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조선의 잔다르크’ 김명시 지사 관련 신문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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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소개]

‘조선의 잔다르크’ 김명시 지사 관련 신문자료

이번 호에 소개할 자료는 ‘조선의 잔다르크’ ‘백마 탄 여장군’으로 칭송받은 김명시(金明時. 1907~1949) 지사를 다룬 신문자료이다. 김명시 지사는 경남 마산 출신으로 1933년 조선공산당 재건운동 혐의로 징역 6년을 언도받아 만기 출옥했다. 이후 만주로 건너가 화북조선독립연맹에 참가하고 조선의용군과 함께 일본군에 대항해 싸웠다. 8·15 해방 후 서울로 귀국하여 사회주의 입장에서 통일정부 건립 활동에 힘썼다. 김명시 지사는 뚜렷한 항일운동 공적에 비해 사회주의 계열이란 이유로 그에 대한 연구가 드물었고 일반인에게도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던 중 2018년 말 열린사회희망연대(김영만 대표, 창원 소재)는 김명시 지사의 항일운동을 널리 알리기 위해 흉상 건립과 표지판 제작을 추진했으며 2019년부터 독립운동가 포상 신청을 하였다. 첫 심의에서 불가 판정을 받았으나 ‘북로당 정치위원’이란 경력에 의구심을 제기하고 이에 대한 입증자료를 추가해 2021년 다시 서훈 신청을 하였다. 그 결과 정부는 2022년 8월 김명시 지사께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사후 73년 만에 이루어져 만시지탄(晩時之歎)은 있으나 참으로 다행한 일이라 하겠다.
다음에서 소개할 자료는 ①조선공산당 재건사건 때의 기사(매일신보 1932.8.29.) ②1945년 12월 중순 귀국 직후 가진 기자회견 기사(동아일보 1945.12.23. 국민보 1946.7.17, 7.24) ③국군준비대 전국대회에서의 축사(자유신문 1945.12.27) ④1946년 11월 인터뷰 기사(독립신보 1946.11.21.)이다. 김명시 지사의 생애에 대해서는 『민족사랑』 2017년 2월호에 실린 「비운의 여장군 김명시」를 참조 바람 ― 편집자 주

산대학 출신으로 반제동맹 부인부장, 밀사로 들어왔다 피체 김명시의 내력

국내 국외 수만리를 여자의 외로운 몸으로 비거비래(飛去飛來)하며 이 사건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 실행하는 일점홍(一點紅) 김명시(金命時)는 어떠한 여자인가? 그를 안다는 것은 한낱 호기심의 자극이 된다는 이상으로 실로 조선공산당 재건의 과정을 말하는 역사가 되는 듯한데 일언으로 그는 1928년 5월 당시 상해에 있어 중심인물의 하나이던 여운형과 함께 활개 치면서 대만공산당 결당대회에서 출석까지 하였었다는 것으로도 전표(全豹)를 짐작할 수 있는 여류 투사이다.

그는 경성 배화여고보 출신으로 1925년 고려청년회에 가입하여 마산 야체이카에서 제1보를 밟은 제1차 조선공산당 사건의 관계자로 같은 해 8월에는 단연 고국을 떠나 19세의 처녀의 몸으로 모스크바의 공산대학에 들어가서 사회과학과 전술을 배워 가지고 1927년 상해로 와서 중국공산당 한인지부에 가입하였는데 중앙부의 지령을 받고 재만 조선인 공산당을 합류시키고자 만주에 와서 활약하던 중 마침 광주학생사건의 자극으로 일본과 철저 항전하고자 아성현(阿城縣)에서 재만한인 반일제국주의자동맹을 결사하고 각지로 편답하다가 신변이 위험하자 다시 상해로 돌아왔었는데, 이제는 만주사변에 느낀 바 있어 반제동맹(反帝同盟)이 결사되자 부인부장(婦人部長)이 되어 활동하다가 이번 조선공산당 재건 때문에 또다시 그의 오빠와 함께 지난 3월 2일 중앙부의 밀사로 파견되어 안동현(安東縣)에서 연락지를 만들고 운동자금과 지령을 품고서 압록강 철교를 건너 신의주 부내 미륵동 박은형 방에 잠복하였다가 일로 경성에 올라갔다는 것이라 한다.

