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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제45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결정에 대한 입장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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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신: 각 언론사 정치부·사회부
발 신: 민족문제연구소(문의: 민족문제연구소 김영환 대외협력실장 (010-8402-1718)
제 목: [보도자료] 제45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결정에 대한 입장문
날 짜: 2023. 09. 15.(금)

  1. 제45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9월 14일 일본 근대 산업시설의 세계유산 등재 후속조치 관련 결정을 채택하였습니다. 일본이 산업유산정보센터에 한국인 등 하시마탄광 사상자 관련 자료를 추가했고, 2015년 등재 당시 한국과 일본 대표 발언의 동영상 제공 등 추가적인 새로운 조치들을 했다며 이를 적극적으로 평가한 결과입니다. 그리고 일본 스스로 약속을 계속 이행하는 것이 중요하며 관련 당사국들과 대화를 지속할 것을 독려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었습니다.

  2. 이는 2021년 제44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일본정부의 불충분한 조치에 ‘강력한 유감’을 표명했던 태도와는 전혀 상반된 입장입니다. 게다가 일본 정부가 제출한 ‘이행경과보고서’는 서두부터 “세계유산위원회의 결의에 성실하게 대응”하고 있으며, “출처가 분명한 1차 사료와 일정한 신빙성이 확보된 증언 등을 적절히 전시”하고 있고, “관계자와 정기적이고 폭넓은 대화를 하고 있다”는 매번 반복해온 입장에서 한치도 다름이 없었습니다.

  3. 그러나 세계유산위원회에서 국제사회와 약속한 것과 달리 일본 정부는 세계유산 등재 직후 한국인 피해자의 강제동원과 강제노동을 부정하였습니다. 도쿄의 산업유산정보센터에 전체 역사를 기록하기는커녕 강제노동의 역사를 숨기고 피해자들이 일본의 근대화를 ‘뒷받침’했다며 역사를 왜곡하고 있습니다. 또한 ‘일정한 신빙성이 확보된 증언’이라고 하면서 강제노동 피해 당사자인 한국인, 중국인, 연합군 포로의 증언은 단 한명도 전시되고 있지 않습니다. 반면에 전 하시마 섬 주민들의 증언으로만 가득 채워진 전시야말로 ‘희생자를 기리는 적절한 조치’라고 절대 평가할 수 없습니다.

  4. 이러한 강제노동을 부정하는 일본 정부의 기본적인 태도 변화 없이는 생색내기 식 조치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일본 정부는 국제사회와의 약속을 성실히 이행하고 있는 것처럼 기만하였으며, 이러한 태도를 용인한 세계유산위원회 결정은 피해자를 또다시 모욕하는 것입니다.

  5. 민족문제연구소는 2015년 일본 근대산업 시설 등재 당시부터 한국인 피해자는 물론 중국인, 연합군 포로 등 강제노동 피해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라고 촉구하는 요청서를 여러 차례 세계유산위원회와 일본 정부에 보냈습니다. 하지만 이와 관련한 대화나 자료 제공의 요청은 전혀 없었습니다. 물론 피해 당사자와의 대화 요청도 없었습니다. 제45차 세계유산위원회 결정 (6항)에서도 ‘해석전략을 강화하기 위해 새로운 증언 관련 사항을 포함한 추가 연구, 자료 수집 및 확인 작업의 수행’을 권장하였습니다.

  6. 이에 일본 근대산업 시설에 동원되어 강제노동의 고통을 겪은 피해자와 그 유족들은 다음 첨부한 입장문을 작성하여 일본 정부와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 발송할 예정입니다. 하시마탄광, 야하타제철소, 나가사키조선소, 다카시마탄광, 미이케 탄광에 동원되었던 피해자들은 그들이 겪은 강제노동과 전쟁의 참혹한 피해 사실을 생생히 증언했습니다. (붙임자료 참조) 그리고 피해자와 유족들은 메이지산업혁명유산에 강제노동 피해를 비롯한 ‘전체 역사’가 기록될 것을 간절히 호소하였습니다.

  7. 민족문제연구소는 일본 근대산업시설의 ‘전체 역사’에 피해자의 목소리가 반드시 포함될 수 있도록 피해자와 유족들과 함께 일본 정부의 약속 이행 촉구와 향후 국제사회를 향한 증언영상 공개, 피해사실 조사와 관련자료 소개 등의 활동을 펼쳐 나가겠습니다.

