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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신흥무관학교 교관 원병상 회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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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병상 저 l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역 l 출판사: 민연주식회사 l 40,000원 l 190×260 양장본 388쪽 l 2023. 08. 18. l ISBN 978-89-93741-40-7 (93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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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일제강점기 최대의 독립운동 기지인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한 뒤 모교의 교관으로서 후배들을 양성했던 원병상의 회고록이다.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와 민족문제연구소가 오랜 준비 끝에 읽기 까다로운 국한문 자필 원고를 현대문으로 바꾸고 꼼꼼히 주석을 달아 한 권의 책으로 펴냈다.

원병상은 신흥무관학교에 대해 자세한 기록을 남긴 것으로 처음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신흥무관학교에 대한 지식의 대부분이 그가 남긴 2편의 수기에 근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신흥무관학교의 산 증인이었던 그가 만년에 이르러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회고록을 남겼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회고록 원본도 유실되고 소중한 기록이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질 뻔했으나, 천만다행으로 후손에게 나누어 준 복사본 중 한 부만이 겨우 전해져 지금에서야 빛을 보게 되었다.

회고록은 원병상의 삶 전체를 담고 있다. 나라를 잃고 서간도로 이주한 망명길에서부터 늦깎이 군인으로 6·25전쟁에 참전한 경험에 이르기까지, 파란만장한 생애의 대소사가 망라되어 있다. 특히 서간도로 망명하게 된 배경에서부터 머나먼 이역에서 힘겹게 정착해나가는 과정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어, 만주의 독립운동가와 동포들이 겪었던 간난신고를 온전히 알게 해주는 생활사 자료로서 가치가 크다. 그밖에 해방 공간에서 지켜본 만주의 공산화 과정과 탄압을 피해 귀환하는 길에 겪었던 수난 등 희귀한 증언도 실려 있다. 해방 후 남한 사회의 혼란상, 50대의 뒤늦은 군 입대와 직접 체험한 동족상잔의 비극 등도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어 질곡의 한국근현대사를 관통하는 소중한 역사자료로 평가할 만하다.

책에는 회고록과 함께 그가 발표했던 신흥무관학교와 관련된 2편의 수기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연구자들의 비교 분석이 용이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이와 함께 당시 실제 상황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지도와 사진 자료를 추가했다. 전문 연구자는 물론 일반 독자들까지도 당시의 시대상을 이해하는 데 크게 참고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저자 소개〉
원병상
1895년 강원도 평해군(현 경상북도 울진군)에서 태어났다. 신민회의 독립운동기지 건설운동에 함께 하기로 한 아버지의 뜻에 따라, 1911년 온 가족이 함께 서간도로 이주했다. 1913년 신흥무관학교 4년제 본과 제3기생으로 입학해 1916년 졸업했다. 신흥무관학교의 생도와 졸업생 등으로 구성된 신흥학우회에서 서기 및 총무부장을 맡아 활약했다. 1919년 5월에는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 임명되어 지청천 등과 함께 독립군을 양성하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해방 후 고국으로 돌아와 광복청년회, 대동청년단에 참가하여 간부로 활동했고, 신흥무관학교의 후신인 신흥대학 설립에도 참여해 신흥무관학교의 정신을 계승하는 데 힘썼다. 1949년 육군사관학교 제8기 특별 2반에 편입해 5주간의 군사훈련을 받고 소위로 임관했다. 1950년 6·25전쟁이 벌어지자 참전해 화령장전투 등에서 무공을 세웠다. 신흥무관학교의 활동을 증언하는 2편의 수기와 회고록 한 권을 남겼다.

〈출판사 서평〉
1910년 8월 29일 나라가 망하자 가산을 모두 팔고 만주로 이주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국땅에 새로이 터전을 닦고 독립군을 양성해 일제에 맞서고자 했던 사람들이었다. 1911년 8월 서간도로 이주한 원병상의 가족도 그런 이들 중 하나였다. 아버지 원세형은 신민회의 독립운동기지 건설운동에 동참하기로 결심하고 18명의 가족과 함께 고향을 떠나 서간도로 이주했다.
만주에서의 삶은 고통스러웠다. 처음 경험하는 만주의 매서운 추위와 풍토병은 생존 자체를 위협했다. 만주의 척박한 땅에서 농사를 짓고 산다는 것은 매년 거듭되는 흉년 속에 맨손으로 자연과 기후에 맞서 싸우는 것을 의미했다. 반복되는 실패 속에서도 포기는 없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희생해 새로운 삶을 개척할 뿐이었다. 그리고 자제들을 무관학교에 보냈다. 삶이 힘들다고 나라를 되찾기 위한 노력을 그만둘 수는 없었던 것이다.