체포는 원봉수가 밀서를 품고 상해로 가던 중 우연히 체포된 데에 발단이 되어 지난 5월 3일 민봉근이 경성의전 병원 앞에서 평북 경찰의 손에 체포되자 김명시의 남매는 손을 맞잡고 도보와 승차로 신의주까지 와서 오빠 김형선은 무난히 탈주하였으나 김명시는 도주중 경의선 석하(石下) 역전의 어떤 농가에 잠깐 들렀다가 평북 경찰의 추격을 입어 마침내 체포되어 검거의 손길이 넓어졌던 것이라고 한다.(『매일신보』 1932.8.29.)

‘독립동맹은 임정과 협조’ 조선의 잔다르크 현대의 미랑인 연안서 온 김명시 여장군 담

연안독립동맹 영수(領袖)의 환국을 맞이하여 국내 통일 문제는 아연 활기를 띠고 있는데 무정장군 직할 지휘관으로 부하 2천명을 가지고 항일전에 활약하여 무훈을 세운 우리 조선의 잔다르크 현대의 미랑(美娘)인 연안독립동맹의 여장군 김명시 여사는 수일 전에 □□ 귀국하였는데 연안 소식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무정 동지와는 1929년 상해시대부터 교류가 있었는데 그 후 국민군에 참가, 전사의 소식을 듣고 추도까지 하였더니 어느새 팔로군에 참가하여 포병단장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동시에 독립동맹을 결성 연안에 본부를 두고 군정학교를 설치, 그 학교에서 양성을 받은 동지로 하여금 적구(敵區)에 나가 천진, 봉천 등지에 분맹(分盟)을 두고 지하운동을 하게 하였는데 주로 한 일은 지원병, 학병을 맞아들여 재교육하는 일이었다.

독립동맹 제3차 대회는 8월 29일에 소집 국제정세에 대응한 전투전략을 결정하려던 것이 일군의 투항이 의외□□ □□□□ □□ 주덕 동지의 동원명령으로 삼천리를 걸어 11월 3일 선발부대는 봉천에 도착하였다. 조선 사람은 친일파나 민족반역자를 제외하고 다 통일전선에 참가하여 한 뭉치가 되어야 한다. 독립동맹 측에서도 특별히 모나게 활동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동안 중경(重慶)에 있는 임정과의 연락은 장건상(張建相) 씨가 하였고 또 우리가 김구 주석을 초청한 일도 있었다. 일군 항복이 예상외로 빨랐기 때문에 그 후에는 연락이 두절되었다. 독립동맹 제3차대회가 전개되었더라면 임시정부에 대한 협조 결정까지 표명되었을 것이다.(『동아일보』1945.12.23.)

우리의 피로 조선을 찾자, 이채 띤 김명시 여장군의 축사

연안에서 고국까지 7천리를 걸어온 꿋꿋하고 씩씩한 여러 오빠 동생을 만나보니 반가움을 무어라 형용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조선의 국군이 되려고 댁에서 나올 때 여러분의 어머님과 누님께서는 반드시 여러분의 손을 잡고 부탁함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총을 메고 일선에 나갈 때에 받은 부탁과 같을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인민을 구하라 나라를 지키라는 부탁입니다. 여러 동무여 진리를 파악한 우리는 그 진리를 위하여 충성을 다 바치고 그 진리를 위하여 싸워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총을 막을 적에는 누구를 위하여 막겠습니까? 우리가 나갈 길은 이미 결정되었습니다. 이는 3천만 동포가 정해준 것입니다. 그런□□ 우리는 이 길로 매진하여야 합니다. 해외의 우리 동지가 적탄을 맞아 조선을 부르며 죽을 적엔 반드시 조선의 오빠여 동무여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게 하여 주기 바라오 하고 감기 어려운 눈을 감았습니다. 혁명은 피없이 아니 됩니다. 혁명에는 타협이 없습니다. 혁명에는 적과 나 외에는 없습니다. □모를 조금도 어려워하지 않고 주저하지 말고 나가 주시오. 동무들 뒤에는 우리 무정 동무와 김일성 동무 그리고 김원봉 장군이 있습니다. 동무들이여 남에게 의뢰 말고 우리 피로 조선을 찾읍시다. 권리를 찾읍시다.