* 붙임 자료

1. 일본의 메이지 산업혁명유산 강제노동 피해자 및 유족 입장문
2. [증언자료] 피해자의 목소리

2023년 9월 15일
민족문제연구소


[붙임1]

<일본의 메이지산업혁명유산 강제노동 피해자 및 유족 호소문>

일본 정부는 강제노동을 비롯한 ‘전체 역사’를 기록해야 합니다!
피해자들의 피와 땀과 눈물을 더 이상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인류의 소중한 문화적 자산을 세계유산으로 선정하여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고 계시는 유네스코세계유산위원회 및 관계자 여러분들께 경의를 표합니다.

제45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결정한 일본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 관련 결정에 대해 강력한 유감의 뜻을 전합니다. 우리는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으로 식민지 조선에서 일본으로 강제로 동원되어 노예노동을 강요당한 피해자들과 그 유족들입니다. 피해자들은 10대부터 20대 중반의 나이에 어디로 가는지도, 언제 돌아올지도 모른 채 끌려갔습니다. 머나먼 이역의 땅에서 가혹한 노동과 부상, 배고픔에 시달리며 매일 밤 고향을 그리며 눈물을 흘려야 했습니다. 해방이 되고 78년이 지난 지금도 그 당시 고생한 날들을 생각하면 어제 당한 일처럼 고통스럽습니다.

2015년 일본 정부는 하시마 탄광, 나가사키 조선소, 야하타 제철소 등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했습니다. 유네스코세계유산위원회는 강제노동을 비롯한 ‘전체 역사’의 기록, 피해자를 기억하기 위한 조치, 관계당사자와의 대화 등을 권고했습니다. 일본 정부는 일본의 메이지산업혁명유산에서 있었던 강제노동의 역사를 인정하며 세계유산위원회의 모든 권고를 충실히 이행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8년이 지난 지금까지 일본 정부는 그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습니다. 이에 우리는 일본 정부에 강한 유감을 밝히면서, 약속을 지킬 것을 촉구합니다.

2021년 세계유산위원회는 메이지산업혁명유산에 대한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는 일본 정부에 이미 ‘강한 유감’을 밝힌 바가 있습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세계유산위원회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강제노동 피해 당사자, NGO, 연구자 등 관계 당사자와의 대화를 위한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일본 정부는 도쿄의 산업유산정보센터에 전체 역사를 기록하기는커녕 강제노동의 역사를 숨기고 피해자들이 일본의 근대화를 ‘뒷받침’했다며 역사를 왜곡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일부 보완 조치를 했다며 약속 이행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피해 당사자인 우리들의 고통을 외면하고 피해자의 목소리를 무시하는 일본 정부의 기만적인 행태에 대해 우리는 심한 모욕감과 함께 분노를 느낍니다.

한편, 일본제철, 미쓰비시중공업 등 메이지산업혁명유산과 관련이 있는 기업들은 한국인 피해자들과는 달리 중국인과 연합군 포로 피해들에 사죄와 희생자를 기리는 후속조치를 약속했습니다. 하지만 이들 기업은 침략전쟁을 뒷받침하기 위해 식민지 조선에서 피해자들을 강제로 끌고 가 노예처럼 강제노동을 시켜놓고 지금까지 단 한 마디의 사죄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104세의 김한수 피해자는 “일본인은 반성을 함으로써, 일본 정부는 정부다운 정부를 발전시킴으로써 세계에 버림받지 않는 새로운 국가로 거듭나길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라는 의견을 직접 피력하셨습니다.

강제노동 피해자들의 피와 땀과 눈물, 고통을 외면하는 메이지산업혁명유산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지향하는 보편적 인권과 평화의 가치를 실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메이지산업혁명유산에 강제노동 피해를 비롯한 ‘전체 역사’가 기록될 것을 간절히 바라며 여러분들에게 호소합니다. 우리들의 피와 땀과 눈물을 꼭 기록하고 기억해 주십시오.

