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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3·1운동을 소재로 한 ‘조국’ 들고 복귀한 친일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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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유치진

일본이 조선왕조의 무능과 무지를 입증하고자 활용한 사례 중 하나가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쇄국이다. 프랑스의 침략을 막고(병인양요) 미국의 침략을 막은(신미양요) 대원군의 대외정책은 서구문화를 수용하지 못하고 옹졸함을 보인 조선왕조의 어리석음을 설명하는 근거로 활용됐다.

쇄국에 관한 그런 이미지가 일제 식민사관에 의해 형성됐으므로 곧이곧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는 우리 사회의 공감대 형성을 반영하는 일이 6월항쟁 7년 뒤인 1994년에 있었다. 그해 8월 31일 교육부는 ‘대구폭동’과 제주도 4·3사건을 ‘항쟁’으로 표기하자는 진보 진영의 의견을 배척하는 ‘국가교과서 편찬 준거 시안’을 발표하면서도, 쇄국과 관련해서는 바람직한 입장을 내놓았다. 그해 9월 1일 자 <동아일보>는 교육부의 방침을 이렇게 요약했다.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 중국·일본 등과 외교관계를 맺고 무역을 해온 조선 사회를 폐쇄 사회로 몰고가려는 ‘식민사관’이 도사리고 있다고 보고 당시 통상 방법이 위압적이었던 점에 착안, ‘통상 거부’로 기술키로 했다.”

흥선대원군의 쇄국은 이처럼 조선왕조의 멸망을 정당화하는 사례로 일제에 의해 채택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 막판에는 이것이 전혀 다른 방식으로 활용됐다. 이 시기에는 쇄국이 조선을 폄하하는 근거가 아닌, 미국에 대한 적개심을 부추기는 자료로 동원됐다.

일본은 1872년부터 양력을 사용했다. 1910년 시작된 일제강점기하에서 한국인들은 음력 명절을 고수했지만, 조선총독부는 양력을 강요했다. 하지만 한국인들은 명절을 쇨 때만큼은 태양의 주기가 아닌 달의 주기를 기준으로 했다. 그래서 총독부의 양력 강요는 식민지배 내내 벽에 부딪혔다.

일제 지배자들이 강조하는 양력 새해 첫날인 1944년 1월 1일, 식민지 한국의 대표적 문화공간인 서울 부민관에서 <무장선 셔먼호>라는 연극이 공연됐다. 1866년에 평양을 침공한 미국 선박 제너럴셔먼호의 이름을 딴 이 작품은 1871년 신미양요를 소재로 했다.

일본 군국주의의 관점에 맞춰 이 연극을 무대에 올린 인물은 지금의 한국인들에게도 잘 알려진 극작가 겸 연출가 유치진이다. 그는 조천석이 쓴 이 작품을 지금의 서울시청 옆인 서울시의회 청사 자리에서 현대극장과 약초가극단의 합동 공연으로 무대에 올렸다. <친일인명사전> 제2권 유치진 편은 이렇게 기술한다.

“유치진이 연출한 이 작품은 평양에 쳐들어온 미국 해군을 물리친 역사적 사실(신미양요)을 극화한 것으로, 일제가 강요한 배(排)미영 정책에 근거한 작품이었다.”

제2차대전의 일환으로 전개된 태평양전쟁 당시의 일본은 기존에 협력했던 미국·영국을 배척하고 이들과 전쟁을 벌였다. 그런 일본의 정책 기조에 편승해 식민지 한국인들의 반미감정을 부추기고자 유치진이 <무장선 셔먼호>를 부민관 무대에 올렸던 것이다.

다방면에서 친일 활동

▲ 극작가 겸 연출가 유치진 ⓒ 자료사진

유치진은 극작가나 연출가로 널리 알려졌지만, 처음에는 우체국 직원으로 시작했다. 을사늑약(을사보호조약) 이틀 뒤인 1905년 11월 19일 지금의 경남 통영에서 출생한 그는 4년제 보통학교와 체신원양성소를 거쳐 10대 중반에 통영우편소에 입사했다. 그랬다가 1921년 일본 유학을 떠나면서 극작가의 길로 나아가게 됐다.

도야마중학교와 릿쿄대학 예과(고교과정)를 거쳐 26세 때인 1931년 이 대학 영문과를 졸업한 그는 그해에 극예술연구회 창립 동인으로 참여했다. 창작·연기·연출·평론 등의 다방면에서 활약한 그는 초기에는 비참한 농촌 현실을 다루는 작품에 주력했다.

1935년 경부터 극예술연구회를 주도한 그는 각색과 연출을 맡은 <춘향전>을 크게 흥행시키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1936년 들어 단원 11명 탈퇴와 리더십 타격 같은 곤란한 상황에 직면했다. 뒤이어 1938년에는 식민당국의 명령으로 극단 이름을 극연좌로 바꾼 뒤 한층 심해진 리더십 문제로 단원들의 항명과 탈퇴를 지켜봐야 했다. 극연좌는 1940년에 해산됐다.

그랬던 그가 1940년 12월 조선연극협회 이사가 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제4-10권 유치진 편에 따르면, 연극을 통한 내선일체를 추구하는 조선연극협회는 총독부 경무과장의 지휘와 자금 지원하에 결성됐다. 이런 단체의 임원으로 가세한 것이 그의 연극 인생에 전환점이 됐다.

