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1918년 ‘태평양’으로 간 조선인 노동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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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실 글방 – 6]

1918년 ‘태평양’으로 간 조선인 노동자들

김명환 선임연구원

근대 이후 우리가 태평양을 가로질러 나아간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잘 알려져 있듯이 1902년 12월 인천을 떠난 100여 명의 조선인들이 이듬해 1월 태평양 한가운데 떠 있는 하와이에 도착하였다. 1905년에는 1,000여 명의 노동자들이 태평양을 가로질러 멕시코에 닿았다. 그리고 이즈음 뜻을 지닌 선각자들이 태평양을 건너 미국으로 갔다. 근대 이후 우리와 태평양의 대면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렇다면 태평양의 내부, 이를테면 사이판 같은 중부 태평양, 혹은 적도 가까이 있는 팔라우 같은 태평양의 한가운데와 인연을 맺은 것은 언제였을까? 이글은 이 물음에 대한 답을 구하는 중에 확인한 일부 사실을 정리해본 것이다.

1918년, 태평양으로 가는 길이 열리다

1918년 6월 28일자 『매일신보』에 「태평양 중의 신천지, 남양군도로 일 가는 조선사람들」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이 기사는 약 1,100글자로 작성되었고, 3면 1단에 게재되었다. 꽤 비중을 가진 기사였다는 의미이다. 기사의 앞부분은 다음과 같다.

북으로는 만주 노령은 말할 것도 없고 고향과는 낮과 밤이 서로 바뀌는 남북 미주에서 다수의 동포가 활동하는 것은 오래인 사실이거니와, 수년 내로 내지의 공업이 발전됨으로 인하여 노동을 가는 사람이 근자에 많더니, 이번에는 멀리 망망무제한 태평양 중의 남양군도에도 새로이 동포의 활동할 문호가 열렸더라.

19세기 후반 이래로 수많은 조선인들이 고향을 떠나 이역에 터전을 잡았다. 고향은 모두 달랐겠으나 그들이 떠난 이유는 비슷했을 것이다. 1910년대에 접어들면 만주와 연해주에는 각각 수십만명에 달하는 교민사회가 형성되었고, 바다 건너 일본에도 이주민이 점차 늘고 있었다. 심지어 태평양 한가운데 하와이와 미주 멕시코에서도 조선인 노동자들이 따가운 태양 아래에서 고된 일을 하고 있었다. 여하한 1910년대는 자의건 타의건 조선인의 활동 영역이 급속도로 넓어지고 있던 때였다. 이제 여기에 막 ‘태평양 중의 신천지, 남양군도’가 추가되는 것이었다.

기사 중에 ‘남양군도(南洋群島)’라는 단어가 눈에 띈다. ‘남양군도’란 무엇일까? ‘남양군도’는 제1차 세계대전 중 일본해군이 점령한 적도 이북의 중서부 태평양 지역을 일컫는 표현이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일본은 영국을 원조한다는 명목으로 독일에 선전포고한 후 아시아․태평양지역의 독일영토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먼저 중국 칭다오(靑島)를 점령하였고, 곧바로 해군함대를 남쪽으로 보 중서부 태평양에 흩어져있던 독일의 섬들을 차례로 접수하였다. 이때 점령한 중서부 태평양의 섬들을 ‘남양군도’라고 불렀다. 이 ‘남양군도’는 사이판, 팔라우, 트럭(축), 포나페(폰페이), 콰잘린, 마주로 등 수많은 섬으로 구성되었다.

일본정부는 남양군도 통치를 위하여 「임시남양군도방비대조령」을 발표하고, 이에 의거하여 트럭(Truk, Chuuk)에 ‘임시남양군도방비대’를 설치한 후 군정을 실시하였다.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는데도 일본은 점령지 개발을 추진하기 시작하였고, 그 결과 조선인 노동자들이 남양군도로 향하게 된 것이었다.

기사를 좀 더 읽어보면 노동자 동원의 구체적인 계획이 보인다.