2023년 9월 15일
일본의 메이지산업혁명유산 강제노동 피해자 및 유족 일동

* 피해자:
미쓰비시중공업 나가사키 조선소 강제동원 피해자 김한수
미쓰이광산 미이케탄광 강제동원 피해자 손중구
미쓰이광산 미이케탄광 강제동원 피해자 류기동

* 유족:
일본제철 야하타제철소 강제동원 피해자 김규수의 아들 김인석
일본제철 야하타제철소 강제동원 피해자 이천구의 아들 이기석
일본제철 야하타제철소 강제동원 피해자 주석봉의 아들 주수영
미쓰비시중공업 나가사키조선소 강제동원 피해자 배한섭의 딸 배옥점
미쓰비시머티리얼 하시마탄광 강제동원 피해자 최장섭의 아들 최기현


[붙임2]

[증언자료] 피해자의 목소리
– 아래 피해증언은 피해자와 유족의 동의를 받아 공개하는 것입니다.

○ 일본제철 야하타제철소 | 후쿠오카현 기타큐슈시

김규수
1928년 전북 담양군 출생으로 1943년 1월 15세에 군산부청의 동원 통지에 처벌이 두려워 강제동원에 응했다. 야하타제철소에 동원되었다.
2007.6
증언,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제공

1)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만 갔어

“징용영장에 ‘군산부청으로 몇 시까지 집결해라’ 그런 내용이 쓰여 있었어요. 어디로 간다, 무슨 일로 간다 그런 것도 없고. 제대로 공부도 못하고 우리처럼 못 살고 (백도 없고) 그러니까 결국에 나한테 징용 영장이 나왔구나.”

2) 영예로운 사원이 됐다고 정신훈련 했어

“훈련소라기보다는 감시 초소가 있는 수용소 같았어요. 거기서 그냥 시키는 대로 아침에 일어나서 뛰라면 뛰고. 야하타제철소의 영예로운 사원이 되었으니 봉사해야 한다는 정신훈련이었어. 그리고 불 끄는 훈련하고 미군이 들어오면 싸움해야 한다고 죽창가지고 훈련하고.”

3) 월급이라고 돈을 준 일이 없어

“월급이라고 우리한테 돈을 준 적이 없어요. 지금 같으면 ‘우리가 개돼지냐’ ‘노조를 결성해 파업을 하자’ 이런 얘기가 나올지도 모르지만 일본에 징용 온 처지에 무엇을 할 수 있었겠어.
월급을 얼마 준다 얘기해 준적도 없고, 우리가 요구를 한 적도 없어요.“

“저축했다는 것도 모르고, 나는 최근에 공탁금 명부라는 것으로 보고 내가 못 받은 임금이 50원 공탁됐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어요. 내가 귀국한 때 기숙사 사감이 여비 200원을 준 적은 있었어요.”

4) 여기까지 와서 죽을 수는 없잖아

“일본이 패전해서 ‘이제 야하타제철소에서 근무를 더 이상 안 해도 된다, 알아서 돌아가라’라고 하더라구요. 어떻게 갈지 막막했는데, 누군가가 ‘시모노세키에 가면 귀국하는 배가 있다’라고 하더라구요.”

“노래도 부르고 아리랑도 부르고 독립만세도 외치면서 한참 배를 잘 타고 갔어. 몇 시간 지났는지 모르지만 바람이 불기 시작해요. 거기가 어딘지 모르겠지만 태풍이 와서 배가 너무 요동이 심했어요. 배가 밑으로 꺼질 때는 몇천 층 바닷속으로 내려가는 것 같고 또 올라갈 때는 하늘까지 올라가는 것 같아요. 배 밑창에는 이미 사람들이 많아서 할 수 없이 갑판에 탔는데, 나는 돛대(마스트)에 내 몸을 로프로 감았어요.”바다에 빠지지 말아야겠다, 내가 귀국선까지 탔는데 여기서 죽을 수는 없다‘는 생의 애착이 생겼어요. 몇 시간을 그렇게 헤맸는지 모르겠어요. 기절을 했어요.”

