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독립신문에 기록된 봉오동·청산리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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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소개]

독립신문에 기록된 봉오동·청산리 전투

올해는 봉오동·청산리 전투가 일어난 지 103주년이 되는 해다. 일제 강점기 우리 독립군이 일본군에 직접 맞붙어 대승한 3대 대첩으로 1920년 6월의 봉오동 전투, 10월의 청산리 전투, 1933년 대전자령 전투가 있다.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 모두 참전하여 대승을 이끈 주역은 바로 홍범도 장군이다. 최근 육군사관학교에 있는, 홍범도 장군을 비롯한 다섯 분의 흉상을 철거한다는 육군사관학교의 발표가 있었는데 이는 명백히 반민족적 처사이므로 마땅히 철회되어야 한다.
이번 호에는 독립신문에 기록된 봉오동 · 청산리 전투 기사를 전재한다. 『독립신문』 제88호(1920.12.25.) 4면의 「북간도(北墾島)에 재(在)한 아독립군(我獨立軍)의 전투정보(戰鬪情報)」와 『독립신문』 제95호(1921.2.25.) 3면의 「대한군정서 보고」이다. 원문이 국한문 혼용체여서 이를 읽기 쉽게 요즘 어법으로 풀어썼다. 끝으로 ○○는 원문의 ○○를 그대로 두었고, ●●는 원문 중 판독되지 않는 글자임을 밝혀둔다. ― 편집자주

북간도에 있는 우리 독립군의 전투정보
1920년 11월 12일 군무부(軍務部) 발표

삼둔자 부근의 전투
(1) 전투 전 피아(彼我)의 형세

적은 아군의 도강 습격을 방어하기 위하여 두만강 연안에 방어(경계)선을 배열하다.

아군은 현재 전투를 목적하지 않고 전쟁 준비를 목적함으로써 중국 길림성 연길, 화룡, 왕청, 혼춘 각 지방에서 모집 훈련중이었으나 우리나라 안에서 활동할 필요가 있으므로 아군의 기습부대와 전령부대는 끊임없이 강 건너 왕래함으로 적의 경찰대를 격파케 되다.

(2) 전투경과의 상황
대한민국 2년(1920년) 3월 1일 이래로 6월 초까지 32회의 작은 전투를 하였는데 아군의 기습대와 전령대는 협동하여 도강할 때마다 그 임무를 진행하던 중 왜적의 순경대, 왜정탐(倭偵探)을 격살하며 왜관서 및 순사파출소를 파괴한 것이 34이오. 6월 4일 오전 5시에 아군 1소대는 화룡현 월신강 삼둔자에서 출발하여 종성군 북방 약 5리 되는 종성군 강양동 상류로 강을 건너 강양동 상류 왜적의 보초장 헌병군조 복강삼태랑(福江三太郞)이 인솔한 적병(헌병순사 병정) 약 1소대를 격파하였고 그 후 날이 저물어 강을 건너 돌아와 적정(敵情)을 경계하던 중 왜적 남양수비대장 신미이랑(新美二郞) 보병중위는 화룡현 전패(戰敗)의 소식을 듣고 즉시 그 부하 1중대병과 헌병순사 10여 명을 인솔하고 복수전주의로 도강하여 아군을 향하고 전진할 때 우리의 수색병은 이를 발견하고 즉시 본대에 경보(警報)하니 아군 사령관 최진동(崔振東)은 부하 1소대를 삼둔자 서남방음폐지에 은폐케 한 후 약간의 병사를 내어 추격하다가 후퇴하자 왜적은 추격 행동을 취하여 잠복한 우리 부대 전방에 도착할 때(6일 오후 10시)에 급사격으로 적의 부대를 파멸시키니 그 잔병은 삼둔자 북방으로 패주하고 왜적의 제39사단장은 전패의 급보를 듣고 안천(安川) 소좌에게 출동명령을 내리다. 우리 소수의 병력으로 다수의 적군을 백전백파한 것이 반드시 적의 대병을 움직이게 한 도전의 원인이 된 줄을 알고 차라리 퇴각하여 작전 요지를 차지함이 옳다 하여 약간의 후병(後兵)을 ●하여 부대 후미를 경계케 하며 안산 북편으로 퇴각하여 안산촌락 후방 한 고지에서 수세를 취하다. 이때 왜적 안천 소좌는 그 부하 1대대를 인솔하고 안산 방면으로 아군을 향하여 전진중이었다. 왜적 신미 중위는 그 부하 패잔군과 보충병으로 1개 소대를 편성하여 인솔하고 봉오동으로 전진하는 중이다.

