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기사

[경향신문] [기고] 뉴라이트가 독립유공자를 재심사하는 시대

396

강제동원(징용) 피해자가 아닌 일본의 입장을 대변하는 외교부 장관, 노동자가 분신하고 과거 노동운동 동료가 경찰 곤봉에 맞아 피를 흘려도 ‘노동 개혁’이라는 고용노동부 장관, 여기에 ‘김정은 체제’ 파괴를 주장하는 인사가 통일부 장관으로 내정되는 마당에 ‘백선엽이 친일파가 아니라는 데 장관직을 걸겠다’는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의 언설은 놀랍지도 않다. 윤석열 정부의 장관들은 국민과 언론, 야당이 질문하면 대답 대신 장관직을 걸고 나서겠다고 한다.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

특히 장관급으로 승격된 보훈부의 박민식 초대 장관은 역사왜곡과 독립운동 폄훼의 숙주 역할을 자임하고 나섰다. 이명박·박근혜 정권 6년2개월(2011년 2월~2017년 5월) 동안 보훈처장을 지내며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을 금지한 박승춘과 비교해도 박 장관의 행보는 역대급이다.

지난 2일 ‘독립유공자 공적심사 기준을 새로 세우겠다’는 보도자료를 내놓은 이후 박 장관과 보훈부 관계자들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와 언론 등을 통해 밝힌 내용을 요약하면 두 가지이다.

첫째, 독립유공자, 특히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의 지향이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위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공산주의 국가 건설을 위한 독립운동이었는지를 따져보겠다는 것이다. 둘째, 백선엽에 대한 현충원 홈페이지 안장 기록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라는 표현을 삭제하는 것을 포함해 <친일인명사전>과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결정한 1006명의 국가 공인 ‘친일반민족행위자’에 관해 해방 이후 공적을 이유로 재평가하겠다는 것이다. 독립유공자에 대한 ‘사상 검증’을 하고, 친일파에 ‘면죄부’를 주겠다는 게 핵심이다.

보훈부는 독립운동 연구자들로 구성된 기존 ‘독립유공자 공적심사위원회’로는 이런 목표를 달성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역사학자 외에 정치·사회·법조 등 주로 뉴라이트 성향의 인사들이 참여하는 특별분과위원회를 신설하겠다고 했다. 특별분과위원회는 독립운동 연구자들이 포진한 독립유공자 공적심사위원회를 우회해 장관이 지정한 ‘쟁점 안건’을 처리하는 ‘하명(下命)위원회’가 될 게 분명하다. 지난 3월7일 국가보훈처가 출범시킨 ‘독립운동 훈격 국민공감위원회’의 위원 17명 중 9명이 뉴라이트 인사거나 극우적 역사인식을 보인 인물들이다.

보훈부가 촉발한 역사왜곡 논란은 이명박·박근혜 정권 시절과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당시에는 식민지근대화론자와 뉴라이트 인사들이 정권의 비호를 배경으로 왜곡된 역사관에서 집필한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2006년), <대안교과서 한국 근·현대사>(2008년), 교학사 발간 <한국사> 교과서(2013년)를 학교 현장에 보급하려다 교사·학생·학부모들의 반대로 실패했다. 급기야 역사교과서 국정화(2015년)라는 자충수를 둬 박근혜 탄핵의 단초를 제공했다면, 이번에는 식민지근대화론자와 뉴라이트 학자들이 아닌 정무직 공무원이 단독 질주하는 모양새다.

그러나 박 장관은 초대 보훈부 장관이란 경력을 추가해 내년 총선에 출마할 것으로 보여 보훈부가 촉발한 역사도발이 얼마나 관성력을 발휘할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윤석열 대통령의 멘토로 알려진 이종찬 광복회장이 지난달 취임사에서 “대한민국 원년은 1919년”이라고 하자 뉴라이트의 대모 격인 이인호 전 KBS 이사장은 “임시정부는 어디까지나 임시정부이지, 국민을 보호할 수 있는 권능을 내외로 인정받는 정식 국가가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이에 이 회장이 “당치도 않은 요청을 다시는 나 말고도 누구에게도 하지 마시라”고 일갈하면서 윤 대통령 지지 그룹 내에서도 의견 일치가 이뤄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공부를 해보면 해볼수록 백선엽은 친일파가 아니라는 자신감이 생겼다’는 박 장관은 언론 인터뷰에서 “백선엽이 간도특설대로 활동할 당시 만주에는 독립군이 없었고 홍군 내지는 비적들만 있었고 그들을 토벌했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을 듣고 있으면 항일독립군을 ‘선비(鮮匪·조선 비적)’ ‘사상비(思想匪)’ ‘공산비(共産匪)’ ‘항일비(抗日匪)’ 등으로 칭했던 일제와 만주 군경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특히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가정부(假政府·가짜 정부)라고 했던 조선총독부와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정부가 아니었다’는 이인호 전 이사장의 주장 사이에는 어떤 연결고리가 있는 것일까.

이러다간 뉴라이트가 독립운동가 심사를 맡고, 헌법 전문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삭제하자는 망언이 나오지 않으리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2023-07-19> 경향신문

☞기사원문: 뉴라이트가 독립유공자를 재심사하는 시대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