주석봉
1924년 전북 전주부 출생으로 1943년 9월 19세에 배급이 중단될까 두려워 강제동원에 응했다. 야하타제철소에서 강제노동을 하다가 1944년 9월 징병영장을 받고 다시 군인으로 동원되었다.
2009.9
증언,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제공

1) 징용을 안 가면 가족들이 굶어

“징용을 안 가면 식량배급을 끊어. 그러면 우리 가족들이 굶어 죽잖아. 징용을 거부하지 못하게 만들었어.”
– 어디로 모이셨어요?
“전주부청으로 다 모여. 전주부에서 징용된 사람들은 다 부청으로 모이지. 구장을 통해 통보를 해. 징용영장을 받는 사람을 모아서 다 싣고 가는 거야. 곤고마루라는 한국과 일본을 오가는 연락선으로 이동해.”
– 그 배에 징용자들이 많이 탔어요?
“민간인이 다 섞여서 타서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지만, 우리 징용자들은 배 가장 밑에 집어넣어. 만일 어뢰 공격을 받으면 꼼짝도 못하고 죽는 거지.”
– 시모노세키에서 내렸죠?
“응. 거기서 바로 야하타시로 싣고 갔어. 그때는 전쟁중이라 사람이 많이 모여있으면 폭격기가 와서 다 폭격을 하니까, 몰래 조용히 이동했지. 수시로 B29가 빙빙 돌면서 정찰을 하는데…”

2) 단속반에 걸리면 반 죽어

“월급은 무슨, 돈은 구경도 못 했어. 용돈이란 게 어딨어? 밥만 먹고 살아 있는 것만으로 다행으로 생각했어. 무조건 밤이고 낮이고 일할 때도 일본 헌병들이 총 들고 감시를 하는데 어디 외출을 할 수가 없지”

3) 공습에 사람이 감자 찌듯이 쪄버렸어

“(하카다 공습 때) 폭격이 사방에 떨어졌어. 굴속에 있으면 죽을 것 같아서 산에 있는 나무 사이에 숨어 있었어. 폭격기 한 육십 몇 대가 빙빙 돌아가면서 논이고 밭이고 폭탄을 막 떨어뜨렸어. 내가 ‘이렇게 죽겠구나’하고 겁에 질려 허둥지둥했어. 부모 형제 외에는 아무 생각도 안 났어. 일본 사람들이 자기 집 밑에다가 방공굴을 다 팠는데 거기 숨은 사람들이 다 떡처럼 쪄졌어. 감자 찌듯이 푹 쪄 버렸어. 폭탄이 떨어지니까 자기 새끼고 뭐고 다 버리고 도망가고 엎어지고 하면서 다 죽을 형편이니 정신이 하나도 없지.”

이천구
1927년 충남 서천군 출생으로 1944년 9월 17세에 면서기와 경찰에 의해 야하타제철소에 강제동원되었다.
2005.10
증언

1) 느닷없이 뺨을 때려버려

“공주군에 가니까 사람이 상당히 많았어요. 각 면에서 동원되어 한 군데 집결을 했으니까 많죠. 공주군에서 기차를 타고 대전으로 갔어요. 충청남도 도청이 있는 곳이에요.”
– 인솔한 사람은 누구였어요?
“일본 군인들이야. 군복입고 견장 차고, 권총, 칼 찬 군인이 인솔하는 거야. 잘못하면 뺨을 때려. 그때부터 무서워서 꼼짝을 못했어. 일본어도 제대로 못하니까 그냥 이유 없이 맞는 거야.”
– 언제 동원되었어요?
“1944년 9월 경에 부산에 도착하니까 일본놈들이 용의주도하게 준비를 해 놓았어요. 당시에는 호텔이 없으니까, 여관에 방 1개마다 7명을 집어넣었어. 밥은 주먹밥, 안에 우메보시, 매실절인 것을 넣었어. 배가 고파서 허겁지겁 먹었어. 그 이튿날 연락선을 타는 거야. 어디로 가는지 우리는 모르지. 지하 5~6층 될 정도로 배 가장 밑에 있으니까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가는 거죠.”