6월 6일 오후 3시 반에 적의 전위중대가 전방 약 300미터에 도착하자 급사격으로 맹렬히 공격하여 일거에 타파하다. 지형이 불리함으로 적의 본대는 감히 응전하지 못하고 안산촌락 후방에 은폐하고 봉오동으로 전진하려던 적의 신미 소대는 이 급보를 듣고 와서 응원이 되었으나 전투에 불리하여 퇴각하다.

(3) 피아의 손해
적의 전사자 120여 명이오, 아군의 전사자 1명, 부상자 2명이다. 이 전투에서 소수의 아군이 다수의 적을 격파한 것이 지형도 유리하거니와 아군의 기세가 왕성하며 선제수단을 취함에 있다.

봉오동 부근의 전투
(1) 전투 전 피아의 형세
적은 봉오동을 아군의 책원지(策源地)라 하여 포위공격을 하려 하고 적의 보병 약 1대대는 보병을 선두로 하여 고려령 방면으로 전진중이며 그에 따라 아군은 작전계획을 다음과 같이 하다.

제1연대를 봉오동 상촌 부근에 있는 연병장에 집합하고 작전명령을 내려 각 부대의 전투구역과 그 임무를 정할 때 제1중대장 이천오(李千五)는 부하 중대를 인솔하고 봉오동 상촌 서북단에, 제2중대장 강상모(姜尙模)는 동산에, 제3중대장 강시범(姜時範)은 북산에, 제4중대장 조권식(曹權植)은 서산 남단에, 연대장 홍범도(洪範圖)는 2개 중대를 인솔하고 서산 중북단에 위치하고 각기 엄밀한 전비(戰備)를 하였다가 적이 도래할 때에 그 전위를 봉오동 입구에 통과케 한 후에 적의 본대가 아군의 잠복한 포위 중에 들어올 때 호령에 의하여 사격케 하고 연대부(聯隊附) 장교 이원(李園)은 본부와 잔여 중대를 영솔하고 서북 산간에 위치하여 병사 증원과 탄약 보충, 군량 보급을 맡게 하고 특히 제2중대 3소대 제1분대장 이화일(李化日)로 부하 1분대를 인솔하고 고려령북편 약 1200미터 지점의 고지와 동북편 촌락 전단(前端)에 약간 병사를 나눠 잠복하였다가 적이 도래하거든 ●●하여 전진을 지체케 하다가 봉오동 방면으로 퇴각케 하고 사령관 최진동 부관 안무(安武)는 동북산서간 최고봉 독립수(獨立樹) 아래에서 지휘케 하다.

(2) 전투 상황
적의 보병대대는 보병을 선두로 한 종대가 7월 7일 오전 6시 30분에 고려령 서편 약 1500미터 지점에 도착하다. 이때 이화일 분대는 서면에 잠복하였다가 적의 전위중대가 접근하기를 기다려 급사격으로 적의 전위중대를 전멸시켰으나 그때 지형이 적에게 크게 불리함으로 그 본대가 미처 응원을 전개하지 못함으로 도로 아군의 양전(佯戰) 소부대가 의외의 대승리를 얻고 본대에 귀합(歸合)하였고 적은 비파동을 거쳐 유원진 대안(封岸)으로 퇴각하여 그 부대를 정돈하여 다시 7일 오전 11시 30분에 유원진 대안을 출발하여 봉오동을 향하고 전진할 때 7일 오후 약 1시에 적의 첨병은 봉오동 상촌에 도착하자 아군은 더욱 은폐하여 잠복하여 움직이지 않으니 적의 전위가 통과하고 그 후에 적의 본대가 아군이 잠복한 삼면 포위 가운데 들어가는지라. 이때 사령관의 지휘호령에 의하여 맹렬한 급사격을 하니 적은 어쩔 줄을 모른 채 전사자와 사상자가 쓰러지고 산 자도 혼란하여 사방으로 도망칠 때, 제2중대장 강상모는 부하를 인솔하고 맹렬 추격하여 적군 100여 명을 사살하고 그 지점에 부하 중대를 잠복하였다가 적의 응원대가 도래할 때 몇 발의 사격을 하다가 교묘히 빠져나오니 마주오던 적은 서로 난사하여 적화(敵火)로 적을 사살케 하다. 대패한 적군 약간은 온성 유원진 대안을 향해 퇴각하다.