신흥무관학교의 교관이 되어 독립군을 양성하다
원병상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1913년 2월 신흥무관학교 4년제 본과 제3기생으로 입학했다. 그는 갖은 어려움 속에서도 3년 동안 생도반장을 역임하며 모범적으로 학교를 졸업했다. 생도와 졸업생으로 구성된 신흥학우단에서도 그는 서기와 총무부장을 맡아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을 다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 조국에서 수많은 청장년들이 만주로 쏟아져 들어왔을 때, 원병상은 모교의 교관으로 임명되어 지청천과 함께 독립군 양성에 힘을 쏟았다. 신흥무관학교에서 정신무장과 맹훈련을 거친 독립군들은 1920년 벌어진 청산리대첩 등 독립전쟁의 최선봉에서 큰 활약을 펼쳤다. 아버지의 신념으로 시작된 독립을 향한 꿈은 그렇게 자식의 꿈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들을 통해 하나씩 하나씩 실천되어 나갔다.

힘겨웠던 만주 망명자의 삶
『신흥무관학교 교관 원병상 회고록』에는 독립을 꿈꾸며 만주에서 새로운 삶을 개척해나갔던 만주 이주자들의 신산했던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들이 서리가 이르고 겨울이 빠른 만주의 혹독한 기후에 어떻게 적응해 나갔는지, 전혀 다른 풍습을 가지고 있던 중국인들과는 어떻게 부대끼며 살았는지, 그 힘겨웠던 삶을 당시의 모습 그대로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렇다고 이 책에 만주 이주자들의 실패담만 담겨 있는 것은 아니다. 그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만주 이주자들은 밭을 논으로 바꾸고 재산을 늘려, 한 뼘 한 뼘 가족의 생계와 독립운동을 도모할 기반을 마련해 나갔기 때문이다.

꿈에 그리던 해방, 그러나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날 수밖에 없었던 그들
『신흥무관학교 교관 원병상 회고록』은 꿈에도 그리던 해방이 찾아왔음에도 그 기쁨이 그리 길지 않았던 현실도 보여준다. 만주에 불어온 공산화의 바람이 만주 이주자들의 삶을 뿌리부터 흔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만주의 공산화 과정에서 그들이 어떻게 핍박을 받고, 자신의 기반을 모두 잃게 되었는지 보여준다. 그리고 어떻게 38선을 넘어 서울로 오게 되었는지도 자세히 알려 준다. 이를 통해 어째서 원병상이 거동이 불편한 아버지를 만주에 남겨두고 올 수밖에 없었는지, 어떻게 임신한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38선을 넘을 수 있었는지 그 곡절어린 사정을 가감 없이 알게 될 것이다.

마지막 선택은 나라를 지키는 군인이 되는 것
신흥무관학교 교관 원병상의 마지막 선택은 나라를 지키는 군인이 되는 것이었다. 나라를 되찾고자 신흥무관학교에 들어가고 교관이 되어 독립군을 훈련시켰던 그가 50이 넘은 나이에 늦깎이 군인이 되어 6·25전쟁에 참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삶은 시작과 끝이 크게 다르지 않은 일관된 인생이었음을 알 수 있다.
『신흥무관학교 교관 원병상 회고록』은 근현대의 굵직굵직한 사건 속에서 한 개인이 감당할 수밖에 없었던 역사의 무게를 담고 있다. 사실 그것은 한 개인이 헤쳐 나가기에는 너무나 가혹한 시련이요 질곡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의 삶은 온전히 평가받지 못하고 숱한 과거사의 하나가 되어 잊혀지고 있다. 이 책이 망국과 항일, 분단과 동족상잔의 시공간 속에서 온갖 고난을 감내하며 살아야 했던 그들이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책을 펴내며