2) 시체 치우며 뱃삯을 벌었지

“모자랑 흰 장갑 하나, 마스크를 주었어요. 큰 대나무 장대하고 가마니를 주면서 들것을 만들라고 해요. 시모노세키항에 여기저기 죽은 시체들이 많으니까 그 시체를 치우면 귀국하는 승선권을 준다고 해요. 그래서 자원했어요. 둘이 한 팀이 되어서 나는 머리를 들고, 상대는 발을 들어서 들것에 올려요. 거기서 150~200m를 가면 바닷가가 나오는데 시모노세키 항구에 배들이 있고 출렁출렁 파도가 치지. 하나 둘 셋 하면 한쪽만 잡고 다른 쪽 손을 탁 놓는거야. 그러만 시체가 바다로 떨어지죠. 열흘 동안 일했더니 배를 탈 수 있는 승선권을 줘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 거죠. 도장을 찍어서 내 이름을 쓰고 보내주었어요. 시체를 치우면서 번 돈으로 관부연락선을 타고 돌아온 거예요.”

○ 미쓰비시 나가사키조선소 | 나가사키현 나가사키시

김성수
1925년 경남 남해군 출생으로 1943년 8월 18세에 일본 후쿠오카현 오무타시에서 나가사키조선소로 강제동원되었다.
2007.3
증언

1) 군사훈련에 정신수련만 시켜

“나가사키 광장에 가니까 미쓰비시 조선소 직원들이 나왔어요. 시내에 있는 회사 기숙사로 우리를 인솔해 갔어요. 기숙사에서 1달 간 교육을 받았는데, 군사훈련이었어요. 그리고 학자 같은 사람이 강의를 하면서 ‘지금 전쟁을 하는데, 세계를 앞으로 지배하기 위해서 이 전쟁을 꼭 승리해야 한다’라고 정신 교육도 시켰어요.”

2) 참, 한국 사람들을 멸시해!

“기숙사 사감이 일본 사람인데 악질이라. 충청도 국민학교 교장을 했더라고. 한국 사람을 인간적으로 보질 않아요. 아주 멸시합니다. 기바치료木鉢寮라는 기숙사에서 우리가 있는 1동만 점호를 하지 일본인들이 있는 데는 점호가 없어요. 매일 저녁 심리적으로 괴로움을 주는 거야.”

배한섭
1926년 경남 남해군 출생으로 1944년 4월 18세에 일본 후쿠오카현 야하타시에서 나가사키조선소로 강제동원되었다. 1945년 8월 피폭, 부상 치료 후 귀국하였다.
2007.5
증언

1) 사감이 매일 소지품을 싹 뒤져 -배한섭, 18세에 강제동원-

“기숙사에는 도망 못 가게 울타리가 다 있었어요. 날마다 왜놈들이 와서 우리가 출근하고 나면 소지품을 싹 뒤져요. 그때 태극기를 가지고 있던 사람이 있었어. 그 뒤로 그 사람은 체포되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어요.”

2) 원자폭탄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어

“기숙사가 나가사키시 너머 산에 있는데 내가 산을 넘어오는 순간 원자폭탄이 터졌어요. 나무 뿌리까지 싹 뽑혀 나가고 그러는데 내가 엎드려 있다가 허리를 다쳐서 지금도 흉터가 남았어요. 기숙사에는 진료하는 데가 없어서 미쓰비시 회사 병원에 가야 해요. 거기 가서 50일 넘게 치료를 받았어요. … 그러니까 원자폭탄이 터져서 시내가 싹 다 흔적도 없이 사라졌어요.”

김한수
1918년 황해 연백군 출생으로 1944년 5월 26세에 연안전매지청에서 근무중 거짓말에 속아 나가사키조선소에 강제동원되었다. 1945년 8월 피폭, 부상당한 동료들을 돌보다 귀국하였다.
2006.2
증언

1) 나무 운반하러 가는 줄 알고 갔어

“어디로 간다는 말은 안했고, 며칠 있다가 출발한다는 것만 알았지. 일본에 간다는 말은 없었고, 연안읍으로 데려간다는 거예요. 그 전에도 연압읍에 가서 나무, 돌 운반 같은 근로봉사를 가끔 했었어요. 그래서 그 일인가보다 하고 모였는데, 모인 사람들이 전부 연백군에서 온 사람들이더라구요. 그리고 헌병이 보초를 서며 우리를 감시했어요.”

-모인 숫자가 얼마나 될까요?
“약 200명 정도 되었어요. 나중에 출발하게 되자 징용된 줄 알았어요. 이렇게 징용으로 끌려가는 줄도 몰랐고, 도착해서 집에 편지를 보낼 수 있는지도 몰랐죠. 출발할 때도 일본으로 가는지 어디로 가는지 얘기 안 해 줬어요.”