남양척식흥업회사와 마관의 모 상점에서 이번에 대구 부근지방에서 100명의 남양 갈 사람을 모집하여 인솔자가 데리고 남양으로 향하여 출발하였는데, 그 사람들의 가는 곳은 남양 「카롤린」군도의 「포나페」섬이요 모집하여 가는 회사는 금년 2월에 150만 원 자본으로 창립하고 「개천굉량(皆川宏量)」이란 사람이 사장인데, 「포나페」섬과 「쿠사이」섬에서 「가라오」라는 삼실로 닻줄 동아줄을 제조할 목적으로 이번에 처음으로 조선사람을 데려가기로 하였으나, 회사에서는 이외에 물감, 기타를 제조하느라고 3년 계획으로 약 3,000명의 조선사람을 데려갈 예정이라 하더라.

기사에 의하면 노동자 모집은 ‘남양척식흥업회사와 마관(馬關)의 모 상점’이라고 되어 있다. 노동자 모집은 대구 인근지역에서 실시할 것이고, 일할 장소는 ‘남양 「카롤린」군도의 「포나페」섬’이라고 한다. 노동자 모집은 일회성이 아니라 3년에 걸쳐 3,000명을 데려갈 것이라고 소개하였다.

이 기사내용을 완전히 믿어도 될까? 그렇지 않다. 전체적으로는 사실에 부합하지만, 구체적인 부분에서는 조금씩 오류가 있다. 먼저 ‘남양척식흥업회사’라는 회사는 존재하지 않았다. 당시 일본 해군성이 작성한 자료에서는 남양군도에서 영업하고 있던 이름이 비슷한 회사가 꽤 여럿 발견된다. 그러나 ‘남양척식흥업회사’는 없다. 그러면 어느 회사였을까? 자료에 써있는 회사명은 ‘남양척식공업주식회사’였다.

노동자들이 일할 지역은 기사에 써있는 대로 「카롤린」군도의 「포나페」섬인데, 요즘 통용되는 지명으로는 ‘캐롤라인(Caroline)제도 폰페이(Pohnpei, Ponape)섬’이다. 포나페 이외에 ‘구사이’라는 섬도 보이는데 당시 지명으로는 ‘쿠사이(Kusai)’, 요즘에는 코스라에(Kosrae)라고 부르는 곳이다. 부산을 기준으로 하면 포나페까지의 직선거리는 약 4,300㎞ 이상이고, 쿠사이까지는 약 4,800㎞이다.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직선거리가 300㎞ 조금 넘는다는 것에 비추어 보면 대략 감을 잡아볼 수 있다. 아무튼 아주 먼 곳, 망망대해의 한가운데에 포나페와 쿠사이가 있다.

포나페와 쿠사이 외에 다른 섬의 이름도 확인된다. 기사를 좀 더 읽어보자.

이번에 출발한 100명 중에서 50명은 흥업회사의 ‘포나페’섬 삼줄 제조로 가고, 나머지 50명은 그 옆 ‘사이한’섬이라는데 마관 석촌상점의 사탕농사에 종사하러 가는데, 이 섬은 ‘포나페’섬에 배로 닷새길가량은 된다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간 사람이 과연 모집하던 말과 같이 고생도 적고 상당한 벌이가 되어 성적이 좋을 것 같으면 이 뒤에도 계속하여 경상남북도 지방에서는 상당한 응모자가 있을 모양이라더라.

100명의 노동자 중 50명은 포나페에서 일하게 될 것이고, 나머지 50명은 ‘사이한섬’에서 석촌상점이 운영하는 농장에서 사탕농사에 종사하게 될 것임을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사이한섬’은 어디이고 ‘마관 석촌상점’은 무엇을 하는 회사일까? 먼저 ‘사이한섬’과 ‘마관’은 지명을 적은 것인데, 각각 ‘사이판(Saipan)섬’과 ‘하관(下關, 시모노세키)’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회사명에서 보이는 ‘석촌’은 ‘서촌’을 잘못 쓴 것으로 추정된다.

