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도산서원 철폐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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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실 글방 – 7]

도산서원 철폐운동

권시용 선임연구원

한때 조선시대 서원을 공부했습니다. 오래전 일이지만 미련이 있어선지 가끔 연구 논문을 흘깃거리곤 합니다. 최근 옛 동학의 논문에서 눈길이 가는 사건을 봤습니다. 이름하여 ‘도산서원 철폐운동’입니다. 도산서원이라면 한국의 서원을 대표하는 곳인데다 그곳에 모셔진 분이 퇴계 이황이니,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듯합니다. 퇴계는 학문은 물론 그의 삶 자체가 오랫동안 공경의 대상입니다. 특히 그는 서원제도에 관심을 두고 제자들과 함께 서원건립운동을 펴나갔습니다. 이를 통해 유학을 공부하고 동시에 본받을 만한 유학자를 제사하는 공간이라는 한국 서원의 정체성이 마련됐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그런 퇴계가 돌아간 후 마련된 것이 도산서원입니다. 이후 도산서원은 영남 유학의 총본산이란 권위를 인정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도산서원을 없애버리자는 운동이 벌어진 겁니다.

이런 놈들은 버르장머리를 가르쳐야 한다

1925년 10월 초, 경상북도 안동 도산서원에서 일이 났습니다. 서원 마당에 소작인 세 사람이 잡혀 왔습니다. 조수철 황원돌 이은석이란 사람이었습니다. 소작인을 잡아온 사람은 도산서원 재임(齋任)으로 있던 이동흠(李棟欽)과 이원각(李源慤)이었습니다. 재임은 서원 원장을 도와 교육과 제사 등 서원 운영을 담당하는 사람입니다. 다른 말로 유사(有司)라고 합니다. ‘양반이 부르는데 즉시 오지도 않고, 게다가 도조(賭租)는 왜 이때까지 바치지 않느냐.’ 소작인들을 잡아온 이유는 도조, 즉 한 해 동안 서원이 소유한 농지를 부친 세를 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이런 놈들은 버르장머리를 가르쳐야 한다’며 소작인들을 형틀에 붙잡아 매고 매질했습니다.

끝이 아니었습니다. 이동흠과 이원각은 소작인들을 그렇게 때리고 묶어 뒀다가 저녁을 먹은 후 다시 한 차례 난타했습니다. 그리곤 밤새 가둬놨습니다. 이튿날 아침, 도조를 속히 바치겠다고 항복한 후에야 소작인들은 풀려날 수 있었습니다. 사실 조수철은 내야 할 도조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맞았던지 조수철은 낼 이유 없는 도조를 바치겠다며 항복했던 것입니다. 없는 살림에 어떻게 도조를 물어줄까 전전긍긍하는 조수철에게 ‘낼 도조가 없다’는 통지가 온 것은 며칠 뒤였습니다.

경고문

이 일은 곧 안동 고을을 떠들썩하게 했습니다. 먼저 지역 청년단체인 풍산소작인회와 안동화성회가 움직였습니다. 풍산소작인회는 이준태를 보내 진상을 조사하고 사실관계를 명확히 확인했습니다. 그다음 10월 5일에 긴급 집행위원회를 열었습니다. 임시의장 안상길이 회의를 주재했습니다. 울분에 찬 회원들이 최후 수단을 아끼지 않을 태세였지만 우선 몇 가지 조건을 달아 경고문을 보내기로 합니다. 안동화성회도 진상 조사 후 10월 15일에 집행위원회를 열고 경고문을 보내기로 결의했습니다. 경고문은 대체로 (1) 피해자에게 사죄할 것, (2) 신문에 공고해서 일반 민중에게 사죄할 것, (3) 사죄는 이동흠, 이원각 두 사람이 도산서원 재임 자격으로 10월 20일 안에 해야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풍산소작인회와 안동화성회가 보낸 경고문을 받은 도산서원 측 반응은 어떠했을까요? 조선일보는 ‘태형 사건의 장본인이 세강속말(世降俗末)이라며 한탄했다’고 전합니다. 세상이 기울고 풍속이 어지러워진다는 말이니 양반의 위엄이 서지 않고 이런 경고문 같은 것이 날아오는 세상을 한탄한 것이죠. ‘세상이 어떻게 됐길래 도산서원이 이런 대접을 받나’라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도둑을 낳고 원숭이가 깃들인 곳

10월 31일 안동화성회는 집행위원회를 열고 도산서원 소작인 태형사건에 대한 대책을 협의했습니다. 경고문에 정한 사과 기한도 지났으니 다음 행동을 결정할 때라는 판단이었습니다. 이날 안동화성회는 ‘도산서원 철폐운동’에 착수하기로 결의했습니다.

