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전봉덕
해방 이후 80년 가까이 되도록 친일 청산이 성사되지 못했다. 이를 훼방하는 세력이 항상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윤석열 정권이 그 바통을 쥐고 있다. 친일파 백선엽을 띄우고 독립투사 홍범도를 폄하하는 윤석열 정권의 모습에서 그 세력의 노골적인 몸부림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런 노골성을 선구적으로 보여준 인물이 있다. 친일파 아무개보다는 헌병사령관이나 법사학자(法史學者)로 더 많이 기억되는 전봉덕이다. 일제강점기의 친일행위보다는 해방 이후의 친일청산 훼방에서 훨씬 혁혁한 기록을 세운 인물이다.
친일 경찰, 일제 패망 후에는 ‘친일 청산’ 훼방
전봉덕은 백선엽의 고향인 평안남도 강서군의 동쪽인 평양에서 태어났다. 출생 연도는 백선엽보다 10년 빠르다. 1910년 12월 12일이다. 22세 때인 1932년에 경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만주 펑톈(봉천)보통학교 교원이 된 그는 1934년 경성제국대학 예과에 들어갔다. 그런 다음, 1937년 경성제대 법문학부에 입학해 3년 뒤 졸업했다.
그의 인생이 친일의 궤적으로 접어들고 있음을 표상하는 상징적인 두 사건이 대학 졸업 1년 전에 있었다. <친일인명사전> 제3권 전봉덕 편은 “재학 중이던 1939년 10월 일본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에, 같은 해 11월 사법과에 합격했다”고 설명한다. 행정고시와 사법시험을 1개월 간격으로 통과했던 것이다.
그는 두 개의 ‘고문’ 시험에 합격한 상태에서 30세 때인 1940년 3월 경성제대를 졸업하고 조선총독부 내무국에서 수습 생활을 시작했다. 그런 뒤인 1941년 2월, 평안북도경찰부 보안과장으로 기용됐다.
1993년에 발간된 <친일파 99인> 제2권에 수록된 김무용 구로역사연구소 연구원의 기고문 ‘전봉덕: 화려한 경력으로 위장한 친일 경찰의 본색’은 “고등관 수습 기간을 거친 전봉덕이 바로 보안과장에 임명된 것은 다소 파격적인 승진이었다”면서 이렇게 설명한다.
“보안과장은 주임관 가운데 도의 이사관급에 해당하는 것으로, 고문 출신의 조선인 관료들에게 흔히 주어진 군수보다 한 등급 위의 자리였다. 당시 조선인 고문 출신자들이 수습 기간을 끝내고 나갔던 자리는 대개 군수였다. 전봉덕과 1939년 함께 고문 시험에 합격했던 이항녕과 윤길중도 각기 하동군수·무안군수로 임명되었다.”
1943년에 경기도경찰부 보안과장으로 전보된 전봉덕은 1944년에는 수송보안과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전시체제 하에서 경찰의 임무가 치안유지 외에 징병·운송·방공 등으로 확대”된 결과라고 위 사전은 설명한다. 이 상태로 그는 원치 않는 해방을 맞이했다.
전봉덕은 1940년부터 5년간 일제의 녹을 먹었다. 칙임관과 주임관으로 구성되는 고등관 타이틀을 달고 그 기간 동안 친일 재산을 축적했다. 그런데 그는 녹봉이 지급되지 않는 기간에도 일본을 위해 일했다. 일제 패망 뒤에, 일제 잔재를 지키고 친일청산을 저지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받은 것보다 훨씬 많이, 일본을 위해 A/S(애프터서비스)를 철저히 했던 것이다.
변신 또 변신… 아무런 단죄도 받지 않은 친일파
그는 일본이 물러간 뒤 미 군정 하에서 경무부 보안과장이 되고 경찰전문학교 부교장이 됐다. 전국적으로 친일 청산 열기가 뜨거워지고 이에 부응하는 움직임이 국회에서 활발해지던 1948년 하반기에 그는 경찰에서 군인으로 변신했다. 일반 경찰에서 군대 경찰인 헌병으로 탈바꿈했다.
이 변신은 친일 청산 좌절의 역사에서 중요한 한 페이지다. 일제 경찰은 친일파의 온상이었다. 빨갱이 잡는다는 명목으로 항일투사나 운동권 학생들을 탄압하던 집단이다.
이들은 1948년 정부수립 뒤에도 경찰의 중추를 이뤘지만, 그중 일부는 친일청산 열기를 피해 군에 입대해 헌병으로 변신했다. 전봉덕이 그 앞장에 있었고, 다른 경찰들이 전봉덕을 믿고 뒤를 이었다.
