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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위대한 독립운동가 밑에서 큰, ‘친일파 사위’의 정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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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김만건

▲ 제78주년 광복절을 하루 앞둔 지난 8월 14일 오전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지사와 부인 최 엘레나 페트로브나 여사 부부의 영현이 봉송되고 있다 ⓒ 연합뉴스

윤석열 정권은 반공이냐 아니냐로 독립운동 재평가를 시도하고 있다. 이로 인해 봉오동 전투의 영웅인 홍범도에게 가장 먼저 날벼락이 떨어졌다. 이런 식의 재평가는 러시아나 중국을 무대로 전개된 항일 무장투쟁을 우리의 독립운동 영역에서 배제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

1917년 러시아 혁명과 1921년 중국공산당 창당으로 인해, 한반도 바로 옆에서 공산주의 정권이나 정치세력이 급격히 팽창했다. 이 때문에 일제의 탄압을 피해 한반도 바깥에서 무장 항일투쟁에 헌신하려면, 현지 정권이나 정치세력과 협조하는 일이 부득이했다.

윤석열 정권 논리대로 러시아·중국의 협조하에 전개된 독립운동을 반국가 활동으로 규정하면, 한국 독립운동에서 가장 강력한 부분이자 일본제국주의가 가장 두려워했던 부분이 한국 독립운동의 역사에서 쏙 빠지게 된다. 홍범도에 대한 윤석열 정권의 폄하는 그런 위험성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윤석열 정권의 역사 재평가가 러시아나 중국을 무대로 한 독립운동에만 영향을 주는 것은 물론 아니다. 식민지 한국 내에서 노동운동이나 소작쟁의 등의 방법으로 저항한 독립투사들도 윤석열 정권하에서 ‘좌파 빨갱이’로 매도될 수 있다. 1919년 3·1운동과 더불어 일제강점기의 대표적인 대규모 민족운동인 1926년 6·10만세운동 역시 마찬가지다. 배후에서 이 운동을 이끈 조직이 박헌영으로 대표되는 조선공산당이기 때문이다.

독립운동의 근간을 뿌리째 뒤흔드는 윤석열 정권의 재평가로 인해 이익을 얻을 그룹도 당연히 존재한다. 반역자에서 애국자로 일거에 둔갑할 수도 있는 그룹이 있다. 러시아 등에서 독립운동가들에 맞서 친일 활동을 한 인물들은 윤 정권의 논리대로라면 애국자로 변신할 여지가 있게 된다.

독립운동가 장인, 친일파 사위

▲ 2009년 11월 8일 일제 시절 식민지배에 협력한 인사들의 행적을 담은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발간 국민보고대회’가 열린 서울 용산구 효창동 백범 김구 선생 묘소에서 시민들이 ‘친일인명사전’을 살펴보고 있다.김만건의 이름은 친일인명사전에 기재돼있다. ⓒ 유성호

광복절 하루 전인 지난달 14일, 독립운동가 최재형과 부인 최엘레나의 합동 안장식이 국립서울현충원에서 거행됐다. 이 부부의 사위인 김만건은 러시아에서 한국 독립운동을 훼방한 친일파다. 러시아에서 공산주의와의 협조하에 전개된 한국 독립운동에 맞섰으므로, 윤석열 정권 논리에 따를 것 같으면 김만건 같은 인물을 나쁘게만 볼 수 없게 된다.

김만건은 임오군란 1년 전인 1881년에 출생했다. 출생지는 블라디보스토크 북쪽인 니콜리스크-우수리스크다. 그곳에서 사용한 이름은 야코프 안드레예비치 김이다. 중국 난징(남경)에서 발행된 1924년 4월 26일 자 <독립신문>는 “루시아 일홈으로 약구보 안드레이 김이라는 김만건”이라는 문장으로 그의 러시아 이름을 소개했다.