○ 미쓰비시 다카시마탄광 | 나가사키현 나가사키시 다카시마

손용암
1928년 강원 고성군 출생으로 1943년 11월 15세에 속초역에서 경찰에 납치되어 사할린 탄광으로 강제동원되었다. 1944년 8월 다카시마탄광으로 다시 동원되었다.
2021.3
증언

1) 완전히 납치야 납치

“옛날에 당꼬 바지(위는 헐렁하고 무릎 아래로 좁아지는 바지)라고 있었잖아요? 일제시대 형사들이 주로 입는 바지. 벌써 형사들은 티가 났어요. 형사가 나를 부르더니 ‘어디에서 왔나’고 물어요. ‘양양에서 배 수리할 물건을 사러 왔다’고 답했어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리로 따라오라’고 해요. 어떤 여관으로 가서 들어가라고 해서 들어가 보니까 6,7명이 거기 있었어요. 그리고 문을 잠궈서 못 나가게 해요. 이튿날 아침 속초역으로 나가서 그냥 기차에 태우는 거예요. 완전히 납치죠. 거기 있었던 사람 모두 납치당한 거예요.”

2) 섬이니까 도망갈 생각을 못했죠

“사할린에 일단 가면 도망갈 생각은 꿈도 못 꿔요. 만약 도망가다 걸리면 죽으니까. 순종할 생각을 하지. 다카시마에서도 도망갈 생각을 못 했어요. 거기는 섬에다가 일본 애들이 쫙 깔려서. 허가 없이 배가 나가면 큰일 나니까. 그런데도 도망가는 사람이 있더라고요. 그냥 헤엄쳐서.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을 못 들었어요.”

3) 기침을 하면 새까만 탄가루가 나왔어요

“지하에 들어가서 채탄 작업 하는 거죠. 굴을 파고 들어가면 탄 덩어리가 이렇게 큰 게 있어요. 거기에 넘어지면 다치고. 또 다 파고 나면 돌로 메꾸거든요? 돌로 메꿀 때도 일하다가 다치고. 또 컨베이어 같은 데 내려가는 데 잘못 넘어지면 다치고. 그래서 다친 사람들이 있죠.”

“그러나 웬만큼 다쳐가지고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리고 탄가루를 먹으니까 기침을 하면 새까만 탄가루가 나왔어요. 침에 묻어서 같이 나왔어요. 병원은 있는데 말만 병원이지 상처 난 거 아니면 속병은 고칠 생각을 못 해요.”

○ 미쓰비시 하시마탄광 | 나가사키현 나가사키시 하시마

최장섭
1928년 전북 익산군 출생으로 1943년 2월 15세에 하시마탄광에 강제동원되었다. 1945년 8월 원폭 투하 후 피폭의 위험에도 나가사키시 도시정비에 투입되었다.
2016.7 증언, 민족문제연구소 제공

1)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고

“면직원이 오라고 하면 오고 가라고 하면 가야 해서 난리가 났지. 그래서 하시마라는 데로 간거야. 대부분 느닷없이 강제로 끌고 간 거지.”

“’편안히 지내다 오면 된다’고 일본놈들이 유인을 하고, ‘작업장의 여러 조건이 좋다’고 안심시키면서 데러갔죠. 하지만 그곳은 아주 위험한 곳이었어요.”

2) 땀으로 목욕을 했어

“아이고 땀으로 목욕을 할 정도로 더워. 수건이 없으면 땀을 감당할 수 없어요. 겨울이고 여름이고 훈도시 하나 입고서 맨바닥에서 일하기가 무척 힘들었어요. 아휴, 지긋지긋해. 더러 맞기도 많이 맞지요. 강제로 시켜서 힘든 일을 하니까 몸은 고되고, 먹는 것은 부족하고. 그 새까만 콩 찌꺼기 밥 한 덩이에 연명을 하고 지내니 그 생활이 어땠겠어요.”

3) 해방 소식에 눈물이 쏟아졌어

“’전쟁에 져서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걷게 됐다. 이제 전부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더라구요. 그 소리를 듣고 모두 박수를 치기 시작했는데 그 광경이 굉장했어요. 감격해서 눈물이 쏟아졌어요.”

