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조선인 학교에도 출현한 군사교련제도와 배속장교의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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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비망록 92]

마침내 조선인 학교에도 출현한 군사교련제도와 배속장교의 존재
미성년자 금주금연법과 삭발령도 학원통제의 수단으로 사용

이순우 책임연구원

조선인의 참정권(參政權) 및 병역의무(兵役義務)에 대하여는 당국자 간에 숙의한 결과로 약 10개년 간 후에 부여하기로 정하였는데 특히 외국에 재주하는 조선인에게는 외무성(外務省)의 주장으로 일본관민(日本官民)과 동일한 자격을 여(與)하기로 결한 후 각국정부에게 통첩하였다더라.

이것은 원래 『황성신문』이었다가 경술국치와 더불어 제호(題號) 변경을 강요당한 『한성신문』 1910년 9월 6일자에 수록된 「조선인 권리의무(朝鮮人 權利義務)」 제하의 기사 내용이다. 여길 보면 막 일본제국의 신영토(新領土)로 편입된 조선에 대해 병역의무의 부과를 10년간 유예한다는 구절이 포함되어 있다. 그 이유는 자세히 알려진 바 없으나 무엇보다도 언어(言語) 차이로 인해 지휘통솔이 쉽지 않은데다 함부로 무기를 소지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겠다는 판단이 깔려있었던 것이 아니었던가 싶다.

식민통치자들이 “조선인의 병역문제는 언어통일과 의무교육의 보급이 철저하게 이뤄지는 것이 선결과제”라는 언급을 곧잘 내뱉은 것도 이러한 맥락으로 이해가 된다. 그게 아니라면 그들의 충직한 본토 신민(臣民)들만으로도 제국 군대의 유지를 감당할 수 있다고 보았으므로 구태여 ‘이등국민(二等國民)’에 불과한 식민지 백성을 대상으로 병력충원을 시도할 필요조차 없었다는 것이 더 큰 이유였을지도 모르겠다.

아닌 게 아니라 ‘조선’은 어디까지나 제국헌법의 시행구역 밖에 있는 식민지(殖民地)였던 탓에 일본정부의 직할구역을 뜻하는 이른바 ‘내지(內地)’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특별지역의 하나로만 취급되고 있었다. 경술국치 당시의 시점인 1910년 8월 29일에 제정 공포된 칙령 제324호 「조선에 시행할 법령(法令)에 관한 건(件)」에 따르면, 식민지 조선에 적용되는 법률은 조선총독의 명령인 ‘제령(制令)’의 형태이거나 “법률의 전부 또는 일부를 조선에 시행한다”는 별도의 칙령(勅令)이 있어야만 했다. 따라서 이곳은 법률상으로도 처음부터 「징병령(徵兵令)」의 적용대상지역에서 완전히 빠져 있었다.

그러나 만주사변(1931년)을 거쳐 중일전쟁(1937년)에 이르러 소모적인 침략전쟁이 지속되면서 이러한 상황은 급변하기에 이른다. 신무천황제일(神武天皇祭日)인 1938년 4월 3일에 맞춰 시행된 「육군특별지원병령」은 부족해진 병력자원을 식민지 조선에서 긴급 조달하기 위한 응급조치의 하나였다. 그러다가 다시 태평양전쟁(1941년)의 확전에 따라 1942년 5월 9일에는 조선에 대한 징병제 실시계획이 공표되었고 여기에는 일시동인(一視同仁)과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실현하여 명실상부한 황국신민(皇國臣民)이 되도록 한다는 그럴싸한 명분이 내세워졌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이러한 징병제 실시에 관한 연혁을 죽 살펴보노라면 이것과 맞물려 항상 함께 등장하는 것이 하나 있었으니, 조선인 학생을 대상으로 한 ‘군사교련제도(軍事敎練制度)’의 시행 여부가 바로 그것이었다.

이를테면 ‘태생적으로’ 병역의무를 지닌 일본인 학생들이야 더 말할 나위가 없지만, ‘법률적으로’ 아무런 병역의무를 질 필요가 없는 조선인 학생들까지 끌어들여 군사교련의 대상에 포함해야 하는지가 계속 논란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이른바 ‘일선공학(日鮮共學)’의 형태로 운영하는 관공립학교도 여럿 존재하였으므로 이 경우에 조선인 학생들은 제외할 것인지의 여부도 현안 문제로 떠오르곤 했다.