독립운동과 한국전쟁에 관한
소중한 기록

신흥무관학교가 배출한 3,500여 명의 전사들은 봉오동·청산리대첩 등 독립전쟁의 주축으로 활약하였으며, 만주지역의 여러 항일무장투쟁단체와 의열단, 한국광복군 등에서도 위명을 떨쳤다. 독립전쟁사상 불멸의 금자탑이라 할 신흥무관학교이지만, 2011년 설립 100주년을 맞아 기념사업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그 진면목은 그리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그간 기념사업회의 꾸준한 노력도 있었지만, 신흥무관학교가 대중에 각인된 계기는 2015년 개봉한 영화 ‘암살’의 흥행 성공이었다. 무려 1,200만 명 관람이라는 대기록을 세운 이 영화에서 배우 조진웅이 분한 ‘속사포’가 신흥무관학교 출신임을 자랑스럽게 내세우자 엄청난 관심을 끌게 된 것이다. 조진웅 배우는 이 때의 인연으로 우리 기념사업회의 홍보대사를 맡아 진정을 다해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그런데 이 신흥무관학교가 역사에 남을 수 있도록 결정적인 공헌을 한 숨은 인물이 따로 있다. 그가 바로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교관으로서 후배들을 양성했던 원병상 선생이다. 독립운동가들의 불문율 중 하나가 일제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 ‘불문不文’ 즉 기록을 남기지 않는 것이었다. 따라서 독립운동 당대 당사자의 자료는 극히 드문 것이 현실이다. 독립운동사 연구자들이 부득이하게 일제가 남긴 문서들을 주요 분석대상으로 삼을 수밖에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원병상 선생은 상당한 자료들을 비밀리에 보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격동의 시기를 지나면서 모두 멸실되고 말았다. 선생은 이를 안타까워하면서 기억을 되살려 시대를 증언하는 수기 두 편과 회고록 한 권을 남겼다. 수기는 『신동아』(1969년 6월호)와 『독립운동사자료집 제10집: 독립군전투사자료집』(1976년 2월)에 실린 「신흥무관학교」란 제목의 약사이며, 회고록은 자필 원본의 복사본만 전해지고 있는 <백암 원병상 회고록-피눈물로 얼룩진 36년 유랑 생애>이다. 원병상 선생은 한국전쟁의 와중이던 1951년 10월경부터 1973년 1월 1일 별세하기 직전까지 오랜 기간 회고록 집필에 공을 들였다. 식민지배와 독립운동, 분단과 동족상잔이라는 역경의 한국근현대사를 온몸으로 겪은 시대의 산 증인으로서 반드시 그 고난과 극복의 역사를 후세에 남겨야겠다는 일념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여기 이 『신흥무관학교 교관 원병상 회고록』은 앞의 회고록과 수기 두 편, 그리고 참고자료들을 새로이 편제한 교주본校註本이다. 전문 연구자 다수가 참여해 치밀한 교열을 거쳐 주석을 붙였으며 사진과 지도 등 시각자료를 수록해 독자의 이해를 높였다. 책에는 원병상 선생의 출생·가계, 만주 망명과 신흥무관학교 시절, 영농과 사업, 팔로군 점령 후의 상황과 탈출, 환국 후의 혼란상, 군 복무와 한국전쟁 등 장년에 이르기까지의 개인사와 시대상이 소상히 서술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신흥무관학교의 설립에서부터 그 변화과정과 교육내용, 생활상과 여러 사건들이 매우 구체적으로 담겨있다는 점에서 독립운동 사료로서 큰 의미를 지닌다. 신흥무관학교 졸업생으로 교관을 역임한 원병상 선생이 이를 상당 부분 복원하였기에, 그나마 오늘 우리가 신흥무관학교의 일면이라도 살펴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참으로 다행이 아닐 수 없다.

국망 이후 만주로 망명한 독립지사들의 신산한 삶이나 이주민 정착과정의 고투를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는 점도 이 책의 가치를 높여준다. 강제병합 이후 뜻있는 많은 이들이 국권회복을 위해 전 재산을 정리한 뒤 가솔을 이끌고 생면부지의 이역으로 기약 없는 발걸음을 내디뎠다.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남부여대 정든 고향을 떠난 원병상 선생 일가는 만주에 정착하기까지 이루 말 할 수 없는 고초를 겪어야 했다. 이들은 풍토병과 연속되는 재해, 경신참변, 친일 부역자들의 악행, 만보산 사건, 대도회 동란 등 온갖 수난을 겪으면서도 좌절하지 않고 굳건히 터전을 일궈나갔다. 이 책은 만주로 이주한 우리 동포들의 디아스포라에 관한 절절한 회고여서 읽는 이들을 한층 숙연하게 한다.

