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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간토대학살 100년 은폐된 학살, 기억하는 시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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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토대학살 100년 은폐된 학살, 기억하는 시민들〉
한국 식민지역사박물관‧일본 고려박물관 연계전시

일본 간토대지진 당시 벌어진 대대적인 조선인학살 100년을 맞아, 이 사건의 참상을 알리고 희생자들을 기리는 기획전시가 8월 1일부터 10월 29일까지 용산구에 위치한 식민지역사박물관 1층 돌모루홀에서 열리고 있다. 〈간토대학살 100년-은폐된 학살, 기억하는 시민들〉을 주제로 한 이번 전시는 지난 7월 5일 일본 도쿄 고려박물관에서 개막한 〈간토대진재100년 은폐된 조선인학살〉과 연계하여 열리는 기획전으로, 민족문제연구소가 주최하고 식민지역사박물관이 주관한다.

1923년 9월 1일 일본 간토지역에 일어난 진도 7.9의 강진으로 도쿄와 요코하마 일대가 철저하게 파괴되고 10만 명 이상이 사망·실종하는 대참사가 발생했다. 조선인학살은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 ‘폭탄을 들고 습격해온다’는 등의 유언비어가 조직적으로 전파되면서 일본 군대와 경찰 그리고 당국의 방조 아래 일본인 자경단에 의해 잔혹하게 자행됐다. 1923년 12월 조선인박해사실조사회(이재조선동포위문반)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간토대학살로 인한 조선인 희생자는 6천 명이 넘었다.

한편, 일제는 학살을 은폐‧축소하고 오히려 ‘국가를 위해 죽였다’는 자경단을 재판에서 면죄부를 주었다. 이 같은 책임회피는 지금까지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으며, 일본정부는 100년간 단 한 번의 사과도 없이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한국정부 역시 외면하기는 마찬가지다. 일본정부에 대한 진상규명 요구는커녕, 최소한의 자체적인 조사 노력조차 보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이번 한일 연계 전시에는 양국 정부의 반역사적 반인도적 태도의 전환을 촉구하는 의미도 담겨있다.

전시는 크게 5부로 구성되었는데 새로운 연구성과를 반영하여 간토조선인대학살의 배경과 과정을 재조명하고 있다.

1부 【학살의 심연】에서는 동학농민군 학살, 의병 탄압과 ‘남한대토벌작전’, 3·1운동 무력 진압, 간도참변 등 무자비한 만행의 주체와 경험이 어떻게 간토대학살로 이어지고 있는가를 살펴보았다. 반복된 학살의 경험은 일제 강제병합 전후 조선인에 대한 멸시와 차별이 구조화하고 ‘불령선인’이라는 공공의 적을 만드는 배경이 되었다.

2부 【간토대학살의 실상】은 학살을 주도한 정책결정자와 그 집행자인 군대, 경찰, 민중의 학살 실태를 피해자의 증언과 함께 재구성했다. 근거 없는 유언비어가 일본 정부의 계엄령과 군대 파견으로 기정사실처럼 확산되고, ‘공인된 학살’로 비화하는 과정을 정리했다.

3부 【글과 그림 속에 담긴 간토대학살】에서는 당시 아이들이 “조선인 정벌”로 기억하고 ‘자경단놀이’로 재현하게 하는 등 참극을 왜곡했던 상황을 보여주고, 한 화가의 두루마리 그림으로 조선인 학살의 잔혹한 실상을 생생하게 고발하고 있다.

4부 【간토대학살 이후, 기억과 망각】에서는 일제 당국이 탄압과 ‘내선융화’로 조선민중의 진상조사와 추모투쟁을 어떻게 좌절시켰는지, 학살사건을 어떻게 조직적으로 은폐했는지를 파헤쳤다.

5부 【시민들의 진정한 추모의 노력】에서는 일본과 한국 정부의 외면 속에서도, 양국 시민사회가 지속해온 진상규명과 추모를 위한 진정어린 활동들을 기록했다. 특히 이 부분은 고려박물관 ‘희생자 추모와 기억의 계승’을 제공받아 재구성하였다.

