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1970, 80년대 엄혹한 시절, 독일 동포들의 민주화를
향한 외침 : 민주사회건설협의회 창립과 활약
김귀옥 한성대 교수
지금은 사라진 1980년대 소위 ‘운동권 서적’이 있었다. 책 제목은 잊었다. 그 책에 한반도 사회변혁과 통일과 평화의 전망을 실현하는 데에는 남, 북, 해외동포들의 연대가 필요하다는 대목이 있었다. 단순한 문구였지만, 해외동포에 대해 새롭게 생각하는 코드를 형성하게 하는 힘이 있는 구절이었다. 19세기 말로부터 현재 이르기까지 일제 강점기, 분단과 전쟁, 냉전과 독재체제로 얼룩진 한반도 현대사에서 해외동포들의 고통에 찬 역할은 빼놓을 수 없다. 중국의 임시정부 요원들이나 만주(현재의 중국 동북지역)의 동포들은 말할 것도 없고, 일본, 하와이와 미국 본토, 러시아, 멕시코 등지의 해외동포들은 바람막이가 되어줄 국가도 없는 환경에서도 농사짓고, 공장 일을 하여 항일조직들에 독립자금이나 필요시 인명까지도 기꺼이 제공했다.
그들의 희망은 해방되면 조국도 찾고, 민주화된 독립 국가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8·15 해방은 남북 분단으로 이어져 해외동포사회도 분단과 냉전이 지배했다. 냉전에 의한 해외동포들이 국가폭력을 당했던 사건 중 하나가 1967년 7월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동백림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독일을 포함한 유럽으로 갔던 유학생과 해외동포, 국내 인사 194명이 간첩 혐의로 구속되어 고문을 당했다. 정규명 박사와 임석훈, 정하룡 등이 사형 선고를 받았고 윤이상 교수와 이응로 화백 등이 유기징역을 받았다. 결국 윤이상과 정규명을 포함한 동백림 관련 해외 인사들 전원은 추방되듯이 한국에서 쫓겨나야 했다. 윤이상은 2018년 유해로나마 귀국했으나 정규명은 여전히 독일 공원묘지에 묻혀 있다.
1968년 독일이나 프랑스 등의 유럽, 미국 등지에서는 반베트남전쟁과 반핵평화운동이 들불처럼 번졌다. ‘69혁명’으로 불린 사회운동으로 인해 각 나라들에서는 민주화운동, 나치 파시즘 청산운동이 전개되었다. 심지어 서독에서는 빌리 브란트 총리가 집권하면서 동서독 기본조약을 이뤄 통일의 초석을 놓았다. 그러나 동백림사건으로 인해 독일의 한인동포사회는 얼어 있었다. 1972년 7·4남북공동성명은 한반도분단과 냉전의 해체를 가져오기는커녕 박정희 정권의 유신독재의 길로 가기 위한 속임수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엄혹한 분위기에서 1973년 3·1운동 55주년을 기념하면서 55명의 서독의 한인동포들이 “독재타도, 민주건설”을 외치며 일어섰다. 55명은 ‘민주사회건설협의회’(서독내등록법인단체, 약칭 민건)를 서독사회에 창립하며, 창립 선포 집회를 당시 서독 수도인 본에서 개최했다.
민건 창립 멤버 55인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민주사회건설협의회 창립멤버 (1974년 3월 1일 기준으로 55명. 가나다 순)
강돈구, 강영란, 강정숙, 김길순, 김득수, 김복선, 김복희, 김순환, 김영한, 김원호, 김종열, 박대원, 박소은, 박종대, 배동인, 배정석, 서돈수, 손덕수, 송두율, 송복자, 송영배, 양원차, 오길남, 오대석, 오인탁, 유충준, 윤이상, 이민상, 이보영, 이삼열, 이승자, 이영빈, 이영준, 이재형, 이정의, 이준모, 이지(이경택), 이지숙, 이태수, 이화선, 임신자, 임승철, 임영희, 임학자, 임희길, 장성환, 장행길, 정정희, 정하은, 천명윤, 최두환, 최순택, 최승규, 홍종남, 황능헌
1970년대 후반 민건 회원 100여 명
55명을 살펴보면 남성이 39명, 여성이 16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직업적으로 보면 유학생이 24명으로 가장 많다. 그러나 파독노동자(간호사와 광부)가 21명이고, 종교인들(기독교 목사) 이 4명이었다. 실제로 민건을 만드는 데 선구적인 역할을 했던 것은 당시 30대 초·중반의 청년이었던 유학생 출신의 송두율, 강돈구, 이삼열, 김길순, 박대원 등이었다.
그런 연유로 혹자는 민건을 유학생과 지식인, 종교인의 해외조직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는 전적으로 오해이다. 민건이 하나의 조직으로서 십수 년간 해외 민주화운동의 씨를 뿌리는 데에는 파독 광부와 파독 간호사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잘 알듯이 하나의 조직이 주창되는 데에는 선두 주자의 역할이 중요하다. 때로는 카리스마적 리더가 필요하기도 하다. 그러나 그 조직이 지속성을 갖는 데에는, 함께할 동료와 민건을 지지할 동포사회가 없어서는 불가능했다. 또한 파독광부와 간호사가 있었기에 경제적 뒷받침과 함께 온갖 궂은 일도 해낼 수 있었다.
그들은 일부 큰 행사에서는 외부 기관, 특히 기독교 조직으로부터 금품이나 물품 등을 지원받았으나, 스스로 회비와 기금을 모았다. 심지어 국내 동포들의 시련에 동참하기도 했다. 4·19기념 행사,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나 김대중 납치 사건에 대한 박정희 정권 규탄, 김지하 구출위원회를 만들어 김지하를 포함한 민청련 학생, 지식인, 종교인, 시민들의 탄압상 고발, 동일방직 등 노동자들의 탄압 문제 등을 둘러싼 토론회나 집회를 개최했다. 그들은 각 분야 전문가들을 중심으로 깊이 있게 공부하며 한국의 현실을 서독사회에 알리는 역할을 했다. 필요시에는 서독의 총리나 대통령을 포함한 언론사, 정당, 사회단체 등에 탄원서나 성명서를 보내는 일도 기꺼이 했다.
심지어 1980년 5·18민중항쟁이 일어나자 그 직후에 민건의 기관지였던 『민주한국』에 대서특필하였다. 동포들을 규합하여 5·18항쟁 관련 다큐멘터리 영화 시청 운동, 단식논성, 항의 집회와 토론회 등을 다양하게 개최했다.
민건이 1980년대 초반까지 한국의 민주화와 반독재·반유신 투쟁을 한 결과는 ‘반한단체’로 낙인찍힌 것이었다. 민건 구성원들이 뭔가를 바라고 조국 민주화와 통일, 평화에 자신의 청춘을 바쳐 헌신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한국인이 자부하는 것, ‘일제 식민주의를 겪은 나라로서 산업화와 민주화를 쟁취’한 나라라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늦었지만 이제라도 우리는 조국 민주화와 더 나은 사람 세상을 향한 민건의 활동과 노력을 한국현대사의 하나로서 기억하고 기록해야 하지 않는가? 2024년 3월 1일 민주사회건설협의회 창립 50주년을 앞두고 그분들의 수고와 분투에 존경을 보내며, 남한을 넘어 한반도와 세상의 민주화와 평화·통일의 세상, 더 나은 세상을 함께 꿈꿔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