또 이 기록에는 주목할 만한 여러 내용이 담겨 있다. 만주 지역에 벼농사를 확산시킨 주역이 바로 우리 동포였다는 사실, 또 그 개척 과정의 간난신고가 어떠했는지를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다. 일제의 패망 이후 만주의 상황이나 일본인이 겪어야 했던 고초, 팔로군의 만주 점령과 조선의용군의 진입, 인민재판과 숙청, 탈출과 귀환과정 등도 희귀한증언이라 하겠다.

환국 이후 저자의 행보도 여러모로 특이하다. 일본군이나 만주군 출신들이 군 창설과정에서 30대에 참모총장 등 군 고위직을 독점하던 시기, 50대 노 독립운동가는 모멸을 받아가며 하급장교를 전전했다. 해방 조국의 부끄러운 실상이 원병상 선생의 군 복무 이력에서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한국전쟁 기간 지휘관으로서 직접 체험했던 전투의 실상과 전쟁의 참상에 대한 생생한 회상도 특기할 만하다.

여러모로 한 개인이 겪었다고 믿기 힘든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일대기가 아닐 수 없다. 구절구절 피맺힌 통한의 기록인 것이다.

이 소중한 자료를 흔쾌히 제공하고 출판을 허락해 준 유족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그리고 해독이 어려운 원본의 교열·주해 작업에 정성을 다해준 여러 연구자들에게도 경의를 표한다. 이 회고록이 우리 기념사업회 학술분과위원회가 수행하고 있는 <신흥무관학교 역사자료 DB 구축> 사업 등 독립운동사 연구에 큰 보탬이 되리라 믿어마지 않으면서, 다소 난해하더라도 일반 독자들에게도 널리 읽혀 역경의 우리 근현대사를 폭넓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2023년 8월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상임대표 윤 경 로


발간을 축하하며

신흥무관학교의 독립정신을
지키고 계승할 터

신흥무관학교 설립 100주년이 되던 2011년, 관련 독립운동가의 후손들과 학계 그리고 시민사회가 뜻을 모아 기념사업을 시작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10년이 훌쩍 넘었습니다.

그간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는 학술회의 개최, 항일 음악 보급, 전시회 개최, 국내외 항일유적지 답사 등 매년 신흥무관학교와 관련된 연구 발표와 문화예술 분야에서 다양한 활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함으로써, 독립전쟁에서 신흥무관학교가 세운 불멸의 업적과 위상을 널리 알리는 데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조부 이회영 여섯 형제분이 신흥무관학교 설립을 주도한 깊은 인연이 있어 기념사업회 창립 때부터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참여했습니다.

신흥무관학교가 어떤 곳인가? 국망을 당해 뜻있는 선각자들이 전 재산을 처분한 뒤, 일가를 이끌고 머나먼 이역 서간도로 망명하여 창설한 최초의 독립군 기지였습니다. 신흥무관학교에서 배출한 3,500여 독립전사들은 봉오동·청산리 대첩과 대전자령전투의 주역으로 활약하였으며, 의열단·민족혁명당·조선의용대·한국광복군 등 항일무장투쟁 대오의 핵심을 이루었습니다.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 이렇게 독립운동사에 혁혁한 공적을 남겼지만, 그에 관한 역사자료는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는 실정입니다. 이번에 기념사업회가 신흥무관학교 관련 증언이 소상히 담긴 『신흥무관학교 교관 원병상 회고록』을 출간한다니, 만주 벌판에서 온갖 간난과 신고를 겪은 선대들을 떠올리면서 특별한 감회가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원병상 선생은 1913년 신흥무관학교 4년제 본과 3기생으로 입학하여 3개년 간 생도반장을 맡았으며, 졸업 뒤엔 류허현 대사탄소학교에서 교사로 복무하며 신흥학우단 총무부장을 역임했습니다. 3·1운동 직후인 1919년 5월에는 모교의 교관으로 부임하여 밀려드는 애국청년들의 훈련에 진력했고, 해방 뒤에는 신흥무관학교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신흥학우단의 부활과 신흥대학 개교에 앞장섰습니다.

