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김상진 열사의 뜻을 새기며 생명운동에 나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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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김상진 열사의 뜻을 새기며 생명운동에 나서다
-강석찬 후원회원(화성한과 대표)

방학진 기획실장

명절이면 어른들에게 보내드리는 선물 중 고급 한과 세트가 빠지지 않았다. 그러나 요즘은 소비 경향이 변하여 다양한 건강식품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래도 묵묵히 우리 한과를 만들며 생명운동을 실천하는 ㈜화성한과 대표인 강석찬 후원회원을 만나 보았다. 화성한과의 소재지는 이름대로 화성시 양감면에 있다. 대목인 설과 추석 명절은 일손이 부족해 밀려드는 주문을 채우기 어렵다고 한다.

“1985년 말에 결혼하고 농촌에 농사를 지으러 들어와서 한살림협동조합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친환경이나 유기재배 같은 인증이 없던 시기에 우리 땅을 살려 좋은 먹거리를 생산하고 건강한 식재료의 생산과 소비를 통해 생명운동을 실천하려는 움직임이 이제 막 움튼 시기라 쌀을 친환경으로 경작해도 수요가 따라주지 못하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래서 소비를 진작시키기 위해선 식품 가공이 필요하였고 그중에서도 우리 농업의 근간인 쌀을 이용한 가공제품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가공제품의 대부분은 정크푸드로 지탄을 받고 있지만 우리 전통식품은 원료 자체의 영양과 맛을 화학첨가제에 의존치 않고 살릴 수 있었기에 한과와 미숫가루, 떡과 조청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요즘은 한살림 외에도 많은 소비자협동조합이 있지만 40년 전에 그러한 생각을 가진 데에는 어떤 동기가 있었을까.

“시골생활을 한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서울내기로 1976년 서울대 농과대학에 입학했습니다. 입학 후 비로소 노동의 귀중함과 우리 농업의 중요성을 배웠습니다. 또 야학활동을 통해 인간에 대한 배려를 조금은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제 인생의 좌우명을 가슴에 새기게 된 동기는 서울 보성고등학교 선배이기도 했던 김상진 열사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엄혹한 유신정권에 대항하여 할복이라는 극한투쟁을 통해 자신을 바치셨던 선배님의 얘기를 입학 후 얼마 되지 않은 시기에 듣게 되었고 대학생활과 이후 귀농과 시민운동을 하는 현재까지도 매번 반성과 후회가 앞서지만 삶의 지표가 되고 있습니다.”

1975년 4월 11일 서울대 농대 잔디밭에서는 박정희 정권에 의해 구속된 학우 석방과 박정희 정권 성토대회가 열렸다. 성토대회 연단에 오른 축산과 4학년 김상진 열사는 <양심선언문>을 낭독 후 할복으로 정권에 저항했다. 이 의거로 인해 유신헌법 철폐와 정권퇴진을 요구하는 민주화운동이 더욱 거세졌고 정부는 급기야 5월 13일 유신헌법에 대한 일체의 언급이나 논의를 금지하는 긴급조치 9호를 발표했다. 김상진 열사의 장례식은 박정희 유신정권이 무너진 1980년 4월에서야 열사의 교정에서 거행되었다.

“더 이상 우리는 어떻게 참을 수 있으며 더 이상 우리는 그들에게서 무엇을 바랄 수 있겠는가?”로 시작되는 <양심선언문>은 “탄압과 기만의 검은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보라. 우리는 이제 자유와 평등의 민주사회를 향한 결단의 깃발을 내걸어 일체의 정치적 자유를 질식시키는 공포의 병영국가가 도래했음을 민족과 역사 앞에 고발코자 한다. 이것이 민족과 역사를 위하는 길이고 이것이 사랑스런 우리 조국의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길이며 이것이 영원한 사회정의를 구현하는 길이라면 이 보잘것없는 생명 바치기에 아까움이 없노라. 저 지하에선 내 영혼에 눈이 뜨여 만족스런 웃음 속에 여러분의 진격을 지켜보리라. 그 위대한 승리가 도래하는 날! 나! 소리없는 뜨거운 갈채를 만천하에 울리게 보낼 것이다.”로 마무리되고 있다.