기사를 읽어보면 ‘마관’ ‘석촌’상점이 ‘사이한’섬에서 사탕농사를 한다는 점을 알 수 있는데, 실제로 당시 시모노세키(下關)의 니시무라(西村) 가문이 설립한 니시무라척식이라는 회사가 사이판(Saipan)에 니시무라제당소를 설치하고 제당사업을 벌이고 있었다. 비슷하게 표현했는데 조금씩 잘못 썼다. 앞에서 언급한 일본 해군성 자료에서도 시노모세키의 니시무라와 사이판의 니시무라제당소가 확인된다. 포나페와 사이판은 약 1,600㎞가량 떨어져 있는데 ‘옆’에 있는 섬으로 표현한 점이 재미있다.

앞의 『매일신보』 기사에서는 조선인 노동자들을 “이번에 처음 간 사람”이라고 표현하였다. 그런데 처음이 아니었다. 경상도 사람들이 포나페로 가기 전에 이미 전라도 사람들이 사이판에 가있었다. 간발의 차이로 말이다.

사이판에 첫발을 내딛은 노동자들

그렇다면 조선인들이 사이판에 처음 상륙한 것은 언제였을까? 이 시점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는 복잡한 확인 과정을 거쳐야 한다. 먼저 공문서를 살펴보자.

임시남양군도방비대사령관은 1918년 10월 1일자로 당시 사이판 거주 인원을 확인해주는 공문을 공표하였다. 사이판으로의 식량 수송을 위하여 거주인원 확인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이 공문에 따르면 일본인(내지인) 151명 및 조선인 159명이 사이판에 거주하고 있었다. 사이판 이외에 ‘야루토(Jaluit)민정서’의 확인서도 첨부되어 있는데, ‘방인(邦人)’과 ‘도민(島民)’ 현황이 기록되어 있다. 이 문서철에는 대정 6년, 즉 1917년의 거주자 현황도 첨부되어 있는데, 각각 ‘내지인’과 ‘도민’(원주민)이 집계표로 정리되어 있다. 표현을 잘 살펴보아야 한다. 1917년에는 ‘내지인’(혹은 방인)과 ‘도민’ 현황을 집계하였는데, 1918년에는 ‘조선인’이 추가된 것이다. 1917년 12월에는 없던 조선인이 1918년 10월에는 있는 것이다. 그 사이 언제쯤 조선인이 사이판으로 온 것이었다.

다음은 증언을 들어보자. 1930년대 말 남양무역주식회사에 취업한 전경운이라는 사람은 해방 후에도 사이판에 남아 평생을 살았다. 그는 두 편의 회고록을 남겼는데, 이중 1995년에 작성한 『한족(韓族) 2세, 3세가 천인안도(天仁安島)에 살고 있는 혼혈아(混血兒)들』에 사이판에 최초로 상륙했던 조선인들의 이야기를 기록해두었다. 전경운은 이야기의 출처에 대하여 유성만으로부터 전해들은 것이라고 하였다. 유성만은 사이판으로 온 최초의 조선인들 중 한 사람인데, 사이판에 자리잡은 후 현지인과 결혼하여 가정을 꾸렸다고 한다. 전경운은 사이판으로 간 후 유성만의 딸과 결혼하였다. 전경운은 장인에게 전해들은 이야기를 회고록에 남겨두었다. 그 중 조선인의 상륙에 관한 부분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일본이 1916년 마이크로네시아를 제 것으로 그러기 위해서는 민간인들이 되도록 빨리 남방으로 진출하기를 장려하는 특혜와 온갖 편의를 정부가 후원하는 정책이 밝혀지자 제일 먼저 자원에 나선 것이 시모노세키(下關)에 해외 원양 삼치와 고래잡이로 거부가 된 니시무라 다쿠쇼쿠(西村拓殖)회사가 Saipan, Tinian, Rota섬에서 사탕수수와 면화재배를 하겠다며 거기에 체격도 좋고 일 잘하는 것이 조선인이라고 설정, 당시 전라남도 광주감옥소 간수인 기노시타(木下)란 자가 총책임자로서 “남양 Saipan, 로타, 데니안섬은 지상낙원으로 추움을 모르는 상하의 섬, 별천지에서 사탕을 만드는 수수재배는 돈벌이도 좋고 먹는 것도 천하일품” 등 대대적 광고가 시가지 가는 곳마다 붙어 있어 광주시민들에게 큰 화제거리였다고. …… 1917년 90명 제일진이 남양으로 떠나 도중에 시모노세키에 본사를 둔 회사에서 일주일을 체류하면서 큰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 그런 후 요코하마항에서 기범선을 타고 떠난 지 10여 일 후 Saipan섬 찰란카노아 해변에 앵컬하고 보트로 상륙했다.