원병상 선생은 누구보다도 신흥무관학교의 전모를 가장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험난한 시대 상황으로 인해 관련 기록을 제대로 보전하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오랜 기간에 걸쳐 메모한 기억의 편린들을 모아 신흥무관학교의 연혁, 지도자와 구성원, 생도들의 교육훈련 과정과 생활상, 관련 사건에 대해서 여러 차례에 걸쳐 증언과 기록을 남겼습니다.

이 책은 그동안 발굴한 모든 자료들을 집대성하여 정리한 통합 교주본으로 앞으로 신흥무관학교를 비롯한 독립운동사 연구에 없어서는 안 될 결정적인 역사자료가 될 것으로 믿습니다.

또한 이 회고록은 신흥무관학교를 비롯한 독립운동의 역사만이 아니라, 동포들의 눈물겨운 이주와 정착과정, 경신참변, 친일파의 횡포, 만보산 사건, 대도회 사건, 팔로군과 조선의용군의 만주 진입 등 시대상을 세세히 묘사하고 있어 일제강점기 만주 일대 우리 민족의 수난사와 생활상을 이해하는 데도 크게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끝으로 소중한 자료를 기꺼이 제공해주신 유족 분들에게 감사드리며, 출간을 위해 애써주신 여러 연구자들의 노고를 충심으로 치하 드립니다.

이 책의 발간을 계기로 신흥무관학교 후예의 일원이라는 사명감을 새로이 하면서, 신흥무관학교의 독립정신을 지키고 계승하는 데 최선을 다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2023년 8월
광복회 회장 이 종 찬


감사의 말씀

할아버지의 이야기,
우리 사회에 도움이 되었으면

몇 해 전 어느 날 아버지께서 오래된 책 한 권을 주셨다. 누군가 한 글자, 한 글자 손글씨로 정성스럽게 쓴 원고를 복사해서 제본한 책이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기록이 담겨있는 책이니 잘 보관하라고 당부하셨다. 책을 펼쳐보고 나는 온몸에 전율이 일어나는 걸 느꼈다. 순간적으로 어린 시절 밥상머리에서 한두 번 들은 적이 있었던 할아버지의 독립 투쟁에 대한 이야기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난 할아버지가 남긴 이 기록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었고, 그 속에 담긴 진실을 모두 확인해보고 싶었다. 할아버지가 경험한 모든 것을 온전히 느끼고 싶었고, 그가 지나온 시대를 완전히 이해하고 싶었다. 할아버지의 삶에 대해 어느 정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답답함을 느꼈다. 자신을 희생해 독립운동에 투신했으나 그 희생과 노력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오늘의 현실이 초라하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나는 할아버지의 명예를 찾아드리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명예를 찾아드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독립운동가 서훈 업무를 담당하는 곳에 찾아가봤지만, 그곳에선 후손에게 선대의 모든 행적에 대해 증명하기를 요구했다. 역사와 옛 자료에 능통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답답한 마음에 여기저기 동분서주했지만 뚜렷한 결과는 얻지 못한 채 시간만 흘러갔다. 그러던 어느 날 알게 된 것이 민족문제연구소였다. 연구소의 구성원들은 할아버지의 오래된 책을 들고 찾아온 나를 아무런 사심도 없이 따뜻하게 맞아주셨다. 이것이 이 책이 나오게 된 계기였다.

할아버지의 회고는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0월부터 시작된다. 할아버지가 대한민국의 군인으로 전시 계엄령 아래 영동지역 강릉, 삼척, 울진 3개 군의 병사·민사 업무를 담당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할아버지는 1895년 강원도 평해군(현재는 경상북도 울진군)의 한적한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름다운 고향 마을에서 책을 끼고 서당에 다니며 천진난만하게 마음껏 뛰어노는 것을 즐거움으로 알던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당시의 국내 상황은 그가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16세되던 해인 1910년 나라가 망했고, 가는 곳마다 일제의 온갖 만행으로 인권과 자유가 짓밟히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에 많은 우국지사와 열혈 청장년들이 일제의 위협에 굴복하지 않고 잃어버린 나라를 찾고자 나섰다. 증조할아버지께서도 “이 겨레의 천추에 씻지 못할 망국의 치욕을 잊을 수 없다”고 한탄하며 나라를 떠날 결심을 굳혔다. 그는 1911년 8월 18일 새벽, 온 가족을 이끌고 ‘만주’로 향하게 된다. 집안에서 맏이였던 할아버지가 그 길의 맨 앞에 섰음은 물론이다.

