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누에의 혼령에 제사를 지내는 것은 전형적인 일본식 풍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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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 남아있는 저들의 기념물 1]

누에의 혼령에 제사를 지내는 것은 전형적인 일본식 풍습
한국잠사박물관(청주)에 남아 있는 ‘충북 잠령탑(1934년)’의 조성 연혁

이순우 특임연구원

일제강점기를 통틀어 이 땅에서 벌어진 참으로 괴기스럽고 별난 일들이 한둘이 아닐 테지만, 그 가운데 몇 가지를 손꼽아보면 우선은 온갖 동물(動物)의 혼령(魂靈)에다 제사를 지내거나 이것들을 위한 비석 또는 위령탑을 세우는 장면들이 퍼뜩 떠오른다. 가령, 도수장(屠獸場, 도살장)에서 죽은 짐승들의 수혼비(獸魂碑)를 조성하여 위령제를 올린다거나 총독부의원(總督府醫院) 구내에 실험동물공양탑(實驗動物供養塔)을 설치한다거나 군용모피(개가죽)의 공출에 희생된 개들을 위한 견혼비(犬魂碑)를 만든다거나 일본군 기병대와 포병대에 속한 군용마를 위한 마혼비(馬魂碑)를 세우는 따위의 일들이 바로 그것이다.

신문자료를 뒤져보면, 심지어 부산요리조합 같은 곳에서는 식재료로 사람들이 먹어 치운 하돈(河豚, 복어)의 혼을 달래고자 법요(法要)를 거행했다고도 하고, 조선조어연맹(朝鮮釣魚聯盟)에서는 낚싯줄에 걸려 최후를 마친 무수한 부어(鮒魚, 붕어)를 위한 공양제 행사를 올렸다고 하는 흔적도 눈에 띈다. 식민지 조선에서 벌어진 일은 아니지만, 일본 오사카에서 효능 좋은 해충박멸제 ‘이마즈 승취분(イマヅ 蠅取粉, 파리약)’에 의해 몰살의 위기에 처한 파리떼를 위한답시고 커다란 승(蠅, 파리) 모형을 걸어두고 죽은 해충들의 명복을 빌며 조문(弔文)을 낭독하고 향을 피워 올리는 공양회가 벌어진 소식이 전해지는 등 우스꽝스럽다 못해 헛웃음이 나오는 장면이 곧잘 연출되곤 하였다.

그러고 보면 축령(畜靈)이니 축혼(畜魂)이니 수령(獸靈)이니 수혼(獸魂)이니 어령(魚靈)이니 견혼(犬魂)이니 마혼(馬魂)이니 우혼(牛魂)이니 하여 ‘무슨 혼(〇魂)’이니 ‘무슨 령(〇靈)’이니 하는 따위의 용어들이 속출하고, 덩달아 ‘무슨 령제(〇靈祭)’, ‘무슨 혼제(〇魂祭)’ ‘무슨무슨 위령제(〇〇慰靈祭)’, ‘무슨무슨 공양제(〇〇供養祭)’ 등 이런 수식어가 붙은 행사가 대유행을 일으키던 시절이 있었다. 모르긴 해도 이러한 현상은 전적으로 삼라만상(森羅萬象) 모든 곳에 신령(神靈)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 신도(神道; 대표적인 일본 종교)의 영향이 크게 작용한 탓이 아닌가도 싶다.

그리고 이 대열에는 ‘누에’가 결코 빠질 수 없다. 일찍이 통감부 시절부터 양잠(養蠶, 누에치기)은 그네들의 식민정책상 식산진흥을 위해 적극 추진하던 장려산업의 하나였으며, 대한제국의 황제가 몸소 동적전(東耤田)에 행차하여 ‘친경의식(親耕儀式)’을 세 차례나 거행하던 바로 그때에 이에 맞춰 황후도 역시 수원의 권업모범장에 있는 양잠시설을 순시한 것을 계기로 창덕궁 서향각에 ‘친잠실(親蠶室)’을 설치하는 한편 ‘친잠권민(親蠶勸民)’ 편액을 내걸고 — 물론 일본인 기사(技師)의 세심한 도움과 지도에 따라 — 손수 누에치기에 모범을 보인 것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이뤄진 일이었다.