전시에는 다양한 사진 자료가 소개되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와 식민지역사박물관이 소장한 간토대지진 사진첩 외에도 여러 기록사진첩에서 조선인 학살을 주도한 일본 군대, 경찰, 자경단과 학살에 사용된 흉기들, 격리 수용된 조선인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을 확인해 출처와 함께 소개했다. (붙임-사진)

또 ‘살아남은’ 조선인들과 일본인 목격자의 체험과 증언을 소개했다. 전북 임실 사람 「진판옥일기」(박경하 소장)에는 9월 1일 대지진의 생생한 경험, 9월 3일 경찰서로 연행되어 겪은 고초가 기록되어 있다. 일본 어린이들이 쓴 지진 소감문 8편중에는 유언비어와 어른들의 반인도적 행위를 의심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은 ‘가장 무서웠던 것은 조선인 소동’, ‘칼과 죽창을 든 사람은 모두 잘 아는 이웃들’, ‘참을 수 없는 증오’와 같은 감정을 드러내고 있다. 대학살은 아이들의 정서 속에 짙은 상흔을 남기면서 조선인 차별을 확고히 하는 전기가 되고 말았다.

조선인 생존자 4명의 증언은 일본의 조선대학교(1963년)와 시민단체(1983년)가 수집한 내용이다.(붙임-증언) 조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일본어를 못하는 노동자여서 참혹하게 희생당한 학살 장면이 증언을 통해 생생하게 전달된다.

기코쿠가 그린 ‘에마키(두루마리 그림)’ 원본은 현재 고려박물관에서 전시 중인데,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는 박명진 다큐멘터리 감독이 소장자인 아라이 가쓰히로 전 고려박물관 관장을 인터뷰한 영상과 고려박물관에서 직접 촬영해 온 그림 이미지를 함께 볼 수 있다.

은폐와 망각에 맞서 꾸준히 이어진 시민사회의 진상규명 성과를 담은 자료집, 추모기록도 전시되고 있어 간토대학살의 진실에 다가가고자 했던 노력들을 다양한 실물자료로 확인할 수 있다.(붙임-실물자료)

한국의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의 고려박물관은 시민의 힘으로 설립하고 운영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고려박물관과는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을 추진하던 2008년부터 상호 교류협력 협약을 맺고 긴밀하게 소통해왔다. 이번 전시도 잊히고 묻혀버린 간토대학살의 참상을 한일 시민의 눈으로 함께 바라보고 영원히 기억하여 역사의 교훈으로 삼자는 취지에서 마련되었다.

간토대학살에 대한 진정한 추모와 기억은 다시 시작되어야 한다. 한일과거사에 대한 직시는 어느 일방을 ‘무릎 꿇게’하는 천박한 역사인식과는 거리가 멀다. 한일 양국의 바람직한 미래는 과거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전제되어야 열리기 때문이다. 간토대학살의 참상과 같이 앙상한 가지만 남은 뼈아픈 역사에 다시 평화와 생명존중의 새싹이 돋을 수 있도록 역사정의 실현의 길에 함께 해 주시길 바란다.

전시문의 : 02-2139-0437 / 김승은 학예실장


[붙임-주요 전시 자료]

[사진]

1~2. 조선인대학살의 레일을 깐 미즈노 렌타로 내무성 장관(왼쪽)과 아카이케 아쓰시 경시총감(오른쪽)
3·1운동 때 조선인 탄압을 주도한 조선총독부 정무총감과 경무국장이었다.
3. 센쥬경찰서에 수용된 조선인, 일본연합통신사, 『간토대진재사진첩』 1923, 박문관, 식민지역사박물관 소장
‘보호’라는 명분으로 연행된 조선인들, 귀국 또한 허용되지 않았다.
4. 우시고메카구라자카경찰서에서 압수한 자경단의 흉기들, 경시청, 『대정대진화재지』, 1925,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자경단은 일본도, 쇠갈고리가 달린 소방용구, 죽창 등으로 조선인을 무참히 학살했다.
5. 지진 복구사업에 등장한 친일단체 상애회, 경시청, 『대정대진화재지』, 1925,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일제 당국은 재일조선인의 관리와 통제를 위해 ‘내선융화’단체를 조직 지원했으며, 간토대학살을 은폐하는 데에도 활용했다.

