜렷한 차이점은 그들이 조선의 특수성 문제를 별로 논의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라고 정리한다.

한국 문학을 일제 어용문학인 국민문학으로 바꾸는 일은 임종국의 표현에 따르면 “4천년의 전통을 해소하고 2600년 속으로 융화”시키는 일이었다. 4천년이 넘는 한민족의 전통을 왜곡하고 이를 일본의 전통 속으로 쑤셔넣자면, 최소한 ‘조선의 전통’이 무엇인지는 당연히 알고 있어야 했다.

국민문학 제1기 세대인 친일파 이광수(1892년생)나 최재서(1908년생) 등은 그것을 고민해보기라도 했지만 조연현 같은 신진 작가들은 그런 의식마저 없었다고 임종국은 지적했다. 그는 신진 작가들을 민족의식이 마비된 세대로 규정했다. 이 시기에 글을 쓰기 시작한 모든 청년 문인들의 민족의식이 마비됐다는 게 아니라, 이 시기 문단에서 특별히 부각된 청년 문인들의 특징이 그러했다는 의미다.

“3·1운동을 전후하면서 출생한 이 세대들은 거개가 지나사변 밑에서 전문교육을 받았고 국민문학의 성장 속에서 문학을 공부했으며, 또한 제1기생들에 의해서 국민문학의 정지 작업이 끝난 후 데뷔한 사람들이었다.”

신진 작가들은 1919년을 전후해서 태어났지만 이 운동의 역량이 약해지는 시기에 성장했다. 그런 다음, 일본의 대륙침략에 가속도가 붙은 1937년 중일전쟁 이후에 지금의 고등학교 수준인 전문교육과 문학교육을 받았다.

거기다가 이광수·최재서 등이 “4천년”을 “2600년” 속에 쑤셔 넣은 뒤였다. 그래서 “4천년”에 대해 크게 고민할 필요 없이 친일 대열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들이 한국적 특수성에 대한 고민도 거의 없고 민족의식도 희박했던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라는 게 임종국의 분석이다.

일본 국민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문학 비평하는 인물

조연현의 문제점이 그런 데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친일인명사전> 제3권 조연현 편에 인용된 ‘아세아 부흥론 서설’을 읽어보면, 그가 대동아공영권론을 찬미하는 데 급급해 문인의 기본 자질마저 무시하고 살았음을 느낄 수 있다.

1942년에 발표된 ‘아세아 부흥론 서설’은 미술평론가이자 교육자인 오카쿠라 텐신(岡倉天心, 1863~1913)의 논리를 이용해 대동아공영권의 당위성을 설명하는 글이다. 그런데 이 글은 오카쿠라 사상의 맥락을 정확히 소개하지 않고 왜곡해서 전달했다. 간단한 확인만으로도 쉽게 알 수 있었던 것을 잘못 인용했으니, 그가 문학보다는 정치적 필요에 더 치우쳐 있었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2008년에 발행된 <종교와 문화>에 수록된 최유경 서울대 객원연구원의 논문 ‘오카쿠라 텐신의 아시아통합론과 불교’에 따르면, 오카쿠라는 <동양의 각성>이란 글에서 반제국주의적 관점으로 아시아의 통합을 역설했다.

그는 “토착의 백성이라는 것은 노예의 다른 이름이 되었다”라며 아시아 토착민족들이 제국주의의 노예가 돼 있는 현실을 비판했다. 그런 뒤 “문명의 이름으로 제국주의자를 포용”한 아시아의 현실을 지적했다. 서양 제국주의가 문명의 탈을 쓰고 아시아를 지배하는 현실을 통탄했던 것이다.

일본을 중심으로 아시아 통합을 주장한 오카쿠라의 글에는 반제국주의 코드가 담겨 있었다. 조연현은 ‘아세아부흥론 서설’에서 이런 맥락을 배제한 채 오카쿠라의 사상을 이렇게 소개했다.

“천재 시인인 강창천심이 이미 명치 36년에 외쳤던 ‘아세아는 하나다’라는 사상이야말로 오늘날 눈부시게 전개되고 있는 대동아공영권의 사상적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이 양자 간에 굳이 차이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강창이 종교·예술적인 측면에서 ‘아세아는 하나다’라고 말했던 반면, 대동아공영권은 정치적 의미에서 ‘아세아는 하나다’라는 사상에 이르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오카쿠라는 서양 제국주의에 맞서 아시아를 통합하자는 반제국주의적 논리를 앞세웠고, 조연현 당시의 대동아공영권론은 일본제국주의를 중심으로 아시아를 통합하자는 친제국주의적 기조를 깔고 있었다.