이로부터 황족과 귀족은 물론이고 어지간한 고관대작의 집집마다 잠종(蠶種, 누에알)이 분양되어 한때는 온 나라가 마치 누에치기 열풍에 휩싸인 듯한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던 것이다. 더구나 경술국치 직후 이른바 ‘임시은사금(臨時恩賜金)’을 재원으로 하여 조선총독부가 각 지역에 설립한 ‘은사수산장(恩賜授産場)’ 같은 곳에서는 여러 업종을 다 제쳐두고 유달리 상묘(桑苗, 뽕나무 묘목), 상족(上簇, 섶에 올리기), 수견(收繭, 고치따기), 제사(製絲) 등과 같이 ‘양잠(養蠶)’ 관련 기술을 보급하는 일이 단연 두각을 나타낸 바 있었다.

이러한 ‘은사수산장’ 이외에도 체계적으로 양잠기술을 보급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로서 각 지역마다 ‘누에씨’를 보급하는 ‘원잠종제조소(原蠶種製造所)’와 잠업기술의 전수와 사육교사의 양성을 위한 ‘잠업강습소(蠶業講習所)’가 잇달아 등장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이에 따라 양잠과 잠사업은 자연스레 식민지의 식산흥업(殖産興業)을 이끌어내는 중요한 단초의 하나로서 경향 각지(京鄕各地)를 통해 크게 확산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광범위한 양잠기술의 보급 및 잠사업의 급격한 팽창과 아울러, 이를 배경으로 하여 느닷없이 표면에 등장한 것이 바로 ‘잠령(蠶靈, 누에의 혼령)’이라는 표현이다. 이에 관한 초창기의 흔적을 찾아보면 우선 ????경성일보???? 1926년 11월 25일자에 수록된 「선농단(先農壇)의 두둑에 잠(蠶, 누에)의 공양탑(供養塔), 동정심 깊은 고수 총독(皐水 總督)의 필(筆, 글씨)」 제하의 기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포착된다.

조선의 견(繭, 누에고치)은 중요한 산업으로 축년(逐年, 해마다) 양잠업이 발전하여 본년(本年)의 산견액(産繭額)도 40만 석(石)을 웃돌고 잠견(蠶繭) 100만 석(石) 계량(計量)의 완성도 가까운데 이러한 발전은 연년(年年) 많은 견충(繭虫, 번데기)을 죽이는 일이 되므로 선내(鮮內)의 제사가(製絲家)는 견충의 보제(菩提, 보리)를 장례 치르는 계획을 세우고 잠(蠶)의 박사(博士)로 알려져 있는 도(道, 경기도)의 우메타니 요시치로 박사(梅谷與七郞 博士)가 입안(立案)하여 카베상회(可部商會), 카네보(鐘紡), 기타 유력자 발기(發起) 하에 잠령공양탑(蠶靈供養塔)을 건립했는데, 장소는 동대문 외(東大門外)의 경기도립 원잠종제조소(京畿道立 原蠶種製造所) 내의 후둔(後盾)이며, 이왕가(李王家)가 농업(農業)의 신양(神樣, 카미사마)을 모시던 선농단(先農壇)의 둔덕, 마른 풀이 무성한 가운데 화강암(花崗岩)의 연마도 아름다운 1장(丈) 3척(尺) 높이의 빼어난 것이다. 그리고 비면(碑面)에 “잠령공양탑(蠶靈供養塔), 고수(皐水)”라고 있는 것은 사이토 총독(齋藤總督)의 견서(繭書, 이름 위에 직위 또는 칭호를 적는 것)를 기재하지 않고 아호(雅號)만 있는 것도 잠(蠶)의 묘(墓)에 상응(相應)하는 사이토 총독의 심심풀이일 것이다. 우메타니 박사 가로되, “외국(外國)에서는 잠령탑을 세워 매년 양잠업의 발전을 기원하는 것이 성행하고 있지만, 일본(日本)에서는 처음일 것이다. 잠(蠶)의 덕분에 국부(國富)도 증가하고 농가경제(農家經濟)도 풍족해지는 이러한 고마움을 일층(一層) 절실(切實)하게 심어주기 위한 것에도 이 공양탑의 의의(意義)가 있다”며 상당히 어려워하면서, 경기도 관내(京畿道 管內)만 하더라도 [대정] 13년(즉 1924년) 중에 67억 필(匹)의 견충(繭虫)을 죽였고, 시정 이래(始政 以來; 1910년 이래)였다면 피해견(被害繭)이 필시 100억 필(匹)은 될 거라고 말하는데, 오는 28일 오전 11시반 이곳에서 성대한 건비식(建碑式)과 공양을 집행한다.