(3) 피아의 손해
수 적군의 전사자 157명, 중상자 200여 명, 경상자 100여 명이오 아군의 전사자 장교 1인, 병사 3인, 중상자 2인이며 적의 유기물(遺棄物)은 많으나 아군의 치중예비태마(輜重預備馱馬)가 없고 또한 전투를 목적한 계획전이 아니요, 예상하지 못한 전투를 치르게 되어 이를 얻기 위해 힘을 낭비할 여지가 없으므로 보병 소총 몇 자루만 가져가다.

(4) 아군은 이번 전투를 목적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안전지대로 퇴각하고 적은 패잔군을 수습하여 다음 날에 도강하여 조선 내로 패퇴하다.

청산리 부근의 전투
(1) 전투 전 피아의 형세
적은 혼춘 왜영사관(倭領事館)이 마적에게 전소(全燒)된 사건을 빙자하여 다수의 군대를 출동하여 우리와의 전쟁준비를 목적하고 우리 군사기관을 파괴하려고 우선 적의 보병 1대대, 기병 2중대, 포병 1중대가 두도구로부터 진로를 양쪽으로 나누어 적의 본대는 청산리 동북방 40리 되는 충신장 가도로 그 지대는 이도구로 어랑촌을 거쳐 봉미구로 전진중이다. 아군은 이번 전투를 목적하지 않고 전쟁준비중에 있을 뿐더러 국제 관계를 고려하여 봉오동에서도 예상치 못한 전투를 야기하여 부득이 전투하기는 하였으나 오히려 피전책(避戰策)을 주로 하여 왕청현 양증산맥 대삼림 속 신흥평으로 퇴각하여 육군무관학교 제1회 졸업식을 행하고 중국 관헌의 교섭으로 인하여 한 곳에 영구히 주둔할 수 없어 무관학도 졸업생 300명 내에서 150명으로 지방시찰 여행대(旅行隊)를 편성하고 그 나머지는 새로 모집한 병사와 합쳐 3개 연대를 편성하고 기관총대 1개 중대는 제1연대에 부속케 한 후에 즉시 출발하여 왕청현 대감자를 거쳐 화룡현 삼도구 청산리에 도착 주둔하다. 10월 19일에 적의 대종대(大縱隊)는 기병을 선두로 하여 봉미구를 거쳐 전진한다는 정보를 듣고 아군은 10월 20일 오전 약 6시에 청산리 촌락을 떠나 전촌락 후방 삼림을 점령하여 아군의 동작을 엄폐하고 약간의 척후를 보내 적의 행동을 정찰할 때 20일 오후 약 3시에 적의 종대는 기병을 선두로 하여 청산리 촌락으로 집중하다.

아군은 결정한바 피전책을 주로 하여 여행대로 후위를 맡고 본대는 서서히 이도구를 향해 진군하며 후위는 그 후병(後兵)으로 적이 나아가는 험로의 요처에 점위(占位)하고 적의 전진을 지체케 하다. 이때 적은 아군이 퇴각하는 줄로 알고 21일 상오 8시경에 청산리를 출발하여 아군을 진격하려 하므로 부득이 아군도 항전하기로 하고 작전계획을 다음과 같이 하다.

제1연대장 홍범도는 부하 연대(6중대원)를 인솔하고 완루구 중앙산록에 점위케 하고 제2연대장 김좌진은 부하 연대(2대대원)를 이도구 왼쪽 고지에 점위케 하고 제3연대장 최진동은 부하 연대(6중대원)를 인솔하고 이도구 오른쪽 고지에 점위하여 은폐 잠복하였다가 우리 후병이 항전하다가 거짓 퇴각하면 적은 반드시 교만한 태도로 추격수단을 취하리니 기회를 잃지 말고 사격케 하라 하다.

