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최승희
북한의 친일청산은 철저했다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친일청산이 무산된 남한보다는 훨씬 낫지만, 북한의 경우에도 문제점이 있었다. 적지 않은 친일파가 해방 뒤 북한에서 사라졌다. 이는 친일청산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대규모 월남의 결과이기도 했다. 친일을 자체적으로 청산한 게 아니라 남한으로 ‘전가’한 측면도 컸다.
상당수의 친일파는 해방 뒤 숙청되지 않고 북한 공공기구에 그대로 남았다. 이게 가능했던 데는 ‘친일파를 고쳐 쓴다’는 김일성 정권의 논리도 크게 작용했다.
2002년에 <대구사학> 제69집에 실린 전현수의 논문 ‘해방 직후 북한의 과거청산(1945~1948)’은 “보안기관과 사법검찰기관 등 국가권력의 핵심적인 부문에서는 친일관료의 숙청이 철저히 전개된 반면, 인민경제와 교육 분야에서는 재교육을 통한 활용이 선호되었다”고 설명한다.
“이 시기 초등학교 및 중등학교의 교장, 교무주임, 교사 24509명이 재교육 과정을 수료했다”고 논문은 설명한다. 이 숫자 전부가 친일파는 아니었지만, 일본군국주의를 전파하던 교직원들이 이 속에 포함돼 있었다. ‘친일파 고쳐 쓰기’나 다름없는 재교육 덕분에 청산되지 않고 살아난 친일 교육자도 꽤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교육자 겸 예술가이면서도 북한 사회에 의해 고쳐 쓰여지기보다는 그 자신이 북한 사회를 고쳐 썼다고 볼 수 있는 친일파가 있다. 세계적 무용가인 최승희가 이에 해당한다.
일왕에 대한 충성
최승희의 명성은 세계적으로 상당했다. 이를 보여주는 것 중 하나가 미국이 미일통상항해조약 파기를 통고한 지 이틀 뒤에 발행된 1939년 7월 28일 자 <조선일보> 기사다. 제목에서는 한자로 최승희(崔承喜)를 표기하고 본문에서는 한글로 ‘최승히’를 표기한 이 기사의 제목은 ‘구주(歐洲)의 인기를 독점한 파리의 최승희씨’다.
기사는 27세 된 그의 순회공연을 보도하면서 “아메리카의 공연을 마치고 다시 구라파로 건너가서 불란서, 백의이(白義耳), 독일 등 각 나라에서 대단한 센세이슌을 일으키며 ‘조선의 무히’로서의 대기염을 토하고 있는 최승히 여사”라는 표현을 썼다. 프랑스·벨기에·독일 공연 중에 삼천 객석이 만원을 이룬 극장의 사례도 기사에서 소개했다. 이 정도로 최승희는 K-무용의 독보적 존재였다.
대한제국 멸망 이듬해인 1911년 11월 24일 강원도 홍천에서 태어난 최승희는 중학교급인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1926년에 졸업한 뒤 고전발레 전공자인 이시이 바쿠 문하에서 현대무용을 공부했다. 그런 다음인 1929년에 최승희무용연구소를 설립하고 1930년에 제1회 창작무용발표회를 연 뒤부터 급속히 명성을 얻어갔다.
그런데 그의 예술적 역량과 명성은 그 자신이나 대중을 위해서보다는 히로히토 일왕(천황)을 위해 훨씬 더 요긴하게 쓰였다. 이 점은 그 자신도 인정하는 바였다. <친일인명사전> 제3권 최승희 편에 따르면, 그는 1940년 12월 14일 자 <아사히신문>에 자신이 무용에 매진하는 이유를 “내가 익찬(翼贊)하는 길은 동양무용 수립에 매진하는 것”이라는 말로 밝혔다.
당시에는 일왕에 대한 충성의 방편으로 익찬이라는 말이 사용됐다. 그런 익찬을 위해 무용에 매진한다고 스스로 밝혔으니, 그의 공연은 그런 의미로 해석돼 관객과 대중에게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었다.
서른 살 때인 1941년 11월, 그는 도쿄극장에서 상영된 내선일체 및 지원병 선전 영화인 <그대와 나>의 시사회장에서 무용 공연을 펼쳤다. 이런 식의 정치적 공연을 식민지 한국이나 일본뿐 아니라 중국에서도 열었다. 일본군이 전투 중인 중국 각지에서 최승희의 황군 위문공연이 열렸다. 자신의 역량과 명성이 일왕의 침략전쟁에 악용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활동을 통해 돈을 벌었으니, 누가 준 돈이든 간에 그 돈은 친일재산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그런 친일재산을 자기 자신을 위해서뿐 아니라 일왕을 위해서도 아낌없이 희사했다.
친일뿐 아니라 친독까지
<친일인명사전>은 기부 내역의 일부만 소개한다는 전제하에 “1937년부터 1944년까지 국방헌금, 황군위문금, 독일 상이군인 위문금, 조선문인협회 기부금, 군사후원연맹 후원금, 조선군 및 해군 위문금, 조선군사보급협회 사업기금, 문화장려비 등의 명목으로 7만 5000원이 넘는 금액을 헌납했다”고 기술한다.
