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기]
항일무장투쟁 유적지 간도(間島)를 가다
김재광 경기 북부 후원회원
DMZ 녹슨 철조망 앞에서 대륙으로 달리는 꿈을 꾸다
지난 4월 29일 민족문제연구소 경기북부지역위원회에서 주최하고 연천지회에서 주관한 ‘정전협정 70주년기념 연천평화기행’이 진행되었다. 허리 잘린 한반도 DMZ를 사이에 두고 7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남북의 청년들이 총부리를 겨누고 대치하고 있는 이 비극의 현장 연천군 태풍전망대를 견학하고 분단된 조국의 뼈아픈 현실 앞에 가슴이 조여드는 심정은 평화를 사랑하는 국민이면 누구나 느끼는 감회일 것이다. 말없이 남북을 흐르는 임진강은 알아주려나…
무거운 짐을 가슴에 안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동행한 이진선이 본인 소개 시간에 홍보한 ‘항일무장투쟁유적지 간도를 가다’ 역사탐방 프로그램을 듣고 “북녘땅이 아니면 어떠랴! 북중 국경을 가보고 싶다”는 꿈을 품게 되었다. 5박 6일 역사탐방에 참여하려면 여러 가지 난관이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아내의 허락을 받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역사탐방에 동행한 동지 박충식이 함께 가자는 강력한 권유에 이끌 려 용기를 내서 아내에게 허락을 받고 결정하니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이번 역사탐방을 통해서 보고 느끼고 싶었던 것이 있었다.
첫째, 윤석열 보수정부가 취임한 후 1년 남짓한 기간 동안 북중러 관계가 노태우 정권에서 추진한 북방외교의 성과인 한중·한소 수교 전보다 더 분위기가 냉각되어서 북중러 국경을 맞대고 있는 ‘옌벤조선족자치주’를 중심으로 살고있는 조선족의 감상을 알고 싶었다.
둘째, 북중러 삼국 접경지 훈춘시 방천풍경구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두만강의 현재 모습과 동해를 친견하고 싶은 꿈과 단둥에서 바라보는 압록강 너머 북녘땅을 조망하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셋째, 한민족과 한반도 역사의 발원지 백두산을 친견하고 싶은 꿈을 이루겠다는 희망이었다.
북중러, 북중 변경에는 DMZ와 분단은 없었다
7월 25일 첫날 탐방지 연길공항에 착륙하자 이곳이 조선족자치주라는 느낌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고, 다민족으로 이루어진 중국이 얼마나 소수 민족의 화합과 단결을 위해서 신경 쓰고 있는지를 중국 간체자와 한글로 쓴 문구 “여러 민족이 단결 진보하고 변강이 번영 안정된 소수민족자치주를 건설합시다.”를 통해서 가늠할 수 있었다.
현지 가이드의 안내로 버스에 탑승하고 훈춘으로 가는 첫 여정을 시작하였다. 훈춘시 방천풍경구관광센터까지 가는 버스 안에서 이번 역사탐방을 주최한 간도학교 최연 선생으로부터 전체적인 일정과 현재 한중관계의 경색으로 인하여 발생할 수 있는 주의사항과 대처방안을 듣고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면서 창밖을 보니 저 멀리 두만강이 희미하게 보이는 것이었다. 선친이 소주 한잔 하시면 부르시던 ‘눈물 젖은 두만강’을 직접 눈으로 마주한 느낌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괜스레 선친이 생각나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뒤로 하고 동남쪽으로 버스는 무심하게도 달리고 있었다.
방천풍경구에 도착하여 10층 높이 전망탑에서 북한과 러시아를 연결하는 조러우호대교 밑으로 유유히 흐르는 두만강을 바라보는 나그네의 감정을 어찌 필설을 표현할 수 있으며, 백두산에서 발원하여 북중, 북중러 변경을 가로지르는 두만강을 빨아들이는 지평선 너머 동해를 바라보는 심정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으리오. 전망대 전시물 중 눈을 사로잡은 ‘동북아구역도’라는 지도 속 훈춘에서 속초 316 해리, 부산 480해리, 상해 928해리 항해거리를 통해서 동해로 가고 싶어하는 중국의 해양굴기를 느낄 수 있었다.