김만건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은 그의 장인인 최재형이다. 1860년 함경도에서 태어나 러시아로 이주한 뒤 민족운동가이자 사업가로 성장한 최재형이 그에게 커다란 힘이 됐다.

2011년에 <한국민족운동사연구> 제69권에 실린 박환 수원대 교수의 논문 ‘러시아 지역 한인 민족운동과 일제의 회유정책’은 일본의 한국인 회유 정책에 앞장선 김만건의 성장 과정과 관련해 “최재형의 도움으로 까잔 사범대학에서 공부하였다”라고 설명한다. 이어서 “그 후 교사로 활동하였으며, 최재형의 장녀 최 베라 페트로브나(1885~ ?)와 결혼하였다”고 한 뒤 대한제국 멸망 이후인 1910년대에 니콜리스크의 대표적 상인이 됐다고 설명한다.

서른 줄에 접어든 이 시기의 김만건은 사업뿐 아니라 독립운동에도 간여했다. 위 논문은 “1910년대 중반 최재형이 일본의 농간으로 러시아 측에 체포되자 그의 석방을 위해 진력하였다”라며 “3·1운동 시에는 대한국민의회 의원으로 활동하였다”라고 설명한다.

1919년 4월 11일 상하이에서 수립된 임시정부는 9월 11일 또 다른 임시정부인 한성정부 및 대한국민의회를 흡수했다. 임시정부에 흡수될 대한국민의회 의원으로도 활동했으니, 30대 후반까지만 해도 모범적인 한국인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시베리아 지역에서 일본군의 영향력이 강해지면서 그의 인생행로가 바뀌었다. 3·1운동 이듬해인 1920년에 발생한 4월 참변(신한촌 참변)이 그 계기가 됐다.

1917년에 러시아 혁명이 발생하고 시베리아가 혼란에 빠지자, 1918년에 일본은 자국민 보호를 빌미로 시베리아에 군대를 파견했다. 하지만 공산주의 군대인 적군의 공세에 밀려 궁지에 빠졌다.

그러던 차에 1920년 3월 한국 독립군과 적군이 니콜리스크를 공격해 일본인 인명피해가 발생하는 일이 있었다. 이를 명분으로 출동한 일본군은 4월 4일부터 니콜리스크와 블라디보스토크 등지의 한국인들을 학살하고 체포했다.

국가보훈처가 1988년에 발간한 <독립유공자공훈록> 제5권에 따르면, 최재형이 운명한 날은 1920년 4월 7일이다. 최재형도 4월 참변의 피해자였다. 김만건의 삶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던 인물이 이렇게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일본은 4월 참변을 통해 시베리아 지역 한국인들을 학살·체포하고 겁주는 한편, 이 지역 한국인들을 친일 조직으로 신속히 묶어나갔다. 위의 박환 논문은 이렇게 서술한다.

“일제는 1920년대 들어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 노우키예프스크(연추, 현재명 크라스키노), 포시에트, 쉬코또보, 니코리스크(현재의 우수리스크), 스파스크 등 다양한 지역에 조선인민회·간화회 등 친일단체를 조직하여 민심을 회유하는 한편, 보다 효과적으로 한인들을 지배하고자 하였다.”

‘친일파 김만건’은 이런 흐름 속에서 부각됐다. 최재형이 사망한 그달에 출범한 니콜리스크 간화회의 회장으로 그가 선출됐다. <친일인명사전> 제1권 김만건 편은 “4월 참변 직후 니콜리스크에서 조직된 친일단체 간화회의 회장으로 활동했다”고 말한다.

간화회(懇話會)라는 명칭만 놓고 보면 간담회 정도에 머물렀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달랐다. 박환 논문에 인용된 니콜리스크 간화회 회칙에 “회장은 회무 지도에 당하야 니시 특무기관 헌병 수령사관과 특별 밀접함”이라는 부칙 규정이 있었다. 니콜리스크 간화회 회장은 니콜리스크 주둔 일본군과 긴밀히 협력해야 한다고 회칙에 못을 박아두었던 것이다.