전경운의 기록은 조선인 노동자의 모집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 소중한 정보를 담고 있다. 첫째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점령지인 남양군도에 민간인들이 들어가게 된 것은 일본정부의 의도가 반영된 것이라는 점, 둘째 일본정부의 정책에 호응하여 시모노세키의 니시무라척식이 개발사업에 뛰어들었다는 점, 셋째 니시무라척식이 조선인을 노동자로 선택한 점, 넷째 노동자 모집을 담당한 사람이 광주감옥의 간수인 기노시타(木下)였다는 점 등이다. ‘기노시타’라는 이름을 기억해두자.

전경운의 기록에 의하면 노동자들은 1917년 출발하였고, 시모노세키, 요코하마 등을 거쳐 사이판 찰란카노아에 도착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앞에서 살펴본 일본해군의 기록에 의하면 1917년에는 사이판에 조선인이 없었다. 일본해군의 증명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여러 문서에 걸쳐 동일한 내용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전경운이 잘못 기록한 것일까? 아니다. 전경운은 유성만의 전언을 충실히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기노시타와 관련된 기록을 통해 확인해 볼 수 있다.

기노시타는 광주에서 조선인들을 데려온 모집인이었다. 이름이 전부 기록된 것은 아니지만 ‘기노시타(木下)’인 점은 확실하다. 기노시타의 다른 흔적은 없을까? 다행히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1938년 작성된 『소화14년도판 대남양흥신록』이라는 책에 이런 인물이 소개되어 있다.

목하신장(木下新藏)
사이판신용조합장
명치 20년(1887) 6월 10일생, 원적 도쿠시마현
대정 7년(1918) 1월 니시무라척식회사 사원으로 사이판으로 와서 농장주임이 되었다.
최초의 조선이민은 주로 그의 알선에 의하였다고 일컬어진다.
니시무라척식이 남양흥발에 매각되자 회사를 그만두고 독립하여 50정보의 농원을 경영하여 사탕수수재배(蔗作) 에 종사, 현재에 이른다.
가라판정에서 신망이 두텁고 공사단체의 역원으로서 부락을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으며 사이판신용조합을 동지와 함께 설립, 조합장에 취임, 현재 그 직에 있다.
현주소 사이판도 북가라판정

전경운의 기록과 『대남양흥신록』 기록은 동일인물을 가리키고 있다. 일단 두 기록에서 제시한 인물의 이름이 같다. 『대남양흥신록』에 의하면 기노시타는 1918년 1월 니시무라척식회사의 사원으로 사이판에 와서 농장 주임으로 복무하였는데, 그가 최초의 조선 이민을 알선하였다고 한다. 전경운의 기록과 거의 일치한다. 이 흥신록의 기록이 사실이라면 조선인 노동자들이 처음 사이판에 온 것은 1918년 1월이 된다.

당시의 운송상황으로 보면 전라도 광주에서 남양군도 사이판까지의 이동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먼저 광주에서 일본으로 오는 것 자체가 긴 여정이다. 당시는 도로사정이 좋지 못하였으므로 광주에 모인 노동자들은 기차편을 이용하여 부산으로 가야 했다. 호남선을 타고 대전으로 가서 다시 열차를 갈아타고 부산으로 이동하였을 것이다. 부산에서는 일본으로 가기 위한 수속을 밟아야 했으므로 또 시간을 허비하였을 것이다. 시모노세키에 도착한 다음에는 회사측의 대접을 받으며 약 일주일가량 체류했다고 한다.