1948년 10월에 육군 고급장교반에 입교하고 12월 졸업 뒤에 소령으로 임관한 전봉덕은 1949년 3월 육군 중령이 되고 헌병사령부 부사령관이 됐다. 이것이 친일 경찰들에게 든든한 보호막이 됐다. 친일 경찰들은 전봉덕이라는 ‘모범 사례’를 믿고 헌병대로 숨어들었다.
전봉덕이 그곳에 숨어 있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이곳을 근거지로 삼아 반격에 나섰다. 친일청산을 추진하는 국회 반민특위와 그 조력자들을 빨갱이로 몰아 체포했다. 그 유명한 ‘국회 프락치 사건’을 주도한 수사본부장이 바로 그다.
약산 김원봉의 친구인 김약수 국회부의장이 빨갱이로 몰려 체포된 1949년 6월 25일, 전봉덕은 아래와 같은 거짓 담화를 발표했다. 6월 26일자 <조선일보> 2면 상단에 보도된 내용이다.
“오늘 아침 김약수 국회부의장을 체포하였으므로 이제 영장을 내린 자는 모조리 체포 수감되었다. 그러나 아직 일단락지은 것이 아니라 조사 진전에 따라서는 더욱 확대할지 모르겠다.
이들은 남로당원이면서 한민당의 탈을 쓰고 국회에서 자기 자신의 정견으로 활동한 것이 아니라 남로당 지령으로 파괴 공작을 꾀하고 왔든 것이다. 이 체포에 대하여는 군경이 합작하였으나, 이후의 죠사 및 처리 일체는 헌병사령부에서 하게 될 것이다.”
1949년 1월부터 본격화된 반민특위의 친일청산은 대통령 이승만의 훼방으로 차질을 빚다가 6월 3일 친일파 시위대의 반민특위 공격 및 6월 6일 경찰의 반민특위 습격으로 기가 꺾였다. 이런 상태에서 반민특위에 협조하는 국회의원들이 빨갱이로 몰려 체포됐다. 전봉덕이 이 수사를 지휘하면서 친일청산을 짓밟았던 것이다.
전봉덕이 담화를 발표한 다음 날, 백범 김구가 암살을 당했다. 독립운동 2라운드인 ‘분단 반대 및 남북통합’을 추진하던 김구가 육군 소위 안두희의 총탄에 쓰러졌다. 전봉덕은 이 사건의 수사도 주도했다.
안두희의 배후가 의심받는 상황에서, 그는 이승만의 전폭 지지 속에 수사를 주도했다. 그런 뒤 “단독 범행인 것 같다”라고 공식 발표를 했다. 꼬리 자르기에 나섰던 것이다. 친일 청산을 방해하고 제2의 독립운동에 대한 탄압을 은폐했다. 일제강점기 때보다 해방 이후의 악행이 훨씬 더했다고 봐도 과하지 않다.
전봉덕의 삶은 그 뒤로도 탄탄했다. 1950년 4월 군에서 제대하고 총리 비서실장을 지낸 뒤 변호사 개업을 한 그는 5·16 쿠데타 뒤에는 혁명재판사편찬위원이 되고, 12·12 및 5·17 쿠데타와 5·18 광주 학살 뒤에는 헌법개정시안 작성 소위원장과 평화통일자문위원회 상임위원을 지냈다.
그는 친일 경찰이나 헌병사령관보다는 법조인이나 법사학계 원로로 더 많이 기억됐다. 일제 때 그는 고등문관시험 행정과뿐 아니라 사법과에도 합격했다. 사법과에 합격한 이력을 기반으로 해방 뒤에 법조인 겸 법사학자로 활동했던 것이다.
그는 1969년에는 서울변호사회장과 대한변호사협회장이 되고 1973년에는 한국법사학회 회장이 되고 1978년에는 한국법학원 원장이 됐다. 친일경찰 및 친일헌병사령관의 성공적인 변신이었다. 위의 <친일파 99인>은 “그는 또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법사학계의 원로로 많이 알려져 있다”라며 “법학과 법사학 분야에서 고전적인 연구서를 많이 낸 바 있다”고 설명한다.
전봉덕은 일제 때의 친일행위뿐 아니라 해방 이후의 친일청산 저지에서도 혁혁한 성과를 기록했다. 그러나 아무런 단죄도 받지 않은 채 우리 사회의 원로로 기억되다가 1998년 5월 18일에 눈을 감았다. 그가 해방 이후에 하던 일은 그 뒤로도 계속 이어지면서 2023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금까지도 악착 같이 친일 및 일제잔재 청산을 훼방하는 세력이 우리 사회를 어지럽히고 있다.
김종성 기자
<2023-09-24>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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