만주에서의 삶은 고통 그 자체였던 것으로 보인다. 척박한 외지에서의 생활고와 삶의 고단함, 현지인들의 부당대우 등 끊임없는 핍박과 고통이 가족들의 삶을 죄어왔던 것이다. 할아버지는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 일하며 한국독립운동의 일원으로 우뚝 섰다. 농사에도 힘을 기울여 가족의 삶을 일정한 수준 이상으로 끌어올리는 데도 성공했다.

하지만 평생토록 만주에서 힘들게 닦은 기반은 순식간에 무너져내렸다. 만주에 팔로군이 진주하면서 피땀으로 일군 토지와 재산을 모두 잃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할아버지는 팔로군의 탄압을 피해 고국으로 돌아왔다. 고향을 떠난 지 35년 만의 일이었다. 할아버지는 만주에서 함께 했던 동지들과 함께 건국 사업에도 참여하고, 신흥무관학교의 후신인 신흥대학의 운영에도 참가해 후진 양성을 위해 애쓰셨다.

할아버지의 마지막 선택은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기 위해 독립군이 되었던 것처럼, 새로 태어난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국군이 되는 것이었다. 할아버지는 54세라는 늦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 훈련을 받았고, 6·25전쟁의 주요 전투에 참가해 여러 공적을 세웠다. 돌이켜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참으로 일관한 삶을 살아오신 셈 이었다.

인생의 마지막 길에서 할아버지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이 책의 저본이 된 자신의 회고록을 가다듬고 또 가다듬었다. 가깝게는 우리 가족들에게, 멀리는 오늘날을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이 살아온 길을 구체적으로 밝힘으로써 잘된 것은 본받고 잘못된 것은 반면교사로 삼으라는 뜻이셨을 것이다. 할아버지는 해방 이후 혼탁한 국내 실정에 대한 아쉬움과 조국의 통일을 보지 못한 애석함을 뒤로 한 채 1973년 1월 눈을 감으셨다.

비장함을 품고 만주로 향하는 첫 발걸음을 뗀지 112년이 지난 이제서야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무대 위로 올린다.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오늘날 우리 사회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이 책이 세상에 나오도록 애써주신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와 민족문제연구소 관계자 여러분께 감사드린다. 마지막으로 평생토록 일관된 삶을 살아오셨던 할아버지와 민족과 국가를 위해 헌신하신 수많은 이름 없는 독립운동가들에게 무한한 존경과 감사를 드린다.

2023년 8월
손자 원 건 희


〈차례〉
책을 펴내며
발간을 축하하며
감사의 말씀
지도
해제
일러두기
머리말

제1장 고향의 장章
1. 고향의 유래
2. 선조의 유적遺蹟
3. 고향의 위치와 전설
4. 휘諱 석해 종조부님의 오언시五言詩 일수一首
5. 나의 어린 시절
6. 아버님의 활동면
7. 잊지 못할 외조부모님의 은덕
8. 경술국치의 비분
9. 고향을 떠나게 된 동기
10. 아버님의 용단과 고향을 떠나던 그날 밤
11. 고향을 떠나던 감상
12. 고국 땅 슬픈 여정