시모노세키를 떠나 요코하마를 경유하였는데, 요코하마에서 사이판까지 열흘이 걸렸다고 한다. 이 모든 과정을 거친다면 거의 한 달 가까이 걸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1918년 1월 중에 사이판에 도착하였다면, 아마 광주에서는 1917년 12월 중에 출발하였을 것이다. 전경운의 기록은 이렇게 읽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사이판에서 조선인들이 대면한 현실

조선인 노동자들이 사이판 찰란카노아에서 본 풍경은 어떠하였을까? 모집 당시 기노시타는 사이판에 대해 “남양 Saipan, 로타, 데니안섬은 지상낙원으로 추위를 모르는 상하의 섬, 별천지에서 사탕을 만드는 수수재배는 돈벌이도 좋고 먹는 것도 천하일품”이라고 소개하였다고 한다. 즉 사이판은 날씨가 따뜻한 지상낙원이고, 사탕수수 재배는 좋은 돈벌이라는 점을 부각시켰다고 한다. 그래서 노동자 모집에 응한 사람들 중에는 면서기를 지낸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노동자들의 기대가 자못 컸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그들 앞에 펼쳐진 풍경은 기대를 완전히 뒤엎는 것이었다.

그런 후 요코하마항에서 기범선을 타고 떠난 지 10여 일 후 Saipan섬 찰란카노아 해변에 앵컬하고 보트로 상륙했다. 90명이 그리던 파라다이스와는 달리 보는 것이 황무지, 항구도 길도 없다. 벽돌로 쌓아올린 양옥이 아니다. 야자잎으로 엮은 지붕과 벽이 아니다. 속았다는 환멸의 비애. 누구도 말하지 않는다. 그러자 저녁식사를 하라며 식당에 들어서 보니 제대로 된 식탁이 아니라 넓은 판짝을 올려놓은 데다 앉아야 했다. 식사라고 가져온 것이 외미밥에 소금국이라고 하였다. 한국의 돼지밥만도 못하다니 누구나 수저를 들려 하지 않자 김육곤씨(가장 젊고 키가 작음)가 홧김에 못이겨 밥상을 뒤집어엎고 쌀밥통을 바깥 진흙탕에 던져버렸다. 그러자 그 주방일을 하던 한 놈이 “야, 이 조센진” 소리치며 달려들었다. 김육곤이 그놈을 거꾸로 잡아 엎어놓고 그자의 수염을 뽑았다. 그는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고 다른 일꾼들도 겁이 나 다시 손을 대지 못했다고.

노동자들 앞에 펼쳐진 풍경은 황무지 그 자체였다. 집은 야자잎으로 엮어 지은 것이었고, 식당은 더욱 당혹스러운 상태였다. 여기에 식사라고 나온 것이 ‘돼지밥’만도 못한 것이었다. 꿈에 그렸던 남양군도를 대면하자마자 무너진 기대. 노동자들은 분노를 숨기지 않았다. 밥상을 뒤집어엎고, 노동자들을 무시한 일본인을 거꾸러뜨렸다. 이렇듯 조선인과 사이판의 첫 만남은 그다지 아름답지 않았다.

조선인의 분노는 이후에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노동조건이 개선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에 후발대로 들어온 평안도 사람들과의 사이도 틀어져 있었다. 전경운의 기록을 좀 더 읽어보자.

낯선 남양의 햇빛은 아침부터 견딜 수 없는 무더위다. 거기에다 소파리 모기떼 속에서 일하고 밤이면 쉬어야 했다. 전등은 없는 데다 섬사람도 보기 드문 자란카에서 아스리토로 통하는 사탕수수 농장 길이 5마일이나 되는 것을 파헤쳐야 했다. …… 그러자 제2진이 도착했는데 이들은 북선 출신들이라 패싸움이 자주 있었다고 한다. 그들의 불만, 원심의 폭발은 날이 가고 해가 거듭할수록 체념으로 잠잠해지기는커녕 드디어 회사쪽에서 속수무책으로 조선사람을 대신 오키나와 노동자로 대체하기 시작하게 된다. 이들은 한국인 체격엔 못 미치나 온순하며 근면하다는 것으로 5년 계약이었던 조선인은 본국으로 귀국시켰다. 소수의 한인들만이 남아 섬 여성과 결혼으로 잔류하게 되었다.