둘째 날 훈춘을 출발하여 투먼(도문)으로 가는 길을 재촉했다. 이번 탐방에서 가장 분주하게 이동해야 하는 여정(도문-봉오동전적지용정-청산리전적지-이도백하)이라 서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북한 남양시와 중국 도문을 연결하는 조중우의대교 아래로 흐르는 두만강은, 강폭이 좁은 곳은 백여 미터 미만이라서 갈수기와 동절기에는 걸어서도 충분히 월경이 가능한 지역이라고 판단되었다. 북중 변경에 월경금지 경고판과 철조망이 없고 두만강이 사이에 없으면 하나로 연결된 땅이라는 느낌이다. 그래서 이 지역을 간도라고 부르는 것일 것이다. 한반도와 대륙 사이에 있는 섬이라는 의미다. 중국인 관광객은 조중우의대교 너머 남양시를 바라볼 수 있는 변경선까지 자유롭게 가는데 우리 탐방단은 남한 국적이라서 갈 수 없다고 저지하여 강변에서 다리 넘어 북녘을 바라보는 심정은 복잡하였다. 뒤돌아 서면서 아리고 서러운 심정을 두만강 흐르는 강물에 띄어본다.
용정에서 한국인 윤동주 시인은 찾을 수 없었다
용정으로 가는 길에 항일무장투쟁 승전사의 서막 봉오동전투 유적지를 찾아갔는데, 현 한중관계를 보여주듯이 출구 철문은 굳게 닫혀있어 최연 선생으로부터 봉오동전투에 대한 해설을 듣고 봉오저수지와 봉오동전적지비 방향을 철문 밖에서 조망하면서 안타까운 마음을 가슴에 묻고 용정으로 발길을 돌렸다.
용정에 들어서니 말로만 듣던 해란강에 비친 햇빛이 “어서 오시라요. 반갑습네다”라고 손짓하면서 반갑게 맞아주는 것 같아서 마음이 들뜨고 ‘전국의 붉고 아름다운 마을 명동촌’ 문구와 함께 오성홍기와 볼셰비키혁명을 상징하는 낫과 망치의 심벌이 뚜렷한 이정표를 보면서 북간도 민족교육의 산실 명동촌을 처음으로 대면하였다.
명동촌 시인길 이정표를 따라 올라가니 윤동주생가와 생가터비를 만날 수 있었다. 그런데 비문에 ‘중국조선족애국시인 윤동주생가’로 판각되어 있어서 필자가 생각한 인식과 중국이 윤동주 시인을 인식하는 넘을 수 없는 벽을 발견하고 씁쓸함을 감출 수 없었고, 굳게 닫힌 대문으로 생가를 볼 수 없어서 담벼락 너머 생가를 보기 위해서 깨금발을 하고 올라서서 바라보는 탐방단의 뒷모습이 서글프고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윤동주 시인, 문익환 목사와 함께 명동촌이 낳은 또 하나의 별 송몽규 독립지사의 낡고 허름한 옛집을 우연히 발견하고 철문 틈으로 사진을 찍는 마음은 가슴이 아리고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굳게 닫힌 명동학교옛터기념관, 김약연 선생 석상을 사진에 담고 우울한 기분을 달래려고 산세를 조망하니 명동촌은 우리의 시골마을과 다르지 않게 누런 송아지가 누워있는 형상이었다. 이어 국가보훈부에 의해서 8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윤준희, 임국정, 한상호, 김강 애국지사 의거 ‘간도 15만원 탈취’ 현장에서 기념 촬영하고 1919년 3·1 혁명의 열기가 간도 용정까지 들불처럼 번져 3월 13일 대한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 순국한 애국지사의 능인 ‘3.13 반일의사능’ 앞에서 순국선열과 애국지사의 고귀한 희생에 묵념하는 마음이 숙연해졌다.
한중관계가 풀려서 탐방객들이 자유롭게 윤동주 생가와 명동학교기념관을 관람할 수 있기를 축원하면서 발길을 용정시로 돌리는데, 꼭 다시 와서 우리를 “잊지 말고 기억해 줘”라는 애국지사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되었다.