(2) 전투 상황
적의 전위 보병중대가 우리 후병이 잠복한 10미터 지점의 근거리에 이르도록 적은 안심하였다가 우리 후병은 이에 이르기까지 태연히 움직이지 않다가 충분한 호기를 맞이하여 맹렬한 급사격을 행한 지 약 20여 분간 1명도 남김없이 적의 전위 중대를 전멸시키니 그 수는 약 200여 명이더라. 그 후방에 뒤따르던 적의 본대는 황망하여 미처 전투를 지원하지 못하고 혼란상태에 빠져 당황한 행동으로 산포(山炮)기관총을 난사하나 조준과 방향목표가 맞지 않고 자연 지물이 유리하여 아군의 손해는 전혀 없고 도리어 아군의 사기는 왕성케 되다. 이때 적의 보병 2개 중대와 기병 약간을 더한 1부대는 장백산 동북지맥으로 우회하여 그곳의 삼림을 점령하여 아군의 측면을 포위하다. 적의 본대는 지형이 불리할 뿐더러 아군의 사격부대의 군기(軍紀)가 자못 치밀함으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400~500미터를 퇴각하여 부대를 정돈하여 아군의 정면과 측면을 포위하고 산포기관총으로 난사하는지라. 아군이 점령한 지점은 고지이며 엄폐 안전할 뿐더러 적은 아군의 집속사격을 받자 적의 사격은 추호도 효과가 없으므로 아군의 사기는 더욱 왕성하고 적(敵)은 날이 저물 것을 고려하여 숙영지로 퇴각하는 행동을 취하다. 아군은 원래 전투를 목적하지 아니한 뜻밖의 전투이므로 보급 준비가 충분치 못할 뿐만 아니라 완전히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인해 극심한 고통에 빠졌다. 그렇기 때문에 맹렬하게 추격할 수단을 취하지 못하고 거꾸로 이도구로 향해 진격하며 적과의 거리를 떨어뜨리려 할 때 먼저 전위를 내어 봉미구 적의 포위선을 돌파하고 이를 탈출하는 동시에 후위를 내어 적의 추격을 막으며 강행군으로 야간 행군하여 다음 날 새벽에 새물둔지 동북방 약 10리 쯤에 위치한 이도구 와룡구에 도착하다. 이때 적의 지대(보병 1대대, 기관총 2중대)는 두 길로 나누어 하나는 남완루구로 하나는 북완루 서편으로 향해 아군 제1연대를 포위 공격하려 하는 중에 아군 제1연대는 정찰척후의 경보를 듣고 임의 배치하였던 저항선에서 ●●●戰을 시작하는 동시에 우리 예비대는, 숲속 부대로 은밀히 우회하여 적의 측면을 갑자기 사격하는 중 ●●完樓로 나아가던 적의 1부대는 오히려 아군이 중앙고지에 있어 자기의 우군과 교전하는 줄로 오인하고 적이 적군을 맹렬하게 사격하니 아군과 적군에게 포위공격을 받는 적의 1부대는 전멸하였는데 그 수는 약 400여 명이더라.

(3) 피아의 손해
적의 전사자가 600여 명이고 우리 측 사상자는 없다. 위 전투는 전후절무(前後絶無)한 기전(奇戰)이라 일컬을 만하다.

새물둔지의 전투
(1) 전투 전 피아의 형세
적은 여단(旅團) 이상의 병력을 출동하여 점점 증가된바 북간도 전지방에 가득 차게 되는데 적의 보병 3개 중대, 기병 1중대, 포병 1중대는 새물둔지를 향해 전진중이었는데 척후의 보고를 접한즉 적의 수색기병 1소대는 새물둔지 동북단 집합가옥에서 숙영중이오, 새물둔지 동방 약 5리쯤 어랑촌에는 적의 보병 3개 중대, 기병 1중대, 포병 1중대가 주둔하다. 그리하여 여행대(旅行隊)는 새물둔지에 숙영하고 있는 적의 기병부대를 기습케 하고 보병 제2연대는 어랑촌 후방 고지를 점령하여 적이 나아갈 진로를 차단케 하고 제3연대는 동 고지 북방 최고표고에 위치하여 원대(援隊)에 임(任)하다.

