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회 소개]
간토대학살 100년 <은폐된 학살, 기억하는 시민들> 기획전
관람하기 전에 간토대학살을 이해하기 위한 여덟 개의 열쇳말
김승은 학예실장
지난 8월 1일부터 식민지역사박물관 1층 기획전시실에서 간토대학살 100년 기획전이 열리고 있다. 전시 소식을 듣고 많은 관람객이 전시장을 찾고 있다. 이번 전시는 일본 고려박물관과 연계한 전시로 한일 시민들이 간토대학살을 어떻게 기억하고, 진정어린 추모를 이어갈 것인가를 실천하기 위한 새로운 시도이다. 특히 한국 식민지역사박물관은 간토대학살을 역사적으로 조명하는 데 초점을 두고 시민의 진상규명과 추도 노력, 새로운 연구 성과를 반영하여 전시를 구성했다. 전시 이해를 돕기 위해 여덟 개의 열쇳말로 <은폐된 학살, 기억하는 시민들>을 소개한다.
하나. 소방수의 쇠갈고리, 도비구치鳶口
일제강점기 일본인 소방수는 경찰의 지휘를 받았다. 소방수는 불만 끈 것이 아니라 조선 민중의 뜨거운 항일투쟁을 진압하는 데도 가담했다. 일본군과 경찰이 평화로운 만세시위 군중을 닥치는 대로 잡아끌고, 죽기 직전까지 짓밟는 현장에 일본인 소방수도 있었다. 소방수들은 ‘도비구치’를 들고 군중을 향해 돌진했다. 끝에 갈고리를 단 긴 막대를 휘두르는 소방수들의 모습이 마치 악마와 같았다고 선교사들은 기록했다. 그 악마의 모습은 1923년 일본에서 다시 목격된다. 그들은 자경단이란 이름으로 피란길에 오른 조선인에게 쇠갈고리를 휘둘러 학살했다.
둘. 1922년 나카쓰가와 조선인 노동자 학살사건
이 사건은 1922년 7월 일본인 주민 신고로 세상에 드러났다. 강 하류로 시신이 자꾸 떠내려 왔다. 그들은 강 상류 수력발전소 건설 현장의 조선인 노동자들이었다. 일제 침략으로 농토와 일자리를 잃은 조선인이 늘자 일본 토목건축업자들은 이들을 일본으로 불러들였다. 니가타현 나카쓰가와 수력발전소 건설에도 조선인 노동자 600여 명이 가혹한 민족차별을 견디며 노동했다. 그 과정에서 적어도 12명이 죽거나 다쳤다. 이 학살 사건은 마치 간토대학살의 예고편과 같았다. 유언비어와 조선인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의 유포, 청년단‧소방대‧재향군인회 등 무장한 주민들에 의한 공격, 이에 경찰이 동참 또는 협조‧묵인하고 은폐한 사실까지 1년 후 간토지역 곳곳에서 재현되었다.
셋. 미즈노 렌타로와 계엄령
간토대지진 당시 도쿄부와 가나가와현을 중심으로 약 10만 5천 여 명이 죽거나 실종되었고, 가옥 37만 채가 파손되었다. 내무성 장관 미즈노 렌타로는 가장 먼저 일본 ‘천황’에게 달려갔다. 공석이었던 총리를 대신하여 지진 수습과 인명구조 대책을 세우는 대신 ‘천황’의 안위와 국정 불안을 염려했다. 그리고 곧이어 계엄령을 선포했다. ‘불령선인의 폭동설’을 명분으로 삼아 주민 통제에 나선 것이다. 미즈노 렌타로는 3‧1운동 당시 혼란한 정국 수습을 위해 사이토 조선 총독과 함께 정무총감으로 조선에 왔던 인물이다. 조선에 도착해 그들이 처음 겪은 사건은 강우규 의사의 폭탄 의거였다.