끝으로 건국부녀동맹 여러 동무들이 부탁하는 말을 전하겠습니다. 국군준비대의 오빠 여러분 여러분의 분투를 감사하며 전조선의 여자동무를 동원시켜 여러분을 도와주려고 합니다. (『자유신문』 1945.12.27.)

중국에서 환국한 여장군 김명시와 그의 독립투쟁사

조선 여성으로서 오늘까지의 반생(半生)을 모조리 조선해방운동에 바쳐 가면서 국내에서 혹은 해외에서 철창 속에서 산중에서, 일본제국주의하에 잔인한 압박의 가시밭길을 걸으며 동지들과 함께 그의 혁명투쟁을 영웅적으로 싸워왔고, 금년에는 조선독립동맹(朝鮮獨立同盟)의 천진(天津) 지부 책임자로서 씩씩한 정치투쟁을 해외에서 전개하는 한편, 조선의용군(朝鮮義勇軍) 총사령인 무정(武丁, 金武亭) 장군에 직속한 여장군으로, 손에 총을 들고 남자 동지와 함께 민족해방에 항일용전의 전선에서 용감히 투쟁하여온 조선의 커다란 자랑인 김명시(38세) 여장군은 역시 조선민족해방과 여성해방에 용감하고 열성적 여투사이신 박진홍(朴鎭弘) 동무와 함께 조선해방의 기쁨과 감격에 가슴을 울렁거리며, 중국 연안(延安)으로부터 홍진만장(紅塵萬丈)의 화북 만주(滿洲)를 거쳐서 서울까지 만리의 노정을 동지들과 함께 도보로서 답파(踏破)하고 서울에 들어왔는데, 왕방(往訪) 기자단에게 다음과 같이 말을 하였다 한다.

“1929년경에 중국 공산군이 국민군과 싸울 적에 무정 장군이 전사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져서 당시 상해에 있던 우리와 조선 동지들은 그를 추도하며 애도하였다. 그러나 그 후 천진에 있을 때에 동지에 들어와서 활동하던 젊은 동무의 연락으로 무정 장군 전사의 소식은 허전(虛傳)임을 알고, 연안에 가서 장군을 만나 그 후부터 다시 일을 하게 되었다. 장군은 우리가 소식을 모르고 있는 동안에 그는 팔로군(八路軍)에 가담하여 다른 장태준, 양녕(楊寧: 신흥무관학교 출신의 金勳) 동지와 함께 저 유명한 팔로군의 서금(瑞金)에서 연안까지 25,000리의 길을 행군하게 되었는데, 이때 세 동무도 모두 사단장이었다.