조선연극협회 이사 직함을 통해 전시체제 연극의 확산에 주력하게 된 그는 대학 졸업 뒤에 그랬던 것처럼 이때도 다방면에서 친일 활동을 수행했다. 위 진상규명 보고서는 창작·연출이나 기고 외에 조선연극협회·조선연극문화협회·영화기획심의회·조선문인보국회 등의 단체 활동을 통해서도 침략전쟁 및 강제징병 찬양에 가담했다고 기술한다.

그는 그것이 돈벌이와 연동되는 데도 주의를 기울였다. 극연좌 해산으로 타격을 입은 적이 있는 그는 평양 부호 박승호 등의 후원을 받아 현대극장을 창단하고 이를 매개로 친일 공연을 이어갔다.

또 식민권력을 관객 동원에 활용하기도 했다. 일본 괴뢰국인 만주국의 건국을 미화한 ‘흑룡강’을 1941년 6월 6일 부민관 무대에 올렸을 때는 총독부 산하인 매일신보사와 전시동원 기관인 국민총력조선연맹의 후원하에 서울 시내 학교와 회사원들을 관객으로 동원했다.

위 진상규명보고서에 인용된 <삼천리> 제13권 제7호에 따르면 사흘간의 공연에 동원된 관객은 1만 61명이었다. 그 시절에 한 장소에서 공연된 연극을 1만 명 이상이 관람했던 것이다. 이런 흥행을 발판으로 일본은 전쟁 수행에 필요한 인적·물적 자원을 뽑아내고 유치진은 자기 금고에 들어갈 돈을 축적했다. 일본의 전폭 지원과 재정 수입이 그의 리더십 문제도 어느 정도 해결해줬으리라 볼 수 있다.

유치진은 친일기관이나 다름없게 된 현대극장을 그룹 형태로 운영했다. 산하에 국민연극연구소와 이동연극보국대를 두어 친일 활동 겸 수익 사업을 확대시켰다. 이동연극보국대의 경우에는 산간벽지를 돌며 일제 침략전쟁을 미화했다. 단원들에게 무료 공연을 시켰을 리는 없으므로, 이 순회공연 역시 친일재산 축적에 상당한 도움이 됐으리라고 볼 수 있다.

해방 이후에도 계속 승승장구

▲ 1991년 3월 13일 자 <한겨레> 기사 “4월의 문화인물 유치진→김정호 문화부번복소동”은 당시 문화부가 극작가 유치진을 4월의 문화인물로 선정해 대대적 기념행사를 추진하던 중 그의 친일행각을 문제삼은 충무 문화 예술인들의 반발에 부닥쳐 인물을 바꾸는 소동을 빚었다고 보도했다.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그렇게 왕성하게 활동하던 유치진은 1945년 8·15 해방 뒤 은둔 생활 모드로 들어갔다. 그랬다가 얼마 뒤 새로운 작품과 함께 복귀했다. <친일인명사전>은 “해방 후, 1947년 2월경까지 은둔 생활”을 했다고 말한다.

1946년 10월에 반일·진보 진영이 미군정에 맞선 일으킨 대구 10월항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됐다가 그해 12월에 진압되면서, 친일·보수 진영이 종전보다 훨씬 유리해지는 양상이 나타났다. 이 시점에 그가 새 작품을 들고 세상으로 나왔던 것이다.

복귀작 제목은 <조국>이다. 3·1운동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그 뒤 <논개>와 <유관순> 같은 작품들도 출품했다. 8·15해방 이전의 행적에 개의치 않는 ‘의연함’을 보였던 것이다.

복귀 이후에 그가 새로 손잡은 파트너가 있다. 일제 시절, 리더십 부족으로 극단 경영에 어려움을 겪던 그는 총독부와 손잡은 뒤부터 연극계의 리더로 급부상했다. 정치권력과 손잡는 이 같은 행태가 1947년 2월 이후에도 반복됐다.

<친일인명사전>은 그가 “좌익 연극에 대한 미군정의 탄압 속에 우파 연극의 선봉”이 됐다고 설명한다. ‘블랙리스트’, ‘문화예술인 숙청’ 등을 떠올리게 하는 분위기 속에서 그가 다시 부각됐던 것이다.

이때 그는 미군정의 수요에 맞는 우파 연극인들을 결집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 결과, 미군정 지원하에서 한국무대예술원 초대 원장이 됐다. 이렇게 해서 1948년부터는 그가 남한 연극계의 주도권을 잡게 됐다.

해방 뒤 복귀작으로 <조국>을 내놓았지만, 그런 작품만 무대에 올린 것은 아니다. 일제치하에서 작품상을 받은 <대추나무>를 1957년에 <왜 싸워?>로 개작해 내보냈다가 비판을 산 적도 있다. <조국>을 내놓을 때의 불안과 긴장감이 이 시기에는 크게 이완돼 있었던 것이다.

일제 때는 침략전쟁에 편승하고 해방 직후에는 미군정에 편승했던 그는 한국전쟁 때는 반공을 강조하는 작품들을 만들어 냈다. 그런 기민함이 바탕이 되어 해방 이후에도 계속 승승장구를 이어갔다.

초대 국립극장장, 반공통일연맹 최고위원, 동국대 연극영화과 초대 학과장, 문교부 대학교수 자격심사위원, 전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초대 회장, 3·1문화상 심사위원, 한국극작가협회 회장 등이 그의 이력서에 들어갔다. 동시에, 예술원 예술상과 3·1연극상 등도 수상 경력에 포함됐다. 만 71세인 1974년 2월 10일, 지병인 고혈압으로 세상을 떠났다.

김종성 기자

<2023-10-29>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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