아무튼 이러한 논의의 결과로 1926년 4월 1일 이후에는 병역의무와 직접 관계가 있는 공립중학교(公立中學校, 일본인 전용학교)의 전부(全部; 10개교가 여기에 해당)와 일본인 위주의 관립경성사범학교, 경성공립상업학교, 인천남공립상업학교, 부산제일공립상업학교 등 14개교가 일괄 군사교육의 대상 학교로 선정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1928년 9월에 개시되는 제2학기부터 전문학교 과정에 대해서도 군사교련을 실시하는 방침이 결정되면서, 그해 7월 3일에는 경성제국대학(본과 및 예과), 경성고등공업학교, 경성고등상업학교, 경성법학전문학교, 경성의학전문학교, 수원고등농림학교 등 각 학교에서 복무할 육군현역(陸軍現役)인 배속장교(配屬將校)의 임명이 이뤄졌다.

병역의 의무가 없던 조선인 학교에 대해서는 군사교련의 실시와 배속장교의 배치가 결정된 사실을 알리는 『조선일보』 1934년 7월 18자의 보도내용이다. 이에 따라 1934년 제2 학기부터 경성제일공립고등보통학교(나중의 경기중학교)와 경성제이공립고등보통학교(나중의 경복중학교)를 대상으로 하여 최초로 군사교련수업이 개시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인 학교에 대한 군사교련의 실시와 배속장교의 배치가 본격적으로 개시된 것은 1934년 하반기의 일이었다. 이에 관해서는 『조선일보』1934년 7월 18일자에 수록된 「제일(第一) 제이고보(第二高普)에 금추(今秋)부터 장교배치, 평양상업(平壤商業), 의전(醫專) 양개소(兩個所)에도, 조선인 군사교련의 일보(一步)」 제하의 기사에 이러한 내용이 채록되어 있다.

기보=조선인의 중등교육기관인 고등보통학교에 현역장교를 배속시켜 군사교련을 시키려는 안은 이미 결정된 이래 그 배속관계를 당국에서 고구하던 중 낙착되어 각각 관계 학교에 통기하였다는 바 이것은 예산과 및 배속장교 수효관계로 각 학교에 일시에 다 하지는 못하고 우선 경성의 제일, 제이의 두 곳 공립고등보통학교와 대구(大邱), 평양(平壤)의 두 곳 의학전문학교와 평양공립상업학교(平壤公商) 등에만 우선 배치키로 결정하였는데 오는 2학기 초부터는 실제 교련에 착수하게 되리라 한다.
종래 고등보통학교로는 전주(全州)와 청주(淸州)의 두 곳 고등보통학교에 장교를 배속시키고 교련하였는데 이는 그 두 지방에는 중학교가 없어서 일본 내지인 학생도 공학을 하는 관계상 병역의무연한 때문에 그 학생들을 교련키 위하여 배속시켰던 것이므로 순수한 조선학생의 교련을 위한 장교배속은 이번이 처음이라 한다. 이 외에 19사단 관하 학교의 장교배속은 아직 결정되지 아니하였다 한다.

이보다 약간 앞서 『매일신보』 1934년 6월 27일자에는 「조선인에 대한 병역의무의 전제(前提), 고등보통학교(高等普通學校)에 군사교련을 8월(月)부터 실시?」라는 기사가 등장한 바 있다. 여기에 나오는 제목에서 보듯이 이러한 조치는 그 자체로 “머지않은 장래에 조선인에 대해서도 병역의 의무를 부과하려는 의도”를 내포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해가 바뀌어 1935년 8월 1일에는 다시 동래고등보통학교, 대구고등보통학교, 광주고등보통학교, 함흥고등보통학교, 경성(鏡城)고등보통학교, 춘천고등보통학교, 평양고등보통학교 등 7개 조선인 학교에 대해 군사교련을 위한 배속장교의 추가배치가 이뤄진 것으로 확인된다. 이러한 결과로 각 학교에서는 때마다 정해진 일정에 따라 마치 군인들처럼 ‘교련사열(敎練査閱)’을 받는 것이 하나의 연례행사로 정착되기도 했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한창 조선인 학교에 대한 교련교육의 실시를 강화하던 바로 그 시기와 맞물려 ‘미성년자에 대한 금주금연’을 대단히 강조하거나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예 이를 ‘법제화’하여 제재를 가한다는 내용의 기사들이 곧잘 신문지상에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알고 보니 이 역시 일제에 의한 조선인 병력동원계획과 전혀 무관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매일신보』 1938년 2월 2일자에 수록된 「지원병제도(志願兵制度)에 수반(隨伴), 미성년자 금주금연법령, 체위향상(體位向上) 사회교풍상(社會矯風上) 긴급문제(緊急問題), 4월부터 실시예정」 제하의 기사를 보면 이러한 미성년자 금주금연령이 지원병제도의 실시에 앞선 선결조치로 시도된 사실이 엄연히 기록되어 있다.