다시 용정시로 와 ‘연변침략일본죄증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룡정일본총령사관유적’ 기념관 2층 현관에 걸려 있는 현판 “력사를 거울삼아 경종을 울린다”는 문구를 통해서 중국이 일제를 대하는 역사관을 읽을 수 있어서 부러움과 부끄러움이 교차하는 감정이었다.
이상설 선생이 주도하여 건립한 대성중학교 옛터와 이상설 역사기념관을 굳게 닫힌 철문 너머로 보면서 무거운 마음을 안고 용정의 유래가 된 ‘룡두레우물’로 발길을 옮겼다. 복개로 인하여 지금은 우물 형태만 남은 룡두레우물에서 탐방단 일행과 기념사진을 담아본다.
일정상 일송정과 청산리전적지는 친견하지 못하고 버스 안에서 최연 선생의 설명으로 대처하고 발길을 이도백하 숙소로 이동하였다.
구름이 걷히고 백두산 천지가 눈앞에 나타나다
탐방 셋째 날 가장 보고 싶었던 백두산(장백산) 천지를 친견할 수 있다는 기대감에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하고 오전 6시 30분 이도백하 숙소를 출발했다. 아침 일찍 서두르는 이유를 최연 선생은 “관광객이 몰리기 때문에 서두르지 않으면 몇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고 설명했다. 또한 한민족에게 백두산은 경외감의 대상이듯이 청을 건국한 여진족과 중국측에게도 백두산은 신성시되고 있으며 특히, 청 태조 누르하치가 백두산 산군에서 출생하여 동북삼성 여진족에게도 신성시되는 장소라는 해설을 듣고 북파 주차장에 도착해 수많은 관광객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 광경을 보고 그 정서를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리 탐방단은 외국인이라서 두 번의 여권과 입장권 검표를 통과한 뒤에야 천지를 조망할 수 있는 북파전망대까지 이동하는 승합차에 오를 수 있었다.
한반도의 조산이며, 백두대간의 출발점인 백두산을 중국에서는 관광객 유치를 통해서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하고 자연 파괴는 아랑곳하지 않는 듯 북파전망대까지 도로를 뚫어서 관광객을 실어 나르는 승합차 행렬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선 광경을 보는 마음이 불편했었다. 천지에 오르는 마지막 주차장에 내리니 구름이 자욱하여 100미터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실정이라 걱정을 안고 주의사항과 1시간 30분 자유시간을 얻어서 오르기 시작하여 9시경 북파전망대에 도착했다. 이때까지도 구름이 걷히지 않아서 천지를 볼 수 없어 주어진 시간을 기다리면서 한마음으로 하늘에 축원하니 거짓말처럼 순식간에 바람이 거세게 불면 서 찰나의 순간에 백두산 천지 검푸른 물결과 반대쪽 북녘땅 천지를 친견할 수 있었던 순간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를 감동이 밀려왔다.
필자에겐 몇 가지 이루고 싶은 꿈이 있다. 그중에 하나가 한라에서 백두까지 한반도 등줄기 백두대간을 걸어서 백두산까지 오르고 싶은 꿈이다. 비록 이번에는 중국 땅을 밟아서 백두산 천지를 친견했지만 죽기 전에 반드시 우리 땅 한반도를 밟고 오를 수 있기를 바란다.
하산길에 바라본 만주벌판은 거리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아득했고, 저 만주벌판을 달리던 조상들의 위대한 대륙의 기상을 되찾기를 바라는 마음과 백두산은 어떤 나라도 독점할 수 없는 넓은 산군과 삼수(압록강, 두만강, 송화강)를 품고 있는 천하제일 갑산이라는 감회에 젖어본다.
다음 여정지 비룡폭포(장백폭포) 전망대까지 오르는 길은 온천수가 흐르는 물과 폭포수가 모여서 흐르는 계곡 좌우로 마천루처럼 솟아 있는 봉오리를 조망하면서 걷는 길은 한마디로 일품이었다. 전날 비가 내려서 그런지 비룡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줄기는 천하절경이라고 표현해도 손색이 없었고, 함께한 탐방단과 기념사진을 찍고 단체사진을 찍기 위해서 준비한 현수막을 펼치니 공안이 강력하게 저지하여 조금 소란이 있었지만 기념사진은 찍을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얼마나 중국이 민족주의 부활에 대해서 경계하고 두려워하는지 느낄 수 있어서 씁쓸함을 지울 수 없었다.