적도 가까운 지역의 햇빛은 견디기가 어렵다. 이것은 경험해보면 더 확실히 알 수 있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에서의 노동이었으므로 노동자들의 고난이 만만치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여기에 노동은 열대림을 파헤쳐가며 도로를 놓고 농장을 개척하는 것이었으므로 매우 고된 작업이었다. 노동자들의 불만은 결국 파업으로 번졌고, 회사는 문제점을 시정하는 것이 아니라 조선인 노동자들을 회사에서 내쫓는 것으로 해결하려고 하였다.

니시무라제당소의 노동자 관리 실패는 전경운의 회고에서만 확인되는 것은 아니다. 일본외사협회가 편찬한 『남방정책을 현지에서 본다』(1938)라는 책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그래서 니시무라제당소가 사이판섬에 설립되었던 것이다. …… 어부만으로는 할 수 없어서 조선인들 들여왔으나, 이것이 또 큰 실패. 그 수는 400명 정도에 달하였으나, 전라남도 출신자와 평안남도 출신자 사이에 불화가 생겨 매일 밤 피비린내 나는 다툼을 반복하였고, 마침내 소요에 가까운 일이 일어나 평안도 출신을 전부 구금하고 조선으로 송환하게 되었다.

일본외사협회의 기록에서는 소요의 책임을 오로지 조선인들 사이의 불화로 몰아가고 있다. 점령 당국이나 사이판제당소의 책임은 묻지 않고 있다. 조선인은 게으르고 편가르기를 잘하기 때문에 단합이 되지 않는다는 일본인들의 편견을 그대로 드러낸 것으로 읽힌다. 그렇지만 일반적인 사실도 알려주는 것이 있다. 사이판의 니시무라제당소가 조선인 노동자 400명을 고용하였다는 점, 조선인 사이에 불화가 있었던 점, 그리고 조선인 소요가 발생하였고 그 결과 본국으로 송환된 점등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점을 앞의 전경운의 기록과 함께 살펴보면 당시 사이판에서 조선인 노동자들이 처한 현실과 그 결말이 어떠하였는지를 알 수 있다.

노동자 파업의 결과 사이판의 조선인 체류자는 급격히 줄었다. 당시 일본측 기록을 살펴보면 1919년 254명에 달하던 조선인이 1921년 190명으로 감소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이후 오랫동안 사이판에서 조선인은 소수자로 남아있었다.

쿠사이 노동자들의 비극

1918년 사이판에서 조선인들은 행복하지 않았다. 기대와는 너무 다른 작업환경에 놓여있었고 보통의 일상을 살기에도 부족한 생활환경에 처해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포나페로 간 경상도 사람들은 괜찮았을까? 안타깝게도 사이판의 조선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앞의 『매일신보』 기사에 의하면 1918년 중반 경상도 출신 노동자들이 포나페로 간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들 노동자들이 포나페에서 어떤 상황에 처해 있있었는지를 알려주는 자료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런데 포나페와 함께 언급된 ‘쿠사이’의 경우는 기록이 남아있다.

일본 해군이 남긴 기록을 보면 남양척식공업주식회사가 쿠사이에 출장소를 설치한 것은 1918년 7월경이었다고 한다. 『매일신보』 기사는 1918년 6월 28일자로 보도된 것이었다. 더 많은 자료를 찾아봐야겠지만, 쿠사이 출장소 설치시기와 ????매일신보???? 보도시점의 유사성으로 보아 조선인 노동자 모집 즈음에 노동자 배치를 위한 준비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쿠사이출장소에서 조선인 노동자들의 파업이 일어났다. 이 사건에 대해서는 일본해군이 작성한 꽤 상세한 조사보고서가 남겨져 있다.