도중에 양녕 장군은 장강(長江) 연안에서 장태준 장군은 복건성에서 적탄에 희생되고, 동포 세 장군 중 무정 장군 한 분만이 연안에 오게 되었다. (중략) 싸울 목표로 조선의용군 편성에 착수하여 연안의 군정대학을 창설하고 일본군대를 탈주하여 우리 의용군에 들어오기를 희망하는 조선 학병 지원병・강제징병 군속(軍屬) 등을 적의 구역 또는 근거리에 있는 우리의 지부 지하조직을 통하여 이 군정학교에 받아서 의식적으로 가르치며, 군사적으로 훈련하여 의용군에 편입하였는데, 이때 약산(若山) 김원봉(金元鳳) 씨 부하도 연안으로 들어와서 이 의용군에 가담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조선여성운동의 선봉이 되었던 허정숙(許貞淑) 동무도 연안군정대학(延安軍政大學)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이리하여 8월 15일 당시까지 우리 조선의용군의 수는 수천여 명에 달하고 있다. 그리고 1945년에 들어와서 나날이 변하는 세계정세에 비추어서 이 정세에 가장 적당한 전술전략과 투쟁방침을 결정하며, 일본의 항복이 불원(不遠)하다는 판단으로서 의용군을 거느리고 조선에 진격하여, 조선의 일본제국과 한번 싸워 이를 완전히 소탕할 계획과 조선독립의 노선과 방침을 결정하기 위하여, 국치기념일인 8월 29일을 기회로 조선독립동맹 제3차 전체대회를 연안에서 열기로 결정되어 각지의 대표 동지들은 속속히 연안으로 모여들게 되었다. 이때에 나는 천진지부 책임대표로서 몇 동지와 같이 1945년 7월 10일에 천진을 떠나 도보로 갖은 신고(辛苦)를 겪으며, 적의 봉쇄선을 돌파하면서 연안으로 향하는 도중에 8월 10일경에 태원 산중에서 팔로군과 일군이 접전하는 마당에 당도하게 되어 할 수 없이 우리의 행군을 중지하고, 가까운 촌에 대기하고 있던 중, 무선전신으로 일본의 항복을 알게 되었다.(1편)

이때에 감개는 가슴이 울렁거리며 그저 울음뿐이었다. 그러자 연안에서는 대회를 중지하고 연안으로 들어오는 각지 대표에게 그대로 도로 돌아서서 봉천에 모이라는 지령이 왔기 때문에, 우리도 그 길로 돌아서 다시 봉천으로 행군을 개시하였다. 이때 연안에서는 8월 15일 즉시로 무정 장군이 의용군 선발부대를 거느리고 봉천을 향하여 행군을 개시하고, 이와 함께 조선독립동맹원들도 전위투사를 거느리고 고국을 향하여 떠났다. 이리하여 각지로부터 봉천을 향하여 출발한 의용군 선발대는 그동안 7천리의 먼길을 도보로 일군 패잔병과 싸우면서 돌파하여 11월 3일에 봉천에 집결을 마쳤다. 고국을 향하여 봉천에 집결하는 행군 도중에 일병으로부터 제대된 동포병사들이다수 합하게 되었으며, 행군 중의 우리 복장은 팔로군과 동일한 군복이었다.

그리고 봉천에서는 러시아혁명 기념일 관병식에 우리 의용군은 7천리 행군의 고장과 피로 등으로 못 참가하는 동무 수천 명을 내어놓고, 6천여 명이 완전히 무장하고 위풍당당하게 참가하였는데, 이 가운데는 여동무도 100여 명이 참가하고 또 봉천에 있는 동포들도 우리의 뒤에 따라나섰다. 이날 해외 수십년 혁명생활에서 해방된 고국을 눈앞에 두고 이 관병식에 참가한 우리의 감개도 컸지마는, 봉천에 있던 동포들은 조선에도 이 같은 씩씩한 군대가 있어서 조국의 해방을 위하여 그 악독한 일본과 싸워 왔구나 하는 감격에 울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국제관계 등을 고려케 하여 봉천에서 군복을 사복으로 갈아입고 2주간 머무르다가, 남·북만주에 흩어져 있는 동포를 보호하며 의용군 일부는 독립동맹 동지들과 안동(安東, 현재의 丹東)까지 와서 그곳에서 20여일을 체재하면서 국내 사정을 연구하여 우리가 가질 노선을 파악하기에 역력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국내의 건국동지들과 통일된 전선을 결성하고 조선의 완전독립을 위하여 싸우려고 결의하였다. 그러나 이 신성한 통일전선 결성에는 어디까지든지 친일파·민족반역자를 배제하지 않고는 결성될 수 없는 것이다.”