(2) 전투의 상황
우리 여행대는 명령을 받은 후 즉시 새물둔지에 먼저 가서 숙영하는 적의 기병부대를 포위 습격하여 전멸하다. 때는 11월 22일 오전 4시경이라 새벽이어서 적은 방심하고 휴식중이었다. 그 중에 적의 일기(一騎)가 포위선을 탈출하여 어랑촌에 주둔한 적의 본대에 경보한지라. 이에 적은 즉시 출동하여 전진할 때 어랑촌 전방 약 3리쯤 떨어진 아군이 은폐 잠복한 고지에서 약 200미터 되는 골짜기에 본대가 도착하자 좌우 고지에서 아군은 맹렬한 집속사격을 시작하니 적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고, 앞선 자가 죽고 뒤에 오는 적군이 쓰러져 쌓인 시체가 언덕을 이루었다. 사격을 시작한 지 약 20분간에 적의 사망자가 300여 명이라. 적은 자기 병사가 많음을 믿고 아군에 대항할 때 적의 기병중대(1소대원)는 아군의 측면을 위협하고 보병과 포병은 소총과 기관총으로 효과 없는 사격을 아군의 정면에서 맹렬히 하여 위협적 행동을 하나 자연 지형이 유리함으로 아군은 조금도 피해가 없으니 사기 왕성하여 좌우 전방으로 침습하는 적을 대항할 때 측면에서 무익한 동작을 하려는 적의 기병을 격퇴하며 정면에 있는 다수의 완강한 적을 맹렬 과감하게 대항하니 통쾌 비참한 대전투가 되다. 이때 적은 지형이 불리하여 아군의 집속사격을 받는 중에 적군과의 거리는 불과 200미터라. 적은 각 방면에 산재하였던 부대가 집중 증가되어 최종에는 아군 5배 이상의 병력이 된지라. 이어서 우리 여행대는 적의 수색 기병부대를 격멸한 후 우리의 본대에 집합하고 아군 제2연대도 예비의 점위한 최고표고로 물러나 일제히 맹렬한 집속사격을 행하니 적은 놀라던 중 분개하여 산포기관총으로 효과없는 사격을 위협적으로 맹사했으나 아군의 피해는 전혀 없으므로〈欄外에〉1

아군의 기세는 더욱 왕성하더라. 오전 4시부터 시작된 전투가 오후 5시까지 격렬히 치러졌는데 점점 날이 저무는 중 적병은 불리함을 스스로 알고 어랑촌 부근으로 퇴각하나 아군은 식량이 원만치 못하여 배고프고 피곤하여 맹진격 격투하여 적병을 여지없이 전멸시키지 못하고 도리어 왕청으로 아군도 퇴각하다.

(3) 피아의 손해
적의 전사자가 500여 명이고 부상자는 부지기수며 아군은 부상자만 5인이다. 우리가 얻은 군 노획물은 기총 30정, 기총 탄약 약 5천발, 말 20필, 군도 20자루, 망원경 5개, 시계 20개이었다.

대한군정서 보고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 총재 서일(徐一)로부터 1월 15일 우리 대본영(大本營)에 도착한 보고에 의하면 그 경과 상황이 아래와 같다.

1. 전투 전후 아군의 정황
대한군정서는 민국 2년(1920) 2월 초부터 사관연성소(士官鍊成所)를 중국 영토 왕청 십리평의 삼림 속에 개설하여 지난 9월 9일에 제1회 졸업식을 행하고(졸업생 298인), 한편으로 보병을 모집하여 조련을 실시하더니 적의 강경한 교섭으로 인하여 중국 육군의 출동이 두세 번에 이르러 독립군의 해산을 독촉하니 대한군정서는 부득이 영사(營舍)를 버리고 각 병종(兵種)으로 전투 서열을 정해 남진하다.

화룡현 삼도구 청산리 또는 이도구에서 적군과 전투를 벌여 많은 적의 장병을 살상하면서도 다행히 아군의 사상자는 매우 적다.

아군은 맹렬한 전투를 치르고 장병이 모두 피로하던 중에 적은 다시 왕청 대황구와 습자구에 주둔하였던 보병대와 기병대의 병력을 철수하여 천보산 이남으로 집중하니 그 기세가 왕성하다.

그러므로 아군은 이에 여러 부대로 나누어 1대는 전투지 부근에 머물며 전장 정리와 적 정보 수색에 종사케 하고 혹은 소로(小路) 혹은 ○○○小路로 ○○를 거쳐 ○○으로 향해 나아가고 1대는 낮엔 잠복하고 밤에 행군하며 ○○을 거쳐 ○○○○○○○로 바로 나아가니 당시 날씨가 매우 추운데 따뜻한 옷도 입지 못하고 두터운 양말도 신지 못한 그 정경은 정말로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다.

