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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일본 대신 한국인의 정신 수준 탓하는 원로목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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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성의 히,스토리] 한국 기독교, 누구의 길을 따를 것인가?

▲ 지난 6월 4일 ‘윤석열 정부 1년에 부치는 기독교 목회자 1천인 시국선언‘이 서울 종로5가 한국기독교회관 조예홀에서 열렸다. ⓒ 권우성

윤석열 정부의 대일외교로 인해 기독교 내부도 갈라져 있다. 지난 5월 4일 서울 종로구 한국기독교회관에 모인 목사들은 윤 정부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이들은 서명에 참여한 목회자 1016명을 대표해 ‘윤석열 정부 1년에 부치는 기독교 목회자 시국선언’을 발표했다. 그중 한 대목은 이렇다.

“일방에 치우친 외교는 국가의 위신을 추락시킬 뿐 아니라 오히려 경제적·군사적 안보의 위협 요인이 되고 있다. 민족의 역린을 건드린 대통령의 3·1절 기념사,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노동자 문제에 대한 해법, 국가안보실 도청 사건에 대한 대처 등은 주권국가에서 있을 수 없는 일로, 미국과 일본에 치우친 사대적이며 굴욕적인 외교 가운데 빚어진 참사이다.”

1016명보다 숫자는 훨씬 적지만 힘에서는 밀리지 않는 정반대 선언도 있었다. 김삼환·김진홍·이영훈·소강석·길자연을 비롯한 원로 목사 206명은 5월 3일 여의도 사랑의나눔 사무실에서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런 한일관계를 원한다’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들은 성명서에서 윤 정부뿐 아니라 일본 자체를 적극 지지했다. 이 206명은 한국 국민들의 “정신 수준”을 이렇게 비판했다.

“지금 한국은 많은 분야에서 일본을 능가하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전 세계 사람들로부터 일본인과 한국인 누가 더 존경받는가다. 누가 상대방을 더 열심히 돕고 어려운 나라를 더 열심히 돕는가? 한국은 이런 정신 수준이 아직 일본보다 높다고 말할 수 없다.”

이들은 윤 정부가 ‘일방적인 양보를 하는데도 일본이 성의를 보이지 않으면, 윤 정부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일본에 문제가 있는 것’이라는 취지의 주장을 했다. “이번에 윤석열 대통령이 통 큰 결단을 했는데도 일본이 상응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전 세계는 일본의 낮은 정신 수준을 흉볼 것”이라고 성명서에서 말했다. 윤 정부가 흠 잡힐 일을 하지는 않았다는 의미다.

206명의 목사들은 “원수를 사랑으로 갚는 것이 진정한 승리의 길”이라고 강조한 뒤, 굴욕외교를 반대하는 더불어민주당에 충고의 말을 던졌다. “더불어민주당이 윤석열 정부의 외교를 꼼꼼히 따져서 정부가 좀더 국익을 챙기게 되면 좋은 일이지만, 동시에 좀 더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기 바란다”라는 말로 성명을 끝맺었다.

지금 한국에서 이 정도로 ‘솔직하게’ 굴욕외교를 지지하는 집단은 찾기 힘들다. 기독교 내부의 보수세력만큼 윤 정권의 대일외교를 당당하게 찬성하는 집단은 찾아보기 어렵다. 식민지배 청산을 훼방하는 에너지가 어디에 가장 많은가를 생각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지금 한국 기독교에 절실히 필요한 것

▲ 김승태 전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장의 강의. ⓒ 일제청산연구소

지난 25일 경기도 하남시 초이화평교회에서 ‘두 갈래 길, 순교와 부일협력’이란 주제로 강의한 김승태 전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장은 “목사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거짓에 대한 판단을 올바로 하고 역사의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목사들의 올바른 판단과 정확한 역사인식이 지금의 한국 기독교에 절실히 필요하다는 언급이다.

김승태 전 소장은 일제청산연구소(소장 양진우 목사)가 C헤럴드(기독교 매체), 불금시사(시사토론 모임)와 함께 주최한 월례포럼에서 순교자 주기철 목사와 친일파 김길창 목사를 비교하는 강의를 했다. 이 자리에서 김 전 소장은 “지금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 목사들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시각을 말해달라”는 기독교 언론인의 질문을 받은 뒤 위와 같이 답변했다.

독립기념관 자료과장과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 등도 역임했고 지금은 수원 생명평화교회 목사로 일하는 김승태 전 소장은 일제강점기 한국 기독교를 가리키며 “만약에 그 당시에 목사님들이 1945년 8월 15일에 해방될 거라고 생각했으면, 그걸 기대하고 믿었으면 그렇게까지 하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일본제국주의가 무너지기를 기대하고 거기에 믿음을 갖는 역사의식이 있었다면, 그렇게까지 노골적으로 친일을 했겠느냐는 언급이다.

다른 종교 경전들도 마찬가지지만, 성경은 기독교의 경전인 동시에 고대 중동의 역사서다. 그래서 성경을 자주 통독하다 보면 역사를 보는 안목이 생기기 쉽다. 이처럼 역사의식을 함양하기에 유리한 직업인데도, 일제강점기의 상당수 목사들은 그런 의식을 갖추지 못해 역사에 죄를 범했다.