끊어진 압록강 단교와 평행선 조중우의교
탐방 넷째 날 비가 내리는 퉁화 숙소를 출발하여 ‘동북항일련군기념관’에 도착하였다. 일정상 관람은 못하고 기념관과 동북항일련군 조형물 앞에서 단체 사진을 찍고 단둥으로 발길을 돌렸다. ‘애국주의교육기지’ 글씨가 각인된 석비를 보며 이곳도 항일역사교육의 현장으로 이용하고 있는 중국 당국의 치밀함을 느낄 수 있었다. 퉁화에서 단둥으로 가는 길에서 고구려 초기 도읍지 졸본성을 감싸고 있는 오녀산성을 멀리서 조망할 수 있었다. 방향을 틀어서 압록강을 조망할 수 있는 도로를 따라 단둥으로 내려가면서 마주한 가두리양식장, 위화도, 동북공정을 통한 역사왜곡―만리장성의 시작이 산해관이 아니라 단둥까지 연결되어 있다는 주장―의 축성물 호산장성 보루와 대비되는 맞은편 북녘땅의 인적 없고 낡고 오래된 공동주택을 마주하는 마음에 궂은 날씨만큼 비가 내렸다.
압록강단교와 조중우의교가 보이는 호텔에 여장을 풀고 조중우호탑과 항미원조기념관을 관람하였다. 눈길을 끈 것은 조중우호탑 맞은편 광장의 중공군이 사용한 대공포, 탱크, 전투기를 보면서 아직도 전쟁의 상흔은 치유되지 않고 있다는 상념에 빠져본다. 우리의 용산 전쟁기념관처럼 어마어마하게 조성된 전시물과 입체조형물, 당시의 전투장면을 재현한 동영상을 통해서 역사교육 인식의 간극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중국공산당 수뇌부가 참석한 한국전쟁에 ‘항미원조’라는 명목으로 참전을 결정한 삽화 액자는 수많은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여전히 한국전쟁은 끝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말로만 듣던 압록강 유람선에 승선하여 압록강단교와 조중우의교 맞은편 북녘땅을 바라보는 감회는 무엇으로 표현할 수 없었다. 압록강 갈매기는 자유롭게 단둥과 신의주를 왕래하는데 우리 탐방단은 한반도를 관통하는 경의선을 타면 몇 시간 만에 올 수 있는 곳을 돌고 돌아 마주하는 심정은 깊은 심연으로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하선하여 끊어진 압록강단교를 걸어서 더 이상 갈 수 없는 끝까지 가서 탐방단과 기념사진을 찍고 ‘조국변경 압록강’ 표지석 앞에서 단체 기념사진을 찍으면서 남북중이 하루빨리 철도와 육로로 왕래할 수 있는 날을 기원한다.
저녁 후 자유시간을 이용해서 단둥 둔치를 돌아보면서 이곳은 우리나라 관광지와 별반 다르지 않게 뽑기, 풍선 터트리기, 링던지기 등 자본주의 풍조가 길거리를 뒤덮고 있었고, 길거리 노래방에서 즉석으로 버스킹이 벌어져 우리 노래 ‘걱정말아요 그대’, ‘남행열차’ 등이 단둥 강변에 울려 퍼졌다. 강 건너 북녘땅까지 전해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하나된 특별한 무대가 즉석에서 펼쳐지면서 단둥의 밤은 깊어만 가고 있었다.
여순감옥에서 대한국인 안중근 의사는 만날 수 없었다. 그러나…
탐방 다섯 번째 날 가랑비 내리는 단둥 숙소를 출발하여 압록강 하구 조중경제특구 황금평을 연결하는 ‘중조압록강대교’로 향했다. 물안개가 대교 아래를 감싸고 있는 강변은 신비스러운 기운이 느껴질 정도로 경외스러운 풍경이었다.
오후 1시 30분경 대련(다렌) 중산로―중국 건국의 아버지 손문 선생의 호가 중산이다― 원형 로터리에 도착하니 주변에 일제가 건설한 건축물과 러시아가 건설한 건축물이 옛 모습을 보존하고 있어서 이채롭게 느껴졌는데, 최연 선생이 대련이 러시아와 일제에 점령당한 아픈 역사의 유산이라는 해설을 듣고 이해 할 수 있었다.
