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이능화
한국학 연구에 큰 영향을 끼친 역사학자 중 하나가 이능화(1868~1943)다. 그는 불교·기독교·유교·도교뿐 아니라 여성사와 사회사에 관한 책들도 저술했다. 기생의 역사를 정리한 <조선해어화사>는 지금도 이 분야 연구에 활용된다.
그런데 그의 역사 연구는 일제 식민사관에 기초했다. 그는 한국 식민사학의 거두인 이병도 못지않은 인물이다. 식민사관의 산실인 조선사편수회에 근무한 기간만 봐도 그렇다.
이병도가 ‘역사를 엮고 가다듬는다’는 직책인 조선사편수회 수사관보(修史官補)로 일한 것은 1925년 8월부터 1927년 5월까지다. 그 뒤 그는 1938년 6월경까지 촉탁 신분으로 근무했다. 대략 13년간 조선사편수회에 몸담았던 것이다.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보고서> 제4-12권에 따르면, 이능화가 조선사편수회의 전신인 조선사편찬위원회에 들어간 것은 1922년 12월 28일이다. 이곳은 1925년 6월에 나온 ‘조선사편수회 관제’에 따라 조선사편수회로 바뀌었고, 그는 여기서 1942년까지 근무했다.
그가 그런 기관에만 가담했던 것은 아니다. 조선사편찬위원회에 들어가기 전에는 조선총독부 학무국 편수관과 교과서조사위원회 위원도 역임했다. 상당히 오랫동안 총독부의 관변 역사학자로 살았던 것이다.
거액을 벌어들인 것은 아니겠지만, 그 긴 기간 동안 일본 녹봉을 받으며 생활했다. 그 기간에 친일 재산을 쌓아가며 한국 역사를 편찬했다. 다른 나라 연구소도 아니고, 한국을 침략한 나라의 연구기관에서 한국사를 편찬했다. 그가 받은 봉급의 의미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일본 입장에서 보면, 그는 가성비가 높은 친일파였다. 일본이 녹봉을 준 기간도 짧지 않지만, 일본이 얻은 것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매우 많았다.
일본은 한국 강점 2년 뒤인 1912년 8월, 그에게 한국병합기념장을 수여했다. 3년 뒤 11월에는 요시히토 일왕(다이쇼 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을 수여했다. 1928년 11월에는 히로히토 일왕(쇼와 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을 부여했다. 이듬해 1월에는 훈6등 서보장을 서훈했다. 그랬다가 1940년 4월에는 조선사편수회에서 공을 세웠다는 이유로 히로히토 일왕의 은배를 수여했다.
20여 년간의 녹봉과 더불어 이 같은 치하의 표시는 이능화가 해준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는 ‘조선이 망한 것은 당쟁 때문이었다’는 인식을 확산시켜 일제 침략에 대한 한국인들의 반감을 누그러트리고 한국인들의 민족적 자긍심을 떨어트리는 데도 기여했다.
<조선사> 편찬 통해 비관적 인식 확산에 기여
민족문제연구소의 전신인 반민족문제연구소가 1993년에 펴낸 <친일파 99인> 제2권에 실린 이이화 역사문제연구소장의 기고문인 ‘이능화: 민족사 왜곡과 식민사학 확립의 주도자’는 이능화가 조선사편수회에서 담당한 집필 분야가 조선시대 중기 및 후기였다며 “당쟁이 가장 치열하던 시기와 근대사의 분기점까지 맡았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총독부가 1927년에 펴낸 <조선인의 사상과 성격>은 “이조의 선조 이후의 정치사는 바로 당쟁”이라고 한 뒤 “양반계급은 이미 당파심이 격렬한 탓으로, 이에 추종하여 목숨을 부지하는 계급 역시 스스로 당파를 만들어 널리 시행한 탓으로 상민 이하의 비천한 계층에까지 파급되었다”라고 서술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파벌 싸움이 없는 나라는 없다. 파벌 싸움의 다른 말은 당쟁, 당파 싸움이다. 이런 정치 투쟁은 일본 집권당인 자민당 내에서도 심하다. 그런데도 일제는 당파 싸움이 조선에만 있었던 듯이 과장을 했다. 이를 통해 ‘한국은 이래서 안 돼!’라는 자조적 논리를 유포했다. 이능화는 <조선사> 편찬을 통해 그런 비관적 인식의 확산에 기여했다.
그의 <조선사> 서술은 일본군이 동학혁명 진압을 구실로 조선에 침략한 뒤 이른바 갑오개혁 혹은 갑오경장을 벌인 1894년을 한국 근대사의 출발점으로 설정했다. 일본군이 벌인 일을 조선 근대화의 출발점으로 서술했던 것이다. 일본이 자국의 필요에 맞게 조선의 제도를 개편한 갑오경장은 지금도 한국인들에게 그리 나쁘지 않은 이미지로 남아 있다. 여기에는 이능화 같은 역사학자들의 역할이 적지 않았다.
<조선사>의 편찬 취지는 중 하나는 단군사관에 대한 대응이었다. 한국인들이 단군을 중심으로 자국 역사를 이해하는 것을 차단함으로써 단군과 한국인들을 갈라놓는 게 핵심 목적 중 하나였다.