1930년대 서울의 직공 노동자들은 월급 10원도 받기 힘들었다. 1934년 10월 12일 자 <동아일보>에 따르면, 지금의 종로구 행촌동에 소재한 편창제사방직 노동자들은 하루 14시간 노동에 대한 월급으로 식사 제공에 3원 내지 7원을 받았다. 최승희가 일왕의 전쟁 수행에 얼마나 큰 도움을 제공했는지가 이런 데서도 증명된다.
그런데 그는 전쟁 부역 2관왕이었다. 친일뿐 아니라 친독까지 저질렀다. 위의 기부 항목에 독일 상이군인 위문금이 있다. “이외에 1941년 2월 독일대사관에 독일 육군병원 부상병 위문기금으로 낸 570마르크는 환율로 볼 때 적지 않은 금액이었다”고 <친일인명사전>은 덧붙인다. 히로히토뿐 아니라 아돌프 히틀러에게도 ‘익찬’을 했던 것이다.
1945년 8·15 해방 당시 그는 한국에 없었다. 친일 위문공연을 하느라 베이징에 체류하다가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 귀국한 것은 이듬해 5월이다. 하지만 오래 있지 못했다. 위 사전은 “일제강점기 행적 등이 문제가 되어 정착하지 못하고 7월 20일 남편 안막(본명 안필승), 큰오빠 최승일과 함께 월북했다”고 설명한다.
친일파들은 북한 정권을 피해 북으로 남으로 내려왔다. 최승희는 정반대 코스를 밟았다. 친일파라는 비판을 들으며 북으로 올라갔다. 역발상에 능한 친일파였다고 말할 수 있다.
세계적인 무용가로 유명할 뿐아니라 친일·친독 행위로도 알려진 이 부역자는 북한 정권의 단죄를 받지 않았다. 도리어 김일성의 지원하에 최승희무용연구소를 평양에 세우고 이듬해부터 공연을 열었을 정도다. 남한 단독정부가 세워진 1948년 8월에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도 당선됐다.
경제나 교육 분야의 북한 친일파들은 재교육을 통해 고쳐 쓰임을 받았다. 예술 교육자인 최승희에게서는 정반대 현상이 나타났다. 북한 사회가 그를 고쳐 쓰는 게 아니라 그가 북한 사회를 고쳐 썼다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조성됐다.
북한에 가서도 승승장구
북으로 올라간 최승희는 곧바로 기반을 잡았다. 1997년 3월 21일 자 <조선일보>에는 월북 직후의 최승희가 학생들을 지도하는 희귀 사진이 최초로 소개됐다. 이 사진을 찍을 당시의 최승희는 김일성의 후원을 받는 데 그치지 않고, 자기 식의 무용 세계를 북한에 이식시키는 영향력까지 발휘했다. 이는 사회주의나 김일성 체제 원리가 북한 무용에 스며드는 일을 더디게 만들었다.
2021년 <한국체육사학회지> 제26권 제1호에 실린 현주 경기대 연구원과 안지호 고양시정연구원 연구위원의 공동논문 ‘북한 무용의 변화에 대한 연구’는 “북한 무용은 1946년 월북한 최승희로 인해 당(집단)의 통제를 받는 구소련식 사회주의 사상무용보다는 안무가 개인의 영향을 받는 신무용이 발전”했다고 한 뒤 이렇게 설명한다.
“북한 당국의 지원을 받았음에도 최승희의 무용 성향은 당보다 개인의 심적 습성이 표현되었으며 이는 사회주의 예술과는 괴리가 있었다. 최승희식 신무용은 비록 사회주의 사회에서 발전하였지만 민속무용을 모티브로 창작하였기 때문에 다른 사회주의 예술작품에 비해 사상성·혁명성·당성 등이 비교적 적은 편에 속했다.”
북한에서 사회주의 사상무용이 발전한 것은 최승희가 숙청된 1960년대 이후다. 그때까지는 최승희가 자기 식대로 북한 무용을 만들어갔다. 북한이 최승희를 재교육해 고쳐 쓴 게 아니라 최승희가 북한 사회를 자신의 새로운 무대로 개조해 고쳐 쓴 셈이 된다.
북한에서 최승희 비판이 시작된 것은 1958년이고, 그가 숙청된 것은 사망 2년 전인 1967년이다. 1946년으로부터 10년 이상 최승희 무용이 북한 무용을 지배한 셈이다. 그 기간 동안 북한 무용의 사회주의화는 그만큼 더뎌지게 됐다.
친일파 최승희가 북한에 가서도 승승장구함은 물론이고 북한 무용까지 지배한 것은, 남한과 달리 친일청산이 잘됐다는 북한 역시 친일청산이 불철저했음을 보여즌다. 이 과제가 과거지사가 아닌 현재의 문제인 동시에, 남한은 물론이고 한민족 전체의 문제라는 점이 이런 데서도 드러난다.
김종성 기자
<2023-11-05>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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