대련을 지나서 이번 역사탐방의 목적 중 하나인 여순감옥 안중근 의사 순국지로 가는 길은 궂은 날씨만큼이나 마음이 무거웠다. 드디어 ‘여순일아감옥구지박물관’ 현판이 박힌 여순감옥에 도착하여 관람을 시작하였다. 위 박물관은 배치와 형식이 우리의 서대문형무소와 별반 다르지 않지만 1902년 러시아가 점령하여 건축한 감옥과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가 1907년 건축하여 1945년 8월 패전 때까지 사용한 감옥이 병립하고 있는 특별한 곳이다. 입구에서부터 수형자 호실, 감옥 구조, 고문틀과 고문기구, 역대 감옥소장 등이 차례로 전시되어 있는데, 특이한 것은 ‘옥중시초’라는 중국공산당 당원을 중심으로 강인한 투쟁의지를 밝힌 시를 전시해 놓았다는 것이다. 그중에 하나를 소개한다.
끓는 피 가슴 가득 솟아오르고
국권 회복 포부를 실현하지 못했네
당을 위해 달게 이 몸을 바치고
인광은 매일 밤 중국을 비추네
滿腔熱血涌心鬪
殘缺金甌志未酬
爲黨損軀甘一死
磷光夜夜照神州
또한 1936년 한해 동안 수형인 수가 3,148명이나 되었다는 전시물을 통해서 이곳이 얼마나 많은 중국 인민과 더불어 일제의 식민지배를 타도하기 위해서 투쟁한 우리 독립투사들이 옥고를 치렀을지 가늠하기 힘들다.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사형장에 들어서서 노모와 처자를 남겨놓고 절명 당하는 심정을 연상하니 눈시울이 붉어지고 심장에서 뜨거운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그런데 필자를 더 힘들게 한 것은 여순감옥에 전시되어 있던 안중근, 신채호, 이회영 애국지사 전시실만 굳게 문이 닫혀서 관람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현 한중관계의 경색된 분위기를 모르지 않지만 일제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 함께 투쟁한 애국지사들에 대한 도리가 아닌 것 같아서 씁쓸하고 비통한 심정을 감출 수 없었다. 쇠창살 사이로 애국지사를 뵙고 싶은 마음에 바라보는 탐방단의 마음도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출구 쪽에 관람 후 다짐을 기록하는 포스트잇이 수없이 붙어 있는데 그중에서 심금을 울리고 우리 아이들에게도 교훈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메시지를 소개한다.
“소년이 강하면, 나라가 강해진다!/역사를 마음에 새겨 국치를 잊지 말자/선열을 추모한다/중화를 진흥하라. 장주앙 2023년 7월 26일(간체자 번역)”
두 번째 여정지는 현재 여순구 구인민병원 경내에 있는 ‘여순일본관동법원구지’로 향했다. 전시실에는 중국 간체자와 한글로 해설이 잘 되어 있어서 불편하지 않게 전시물을 이해 할 수 있었고, 여순감옥에서 보지 못한 안중근의사 영정과 함께 전시된 수묵화–위국헌신군인본분, 국가안위노심초사등-와 ‘경천’ 액자를 읽으면서 가슴 뭉클하고 벅찬 감동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탐방객과 함께 영정 앞에서 참례하고 묵념을 올렸다.
1910년 2월 14일. 우리가 발렌타인데이라고 연인에게 초콜릿을 주는 이날 안중근 의사는 이곳 관동법원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전시실 안내원의 배려로 탐방단은 그 법정에 착석하여 ‘보보고’에서 제작한 DVD를 통해서 안중근 의사의 생애와 의거를 시청한 것은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을 것 같다.