○ 미쓰이 미이케탄광 | 후쿠오카현 오무타시

류기동
1916년 충남 공주군 출생으로
1942년 4월 26세에 경찰의 압박으로 미이케탄광에 강제동원되었다.
2021.3
증언

1) 홀랑 벗고서 훈도시만 차고 일해

“기숙사비, 식사비 같은 것은 월급에서 내지만, 대개 옷은 그냥 줘. 옷이라야 훈도시* 하나여. 홀랑 벗고서 훈도시만 차면 가 일하는데 뭐. 거기서 일거리 잘못 만나면 힘들어. 변소 볼만큼 밥이나 먹나, 거기 가서 변소(대변) 안 나와. 여덟 시간을 못 참겠어?”

2) 세 번인가 죽을 뻔 했지

“천장이 무너져서 머리에 흉이 네 군데가 있어. 천장을 받치는 기둥이 있는데 그 밑에 지나다가 잘못해서 들이받으면 천장이 무너져 버리거든. 많이 안 다쳤어도 세 번인가 죽을 뻔했어. 와이어가 발목에 감겨서 끌려가다 다친 흉이 지금도 있어. 발목을 다친 줄도 모르고 수레를 일으키다가 쇠고리에 부딪혀서 턱이 이만큼 깨졌지. 탄광에서 사고가 많았죠. 자주 사람이 하나씩 죽어 나갔어요. 전차가 다니려면 위로 전선에 줄을 매다는데 그 줄에 머리만 닿아도 전기가 통해 멀리 나가 떨어져요. 그래서 엄청 위험하다고.”

손중구
1923년 경기 개풍군 출생으로 1943년 4월 20세에 삼형제 중 1명은 가야 한다는 경찰 압박에 강제동원되었다. 미이케탄광에서 강제노동 하였다.
2006.3
증언

1) 어디로 가는지 아무것도 몰라

“내가 삼형제 중에 둘째인데, 내가 징용을 가면 다른 형제들은 무사할 거라고 해서 내가 대표로 갔어.”

– 그때 일본어는 하실 수 있었어요?
“일본어는 전혀 몰랐어. 동네 친구들도 일본어를 전혀 몰랐어요.”

“기차를 타고 부산에 가는데 밥을 주었어요. 그리고 부산에서 연락선을 탔어요.”

– 기차로 이동할 때 일본 어디로 간다고 알려 주었나요?
“아무 말도 없었어. 그리고 우리는 일본어를 모르니까. 일본 시모노세키에 가서 저녁을 먹었을 거예요. 그리고 또 기차를 타고 바다 해저터널로 가는 거야. 지금 기억을 더듬으니까 생각이 나는 거지 그때는 바다 밑으로 가는지 뭔지 몰랐어.”

“밤에 어둑한데 연락선 양쪽을 호위해서 가더라고. 미군들이 바다에 기뢰를 던져놔서 배에 맞으면 그냥 터지는 거야. 그걸 막으려고 망 같은 걸 설치해서 양쪽에 작은 군함이 연락선을 호위해서 가더라고.”

2) 가스가 많아서 폭발하면 다 죽어! -손중구, 20세에 강제동원-

“탄광 속으로 들어가면 가스가 많이 발생돼. 그래서 가스 조사하는 사람이 다녀. 통에 불이 켜져 있는데 가스가 많으면 불이 더 커져. 그래서 가스가 찼는지 알지. 그래도 이따금 탄광 안에서 가스가 폭발해서 거기 있던 사람이 싹 죽어버려.”

3) 콩깻묵 먹다가 이질병에 걸려요

“도시락을 가져가요.”
– 내용물이 뭐예요?
“콩깻묵이라고 하면 알지 모르겠다. 콩기름 짜고 남은 찌꺼기. 이렇게 둥그렇고 두꺼운데, 부셔가지고 현미쌀 섞어 먹어요. 이질병에 걸리면 다 죽어요. 나는 아버지가 양귀비 진액을 싸줘서 가지고 갔지.”

“그 양귀비 진액으로 친구를 살렸어요. 친구가 이질병에 걸려서 먹지도 못하고 피똥만 싸고 있는데, 양귀비 진액을 따뜻한 물에 타서 강제로 먹였어요. 그렇게 몇 번 먹이니까 완전히 살아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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