조연현은 이 같은 핵심적 차이를 배제한 채, ‘오카쿠라는 종교·예술 측면에서 아시아 통합을 주장했고, 대동아공영권론은 정치적 측면에서 아시아 통합을 주장했다는 점에서 차이점이 있다’는 엉터리 해석을 내놓았다. 당시 지식인들이 잘 알고 있었던 오카쿠라의 사상을 내세워 대동아공영권론을 합리화하고자 잘못된 해석을 선보였던 것이다. 그런 직후에 이렇게 말했다.

“거기에 관한 자세한 설명은 필자와 같은 학도의 능력으로서는 할 수 없을뿐더러, 또한 여기서 그것을 구명할 시간도 필요도 느끼지 않으므로 할애하지 않겠습니다만.”

오카쿠라의 사상을 정치적 필요에 맞게 엉터리로 인용한 뒤, 위와 같은 말로 독자들의 반박을 피해 나가고자 했다. 제대로 설명하지 못할 글을 써놓고 위와 같이 변명했던 것이다. 대동아공영권을 옹호하는 글을 써내기에 바빴음을 느낄 수 있다. 문인의 기본 자질이 결여됐음을 보여주는 이런 글이 <동양지광> 같은 시사지에 실렸다는 사실로부터, ‘신진 작가들’의 친일에 힘을 실어주던 당시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친일문학론>은 “문학자는 문학자로서의 특수한 사명을 위하여 국민생활·국민이상을 자기 문학 속에 구현해야 한다”는 메시지가 조연현의 문학 비평에서 나왔다고 알려준다. 문학을 위해서가 아니라 일본 국민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문학을 비평하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독립운동가와 친일파 기리는 문학상 수상자 동시 발표

▲ 경남 함안군 가야읍 산책로 ‘아라길’에 세워진 조연현 시판. ⓒ 윤성효

2010년에 <한국 근대문학 연구>에 실린 고봉준 경희대 연구교수의 논문 ‘조연현 비평에서 문학과 정치’는 “일제 말기 조연현은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지속적으로 투고하여 1939~1941년에 여러 편의 글을 발표했고, 1942년 무렵에는 덕전연현으로 창씨개명을 하고 일제의 파시즘 체제를 적극적으로 옹호한 10여 편의 일문(日文) 평론을 연속적으로 발표했다”라고 기술한다.

기본이 결여된 청년 비평가가 일제 침략전쟁을 찬미하는 글을 쓰면서 수년간 원고료를 받아냈다. 조연현이 거액은 아닐지라도 친일재산을 축적하며 살았던 것이다.

문인과 청년의 양심을 팔아버린 조연현은 일제가 패망한 뒤에도 한국 문학에 계속 영향을 줬다. 해방 직후에 청년문학가협회·전국문필가협회·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등의 발족에 참여한 그는 박정희 집권기에는 한국문인협회 이사장과 한국예술문화윤리위원장과 한양대 문과대학장 등을 역임했다.

그가 끼친 것은 명백한 악영향이었다. <친일인명사전>은 박정희 집권기에 사전심의제 같은 검열제도를 주도한 그가 “긴급조치 9호 시대인 1975년 6월부터 1976년까지 한국예술문화윤리위원회 위원장 자격으로 이른바 ‘가요정화 조치’를 주도해 수많은 금지곡을 양산했다”고 설명한다.

일제강점기뿐 아니라 해방 이후에도 악영향만 끼치고 살았지만, 이 사회는 그에게 계속 칭찬을 해주었다. 1963년에는 문화포장, 1965년에는 대한민국예술상이 주어졌다. 1970년에는 국민훈장 동백장, 1972년에는 하필이면 3·1문화상 예술상이 수여됐다.

그뿐 아니다. 조연현을 본받으라는 메시지가 매년 울려 퍼지고 있다. 1982년에 한국문인협회가 제정한 조연현문학상은 지금까지도 수여되고 있다. 작년에는 제41회 시상식이 있었다.

제40회 조연현문학상 수상자에 관한 2021년 보도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한국문인협회가 조연현문학상과 윤동주문학상의 수상자를 함께 발표하는 일까지 있었다. 독립운동가 윤동주와 친일파 조연현을 기리는 문학상의 수상자를 동시에 발표하는 어이없는 일까지 벌어졌던 것이다. 일제 잔재 조연현을 청산하는 일이 한국 문학계에서 시급함을 절감하게 된다.

김종성 기자

<2023-06-25>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한국문인협회가 제정한 조연현문학상의 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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