말씀하는 여사의 얼굴에는 투지가 끓어 넘치고 있다. 여사는 경상남도 마산 출생으로 금년 39세인데, 경성 배화고등여학교를 졸업하고 1925년 19세 때에 모스크바에서 수학하고, 1927년에 상해로 나와서 혁명운동을 하다가 1929년에 북만에서 활동하였고, 광주학생사건 당시에는 반제동맹을 조직하여 항일투쟁을 하였으며, 다시 국내에 들어와서 활동하다가 일본 관헌에게 체포되어 철창생활까지도 하였는데, 그후 다시 해외로 망명하여 상해·화북 등지에서 해외 동지들과 연락하며 씩씩한 혁명투쟁을 하고 있었다 한다. 〈부녀총동맹회회록〉에서(『국민보』 1946.7.17, 7.24)

여류혁명가를 찾아서⑦
29년간 투쟁생활 태중(胎中)에도 감옥살이, 김명시 여사편

크지 않은 키. 검은 얼굴, 야무지고 끝을 매섭게 맺는 말씨, 항시 무엇을 주시하는 눈매. 온몸이 혁명에 젖었고 혁명 그것인 듯이 대담해 보였다.

“투쟁하신 이야기를 좀 들을까요” 하고 물으니
“열아홉 살 때부터 오늘까지 21년간의 나의 투쟁이란 나 혼자로선 눈물겨운 적도 있습니다마는 결국 돌아보면 아무 얻은 것 하나 없이 빈약하기 짝이 없는 기억뿐입니다.”

이런 겸사(謙辭)의 말을 잊어버리지 않았다. 아니 아직도 민주과업이 착란하고 막연한 채로 남아있는 오늘의 남조선을 통분히 여겨 마지않는 여사로서는 앞만 바라보는 타는 듯한 정열이 오히려 지난 일을 이렇게 과소평가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1925년에 공산대학엘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1927년도에 파견되어 상해로 와보니 장개석 씨의 25쿠데타가 벌어져서 거리마다 공산주의자 시체가 누었더군요. 거기서 대만, 중국, 일본, 비율빈(필리핀), 몽고, 안남(베트남), 인도 등지 각국 사람들이 모여서 동방피압박민족반제자(反帝者)동맹을 조직하고 또 그 이면에서는 중공 한인특별지부 일도 보게 되었습니다.

1928년에 무정(武丁) 장군을 강서(江西)로 떠나보내고 그 다음해 홍남표(洪南杓) 씨와 만주에 들어가서 반일제동맹을 조직했습니다. 그때 마침 동만폭동(東滿폭동: 1930년 5월부터 수개월간 지속된 간도지역 반일폭동을 말함)이 일어나서 우리는 하얼빈 일본영사관을 치러 갔습니다. 그다음 걸어서 흑룡강을 넘어 치치하얼을 거쳐 천진, 상해로 가던 때의 고생을 생각하면 지긋지긋합니다.

상해에 가서 김단야(金丹冶) ‧ 박헌영(朴憲永) 제씨가 와계시더군요. 그다음 나는 인천으로 와서 동무들과 〈콤뮤니스트〉 〈태평양노조〉 등 비밀 기관지를 발행하다가 메이데이날(5월 1일 노동절) 동지들이 체포당하는 판에 도보로 신의주까지 도망을 갔었는데 동지 중에 배신자가 생겨서 체포되어 7년 징역을 살았습니다. 스물다섯 살에서 서른두 살까지 나의 젊음이란 완전히 옥중에서 보낸 셈이죠.”

그다음 연안독립동맹(화북조선독립동맹)에 들어가서 천진, 북경 등 적지구(敵地區)에서 싸우던 눈물겨운 이야기, 그중에 임신중에 체포되어 배를 맞아 유산하던 이야기, 밤에 수심도 넓이도 모르는 강물을 허덕이며 건너가던 이야기 등은 소설이기엔 너무도 심각하다.

싸움이란, 혁명에 앞장서 싸우는 것이란 진실로 저렇게 비참하고도 신명나는 일이라고 고개를 숙이며 일어나서 나왔다. • (『독립신보』 1946.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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