2. 실물

1. 미야타케 가이고쓰, 『진재화보』 제1책, 1923, 식민지역사박물관 소장
“조선인 여성이 폭탄을 숨기고 있다”는 유언비어를 묘사한 삽화가 실렸다.
2. 도쿄시 학무과, 『도쿄시립소학교 아동 진재기념문집 : 심상 6학년, 1924, 식민지역사박물관 소장
학교에서 간토대지진 당시 아이들이 직접 보고 들은 생생한 소감문이 실려 있다.
3. 진판옥 일기, 1923, 박경하 소장
9월 1일 도쿄에서 지진을 겪은 후 3일 피난길에 체포되어 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된 경험을 생생히 기록했다.
4. 『조선인 희생자 문제 No.1 혼조ᐧ후나바시 조사보고』 1963, 히구치 유이치 소장
1963년 5월 일조협회 조선인희생자문제특별위원회가 사이타마현 혼조시와 지바현 후나바시시에서 진행한 간토대학살 진상조사 내용을 담은 소책자이다.


증언

신창범愼昌範
“나는 시체수용소에 버려졌다”

조선대학교, 『관동대진재 조선인 학살의 진상과 실태』 1963

〔아라카와荒川 게이세이京成철교 중간에서〕 4일 새벽 2시 정도였던 것 같다. “조선인을 끌어내라” “조선인을 죽여라”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 잠시 후 저쪽에서 무장한 사람들이 자고 있는 피난민을 한 명씩 깨워 조선인인지 확인하기 시작했다.

무장한 자경단은 조선인을 발견하면 그 자리에서 일본도로 내리치거나 찔러서 학살했다. 자경단이 아라카와荒川 제방공사에서 일하던 임선일林善一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임선일은 “뭐라고 하는데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어. 통역해 줘”라고 조선말로 내게 소리쳤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자경단이 일본도로 내리쳐 그는 학살을 당했다. 나도 죽일 것 같아 옆에 있던 남동생 훈범勳範과 매형과 같이 철교에서 무작정 뛰어내렸다.

철교 위에서 총소리가 계속 들렸고 강에 뛰어들어 헤엄치던 사람들이 물속으로 속속 사라져갔다. 우리는 갈대를 묶어 겨우 몸을 지탱하며 덜덜 떨고 있었다. 자경단 세 명이 거룻배를 타고 다가왔다. 일본도와 갈고리鳶口를 들고 있어 너무나 무서운 표정이었다.

그런데 죽음에 직면하면 오히려 용기가 나는 법이다. 지금까지의 공포심은 갑자기 사라지고 적개심이 격렬하게 불타올랐다. ‘죽더라도 나도 한 명은 죽이고 죽어야겠다.’는 각오였다. 강물 안에서 죽기 살기로 난투를 벌였다.

그런데 힘이 다 빠져서 자경단에 붙잡혀 강가로 끌려갔다. 강으로 끌려가자마자 한 남자가 일본도를 내리쳐 내 왼손 새끼손가락이 잘려 날아가 버렸다. 자경단의 일본도에 다치고 죽창으로 찔려 나는 의식을 잃었다.

나중에 들었는데, 아라카와강둑에서 살해된 조선인 수가 어마어마했으며 그 시신은 데라시마寺島경찰서에 수용되었다. 시신은 들것으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수산시장에서 큰 생선을 끌고 가듯 남자 둘이 갈고리로 찍어서 시신을 끌고 다녔다고 한다. 나도 그렇게 끌려가서 데라시마경찰서의 시체수용소에 방치되었다.

시체수용소 쪽에서 “물 좀 줘”라는 소리가 들려 남동생이 주변에서 찾았지만 나를 찾지 못했다. 서너 시간 뒤 남동생은 또다시 물을 달라는 목소리를 듣고 마침내 나를 찾아냈다. 순사는 다친 사람을 치료할 생각은커녕 동생이 나에게 물을 먹이는 것까지 방해했다.

…… 조선에 돌아가 보니 고향(거창)에서도 진재 당시 열두 명이나 학살되었고 우리 친척도 세 명이나 학살을 당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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