사이토 총독의 휘호가 새겨진 ‘잠령공양탑’은 선농단(先農壇,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제기리 274번지) 구역에 처음으로 세워졌고, 그 이후 경기도농사시험장(京畿道農事試驗場)과 경기도원잠종제조소가 부천군 소사면 벌응절리로 옮겨감에 따라 1939년 4월에 이것 역시 뒤늦게 그곳으로 이축(移築)되었다가 지금은 인천시립박물관의 야외전시구역에 수습되어 있다. 아무튼 이때 건립된 ‘경기도 잠령공양탑’이 최초의 시발점이 된 이래로 몇 해가 지나지 않아 전국 곳곳의 원잠종제조소마다 별도의 ‘잠령공양탑’을 조성하고 그 앞에서 ‘잠령제(蠶靈祭)’를 거행하는 사례들이 속출하였다.

이들 가운데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강내면 학천리에 자리한 한국잠사박물관(2004년 신축개관)의 야외전시구역에 남아 있는 ‘충북 잠령탑’도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제작된 것이었다. 이것을 살펴보면 전면에 “잠령(蠶靈)”이라는 큼지막한 글자가 새겨져 있고, 후면에 “단기(檀紀) 4266년(年) 10월(月) 31일(日) 건립(建立)”과 “충청북도 잠업관계자 일동(忠淸北道 蠶業關係者 一同)”이라는 글씨가 남아 있다.

모르긴 해도 ‘단기’라는 표시가 처음부터 있었을 리는 만무하므로 해방 이후 시기에 이 부분을 고쳐 새긴 것이라고 보면 맞지 않을까 한다. 다만, 여기에서 ‘단기 4266년’은 일제 연호로 ‘소화 8년(서기 1933년)’이며, 그렇다면 충북 잠령탑의 건립이 ‘1933년 10월 31일’에 이뤄졌다는 얘기인 셈이다. 하지만 이 날짜는 충청북도 은사수산 원잠종제조소(忠淸北道 恩賜授産 原蠶種製造所)의 창립 20주년 기념행사가 벌어진 때를 가리키며, 실제로 제막식이 거행된 것은 그 이듬해 11월 7일의 일이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이와 관련하여 매일신보 1934년 10월 24일자에 수록된 「잠업관계자(蠶絲關係者) 열성(熱誠)으로 잠령탑(蠶靈塔) 건설(建設), 충북도내(忠北道內) 6만여(萬餘) 업자(業者)의 호신(護神)으로 내월(來月) 7일(日)에 제막식(除幕式)」 제하의 기사에는 ‘충북 잠령탑’의 조성경위와 제막식 거행일자에 대해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 정리되어 있다.

[청주(淸州)] 내(來) 11월 7일 오후 1시부터 청주군 화천정(淸州郡 和泉町)에 있는 충북원잠종제조소(忠北原蠶種製造所)에서는 잠령탑 제막식(蠶靈塔 除幕式)과 잠령제(蠶靈祭)를 거행(擧行)하기로 되었다 한다.
충북의 희생잠수(犧牲蠶數)는 매년 잠아(蠶兒, 누에)로 약(約) 1,600만(萬) 두(頭), 잠용(蠶蛹, 번데기)으로 약 10억(億) 두, 잠아(蠶蛾, 나방)로 약 1,400만 여두, 합계(合計) 무려(無慮) 10억 3,000만 두에 달하는 바 여사(如斯)히 막대(莫大)한 잠령(蠶靈)은 학술(學術)의 연구(硏究)에 또는 경제상(經濟上)에 찬연(燦然)한 공적(功績)을 끼치어 오인인류(吾人人類)를 위하여 희생공헌(犧牲貢獻)하고 있으므로 종래(從來)부터 차등 잠령(此等 蠶靈)의 명복(冥福)을 기도(祈禱)하기 위(爲)하여 도내(道內)의 잠사관계자(蠶絲關係者)가 상합(相合)하여 매년(每年) 원잠종제조소 구내(原蠶種製造所 構內)에서 잠령공양제(蠶靈供養祭)를 거행(擧行)하여 내려왔던 바 객년(客年) 원잠종제조소 개소이십주년 기념식(原蠶種製造所 開所二十周年 記念式) 거행당일(擧行當日)에 도내(道內) 잠사관계자대회(蠶絲關係者大會)를 개최(開催)하고 동석상(同席上)의 결의(決意)에 의(依)하여 동소(同所)의 뒤에다가 우리 충북(忠北)의 잠신(蠶神)이 될 잠령(蠶靈)을 안치(安置)하기 위하여 영구불멸(永久不滅)의 잠령탑(蠶靈塔)을 건설(建設)하기로 되어 이래(以來) 공사(工事)를 진행(進行)하게 되었었다.
…… 기(其) 비문(碑文)은 관폐대사 조선신궁 궁사(官幣大社 朝鮮神宮 宮司) 아치와 야스히코(阿知和安彦) 씨의 휘호(揮毫)에 의한 자(者)이며 주위(周圍)의 옥원(玉垣, 울타리)은 도내 각군(道內 各郡)으로부터 송부(送附)된 초석(礎石)으로써 축조(築造)하여 송림간(松林間)에 외연흘립(巍然屹立)한 잠령탑(蠶靈塔)은 충북도내(忠北道內) 6만여(萬餘)의 잠사관계자(蠶絲關係者)의 둘도 없는 수호신(守護神)이 되도록 성심성의(誠心誠意)를 다하여 건설(建設)된 것이다.