일본해군이 조선인 노동자 파업사건에 상세한 보고서를 남긴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렇게 된 데에는 그 전후 사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문제가 된 쿠사이 조선인 노동자 파업사건은 1919년 11월 3일에 벌어졌다. 당시는 제1차 세계대전 전승국들 사이에서 독일의 식민지를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한 논의가 한창이던 때였다. 일본정부는 제1차 세계대전 중 점령한 남양군도를 통치지역으로 확보하고자 하였고, 이를 관철시키기 위한 외교전을 치열하게 전개하고 있었다. 이런 때에 조선인 노동자 파업이 일어난 것이었다. 별것 아닌 일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지만,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꼬투리를 잡기에 충분한 사안이기도 했다. 국제적으로 보는 눈이 많던 시기였으므로 일본은 문명국다운 해결책을 선보일 필요가 있었다. 이런 분위기 때문에 조선인 파업사건에 해군이 조사단을 파견하였던 것으로 해석된다.

조사보고서 내용을 살펴보면 조선인들의 파업은 임금지급 방식 및 급여인상과 관련된 것이었다. 당시 조선인들은 일급으로 급여를 지급받고 있었는데, 이것을 월급제로 바꾸어줄 것을 요구하였다. 10월 31일 조선인들의 파업이 시작되자 회사측에서는 일급 5전 내외의 인상안을 제시하였다. 이후 합의와 번복이 반복되며 파업이 계속되었고, 이 과정에서 양측의 감정이 악화되었다. 사단은 11월 3일 벌어졌다. 그 전말을 살펴보면 다음의 기록과 같다.

(1919년) 11월 3일 오전 7시경 다몬사쿠(タモンサック) 제2농장에서 작업을 시작할 즈음 작업주임 와타나베(渡邊修) 및 안도(安藤覺一郞)와 조선인 노동자 사이에 언어가 통하지 않아 다툼이 벌어졌다. 이 일로 와타나베와 안도 두 사람이 노동자들에게 구타를 당하고 노동자 숙소에 갇혔다. 오전 8시경 이 소식은 레로 섬에 있는 회사출장소에 알려졌다. 회사지배인 이와타(岩田喜雄)는 곤봉과 나이프 등 흉기를 소지한 일본인 30명과 원주민 다수를 인솔하여 11시경 다몬사쿠에 도착하였다. 이와타 일행은 와타나베와 안도 두 사람의 부상이 심하지 않음을 확인하였다. 조선인 노동자들은 이와타 일행이 자신들보다 많았으므로 저항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일본인 등은 조선인 노동자들을 곤봉으로 난타하여 김생이(金生伊) 외 23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부상 당한 조선인 노동자들은 4일 레로로 보내져 치료를 받았는데, 이때 노동자 1명이 도망쳤다. 아직 적개심이 가라앉지 않은 일본인들이 다시 곤봉 등으로 조선인 노동자들을 난타하여 결국 장용도(張龍到), 최달호(崔達好) 등 2명이 사망하였다. 다른 부상자들은 수일 후 작업장으로 복귀하였다.

이 기록은 일본해군이 남긴 『남양 쿠사이사건 관계자 퇴도(退島)의 건』이라는 문서에 포함된 것이다. 해군 조사관이 작성한 것이므로 기록 자체가 중립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를 감안하고 읽어보아야 한다.

앞에서 밝힌 대로 10월 31일 이후 조선인들의 파업이 지속되고 있었다. 아직 목적달성을 하지못한 상태였으므로 노동자들의 심리가 불안하였을 것임은 미루어 알 수 있다. 11월 3일 당일 최초의 사건이었던 조선인 노동자들과 일본인 작업주임 사이의 다툼은 언어가 통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불상사였다. 그런데 여기에 대처하는 회사측의 대응이 과하다. 회사지배인이 곤봉과 나이프등을 소지한 일본인 30명과 원주민 다수를 대동하고 조선인 진압에 나섰다. 다른 문서에서 보면 당시 조선인 노동자들은 76명이었고, 진압에 나선 회사측 인원은 123명이었다.