이번 새로이 실시를 보게 되는 지원병제도에 대하여 한 가지 여기에 따르는 새로운 법령이 그 제정과 실시를 급히 하고 있는 것이 있다. 즉 총독부에서는 일반 청소년들의 체위향상을 위하여 미성년자(未成年者)들의 금주금연법(禁酒禁煙法)을 내지(內地)와 같이 시행하고자 얼마 전부터 원안을 작성하던 중 작년 가을에 법제국(法制局)에 회부하여 심의를 청하여 왔었다.
그리하여 조선인의 지원병제도 실시에 따라 청소년들의 체위향상은 현하의 절실한 문제로 되어 있는 만큼 위선 청소년의 건강을 해롭게 하는 음주 끽연을 절대로 금지하고자 하는 것이 선결문제로 되어 있으므로 총독부에서는 급속한 실현을 통감하여 법제국의 심의를 재촉하게 되어 이번 4월부터는 이것이 실시하게 되리라 한다. 물론 이 발령 실시에 따라 반도 장래의 국방을 짐지고 나서는 반도 청소년들이 건강이 확보될 것으로 이에 대한 기대는 자못 큰 바 있으며 동법의 내용은 내지의 법률을 골자로 한 것이라고 한다.

이와 함께 이 시기에 ‘삭발령(削髮令)’도 함께 내려진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른바 ‘시국(時局)의 각성(覺醒)’이라는 미명 아래 1937년 11월 5일에는 학무국장 명의의 통첩(通牒)이 발령됨에 따라 관립 대학교 및 전문학교 학생은 일괄하여 군대식으로 완전 삭발을 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더구나 정무총감을 비롯한 총독부 관공리들이 솔선수범하여 이른바 ‘마루보즈(丸坊主, 삭발머리)’를 하는 장면이 연일 신문지면을 장식하는 일이 벌어지곤 했던 것이다.

이밖에 『매일신보』 1942년 5월 7일자에 수록된 「존폐기로(存廢岐路)의 학원구기(學園球技), 최후(最後)의 단안(斷案)을 주목(注目), 각도(各道) 학무 체육관 회의(學務 體育官 會議)를 초집(招集)」 제하의 기사를 보면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상황이 채록되어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전시하 국민의 중견층인 청소년의 체육훈련은 언제든지 총칼을 메고 전장에 설 수 있도록 유검도, 사격, 총검술 등을 중심으로 하는 국방훈련에 중점을 두어야 될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전시체육훈련의 목표가 이와 같이 확립됨에 따라 종내 중등, 전문학교에서 오랜 역사를 가지고 많은 비용을 들여 대규모로 주력하여 오고 있는 야구, 정구, 축구, 농구, 배구 등 구기(球技)가 재검토의 도마 위에 서게 된 것도 당연한 결과인데 이 경기가 모두 일반대중의 관람흥미의 초점이 되어 있는 것인 만큼 구기의 존폐문제는 사회의 주목을 끌고 있다.
…… 여러 점에 있어서 대학 전문학교의 경기종목에서 빼는 것이 적당하다는 견해이나 중등학교에서는 연령이 한창 발육하는 때인 것과 재학연한이 긴 것 등 대학 전문학교와는 사정이 다르므로 단체정신을 양성하는데 적당한 각종 구기는 선수제도의 폐해에 빠지지 않는 정도에서 필요를 인정하고 있다. (하략)

흔히 단체경기로 인식되고 있던 구기종목조차도 전시체제하에서는 총검술이나 사격과 같은 국방훈련종목에 밀려 된서리를 맞게 되었다는 것이 조금은 의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별의별 학원통제의 수단을 강화하여 조선인 학생들을 거듭 옥죄는 것도 모자라서, 마침내는 그저 ‘이등국민’으로만 업신여기던 식민지 조선의 젊은이들에게까지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지게 만든 것은 그만큼 일제 패망의 순간이 임박하였다는 반증이기도 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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