제2장 황야의 장章
1. 이국異國 제1보의 첫 감상
2. 자국마다 눈물 고인 이역 천리 원정
3. 이역의 첫 선물은 실망뿐
4. 신접新接 가족의 이역 첫 시련
5. 구래민舊來民의 특권기
6. 무변광야無邊曠野 황무荒蕪의 서간도
7. 이국 신접新接 제1거지第一居地 퉁화현 북구
8. 구국 투쟁 대열에 참여 제1보
9. 제2거지第二居地 기가골 눈물의 간황
10. 변장의 설움과 가혹한 토인土人들 착취
11. 나와 신흥무관학교
12. 연속되는 흉년과 농노생활
13. 모교의 유지난과 학비난
14. 아동교육과 청년 군사훈련
15. 모교 교직에서 남은 기억
16. 접종接踵하는 모교 사고 수습에 고심
17. 만주 명물의 마적당을 해부해본다
18. 만주농업의 전환기
19. 정사년의 액운과 이역 제3거지第三居地 태평구太平溝
20. 활로 찾는 헤이룽장성 치치하얼 기행
21. 이역 제4거지第四居地 흑위자
22. 기미만세운동 여파
23. 왜적의 대참살 만행
24. 독립군의 활동상황 개요
25. 만주 정세의 일변과 피동적인 토인土人 군경
26. 만인滿人의 가경可驚할 망국적인 아편중독
27. 아버님의 용감성
28. 신성소학교 설립과 대동보 전질 봉환
29. 참혹한 가화 접종
30. 뼈저린 망국민의 설움
31. 소공 앞잡이 엠엘당(주중청총)
32. 금천현 일본영사 주구 숙청사건의 파문
33. 만보산사건의 여파와 가정적 실망
34. 대도회大刀會 동란과 가족의 수난
35. 이역 제5 주거지 이팔석농장 개간, 농부로 가장
36. 원통한 어머님의 서세와 최영선 군의 총상
37. 계유∽경진 8년간의 가정적 희비 쌍선
38. 가인家人의 영별永別과 자녀의 상처
39. 대동아의 침략전과 우리의 분노
40. 건물과 토지소유로 자녀교육 기반 조성도 허로
41. 히로시마廣島의 원자폭탄에 대동아침략전 붕괴
42. 해방의 종소리와 그날의 감격
43. 해방경축대회 경축사
44. 국치 36년간의 회고
45. 종전과 만인滿人의 난동
46. 만주는 중공의 천지로 돌변
47. 중공 지배하의 조선의용군
48. 공산당의 인민재판
49. 적도의 박해와 나의 수난 – 꿈에 본 태극기
50. 중공의 혈쵀쏸장법과 시민의 진정
51. 부자간의 통곡과 가족의 생이별
52. 중공의 도마 위에서 구사일생 탈출
53. 만주를 떠나는 나의 소감

제3장 환국의 장章
1. 36년 만에 찾아온 고국, 첫날부터 앞길은 태산
2. 뜻밖에 만난 가족과 행자의 사망
3. 만포진보안서의 선의와 셋방살이 1개월
4. 평화향이 그리워 남으로, 가족 소식은 절망 중 어린이 출생
5. 평양수용소의 야박한 차별대우에 분노
6. 대동강의 홍수와 평양역의 ‘쓰리’ 봉변
7. 학현역장의 신세와 해주수용소의 후의
8. 원한의 38선을 넘어, 고도 개성도 관광
9. 수도 서울을 향하여, 첫 번 만난 옛 동지
10. 고국에 돌아와 첫 출발, 청년운동
11. 한 많은 교육난
12. 신흥대학을 찾아, 신흥학우단도 부활
13. 독립운동자동맹을 엽관배의 도구화로
14. 혼란과 탁류 속에 적색분자들의 광상
15. 해방 조국 창군에 참여, 사관후보생이 되어
16. 전지 옹진에서, 6·25의 전야
17. 38선 전역에 뻗친 전화
18. 서울 가족의 안위, 예상되는 구사일생
19. 동란에 돌아다닌 전지, 화령장의 통쾌한 승첩
20. 전투 중의 소감
21. 초연硝烟이 잠긴 춘천에서
22. 중공이 도망간 후 처음 가보는 서울 주택
23. 40년 만에 고향 마을을 찾아
24. 모를 것이 인생의 운명

종결에 제하여
여감
1. 나의 이름과 호의 해석
2. 가처家妻의 수기 한 토막 – 고난 생애의 일면
3. 슬픈 그대의 영별
4. 부고
5. 휘호
6. 녹음기 구입에 대한 나의 소감
7. 가훈
8. 잊어서는 안 될 처신
9. 나의 소망
10. 나의 섭세행로
11. 이력서
12. 한 국민 정신 여하가 한 나라의 주체성을 좌우한다
13. 나의 말년 가슴에 맺힌 여한

원문
부록 1 「신흥무관학교」(『신동아』, 1969년 6월호)
부록 2 「신흥무관학교」(『독립운동사자료집 제10집: 독립군전투사자료집』, 1976.2)
부록 3 건의서
부록 4 추천서
부록 5 국치후 독립운동의 경위 사실
원병상 선생 연보
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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