2010년에 <사학연구> 제99호에 실린 박찬흥 고려대 연구교수의 논문 ‘조선사(조선사편수회 편)의 편찬 체제와 성격’은 “<삼국유사> 고조선조(條)를 고구려 동명성왕 즉위조에 첨가하거나 <제왕운기>등의 단군신화 관련 기록도 제외시킨 것도 단군신화를 은폐하려는 의도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이능화는 <조선사>가 그런 방향으로 편찬되는 데도 기여했다. 담당한 분야는 조선시대였지만, 전체적인 편집 방향을 논의하는 기회에 그런 역할을 했다. 위의 <친일파 99인>에 인용된 <조선사편수회 사업 개요>에 따르면, <조선사>의 기본 틀이 짜여지던 1934년에 그는 조선사편수회 회의장에서 이런 발언을 했다.
“단군과 기자에 관한 사항은 매우 중요한 문제인데도 불구하고 그 연대가 불분명하기 때문에 본편에 수록되지 않았으므로. 이제 몇 편을 만들자는 논의가 있습니다. 그것에 관한 사료가 매우 적기 때문에 저는 별편이 어떨까 생각합니다. 저의 생각으로는 <삼국유사>와 <동국통감>과 기타 중국인의 학설 등을 모아서, 좀전에 이나바 간사가 말씀하셨던 고려 백문보의 항이나 이조 세종의 항에 수록하면 좋겠습니다.”
단군조선에 관한 자료가 매우 적다고 말하면서, 이를 명분으로 단군조선을 <조선사> 본편에서 빼는 것을 합리화했다. 그런 뒤 단군조선을 본편이 아닌 별편에 넣으면 어떨까, 세종대왕 항목에 끼워 넣으면 어떨까 등등의 궁색한 제안을 내놓았다.
일본의 침략과 식민지배를 ‘교화 사업’으로 미화
이능화가 단군조선에 관한 사료가 매우 적다고 말하던 시기에 역사학자 겸 독립투사 신채호는 뤼순감옥에서 <조선상고사>를 저술했다. 그의 글은 1931년 <조선일보>에 연재됐다. 신채호는 일제강점 이전에 있었던 한국 고서들은 물론이고 중국 역사서 곳곳에 산재한 고조선 관련 자료를 일일이 수집해서 단군조선 역사를 서술했다.
감옥에 갇힌 신채호가 이런 일을 해냈다는 것은 고조선 역사를 서술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런데도 이능화는 사료가 적다는 이유로 단군조선 역사를 본편에서 생략하는 데 동의했다. 그런 뒤 1942년까지 조선사편수회의 녹봉을 받았다. 친일파냐 아니냐를 떠나 학자의 기본적인 양심도 갖추지 못했던 것이다.
학자적 양심도 없는 인물이 <조선사> 편찬에 가담했고, 이로 인해 조성된 고조선에 대한 역사인식이 아직도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해방 80년이 다 되도록 한국인들은 한국사의 뿌리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일제가 심어놓은 역사관이 해방 뒤에도 남도록 하는 데에 기여했으니, 그가 받은 녹봉은 일본이 얻은 이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는 가성비 높은 친일파였다.
1965년과 2023년에 굴욕외교를 주도한 사람들에게 ‘조선시대 당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단군조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라고 물으면, <조선사>의 서술 취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대답을 듣게 될 것이다. <조선사> 등에 기반한 일제 식민사관의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 느끼게 될 것이다. 이능화가 일본을 위해 얼마나 큰일을 하고 죽었는지를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이능화는 역사 서술 분야에서만 일제에 부역한 게 아니었다. 일본 왕실에 아부하는 한시를 써서 공모전에 출품해 당선되기도 했다. <친일인명사전> 제2권 이능화 편은 “1939년 일본 기원 2600년을 기념하는 한시 ‘황화만년지곡(皇化萬年之曲)’을 지었다”라고 알려준다.
일왕의 교화가 영원무궁하라는 의미의 이 시는 “하늘이 내리신 진무천황을 만세토록 하늘이 보호하시도다”라고 한 뒤 “메이지 대제는 중흥을 이루어 앞길을 밝히시네/ 그 위세는 청국과 러시아를 아우르고 교화는 조선에 미치도다”라고 읊었다.
무쓰히토(메이지) 일왕은 1867년 즉위해 1912년 사망했다. 일본이 강화도 사건을 도발한 해가 1875년이고 대한제국을 멸망시킨 해가 1910년이다. 무쓰히토 재위 기간에 일본이 조선 침략을 개시해 성공시켰던 것이다. 그런데도 이능화는 ‘메이지의 교화가 조선에 미치도다’라고 칭송했다. 일본의 침략과 식민지배를 ‘교화 사업’으로 미화했던 것이다.
이런 친일 사학자가 퍼트린 논리들이 아직까지도 한국인들의 뇌리를 상당부분 지배하고 있다. “조선은 당쟁 때문에 망했어”, “단군조선은 신화일 뿐, 사실이 아니야” 라는 말이 우리 귀에 들리면, 이능화가 아직 살아 있구나 하는 경각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김종성 기자
<2023-07-02>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조선은 당쟁 때문에 망해? 그가 아직 살아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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