이 기사에 따르면 충북 잠령탑의 조성은 ‘충청북도 [은사수산] 원잠종제조소 창립 2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목적이었으며 또한 여기에 사용된 자연석은 청주 시내 용화사에 있던 것을 가져왔다는 사실이 잘 드러난다. 그리고 초석(礎石)으로는 충북 도내 각군에서 보내온 돌들을 사용했다고 적고 있는데, 실제로 잠령탑의 기단석 부분에는 ‘報(보은)’, ‘丹(단양)’, ‘槐(괴산)’, ‘陰(음성)’, ‘堤(제천)’, ‘沃(옥천)’ 등과 같이 해당 지역을 돌마다 표시한 흔적이 지금도 그대로 잘 남아 있다.

이 대목에서 한 가지 더 깊이 유념할 사항은 이 잠령탑의 전면에 새겨진 글씨가 바로 조선신궁궁사인 아치와 야스히코(阿知和安彦; 재임 1931.4.30~1940.8.10)가 휘호(揮毫)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익히 알려진 바대로 ‘조선신궁’이라고 하면 식민지배자들에게 조선 전역을 통치함에 있어서 정신적 지주이자 수호신(守護神)과 같은 역할을 하는 공간이었고, ‘궁사’는 바로 그곳의 최고직위에 해당하는 신직(神職)이었다.

바로 이러한 위상에 있는 인물에게 휘호를 청탁하고 그리하여 그의 손을 빌려 ‘잠령(蠶靈)’이라는 글씨를 새겼다는 것은 누에의 혼령에 제사를 지낸다는 개념 자체가 일본 신도의 그것 — 예를 들어 잠령신사나 잠령공양탑 따위 —과 직접 맞물려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하겠다. 이와 관련하여 누군가는 우리에게도 ‘선잠단(先蠶壇, 서울 성북구 성북동 64-1번지)’에 제례를 거행하는 전통이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선잠단에서 제사를 올리는 대상은 잠신(蠶神)이라 일컫는 서릉씨(西陵氏)이지 ‘잠령(蠶靈, 누에의 혼령)’의 개념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그런데 듣자 하니 일제가 남겨 놓은 이러한 ‘잠령탑’ 앞에서 지금도 ‘풍잠기원제(豊蠶祈願祭)’라는 이름으로 일종의 ‘잠령제(蠶靈祭)’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누에농사의 풍년을 비는 마음을 누가 탓하랴 마는, 그렇더라도 최고위직 식민통치자의 일원이기도 한 조선신궁 궁사와 같은 이가 쓴 글씨 앞에다 버젓이 제사상을 차리는 건 암만 봐도 선뜻 수긍하기 어려운 참으로 고약한 장면의 하나가 아닌가 말이다.

거듭 말하자면 누에의 영혼을 위해 제사를 올리는 것은 우리식 ‘선잠례(先蠶禮)’와는 전혀 무관하게 그 자체가 전형적인 일본식 풍습에서 비롯된 일이며, 그나마 이러한 잠령제가 이 땅에 등장한 것은 제아무리 거슬러 올라가도 1926년 — 충청북도의 경우에는 1932년 — 의 시점을 넘어서지 못하는 그야말로 ‘만들어진 전통’이라는 점도 정확하게 인식될 필요가 있다. 풍잠기원제를 올리더라도 일제의 유산인 ‘잠령비’ 또는 ‘잠령공양탑’ 앞이 아닌 새로운 대안공간과 제례형식의 모색이 절실한 시점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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