도산서원은 사회에 해독을 끼칠 뿐 아무 존재할 가치가 없다.
1. 사회의 여론을 환기하기 위해 도산서원 성토문을 뿌리고 성토강연회를 개최한다.
2. 도산서원의 정체를 뿌리째 드러내기 위해 문구를 다음과 같이 정정한다.
도산서원을 ‘盜産捿猿(도산서원)’으로, 서원 원장(院長)을 ‘猿長(원장)’으로, 재임(齋任)을 ‘災任(재임)’으로
3. 직접 폭행자 이동흠과 이원각은 광견(狂犬)으로 취급한다.

결의 내용은 사사로이 태형을 저지른 서원 재임의 책임을 묻는 데서 더 나아가 도산서원 그 자체의 철폐를 거론하고 있습니다. 특히 도산서원을 도둑을 낳고 원숭이가 사는 곳으로, 서원 원장을 원숭이 우두머리에 빗대는 대목에서는 상당히 원색적인 비난이었습니다. 더구나 사건의 장본인들은 미친개로 취급하기까지 했습니다. 잘못을 저지른 책임자의 공개 사과 정도로는 해결되지 않을, 도산서원이란 존재에 대한 격렬한 혐오감이 느껴집니다.

11월 10일 풍산소작인회 역시 적극적 수단이 필요하다고 결정하고 사건 대책을 담당할 전문위원회를 조직했습니다. 풍산소작인회 또한 안동화성회와 같은 입장의 결의사항을 채택했는데, ‘이황 선생의 이름을 팔아 도산서원의 폐해와 서원 유사의 죄악을 덮으려는 자는 원래 이름 대신 이동흠 이원각의 주구(走狗)란 칭호를 사용’하겠다는 내용을 추가했습니다. 도산서원을 비호하는 자는 똑같이 미친개로 부르겠다는 것이죠.

전국적인 이슈가 되다

도산서원 철폐운동은 안동 지역 사회단체들로 확대됩니다. 안동화성회와 풍산소작인회를 비롯해 안동청년연맹, 안동노우회, 안동여성회, 정광단 등 6개 단체는 11월 22일에 도산서원을 성토하는 강연회를 개최하기로 계획했습니다.

다른 지역에서도 이 사건에 민감하게 반응했습니다. 전남 순천의 전남동부청년연맹위원회, 전남순천농민연합회도 긴급위원회를 열어 만장일치로 ‘소작인을 태형한 도산서원 사건을 비인도적 행위로 규정하고 경고문을 보낸’다는 결의를 채택했습니다. 대구청년회도 ‘인권을 유린하고 생활을 위협하며 봉건제도의 악습인 사태형(私笞刑, 사사로이 매질함)을 감행한 도산서원은 무산대중의 원부(怨府, 원한이 되는 기관)로 인정하며 그것의 폐지를 요구한’다고 결의했습니다. 경상남도청년연맹은 창립총회에서 도산서원 사건에 대한 결의사항을 채택했습니다. 전남 광양노농연합회에서도 도산서원 사건을 ‘소위 부호 겸 양반 계급의 불법행위이며 인류 도덕을 무시한 사건’으로 규정하고 철폐운동을 적극 논의합니다. 경남 거제도의 이운청년회도 도산서원 사건을 논의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도산서원 태형사건은 전국적 이슈가 됐고, 사회 각 방면에서 항의문 경고문이 도산서원에 빗발쳤습니다.

사건의 마무리

안동은 물론 전국 곳곳에서 항의문, 경고문이 날아들고 도산서원 철폐운동으로 확대되자 도산서원 쪽도 대책을 세우려 했습니다. 11월 20일 도산서원은 당회를 열고 입장을 정리했습니다.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 이동흠과 이원각의 청벌(請罰, 벌 받기를 청함)을 인준한다. 둘째, 태형을 행한 재임의 개인 과실인데, 도산서원 전체에 대해 모욕의 말을 쓰고 철폐하자는 결의를 한 안동화성회와 풍산소작인회에 대해서는 항의한다.’

이대로면 소작인을 때린 이동흠과 이원각이 책임을 지고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하려는 것 같습니다. 도산서원 철폐란 움직임에는 발끈했지만, 적어도 양반이란 신분을 내세우며 소작인을 함부로 대한 두 사람의 잘못은 인정하는 모양샙니다. 그런데 실상은 그것도 아닌 모양입니다. 다른 신문 기사를 보면, 도산서원 쪽은 양반이 ‘농노’에게 태형을 가하는 것은 예삿일이라며, 오히려 서원에 들어온 경고문에 퇴계 선생의 이름을 바로 쓴 것을 문제 삼고 있습니다. 나라에서도 쓰지 않던 퇴계 선생의 이름인데 경고문이란 것에 함부로 쓰였다는 겁니다. 이렇게 망극한 일이 생긴 것에 책임을 지고 도산서원 원장이 사임했으며, 이하 재임들도 자연히 따라서 사임했다는 것입니다.

