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녹두장군’ 전봉준은 왜 좌감옥(左監獄)에서 최후를 맞이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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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비망록 94]

‘녹두장군’ 전봉준은 왜 좌감옥(左監獄)에서 최후를 맞이했을까?
근대시기 이후 사형제도의 변경과 처형장의 공간 변천사

이순우 책임연구원

이번 호를 끝으로 ‘식민지 비망록’은 막을 내립니다. 2015년 5월 「위문대의 시초는 일본군 위문용」을 시작으로 8년여 동안 94회를 연재해왔습니다. ‘식민지 비망록’은 이순우 책임연구원의 제안으로 글감을 다양화하고자 10월호부터 ‘이 땅에 남아있는 저들의 기념물’이란 코너로 바뀝니다.(필자는 그대로입니다) 일제 강점기 일본인이 만든 건축물이나 기념비 등에 얽힌 사연을 소개할 예정입니다. 이제껏 한 호도 거르지 않고 좋은 글을 집필해준 이순우 책임연구원의 노고에 고마움을 표하고 새 코너에 대한 후원회원들의 꾸준한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 편집자 주

군기시 앞길(軍器寺前路, 무교), 철물전로(鐵物前路, 종로 철물전교 앞길), 서소문 밖 큰길(西小門外 通衢), 모화관 앞(慕華館前), 당현(堂峴, 당고개), 청파 앞길(靑坡前路), 노량사장(露梁沙場, 새남터), 만천평(蔓川坪), 양화진 나루터(楊花津頭) …….

여기에 나열한 곳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효수(梟首)를 하거나 처형장(참형 또는 교형)으로 사용된 대표적인 공간들이다. 가만히 살펴보면 이러한 처형장은 대개 서울 도성의 서쪽 일대에 몰려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와 관련하여 우선 『서경(書經)』, 하서편(夏書篇) 감서(甘誓)에 “명을 따르면 ‘조’에서 상을내릴 것이고, 명을 따르지 아니하면 ‘사’에서 죽이며 내 너희를 노륙(孥戮; 처자식까지 함께 처형하는 것)할 것이니라[用命 賞于祖 不用命 戮于社 予則孥戮汝]”라고 한 구절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여기에서 ‘조(祖)’는 종묘(宗廟)를 말하며 ‘사(社)’는 사직(社稷)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그리고 『주례(周禮)』 고공기(考工記)에 일컫기를 “좌조우사 전조후시(左祖右社 前朝後市; 왼쪽에 종묘, 오른쪽에 사직, 앞쪽에 조정, 뒤쪽에 장시를 두는 배치 원칙)”라고 하였는데, 이에 따라 행형(行刑)이 이뤄지는 사직은 오른쪽, 즉 서쪽에 자리하는 것이 통례이다. 처형장이 도성의 서쪽 지역에만 두루 포진한 것은 바로 이러한 연유이며, 더구나 서쪽은 ‘숙살(肅殺; 쌀쌀하고 매서운 가을 기운이 초목을 말라 죽게 한다는 뜻)’의 방위(方位)이므로 그 뜻에도 마땅히 부합하는 것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이들 가운데 사육신(死六臣)이 환열(轘裂, 거열)을 당한 곳으로도 유명한 군기시 앞길은 예로부터 처형장으로 가장 널리 사용된 공간이고, 그 다음으로 ‘서소문 밖’은 근대시기에 가까워질수록 사용빈도가 부쩍 늘어난 장소로 확인된다.

그런데 근대시기에 이 땅에서 살았던 서양인들이 남겨놓은 기록을 뒤적이다 보면 간혹 꽤나 섬뜩한 장면을 마주할 때도 있는데, 예를 들어 『더 코리안 리포지토리(The Korean Repository)』1895년 2월호, 79쪽에 채록된 다음과 같은 내용의 단신기사가 바로 그것이다.

1월 22일(음력으로는 12월 27일로 환산), 우리는 서소문 밖에 두 동학(東學) 지도자들의 머리가 효수(梟首)되어 있는 곳을 지났다. 늘어놓은 전체 숫자는 넷이었으나 우리는 단지 둘만 보았다. 이들은 전라도 지역에서 처형되었고, 머리만 전시와 모멸을 위해 서울로 옮겨왔던 것이다. 이것들은 머리카락으로 삼각대에 묶어 놓았으며, 바닥에서 대략 3피트 높이였다. 이러한 끔찍한 광경이 있고나서, 그 다음날 관보(官報)에서 참형(斬刑)과 다른 야만적인 처형 방식이 철폐되었다는 소식을 읽게 된다는 것은 기운이 나게 하는 일이다.