부득이 ○○○○ 이북을 향해 한편으로 군인의 추위와 굶주림을 면하며 한편으로 각 부대의 집중을 꾀하니 먼 부대는 수천 리 가까운 부대는 8, 900리 되는 서로 벽지에 위치한 군대의 집결이 어찌 쉬웠으리오. 그런 중 ○○○○은 우리 한인 촌락이 매우 보잘것없어 능히 수백 명의 의복과 양식도 공급할 수가 없는바 부득이 ○○ 방면으로 점차 행군중이며 서·북간도의 각 군단은 태반이나 이곳에 집합하여 상호 연합으로 일치 행동을 하게 되니(각 군단을 합하여 ○○○○인) 병력의 점차 커짐과 군심(軍心)이 더욱 단단해짐은 족히 제2회 결전이 기대되더라.

2. 청산리와 천수동 부근 전투상황
이는 본보 제88호(1920.12.25.) 제4면에 게재한 전투정보 중에 있는 것과 큰 차이가 없으므로 여기에 이것을 생략함

3. 적군과 아군의 사상(死傷)과 아군의 전리품
(1) 적의 사상자
사망자―연대장 1인, 대대장 2인 기타 장교 이하 1254인(적들끼리 격살자 500여 인)
부상자―장교 이하 200여 인

(2) 아군의 사상자와 포로
사망자 1인, 상이자 5인, 포로 2인

(3) 아군의 전리품
기관총 4정, 소총 53자루, 기병총 31자루, 탄약 5천 발, 군도 5자루, 나팔 2개, 말안장 31개, 군용지도 4부, 팔목시계 4개, 기타 피복 모자 담요 도낭휴대천막 군대수첩 등속 약간

4. 참전장교[經戰將校]

사령부 사령관 김좌진
사령부 참모부장 나중소(羅中昭), 부관 박영희(朴寧熙)
연성대장(硏成隊長) 이범석(李範奭), 동 종군장교 이민화(李敏華) 김훈(金勳) 백종렬(白鍾 烈) 한건원(韓建源)
대대장서리 제2중대장 홍충희(洪忠憙)
제1중대장서리 강화린(姜華麟)
제3중대장 김찬수(金燦洙), 제4중대장 오상세(吳祥世)
대대부관(大隊副官) 김옥현(金玉玄)
소대장 신희경(申熙慶) 강승경(姜承慶) 채춘(蔡春) 김명하(金明河) 이후출(李詡朮) 정만수(鄭冕洙) 김동섭(金東爕), 소대장서리 이운강(李雲岡)
기관총대 소대장서리 김덕선(金德善) 최인걸(崔麟杰)
제1중대 특무정사(特務正士) 나상원(羅尙元)
제3중대 특무정사 권중행(權重行)

5. 적군과 아군의 승패 이유
이번 전투에 온갖 승산이 있는 적은 어째서 도리어 대패를 초래하였으며 온갖 준비가 부족한 아군은 능히 전승을 거두었는지 이를 약술함.

적의 실패 이유
(1) 병가(兵家)에서 가장 꺼리는 적을 가볍게 보는 행위로 험한 산림을 별로 수색도 없이 경계도 없이 무턱대고 나아가다가 항상 일부 혹은 전부의 함몰을 당함이며 (2) 국지전술에 대한 경험과 연구가 부족하여 삼림과 산지 속에서 종종의 서로간의 충돌이 생겨났으며 (3) 일본 군인의 전쟁을 싫어하는 마음과 목숨을 건지려 도주하는 비겁하고 나약한 마음은 극도에 달하여 군기가 문란하며 사격술이 정밀하지 않아 일발의 효과도 없는 난사를 행할 뿐이더라.

아군의 전승 이유
(1) 생명을 돌아보지 않고 용감히 떨쳐 일어나 싸우고자 하는 독립에 대한 군인정신이 먼저 적의 기개를 압도함이오 (2) 양호한 진지를 선점하고 완전한 준비로 사격성능을 극도로 발휘함이오 (3) 임기응변의 전술과 예민 신속한 활동이 모두 적의 의표를 찌름이라.

오호라 3일간 전투에 군량 보급로가 모두 끊어졌지만, 대여섯 덩이의 감자로써 허기진 창자를 겨우 채우고 한낮과 한밤에 능히 150여 리의 험산밀림을 통행하되 추호도 지치지 않고 전투 후에 또한 수천 수백 리 눈덮힌 삼림을 통과하여 동상(凍傷)에 걸린 자가 적지 않아도 조금의 원망도 없음은 참으로 독립의 장래를 위하여 희망하는 바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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