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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기고] 국가보훈부의 정략적 ‘유공자 서훈 재검토’를 경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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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국가보훈부 장관 지명된 박민식 국가보훈처장이 지난 5월15일 오전 서울 용산구 서울지방보훈청에서 <한겨레>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국가보훈부가 7월2일 국민 눈높이에 맞는 ‘독립유공자 공적심사 기준’을 새로 세우겠다고 밝혔다. 독립유공자 서훈의 영예성이 담보될 수 있도록 가짜 유공자 논란 불식과 신뢰 제고에 초점을 두겠다는 것이다.

그간 연금 등 독립유공자에 대한 예우와 헛된 명예욕에 눈이 멀어 ‘아비를 바꾸고 할아버지를 갈아치운다’는 환부역조(換父易祖)까지 서슴지 않는 극악한 사례도 적지 않게 있었다. 이 중 명백한 증좌가 확인된 일부는 서훈이 취소됐지만, 이는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가짜 유공자는 국가 기강에 관한 심각한 사안으로 보훈부의 이번 대책 수립이 때늦은 감이 없진 않지만, 과오를 시정하겠다는데 반대할 국민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보훈부가 배포한 보도자료와 후속 언론보도를 보면, 보훈부의 진의가 과연 서훈의 공명정대함을 확보하는 데 있는지 의구심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먼저 독립유공자 공적심사위원회를 기존 2심제에서 사실상 3심제로 확대·개편하여, 쟁점 안건의 경우 특별분과위원회에서 심층 논의하겠다고 밝힌 대목이다. 이는 3심에서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겠다는 전형적인 옥상옥식 개편으로 보인다. 오히려 역사학계 외 정치·사회·법률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에게 신설 특별분과위원회와 본심인 공적심사위원회를 개방한다는 방침이야말로 보훈부의 진짜 속셈이 아닐까 한다. 지금도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이 일부 심사에 참여하고 있는데 굳이 개방을 공표, 강조한 것은, 이를 기화로 역사학계가 주도하는 현 시스템을 손보겠다는 것 아닌지 합리적 의심을 가지게 한다. 즉 뉴라이트 계열 비전문가들이 대거 참여할 기회를 보장해, 서훈심사와 건국절 등 독립운동사 논쟁에서 유리한 지형을 만들고자 하는 의도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는 독립운동가 서훈 재심사를 위해 올해 3월부터 가동되고 있는 이른바 ‘독립운동 훈격 국민공감위원회’의 구성에서 뉴라이트 비전문가가 다수를 이루고 있는 데서도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보훈부는 북한정권 수립에 기여하는 등 친북 행적 제외 기준을 명확히 해 사회적 논란을 최소화하고, 공과가 있는 독립운동가에 대한 재평가 방안도 논의하겠다고 밝혔다. 그런데 항일투쟁에서 김구 선생과 쌍벽을 이뤘던 김원봉 장군이 아직도 서훈을 받지 못하고 있는 사례에서 드러나듯 지금도 앞의 기준은 과도하게 적용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나아가 ‘친북’이라는 추상적 잣대는 미군정기 좌익활동이나 단독정부 반대 운동까지 포함할 여지가 있어, 지난 20여년간 시행해온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서훈 기조에 크게 역행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외국인이나 독립자금 기여자, 신사참배 거부자 서훈 확대는 전적으로 환영할 만한 조치이지만, 공과를 재평가하겠다는 대목은 전형적인 ‘변절 옹호론’ 또는 ‘국가발전 기여론’으로 친일파의 죄상에 면죄부를 줄 개연성이 매우 높다. ‘선 항일 후 친일’ 행위자, 즉 변절자 서훈 제외 원칙이 무너질 수 있는 단서가 될 수 있어 경계해야 할 대목이다.

“가짜 독립유공자는 결코 용납할 수 없습니다”라는 글을 올린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의 페이스북.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또 보훈부의 홈페이지나 에스엔에스(SNS)를 활용한 공개검증 홍보가 얼마나 실효가 있을지도 의문이지만, 거꾸로 이념 갈등을 조장하고 정쟁의 도구로 악용될 여지에 대해서도 면밀한 검토를 해야 하겠다. 당장 이러한 우려가 현실이 되고 있다. 검증에 착수하기도 전에 김원웅 전 광복회장과 손혜원 전 의원의 선대 등 특정인에 대한 서훈 취소가 공공연하게 거론되는가 하면, 김가진, 조봉암 등 일부 인물에 대한 서훈이 기정사실처럼 언론에 보도되고 있다. 한술 더 떠 친일행적이 인정돼 서훈이 박탈된 김성수와 장지연도 재서훈을 추진한다고 한다. 이런 식이라면 심사위원회가 왜 필요한가? 보훈부 장관이 마음대로 정하면 될 일 아닌가.

교육이나 통일문제처럼 보훈정책 또한 나라의 근간과 관련된 중대 사안이다. 이런 국가적 과제들이 공청회 등 최소한의 여론수렴 과정도 거치지 않은 채 즉흥적이고 일방적으로 발표되는 사태가 빈발하고 있는 요즈음 상황은 안정적인 국정운영과는 너무나 거리가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독립유공자 서훈과 관련된 이와 같은 난맥상을 벗어나려면 몇가지 원칙을 바로 세울 필요가 있다. 첫째, 이념 갈등을 조장하고 정략의 도구로 삼는 일체의 행위를 즉각 중지해야 한다. 둘째, 서훈심사는 고도의 전문성이 전제되어야 하므로 역사학계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 셋째, 관련 전문가들이 객관적인 서훈기준과 심의절차를 새로이 마련한 뒤 독립운동계와 시민사회의 여론을 수렴해야 한다. 넷째, 심사위원회의 자의적 판단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세부기준을 상세히 규정하고 이를 공개해야 한다.

<2023-07-04> 한겨레

☞기사원문: [기고] 국가보훈부의 정략적 ‘유공자 서훈 재검토’를 경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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