진압에 나선 이와타는 억류되었던 일본인 작업주임들의 부상이 심하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이때 조선인들은 저항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곤봉으로 난타하는 등 폭력적인 방법으로 조선인들을 진압하였다. 조선인 진압이 과격하였음은 난타당한 사람들 중 24명이 부상을 입어 진료소로 후송되었다는 조사보고서 내용으로 미루어 알 수 있다. 당시 일본인이 조선인을 대하는 일반적인 양태로 보아 진료소로 옮겨졌다는 것은 꽤 부상이 컸다는 점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조선인의 수난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1월 4일 진료소에서 조선인 노동자 1명이 탈주하자 일본인들의 구타가 다시 시작되었고, 이 과정에서 급기야 조선인 2명이 사망하였다. 쿠사이 조선인 노동자 파업에 대한 회사측의 대응은 사람이 죽어나갈 정도로 무자비한 것이었다.

사망한 장용도(張龍到)와 최달호(崔達好)에 대한 다른 정보는 전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들과 함께 일했던 사람들의 출신지로 보아 이 두 사람은 경상북도 사람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노동자 파업사건 후 파업한 조선인들과 진압한 일본인 모두 재판에 넘겨졌다. 그 결과 일본인 6명과 조선인 3명에게 징역형이 선고되었다. 최종적으로 퇴도(退島) 처분을 받아 본국으로 송환된 사람은 일본인 21명, 조선인 7명이었다. 이 조선인 7명의 인적사항이 전한다. 거창군 출신 1명을 제외하면 경상북도 출신이다.

퇴도 처분을 받은 조선인 노동자의 인적사항

『매일신보』 기사에 의하면 포나페로 간 조선인 노동자들은 대구 인근 지역에서 모집하였다고 한다. 퇴도 처분을 받은 7명은 모두 이에 부합하는 사람들로 볼 수 있다. 심지어 경상남도 거창도 거리상으로 보면 대구에서 멀지 않다.

비극으로 끝난 첫 만남

1918년 조선인들이 태평양 깊숙한 곳과 만나기 시작했다. 조선사람들은 태평양의 ‘남양군도’가 사시사철 따뜻한 지상낙원이라고 해서, 그곳에서는 돈벌이가 좋다고 해서 떠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남양군도는 당시 조선인들에게 새로이 펼쳐지던 신세계였다. 그러나 그 신세계는 결코 달콤하지 않았다.

1918년 1월 전라남도 출신 노동자들은 사이판에 상륙하였고, 그들 다음에 평안도 출신 노동자들이 뒤를 이었다. 같은 해 중반, 경상북도 출신 노동자들이 포나페를 거쳐 쿠사이에 도착하였다. 비슷한 시기, 다른 지역 출신의 노동자들이 사이판과 쿠사이에 각각 다다른 것이었다. 출신이 달랐어도 이들 조선인 노동자들이 꾸었던 꿈은 같았을 것이다. 아마도 이들은 노동조건이 좋은 곳에서 큰 돈을 벌어 지금보다 나은 삶을 살고자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기다리고 있던 현장은 황무지 그 자체였고, 노동과 임금 조건은 불리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노동자들의 불만은 폭발했고, 불만은 파업으로 분출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노동자들이 회사에서 쫓겨나는 것이었다. 심지어 목숨을 잃기도 하였다. 식민지 민중이 처한 가감 없는 현실이 태평양 한가운데, 사람들이 낙원이라고 부르던 그곳에서도 펼쳐졌던 것이다.

사이판과 쿠사이에서의 조선인 노동자 파업은 남양군도 현지에서 조선인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을 만드는데 일조하였다. 즉 조선인은 거칠고 다루기 힘들어 노동자로서 적합하지 않다는 인식이 생긴 것이다. 일제강점기 만주나 노령, 심지어 일본에서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조선인 거주자가 급격히 늘어났다. 그러나 ‘남양군도’의 조선인은 좀처럼 늘지 않았다. 이렇게 된 데에는 현지에서 형성된 조선인에 대한 편견이 강하게 작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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