김만건은 그런 단체의 회장이 됐다. 그가 부여받은 임무가 일본군의 지시를 한국 교민들에게 관철시키고 교민들의 동향을 일본군에 보고하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의 친일은 그 정도로 그치지 않았다. “1922년 시베리아 조선인민회 총회에서 의사원으로 선출되었다”고 <친일인명사전>은 말한다. 일본이 조직한 또 다른 친일단체에도 관여했던 것이다.

공산주의 견제한 김만건, 윤석열 정권은 어떻게 판단할까?

▲ 윤석열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가 지난 8월 15일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 대강당에서 열린 제78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만세삼창을 한 뒤 태극기를 흔들고 있다. ⓒ 연합뉴스

일본군의 시베리아 활동은 한국 독립운동을 견제하는 한편, 공산주의의 확산을 견제하는 일이었다. 김만건의 활동은 한국 독립운동과 공산주의를 견제하는 활동이었다. 이런 활동이 이제까지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됐지만, 공산주의 독립운동은 독립운동이 아니라는 윤석열 정권의 논리대로라면 김만건에 대한 재평가가 불가피해진다.

이는 홍범도 등의 독립운동에 대한 감사와 경의를 기초로 형성된 한국인의 역사의식과 가치관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일이다. 홍범도 대신 김만건 같은 인물을 존경하고 숭앙해야 하는 대혼란의 시대를 맞이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김만건이 거물급 사업가였다는 점을 근거로 ‘그의 친일이 기업을 지키기 위한 부득이한 선택이 아니었을까? 친일을 했다 하더라도 시늉만 내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위의 <독립신문>은 이렇게 보도했다.

“왜인의 출병함을 제(際)하여 조선민회의 회장이 되며 우리 독립군을 다수 함해(陷害)하고 왜 사령부에 아편 전매를 득하엿다 하고 못된 즛을 만이 하엿고, 왜군이 철퇴할 때는 자칭 한인의 연합이라 하고 철퇴치 말나는 청원을 하였으며”

일본군의 출병을 계기로 친일단체 회장이 된 뒤 독립군을 고발해 위험에 빠트리고 일본군 사령부에 청탁해 아편 전매권을 얻는 등의 “못된 즛(짓)”을 많이 했다. 일본군이 철수하려 하자 ‘한국인들의 연합 청원’ 형식을 빌려 ‘철수하지 마시라’는 애원까지 했다. 상당히 적극적인 친일파였던 것이다.

그런 친일의 결과로 돈도 많이 벌었음을 알 수 있다. 일본군 사령부의 지원을 받아 아편 사업을 벌였다. 그 결과로 벌어들인 친일재산의 규모가 상당했으리라는 추정을 가능케 한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시늉만 하는 친일파가 아니었다. 최재형이 살아 있을 때 독립운동을 도운 공로는 있지만, 그것을 상쇄하고도 남는 “못된 즛”을 자발적으로 숱하게 저질렀다. 이를 통해 불법적 수익 구조도 만들어 냈다. 1948년 이래의 역대 헌법은 ‘대한민국이 1919년 3·1운동으로 건립됐다’고 선언했으므로, 김만건의 행위는 반민족행위인 동시에 반국가행위가 된다.

기록상으로 나타나는 김만건의 끝은 좋지 않았다. <친일인명사전>은 “일본군이 시베리아에서 철수한 후 한인들이 볼셰비키 국가보안부에 친일 혐의자로 고발함으로써 체포·투옥되었다”라고 기술한다. 이런 반국가행위자가 윤석열 정권하에서는 애국자로 둔갑할 가능성이 없지 않다. 우리 사회의 가치관을 혼란케 만드는 현상이다.

김종성 기자

<2023-09-17>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위대한 독립운동가 밑에서 큰, ‘친일파 사위’의 정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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