한편 안동 6개 단체가 열기로 했던 성토강연회는 경찰의 금지 조치로 열리지 못했습니다. 안동경찰서는 ‘상부 명령’을 핑계댔고, 경북 경찰부는 ‘공안 유지를 위해 금지’한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그러자 6개 단체는 이튿날인 11월 23일에 다시 모여 ‘도산서원 철폐운동 연합위원회’를 조직하고 결의를 다졌습니다. 애매한 입장의 경찰 태도도 공식적으로 문제 삼기로 했습니다. 이렇게 도산서원 원장과 재임이 물러나는 정도에서 이 사건은 마무리되지 않았습니다. 청년, 사회단체는 이 기회를 잡아 도산서원으로 상징되는 양반 계급에 대한 공세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안동 안에서는 소소한 충돌이 지속되고 있었습니다. 11월 26일 아침 이원각의 동생 이원태가 안동화성회를 찾아갔습니다. 이동흠과 이원각이 대신 보낸 것입니다. 이원태는 어떻게 사과해야 할지 절차를 물으러 왔다고 말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정광단 쪽에서 이원태와 이원각을 찾아가 ‘비루한 놈’이라 욕하고 침을 뱉고 구타했습니다. 그러면서 ‘도산서원을 철폐하고 그 건물은 불쌍한 집 없는 사람에게 주고, 재산은 사회사업에 제공하라, 너희 두 사람은 개가죽을 쓰고 일반사회에 사과하라’며 위협했습니다. 이제 다툼이 명분 싸움을 지나 감정 싸움으로 번지고 있었습니다.

12월에 접어들면서 이번엔 유림 세력의 반격이 나타났습니다. 인근 의성군 유림이 움직였습니다. 의성향교에서 군내 유림들에게 통문을 보냈습니다. 통문은 요즘으로 치면 편지, 이메일 같은 것입니다. 의성 지역 유림 30여 명은 12월 7일 의성향교에 모여 어떤 결의를 했다고 합니다. 구체적인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도산서원 재임 이동흠에 대한 것, 안동화성회에 대한 것, 그리고 조선일보에 대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이동흠에 대한 결의가 어떤 내용인지는 모르겠지만, 안동화성회와 조선일보에 대해서는 상당한 반발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12월 말에는 영덕군 영해향교에서 반응이 나왔습니다. “퇴계 선생은 동방의 공맹정주(孔孟程朱, 공자 맹자 정자 주자)다, 도산서원은 과거 흥선대원군도 어쩌지 못했다, 도산서원을 철폐하자는 말은 퇴계 선생을 무시하는 말이며 요순에서 시작해 공맹정주를 거쳐 퇴계 선생으로 이어지는 도학을 무시하는 것이다. 그것은 곧 사람이 금수와 같다는 말이다”는 흥분의 목소리였습니다. 유림을 움직이게 한 것은 ‘도산서원 철폐운동’이었습니다. 사건은 마무리되지 않았습니다.

계속 일어나는 태형 사건

도산서원에서 일어난 사건은 이번만이 아니었습니다. 이 사건이 벌어지기 반년 전, 즉 1925년 4월에는 도산서원 원장 자리를 놓고 분란이 났습니다. 신임 원장에 이중균을 선임했는데, 전임 원장인 이중협이 반발했습니다. 각자 서로를 비방하는 글을 돌리더니, 어느 날 이중협이 도산서원 고지기를 잡아다 볼기를 때리며 ‘이것은 의인매(宜仁은 이중균의 아명)’라고 했답니다. 분을 못이긴 이중협이 이중균을 때리고 싶은데, 양반 체면에 그럴 수 없으니 그 대신 서원 노비를 때리며 ‘이건 이중균을 때리는 거다’라고 한 거죠. 지금 보면 애들 장난 같은, 참 웃긴 일이죠. 그렇지만 매 맞는 노비의 입장은 어떻겠습니까.

소작인 태형 사건으로 떠들썩하던 1925년 10월, 경남 진주와 의령에서는 도산서원의 이름을 판사기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누군가 도산서원 원장 망기(望記, 추천장)를 가지고 다니며 돈을 받고 팔아먹은 겁니다. 유림의 명망 있는 인사가 맡는 서원 원장 자리를 놓고 그 추천서를 팔고 다닌 사람이나, 또 그걸 돈 주고 사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도산서원이나 안동 유림이란 것이 형편없이 망가졌음을 대변합니다.