여기에 나오는 광경은 청일전쟁 당시 우리나라를 처음 찾았던 영국인 여행작가 이사벨라 버드 비숍(Isabella Bird Bishop, 1831~1904)이 남긴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rs)』 Vol. 2(1898), 24쪽 부분에도 거의 같은 내용의 목격담으로 등장한다. 이와 관련하여 『관보(官報)』 개국 503년(1894년) 12월 25일자(음력)에 수록된 순무영(巡撫營)의 초기(草記)에 따르면 서소문 밖에 효수된 것들 중에 동학농민군의 지도자인 김개남(金介男, 1853~1894)의 수급(首級)이 포함된 것은 확실한 듯하다.

순무영이 초기하였는데, 비적의 괴수 성재식, 최재호, 안교선은 당일 남벌원에 효수하여 경계시켰고, 김개남의 베어낸 머리는 서소문 밖의 거리에 달았다가 3일이 지나 김개남과 성재식의 수급을 경기감영으로 하여금 소란이 일어난 지방에 돌려보이게 한다는 일이다(巡撫營草記匪魁成載植崔在浩安敎善當日南筏院梟警金介男査馘西小門外懸街三日後介男載植首級令畿營傳示於作擾地方事).

하지만 이들 수급의 정체가 정확하게 누구의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이 당시의 장면을 직접 사진으로 담아낸 일본인 사진사 무라카미 코지로(村上幸次郞, 무라카미 텐신)가 『메자마시신문(メザマシ新聞)』 1895년 2월 8일자에 남긴 관련 기고문에 “조의문(照義門, 소의문의 착오) 밖 광마장 중앙(廣馬場 中央)에 …… 최(崔; 최재호)의 머리를 위쪽에, 안(安; 안교선)의 머리를 아래로 하여 그림과 같이 촬영하였다”고 적어놓았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한 가지 상황이 묘하게 바뀐 점은 이들에 대한 참형과 효수가 실행되고 불과 이틀이 지나서 이방인들의 눈에 야만적이라 일컬어지던 참형제도가 완전히 폐지되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이에 대해 『오사카매일신문(大阪每日新聞)』 1895년 2월 2일자에 게재된 「참살 효수를 폐함(斬殺 梟首を 廢す)」 제하의 기사는 이러한 조치가 당시 법무아문대신(法務衙門大臣)이던 서광범(徐光範, 1859~1897)에 의해 이뤄진 것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 이후 1898년 9월 11일에 아관파천 시기 러시아공사관 통변(通辯)으로 득세했다가 몰락 위기에 처한 김홍륙(金鴻陸)이 무엄하게도 독차음모사건(Coffee Poisoning Plot; 커피에 아편을 풀어넣어 황제를 모해하려던 사건)을 벌인 것을 계기로 참형(斬刑)과 노륙(孥戮)의 형벌을 되살려야 한다는 논쟁이 거세게 벌어지기도 했다. 이러한 영향 탓인지 실제로 1900년 9월에는 황실국사범에 한해 ‘참형 제도’가 한때나마 부활되었으며, 그러다가 1905년 2월에 이르러 법률 제3호 「형법(刑法)」의 제정과 더불어 다시 영구 폐지되는 과정이 이어졌다.

아무튼 이러한 사형제도의 개혁 때문에 ― 참수와 효수의 형벌을 받은 김개남, 성재식, 최재호, 안교선등의 동학지도자들과는 달리 ― ‘녹두장군(綠豆將軍)’ 전봉준(全琫準, 1855~1895)의 경우에는 ‘교형(絞刑)’의 방법으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이에 관해서는 『관보』 개국 504년(1895년) 3월 29일(음력) 기사에 다음과 같은 흔적이 남아 있다.

법무대신(法務大臣)은 …… 또 상주(上奏)하기를 비류(匪類)의 전봉준(全琫準), 손화중(孫化中), 최경선(崔慶善), 성두한(成斗漢), 김덕명(金德明) 등을 신(臣)의 아문(衙門)으로 나수구신(拿囚究訊)하와 정절(情節)을 자복(自服)하온 고(故)로 「대전회통 추단조(大典會通 推斷條)」에 군복기마 작변관문(軍服騎馬 作變官門)을 조(照)하와 교형(絞刑)에 처(處)하옵나이다. 봉지의윤(奉旨依允; 윤허하신 대로 명을 따르나이다).

그리고 『모지신보(門司新報)』 1895년 5월 12일자에 수록된 「전봉준 사형 선고의 실황」 제하의 기사에는 1895년 4월 24일(음력 3월 30일)에 시행된 전봉준의 처형장소가 ‘좌감옥’이었다는 사실이 채록되어 있다. 여기에 나오는 ‘좌감옥’은 갑오개혁의 와중에 좌우포도청(左右捕盜廳)을 합설하여 ‘경무청(警務廳)’이 신설되고, 여기에 다시 전옥(典獄)을 경무청에 부속시키면서 ‘우감옥’과 더불어 이때 함께 생겨난 감옥의 명칭이다.

4월 23일 오후 4시를 조금 지나 권설재판소(權設裁判所)에서 전봉준은 마침내 사형선고를 받았고, 다음날 오전 2시쯤 좌감옥(左監獄)에서 교죄(絞罪)에 처해졌다.