넷. 자경단自警團의 ‘허락된 살인’
유언비어가 퍼지자, 재향군인과 청년단, 소방대 등 지역 주민들은 신속하게 자경단을 조직했다. 자경단에겐 조선인 학살이 군대와 경찰에 의해 ‘허락된 살인’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특히 자경단의 중심에는 재향군인이 있었다. 일본군은 청일전쟁에서 동학농민군 학살, 러일전쟁 전후 의병학살과 3‧1운동 탄압, 연해주와 간도 일대 독립운동 근거지 말살과 민간인 학살을 주도했던 자들이다. 그들이 조선인을 탄압하고 죽였던 경험, ‘불령선인’이라는 위험한 존재로 간주하는 시선은 고스란히 일본 지역사회에 스며들었다. 이러한 재향군인들이 자경단을 지도하며 조선인 학살을 선동했다.
다섯. 자경단 놀이
간토대지진과 조선인학살은 아이들의 눈과 마음에도 깊이 각인되었다. 도쿄와 가나가와의 학교에서 아이들이 쓴 소감문에는 조선인에 대한 ‘공포’뿐 아니라 ‘증오’라는 감정까지 담겨있다. ‘조선인들의 소동’을 경찰과 마을 사람들이 칼이나 죽창을 들고 ‘정벌’을 했다고 기억했다. 그리고 조선인 학살의 끔직한 경험은 아이들의 일상에서 ‘자경단 놀이’로 재현되었다. 열 살 안팎의 아이들이 자경단 놀이를 통해 사회적 약자를 목표물로 삼아 부정적 이미지를 덧씌우고 집단적 가해를 놀이삼아 합리화했던 심성은 불과 십여 년 후에 벌어진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에 순응하는 배경이 되었다. 그리고 자경단 놀이는 지금도 재일조선인 학생들을 향한 증오범죄로 재현되고 있다.
여섯. 조선인박해사실조사회
1923년 9월 간토대지진 당시 도쿄부, 가나가와현, 지바현, 사이타마현, 군마현 등에서 발생한 조선인 학살의 진상규명을 위해 조직된 단체다. 도쿄조선유학생학우회, 도쿄조선기독교청년회, 천도교청년회 도쿄지회가 중심이 됐다. 후세 다쓰지, 요시노 사쿠조 등 일본인도 협력했다. 이들은 유족들을 방문하고 참살 당한 시체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유골과 제대로 된 무덤이라고 할 수도 없는 매장지들을 참배하면서 대학살의 참상을 듣고 기록했다. 11월 25일까지 조사한 지역별 희생자 규모는 『독립신문』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희생당한 동포들을 위문하고 그 참상을 기록한 이들의 활동상 외에도 간토대학살 이후 재일조선인들의 삶과 투쟁에 대해서는 『재일조선인단체사전』에 상세히 실려 있다. 사전은 재일조선인 관련 연구에 힘써 온 한‧일, 재일조선인 연구자, 활동가, 시민 등 38명과 민족문제연구소 편찬팀이 뜻을 모아 집필‧편찬했다.
일곱. 4대 민족투쟁
간토대학살 이후 일본 정부차원의 조선인학살사건 진상규명과 가해자 처벌은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9월 중순부터 일본 정부는 조선인을 학살한 자경단원을 체포해 재판에 회부했다. 정부의 책임을 모두 일본 민중에게 전가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처벌은 반발을 줄이기 위해 최소한으로 이루어졌고, 재판도 형식적이었다. 조선인 살해에 대 한 죄는 가볍게 다뤄졌고, 항소심에서는 대부분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반면에 간토대학살의 진상이 전파될 수 있는 집회와 강연회는 금지 당했고, 희생자 추모회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하지만 재일조선인들은 간토대학살을 잊지 않기 위해 집회와 투쟁을 이어갔다. 3‧1운동, 5‧1메이데이, 8‧29국치일과 더불어 9‧1간토대지진 추도집회는 4대 민족투쟁의 하나로 1930년대 중반까지 이어졌다.
여덟. 간토대학살 희생자 추모비
간토대학살을 기억하는 13개의 추모비에서는 매년 9월 초에 한‧일‧재일 시민들이 함께 추도회를 열고 있다. 이 추모비에는 재일조선인 관련 연구자들과 시민들이 그동안 밝혀 온 간토대학살의 진상과 희생자의 이야기가 서려있다. 우리에게 간토대학살 100년을 되새길 수 있는 소중한 현장이자 기록이다. 간토 지방 곳곳에서 열리고 있는 추도회와 추모비에 대한 정보는 고려박물관에서 제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