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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효창공원 삼의사묘역 각서 ‘유방백세’ 채색 상태가 원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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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인 애국선열 묘역으로 역사교육과 현장탐방의 공간으로 사랑받고 있는 독립운동의 성지 효창공원 일대의 유적 관리에 보다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왔다.

현재 효창공원에는 안중근 의사 허묘와 삼의사(이봉창, 윤봉길, 백정기)묘, 임정요인묘, 백범 김구묘 등 독립지사 묘역이 조성되어 있다. 그런데 이 중 삼의사 묘역 입구의 석주(石柱)와 묘단(墓壇) 석축에 새겨진 글자가 본래 채색이 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모두 벗겨져 원형을 알아 볼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이 새로이 밝혀졌다.

민족문제연구소 김승은 학예실장은 “우리 연구소가 효창공원 인근에 자리 잡고 있어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연계해 묘역탐방과 시민강좌 등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일상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여러 석조물에 새겨진 글씨들에서 채색 흔적을 발견하고 고증을 거친 결과 본래 채색이 되어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관계 당국에 건의해 조속히 원형복원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안중근 의사의 허묘에도 묘비석이 새로 세워지는 등 전반적인 묘역관리는 크게 소홀함이 없는 상태로 볼 수 있다. 삼의사묘의 묘단에 남아 있는 ‘유방백세(遺芳百世)’ 각서(刻書)는 세월의 흐름에 따라 퇴색이 심해져 본래 채색이 되어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잊히게 되고 따라서 보수정비작업이 전혀 이뤄지지 않은 채 지금에 이르게 된 것이다.

윤봉길 의사 의거 16주년 기념 참배(1948.4.29) 당시의 효창공원 삼의사 묘역 (자료출처 : 『백범김구사진자료집』, 2012)

유방백세(遺芳百世) 각서는 해방 직후 일본에서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세 분 의사의 유해를 수습하여 국내로 봉환할 때 직접 그 장지로 옛 효창원 터를 고른 당사자이기도 한 백범 김구 선생이 휘호한 것이다. 삼의사의 의로운 뜻과 그 공적이 후세에 길이길이 전해지라는 의미를 담았으며, 맨 마지막 글자의 측면에 ‘무자춘일 김구제(戊子春日 金九題)’라고 새겨져 있어, 1948년 봄에 김구 선생이 쓴 글씨임을 알 수 있다.

원래 ‘유방백세’라는 표현은 『진서(晉書)』 「환온전(桓溫傳)」에 나오는 “대장부가 처음부터 아름다운 명성을 후세에 길이 전할 수 없다면, 더러운 이름을 만세에 남기는 일도 역시 부족한 법이니라(大丈夫旣不能流芳百世 亦不足復遺臭萬載耶)”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다. 흔히 이를 ‘유방백세 유취만년(流芳百世 遺臭萬年)’이라는 관용구로 사용하기도 하는데, 백범은 ‘유방백세’의 ‘流’를 ‘遺’로 바꿔 적었다.

채색 각서에 대해 민족문제연구소 이순우 책임연구원은 “예로부터 비석 종류에 새겨진 글씨에는 주칠(朱漆)이나 흑칠(黑漆)을 하여 글씨가 돋보이게 처리하는 것이 상례였고, 그러다가 세월이 흘러 풍화가 심해지면 다시 이를 보수하여 관리하는 것이 마땅한 절차였다”라고 설명하고, “1948년 당시에 촬영된 사진자료를 보면 해당 각서에 검은색이 칠해져 있었던 것이 분명하므로 원형유지 차원에서라도 서둘러 채색복원작업을 시행하는 것이 맞다”고 강조했다.

한편, 삼의사 묘역 입구의 돌기둥에도 ‘삼의사 묘 정문’과 ‘단기 四二九一년 八월 十五일 건립’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이곳 역시 완전히 탈색이 되어 글자를 알아 볼 수 없는 상태이므로 이 부분에 대한 채색작업의 필요성도 함께 제기되고 있다.

첨부자료 1) 삼의사 묘역(효창원) 선정 과정 관련 『백범일지(白凡逸志)』 기록

……나는 즉시로 일본에 체류하고 있던 박렬(朴烈) 동지에게 부탁하여 조국 광복에 몸을 바쳐 무도한 왜적에게 각각 학살을 당한 윤봉길·이봉창·백정기 3열사의 유골을 환국시키게 하고 국내에서 장례 준비를 진행하였다. 그러던 중 “유골이 부산에 도착하였다”는 기별을 듣고, 영접차 특별열차를 타고 부산을 향하였다. 3열사의 말없는 개선에 유골봉환식을 거행하고, 영구를 서울로 봉환하기 위해 부산역을 출발하였다. 부산역 앞에서 서울까지 각 역전마다, 사회단체와 교육기관은 물론이고 일반 인사들까지 운집·도열하여 추도식을 거행하니, 산천초목도 슬퍼하는 듯 감개무량하였다.
서울 도착 즉시 영구를 태고사(太古寺)에 봉안하고, 유지 동포들은 누구를 가릴 것 없이 경의를 표할 수 있게 하였다. 장례에 임하여 봉장위원회(奉葬委員會) 책임자들이 장지를 널리 구하였으나 여의치 못하여, 결국 내가 직접 잡아놓은 용산 효창원 안에 매장하였다. 그것은 서울(漢城) 역사 이래 처음 보는 장례식이었다. 미군정 간부들도 전부 참석하였으며, 미국 군인도 호위차 같이 출동하겠다는 것을 이것만은 중지시켰다.
그러나 조선인 경관은 물론 지방 각지에 산재한 육·해군 경비대까지 집합하고, 각 정당 단체와 교육기관이며 각 공장 부문 일반 인사들이 총출동하여, 태고사로부터 효창원까지 인산인해를 이루어, 전차·자동차 등 각종 차량과 일반 보행까지 일시 정지하였다. 슬픈 곡조를 연주하는 음악대를 선두로 사진반 기자는 사이사이에 늘어섰고, 그 다음은 제전을 드리는 화봉대(花峰隊), 창공에 흩날리는 만장대(輓章隊)가 따랐고, 그 뒤 여학생대가 3의사 상여를 모시니, 옛날 국왕 인산(因山) 때 이상으로 공전의 대성황을 이루었다.
장지에는 제일 앞머리에 안 의사의 유골을 봉안할 자리를 비워놓고, 그 아래로 3의사의 유골을 차례로 모셨다. 당일 임석한 유가족의 애도하는 눈물과 각 사회단체의 추도문 낭독으로 해는 빛을 잃은 듯하였다. 사진반 촬영으로 장례식을 마쳤다.
(*) 인용출처 : 김구(도진순 주해), 『백범일지』 (돌베개, 2002 개정판), 412~414쪽.

첨부자료 2) 효창공원 구역 내 애국선열묘역 조성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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