근 50년이 지난 선언문이지만 어제 작성한 듯 요즘 우리나라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말았다.

초지관철(初志貫徹) 즉 사람이 처음 다짐한 뜻을 간직하면서 평생 한 길을 가는 데에는 이처럼 강렬한 자기만의 체험이 있어야 한다. 바로 강석찬 대표는 김상진 열사의 뜻을 가슴에 품고 초지관철, 용왕매진하는 삶을 살고 있었다. 따라서 강석찬 회원이 화성한과 외에도 여러 가지 활동을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모습처럼 보인다.

“제가 시작은 우리 농업 살리자는 농민운동에서 출발했지만 함께 사는 사회를 위해서는 환경운동, 생명운동으로 진화가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중앙집권화된 구조를 바꾸고 지역을 살려야 합니다. 우선 네 가지 정도가 마련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첫째, 교육의 문제로 기존의 정규 학교교육에서 해결치 못한 대안교육을 하기 위한 대안학교운동입니다. 현 상황에 맞춘 방과후 청소년대안학교인 그물코학교를 지역분들과 함께 만들고 운영합니다. 둘째, 복지와 돌봄에 대한 문제로 지역 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을 만들고 참여하고 있습니다. 셋째, 지역언론입니다. 잘못되고 왜곡된 언론은 건강한 시민활동의 장애물입니다. 강자의 논리가 아닌 약자의 편에 선 지역언론인 시민신문을 만들어 참여하고 있습니다. 넷째, 기후위기시대에 필요한 재생에너지운동을 위해 협동조합을 만들어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물코대안학교, 화성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화성시민신문, 화성시민햇빛발전협동조합 등등 이러한 단체들이 강석천 회원이 직접 주도적으로 관여하고 있는 단체들이다. 생각과 고민에 그치지 않는 그의 추진력을 확인하는 대목이다. 그러면 우리 연구소와는 언제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되었을까.

“지금은 화성한과가 화성시 양감면에 있지만 첫 시작은 화성시 매송면 야목리였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민족문제연구소 2대 이사장을 지내신 독립운동가 조문기 선생님의 집과 바로 지척이었더군요. 그동안 우리 사회의 여러 문제의 시작은 역사를 제대로 배우지 못함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던 중 2009년 11월 『친일인명사전』 발간 직후 친일청산문제에 헌신하는 민족문제연구소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연구소 후원회원 가입 이후 강석찬 회원은 2012년 식민지역사박물관 모금, 2014년 화성매송초등학교에 건립된 독립투사 조문기 선생 동상 모금에도 큰돈을 보내주었다. 또한 요즘에는 화성시에서 추진하려는 홍난파를 기념하는 화성근대음악관 반대 활동도 주도하고 있다.

다시 본업인 화성한과 이야기로 돌아가자. 강석찬 회원은 한과를 만들면서 몇 가지 원칙을 정했다. 1차 원료는 가급적 국산 유기·친환경인증 원료 사용이다. 친환경은 기후위기 시대에 탈탄소생산을 위해 햇빛·재생에너지 또는 재활용·재사용제품 사용, 화학첨가제 거부, 소비기한은 가급적 짧게 하여 생산 즉시 소비자에게 전달되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원칙을 정한 이유는 화성한과의 제품은 맛과 가격만의 상품이 아니라 생산자와 소비자의 얼과 정신이 만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서이다. 시대의 흐름에 맞게 컵라면처럼 즉석 떡국떡을 출시해 인기를 얻고 있지만 처음 세운 원칙을 결단코 굽히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하였다.

끝으로 연구소 후원회원에게 당부 말씀이 있다면

“화성한과는 가족단위로 오시어 전통음식 만들기 체험도 할 수 있습니다. 연구소 회원들이 가족들과 많이 오셨으면 좋겠습니다.”

화성한과 공장 외벽에는 ‘우리 맛 만듦 집’이라는 현수막이 붙어있다. 우리 맛뿐만이 아니라 우리 역사, 우리 환경, 우리 교육, 우리 동네, 우리 사람을 개선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 강석찬 회원의 치열한 활동에 열렬한 지지와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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