세 번째 여정지 ‘여순박물관’, ‘관동군사령부구지’는 입장시간이 지나 내부는 관람할 수 없어서 사진으로만 기록을 남겼다. “관동은 산해관 동쪽 지역을 이르며 그곳에 주둔한 일본군을 관동군이라고 부르고 그 사령부가 여순에 설치되었다. 심양을 거쳐 봉천까지 이동하였고,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이듬해 만주국을 세우고 실질적으로 지배한 것이 관동군사령부”라고 최연 선생이 해설하였다. 이어 러일전쟁 최대 전적지 ‘백옥석탑’을 보기 위해서 백옥산을 오르는 동안 땀이 얼굴을 타고 흘렀지만, 석탑 광장에서 바라본 여순만의 풍경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보상이 되었다.
탐방 마지막 날에는 대련 성해광장에서 성해만대교를 배경으로 사진도 찍고 해변도로를 달려 마지막 여정지 러시아정구지(러시아인거리)에 도착하여 길거리 쇼핑도 하고 커피와 생과일 음료수도 한 잔씩 나누면서 헤어짐이 아쉬워 기념사진도 찍고, 숨 가쁘게 달려온 탐방의 여운을 뒤로 하고 인천공항으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자주독립! 평화통일! 실현되는 그날까지 걸음을 멈추지 않겠다
5박 6일간 진행된 ‘항일무장투쟁유적지 간도를 가다’ 역사탐방을 마치면서 간도독립투쟁의 역사와 지리인문학 교육을 쉽게 해설한 최연 선생과 이진선 인솔자 및 현지 가이드와 6일 동안 안전 운전해준 운전사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이번 탐방을 통해서 피상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두만강, 압록강 변경지역의 지정학적 중요성과 북간도를 중심으로 치열하게 전개된 항일무장투쟁의 역사와 그 속에서 이름도 남기지 못한 채 간도벌판에 뼈를 묻은 항일애국지사와 그 후손들의 삶을 단편적이나마 돌아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백두산은 우리의 강토이지만 한반도를 걸어서 갈 수 없는 땅이 된 뼈아픈 역사를 잊지 않고 남북 화해와 동북아 평화를 이루기 위한 길은 무엇인지 시야를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
이번 탐방을 끝으로 해군에 입대하여 독도를 처음으로 함상에서 마주한 이후 가슴에 품었던 독도 탐방의 꿈과 동북아 근현대사의 분수령이 되었던 청일전쟁-러일전쟁 그리고 일제침략과 국권침탈, 항일독립투쟁과 해방, 분단의 역사 현장을 돌아본 긴 여정을 마치면서 다음과 같은 소회를 담아본다.(중략)
탐방기를 마감하면서 남북, 해외 8천만 동포에게 전한다.
첫째, 진심으로 평화적 남북통일을 이루고 싶으면 또 다른 변경 두만강 하구에서 백두산천지 그리고 압록강 하구까지 걸어보시라.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DMZ에서 본 전쟁의 상흔과 분단의 비극을 뛰어넘는 통일의 길이 보일 것이다.
둘째, 제국주의 ‘서세동점’ 대전환기에 부국강병을 실현하지 못하고 외세에 의존한 조선이 어떻게 국권을 상실하고 36년간 통한의 식민지 시기를 보내야 했는지 잊어서는 안된다.
셋째, 120년 전 러일전쟁의 비극이 재현되지 않도록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이해를 조정하고 관리하는 ‘신조선책략’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다. 외교적 측면과 경제적 측면의 분리를 통한 유연한 접근과 상호 공존을 통한 평화통일의 길을 찾아야 한다. 북한의 핵무기 개발과 무력 시위는 북한 내부의 결속은 이룰 수 있겠지만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원하는 동포의 바람은 아니다. 7·4남북공동선언과 남북기본합의서 정신과 6·15선언과 4·27선언에 반하는 것임을 명심하여야 한다. 역지사지 입장에서 한미일 공조를 통한 핵자산 운용과 갈등 고조는 분단 리스크를 관리해야 할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고, 평화헌법 무력화를 통한 전쟁 가능한 국가를 획책하고 있는 일본의 전략에 이용만 당하는 하수의 전략임을 명심하여야 한다.
끝으로 현해탄을 넘어 일본에서, 남도의 끝 해남에서, 영남의 수부 대구에서 출발하여 비행거리 2,000km, 육상거리 1,700km를 동행한 역사탐방단 모든 참가자의 건강과 안녕을 기원하면서 다시 만난 날을 기약한다. 고맙습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