소작인 태형 사건이 있고 1년 후인 1926년 11월에 또 도산서원에서 태형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도산서원 신임 원장의 자격이 없다고 안동 예안 사는 이섬호(李暹鎬)가 서원 원지기를 잡아와서 때렸다는 겁니다. 신임 원장을 추천한 사람의 이름을 볼기에 붙여 놓고 때렸다고 합니다. 1년 전 시작된 서원철폐 문제가 잊히지 않은 때 일어난 태형 사건이었습니다. 안동 사회단체들은 다시 도산서원에 경고문을 보내고 철폐운동을 계속해 나갑니다.

도대체 양반 세상은…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사대부의 여식으로 태어나 조선을 구하기 위해 총을 잡은 고애신에게 노비 출신 유진 초이가 묻습니다. “귀하가 구하려는 조선에는 누가 사는 거요? 백정은 살 수 있소? 노비는 살 수 있소?” 고애신은 대답하지 못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조선-대한제국이 끝장나고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받게 됐습니다. 이미 조선 후기 사회경제적 변화를 겪으며 신분제는 차츰 해체돼왔습니다. 1886년에는 노비세습이 폐지되고 1894년에는 신분제가 폐지됐습니다. 그렇지만 법적 제도적 철폐와는 달리 사회 관습으로서의 신분 차별은 여전했습니다. 삶의 관성은 변하기 어렵고 생활은 계속돼야 했습니다. 노비는 여전히 주인집 머슴살이를 했습니다.

1920, 30년대 신문 사회면 기사에는 ‘상놈’이라 불리는 사람들에 대한 향촌 양반의 횡포가 계속 실렸습니다. 양반 대우를 안 한다고, 상놈이 양반에게 대든다고, 서로 누가 더 양반이니 자랑하다가 폭행하고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향교나 서원, 지역 관공서 등을 둘러싼 향촌 양반들의 갈등도 적지 않게 보도됐습니다. 도산서원 태형 사건도 그런 사례의 하나입니다.

양반 문제가 신문에 계속 보도되는 것은 그것이 중요한 사회적 문제로 인식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제도가 없어져도 여전히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사회적 신분 차별에서 벗어나야 했습니다. 그래서 나타나는 것이 ‘전 인민의 양반되기’ 현상입니다. 식민지 시기에 족보와 문집 간행이 절정을 이루었다고 하죠. 1937년 경성부에 접수된 공립보통학교 지원서에 99%가 자신을 양반이라고 적었다는 일화는 유명하죠. 그래서 이런 ‘양반되기’의 열망이 평등을 지향한다는 연구가 있습니다. 기존 양반들로선 새로 양반이 되려는 사람들이 눈에 거슬렸을 테고, 신문 사회면에 오르는 사건들이 빈발하는 이유가 됐죠.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시대일보 등 언론은 처음부터 이 사건에 주목했습니다. 도산서원 소작인 태형 사건이 일어나자 신문은 사건의 발단, 지역 단체들의 대응은 물론 다른 지역의 도산서원 성토 분위기도 자세히 전했습니다. 그리고 사건에 대한 신문사 의견을 적극적으로 내놓았습니다. “17세기나 18세기의 악몽을 깨닫지 못하는 도산서원의 소행이 끼치는 죄악과 사회에 미치는 폐해를 어디서 씻고 누구에게 호소하랴.”(조선일보 1925.11.4.) “이동흠과 이원각이 형구(刑具)는 그대로 두고 와서 사죄하겠다고 하는데, 누가 그 말을 신뢰하랴. 도산서원은 개인 과실을 가지고 서원 전체를 공격하는 것은 무리라며 적반하장의 태도를 취한다.”(조선일보 1925.12.1) 당시 신문들은 도산서원 철폐운동을 적극 지지함은 물론 그런 여론을 확산하려 애씁니다. 1920, 30년대 반제국주의와 함께 중요한 민족적 과제는 반봉건이었습니다. 유교이데올로기의 상징인 도산서원에서 이런 사건이 일어났으니, 새로운 사회를 열어갈 청년들을 지원하고 보수회귀세력을 공격하기에 훌륭한 도화선이었던 겁니다.

p.s. 소작인 태형 사건의 장본인 이동흠은 독립운동가입니다. 국권 피탈 때 순국한 이만도(李晩燾)의 손자이며, 김창숙(金昌淑)을 중심으로 한 경북유림단에 가담해 군자금 모집활동을 하다 일본 경찰에 붙잡혀 고초를 겪었습니다. 이동흠은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받았습니다. 양반 위세 부리며 소작인을 잡아다 때리는 인물과 독립운동가, 매치가 잘 안됩니다.

일본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나려는 사람들은 독립을 꿈꾸고 행동에 나섰습니다. 그런데 독립된 세상이 똑같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새로운 세상을 향해 가는 사람도 있고 원래 살던 좋았던 때를 되찾고자 하는 사람도 있었겠죠. 이동흠은 후자가 아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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