한편, 좌감옥의 위치에 대해서는 우선 『독립신문』 1896년 6월 6일자에 “6월 2일 경무중서가 그전 좌포청으로 반이하였다더라”는 내용의 기사가 남아 있는 것에 주목이 된다. 또한 경무사 김재풍(警務使 金在豊)이 1897년 2월 8일자로 발신한 「제3호 보고(第三號 報告)」에 “…… 구 중서기지(舊中署基址)는 즉(卽) 전 좌순청관사(前左巡廳官舍)이온데 협착퇴락(狹窄頹落)하와 불감용접(不堪容接)이온 고(故)로 전 좌감옥서(前左監獄署)로 이접(移接)할 시(時)에 …… 운운”하는 구절이 포함된 것이 눈에 띈다. 따라서 이들 내용에 비춰 보건대 경무중서(警務中暑)가 옮겨간 ‘좌감옥’은 곧 ‘옛 좌포도청 자리(묘동 59번지, 지금의 종로 119안전센터 구역)’에 해당한다는 사실이 입증된다.

근대시기 감옥서와 관련한 공간 변천 연혁

근대시기 정치사회적인 격변기에 있어서 ‘좌감옥’의 존재가 특히 두드러진 까닭은 이곳이 바로 유일한 사형집행장소(교수형)였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실제로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정리한 『각사등록 근대편(各司謄錄 近代編)』 「사법조첩(司法照牒)」에 수록된 ‘한성재판소(漢城裁判所)’의 보고서 자료를 취합해 보면, 이 당시 사형죄수에 대한 처교(處絞) 장소가 한결같이 ‘좌감옥서’ 또는 ‘전(前) 좌감옥서’로 표기되어 있는 점이 잘 포착된다.

심지어 『독립신문』 1896년 5월 2일자에 수록된 기사 한 토막에는 “이달 11일에 ‘좌우 감옥소’와 거기 있는 죄인들을 서소문안 그전 선혜청 대동아문으로 옮기더라”는 내용이 남아 있는데, 여기에서 보듯이 좌우 감옥을 합쳐 소의문 안쪽에 새로 지은 감옥으로 옮겨간 이후에도 사형의 집행은 여전히 ‘옛 좌감옥 자리’에서 이뤄진 것으로 확인된다. 그렇다면 이것은 과연 무슨 까닭이었던 것일까?

이에 관한 해답은 『각사등록 근대편』 「사법품보(司法稟報)」에 수록된 의정부찬정 내부대신 이건하(議政府贊政 內部大臣 李乾夏)의 1899년 4월 26일 발신 ‘조회 제9호(照會 第九號; 감옥서 교수대 설치의 준공에 관한 건)’를 통해 찾아낼 수 있다.

경무사 원우상(警務使 元禹常) 제51호 보고(報告)를 접(接)한즉 내개(內開)에 감옥서(監獄署)에 교대(絞臺)를 금기준역(今旣竣役)하였삽기 자(玆)에 보고(報告)하오니 조량(照亮)하오셔 전조법부(轉照法部)하심을 요(要)함. 등인(等因)이옵기 자(玆)에 앙조(仰照)하오니 조량(照亮)하심을 위요(爲要).

이를테면 1896년 5월에 서소문감옥이 새로 생겨난 이후에도 어찌 된 영문인지 ‘교대(처형장치)’를 그쪽으로 옮겨가는 일은 차일피일 미뤄지다가 거의 3년이나 지나서야 겨우 이전공사가 마무리 되었다는 소식이었다. 물론 그 사이에 ‘교대’를 옮겨가려는 시도는 몇 차례 있긴 했지만 말이다. 이에 따라 참형이 폐지된 1895년 1월 이후 1899년 4월의 시점에 이르기까지 그 기간에 집행된 교수형은 모두 옛 좌감옥 터에서 이뤄지는 상황이 이어졌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동학의 제2대 교주인 최시형(崔時亨, 1827~1898)에 대한 교형(絞刑)이 집행된 곳이 ‘옛 좌감옥 자리’였던 것도 바로 이러한 연유이다. 다만, 『신인간(新人間)』 1927년 7월호(통권 제14호)에 게재된 조기간(趙基栞)의 글 「해월신사(海月神師)의 수형 전후 실기(受刑 前後 實記)」에는 “1898년 7월 20일에 ‘육군법원’에서 교형을 당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1927년의 시점에서 관행적으로 굳어져 있던 해당 공간의 명칭을 사용했던 탓으로 풀이된다.

여기에 언급된 ‘육군법원’ 역시 옛 좌감옥 자리를 가리키는 또 다른 표현방식의 하나일 뿐이었던 것이다. 요컨대 전봉준과 최시형은 서로 체포된 시기와 수감된 장소는 달랐으나 결국 최후를 맞이한 처형대만큼은 동일한 공간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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