김길창도 그런 목사였다. 그는 일제의 신사참배 요구를 마지못해 받아들이는 정도가 아니라 매우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친일인명사전> 제1권 김길창 편은 “1938년 9월 10일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부회장으로서 각 노회 총대들을 이끌고 평양신사에 참배했다”고 말한다.

신사참배는 일왕(천황)과 그 조상신인 아마테라스 오미카미 등에 대한 종교적 경외감을 표시하는 행위다. 일례로, 이세신궁에 대한 참배는 이곳에서 숭배되는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에 대한 신앙의 표시다. 일본이 기독교인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한 것은 ‘하나님 대신 일왕과 그 조상신을 믿으라’고 요구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런 이치를 몰랐을 리 없는 김길창은 1938년에 ‘신사참배 투어’를 위한 일본 여행까지 조직했다. <친일인명사전>은 “같은 해 12월에는 장로회 총회장 홍택기, 감리교 신구총리사 양주삼과 김종우, 성결교 이명직 목사 등과 함께 일본에 건너가 이세신궁을 비롯한 일본 신궁들을 참배하고 돌아왔다”고 설명한다.

김길창이 벌인 일은 그 정도에 그치지 않았다. 김승태 전 소장은 “신사참배 문제가 대두된 이후에는 경남교구장으로서 적극적으로 신사참배를 주창하고 이에 반대하는 목사와 교인들을 일본 경찰과 결탁하여 탄압”하기까지 했다고 설명한다. 일본 국교의 대리인이 되어 신사참배 거부자들을 박해하는 일까지 벌였던 것이다.

김길창은 일제 경찰과도 수시로 접촉했다. 그가 신사참배 거부자들을 밀고했다는 의혹도 있었다. 1949년에 국회 반민특위 증인으로 소환된 일제 형사 장세권은 “김길창은 목사 중에도 제1인자인 거물 목사라, 경찰계에서도 소위 간부들과 연락이 빈번”했다고 증언했다. 그러면서 김길창이 경찰서 별실에서 간부들과 장시간 대화하는 일도 많았다고 진술했다.

그랬던 김길창이 해방 뒤에는 일본인들의 재산인 적산을 거둬들이는 일에 앞장섰다. “해방이 되자마자 그는 적산을 인수하여 교육사업을 확장하는 데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였다”라고 김승태 전 소장은 말한다.

김 전 소장이 소개한 김길창 자서전의 한 대목은 인상적이다. 자서전에서 김길창은 “남들은 들뜬 해방의 기쁨에 도취하고 있을 때 나는 조용히 적산 부지로 된 교회 대지 150평을 평당 2000원으로 불하받기에 바빴다”고 회고했다.

그로 인해 김길창은 해방 뒤 교육계 거물로 거듭났다. 김 전 소장은 “1945년 동아대학교 설립에도 참여하여 이사장을 지내고, 학교법인 남성·대동·훈성·한성 등 4개의 재단을 설립하여 교육사업을 확장하였으며, 1962년에는 부산신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을 맡기도 하였다”라며 “이러한 재산과 사회적 영향력을 배경으로 교계에서도 수차의 경남노회장, 부산기독교연합회 회장, 한국기독연합회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고 설명한다.

한국 기독교가 잘되려면

▲ 김승태 전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장 ⓒ 일제청산연구소

반면, 순교자 주기철의 길은 험난했다. 신사참배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수차례 구속되고 가족들이 목사 관사에서 쫓겨나는 속에서도 일왕에 대한 믿음의 표시를 끝끝내 거부했다. 일제 경찰이 심한 구타와 발길질을 가했지만, 그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한번은 매질하러 들어온 일제 경찰에게 “당신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라며 “그때 당신은 이런 것들과 다른 죄들에 대해서 대답해야 할 것”이라고 의연하게 경고해 상대방이 고문을 중단하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만 47세 된 그의 육체는 가혹행위를 버텨내지 못했다. “1944년 4월 13일 건강이 악화되어 병감으로 이감되었다가 21일 부인 오정모 집사와 마지막 면회를 한 후 그날 밤 숨을 거두었다”고 김승태 전 소장은 말했다.

김길창 같은 친일 목사들로 인해 일제강점기 말기에 한국 교회 상당수는 일왕을 믿는 종교로 변질됐다. 이런 한국 기독교가 해방 뒤에 살아난 것은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주기철 목사 같은 이들이 제국주의를 거부하는 모범을 남겼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는 한국 기독교가 잘되려면 김길창이 아닌 주기철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윤석열 정권의 대일외교는 단순히 일본과 잘 지내자는 것도 아니고, 일본제국주의의 망령을 도로 불러들이기까지 하는 일이다. 주기철과 김길창의 상반된 행보는 한국 기독교가 윤 정권의 굴욕외교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를 보여준다.

명백한 범죄를 사과·배상하지 않는 일본의 정신 수준을 나무라지 않고 엉뚱하게도 한국인들의 정신 수준을 탓하는 원로 목사 206명이 주기철의 길을 따르고 있는지 의문이다.

덧붙이는 글 글쓴이는 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입니다.

김종성 기자

<2023-06-26>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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