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한글 글씨로 세상을 바꾸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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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한글 글씨로 세상을 바꾸고 싶다”
– 김성장 세종손글씨연구소장

방학진 기획실장

국방부가 8월 25일 육군사관학교에 있는 홍범도 장군 등 독립전쟁 영웅 흉상을 전격 철거하려 했지만 온 국민의 저항으로 말미암아 4개월이 지난 지금도 영웅들의 흉상을 훼손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 연구소도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이름으로 때로는 민족문제연구소 이름으로 흉상을 지키기 위해 온라인·거리 서명운동, 스티커 제작·보급, 여러 차례의 걷기대회와 기자회견 등을 전개하며 독립전쟁 영웅 흉상 지키기에 온 힘을 쏟고 있다. 이러한 모든 활동은 당연히 연구소 후원회원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가능한 일이다.

마침 올해는 홍범도 장군 순국 80주기이다. 연구소와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는 장군님을 추모하기 위해 서울·대전·안산·광주·대구·춘천 등 전국 주요 도시에 추모부스를 설치·운영하기로 했다. 우리 연구소는 10월 25일부터 28일까지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앞에 부스 설치와 운영을 담당했다. 그러나 25일 부스를 설치하러 아침 일찍 현장에 나온 연구소 상근자들에게 서대문구청 직원은 “정치·사회적으로 민감한 사안으로 공원 이용객의 불편을 초래할 우려가 있어 공원 이용 질서 유지를 위해 장소 사용을 불허하오니 양해해 달라”는 공문을 건네주며 부스 설치를 불허했다. 전날까지의 전화 통화에서 추모 부스를 설치해도 된다는 구청의 입장이 돌변한 것이다. 이 소식을 듣고 여러 명의 기자들이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앞 부스 설치 현장에 도착했고 결국 물리적 충돌 없이 연구소는 부스를 설치할 수 있었다. 전화위복이었는지 홍범도 장군 부스 설치 소식은 뜻밖에 널리 알려졌다. 특히 연구소가 맡은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앞 부스에서 헌화는 물론 시민을 대상으로 한 캐리커처 그리기, 목판체험과 예쁜 손글씨(캘리그라피) 써주기 등의 부대행사로 인기가 높았다.

10월 하순이라 제법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시린 손으로 시민 한 명 한 명에게 정성껏 손글씨를 써주는 분들이 있었다. 바로 김성장 세종손글씨연구소장과 김성장 소장에게 손글씨를 배우는 세 명의 제자들이다. 어깨동무체라고도 부르는 신영복 선생님(1941~2016)의 민체(民體)를 가장 잘 구현한다는 평을 듣는 김성장 소장은 단순히 신영복 선생의 글씨만이 아니라 글자체에 담긴 정신도 연구하였다.

“신영복은 감옥에서 붓글씨에 몰두하게 되는데 한문 서체를 체계적으로 공부하면서 틈틈이 한글을 썼다. 그리고 한글의 서예적 완성으로 일컬어지는 궁체가 ‘귀족적 감수성’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 보고 궁체가 표현할 수 없는 새로운 정서를 표현할 수 있는 한글 서체를 모색하였다. 지배 집단의 이념이 미학적으로 완결된 것이 궁체인데 여기에 피지배 집단인 민중들의 사상과 감성을 담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깨달음에서였다.

그는 1980년대의 사회 변혁 요구와 연대적 감수성을 모두 표현하는 서체를 탄생시켰다. 그것이 바로 신영복의 한글 민체이다. 그는 붓글씨의 굵기와 선의 흐름을 변화시켜 역동적 민중미학을 최대한 구현하고자 하였다. 서양의 존재론적 패러다임이 심각한 결함과 모순을 안고 있다고 보고 동양적 전통 속의 관계론적 패러다임을 제시하였던바 이를 서예의 장법(章法)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이것은 민중적 공동체의 감수성이자 사회의 모순에 저항하는 개인과 세력들의 연대가 필요하다는 1980년대적 가치의 서예적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김성장, 「신영복 한글 서예의 사회성 연구」, 원광대 석사논문, 2007)

매주 토요일 촛불집회에 참석한 적이 있다면 김성장 소장과 제자들의 손글씨 부스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전직 국어교사였던 김성장 소장이 신영복의 민체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궁금했다.

“한글서체운동이라는 용어가 가능할 수 있을까요? 시대마다 한글의 서체가 변화하는데 훈민정음체에서 궁체로, 소설필사체로, 편지서체로 다양하게 변화하고 분화하는 가운데 사람들의 정서가 담기게 됩니다.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서체는 사각형의 규칙성과 일정한 굵기로 엄숙하고 권위적인 느낌의 서체라 할 수 있고, 궁체는 궁녀들의 절제된 삶이 반영된 서체로 곱고 우아한 서정을 담고 있습니다. 소설이나 편지의 글씨들은 쓰는 사람마다 다양한 조형과 선의 질감에 변화가 생겨 다양한 감성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다양한 서체 가운데 운동성을 가진 한글서체가 있을까요? 브레히트의 시와 연극이 시대의 아픔을 담아내듯이, 1980년대 민중판화처럼 진보적 가치를 담아내려는 예술이 있듯이 사회변화의 요구가 담긴 서체가 가능할까요? 저는 신영복의 한글 민체가 그러한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김성장은 단순히 집이나 사무실에 걸어두고 싶은 보기 좋고 예쁜 손글씨를 쓰는 것이 아니었다. 글씨 쓰기를 통해 사회 모순을 드러내고 개혁하고 싶었다. 그래서 각종 시위 현장에서 그를 만나는 것은 어렵지 않다.

“2000년에 충북 보은에서 동학행사를 하면서 깃발에 붓글씨를 쓴 것이 출발이었습니다. 이후 옥천에서 조선일보 반대 운동 행사에서, 그리고 박근혜 퇴진을 위한 광화문 활동, 전태일, 김남주, 노무현 등을 주제로 한 전시 작업, 농성자 집회 현장, 조국 수호 집회 등에서 글씨를 쓰거나 작품을 걸었습니다.”

개인적으로 김성장 소장을 처음 만난 곳은 조선일보 반대를 위한 옥천언론문화제에서였다. 옥천 전체가 김성장 소장이 쓴 조선일보 반대 만장으로 가득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초기 안티조선운동을 할 때 200장 가까운 깃발을 직접 붓으로 써서 광장을 가득 메우기도 했는데 깃발이 서 있는 모습 그 자체가 왁자지껄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더군요. 깃발 하나가 행사참가자 한 사람 몫이라고나 할까? 암튼 쓰면서도 가슴이 뜨거워지고 깃발을 대나무 끝에 매달아 세울 때 마치 세상의 정의가 바로 세워지는 듯해서 흥분되기도 했습니다.”

왕성한 사회 활동과 더불어 『선생님과 함께 읽는 정지용』과 시집 『내 밥그릇』, 『서로 다른 두자리』 등 창작활동을 펼쳐 2020년 제17회 거창평화인권문학상 수상이란 결실로 이어졌다. 심사위원회는 “문학과 예술을 통해 사회개혁과 노동현실을 고발하는 현장에 참여하고 있다”라고 그의 작품세계를 높이 평가했다.

김성장 소장은 『친일인명사전』 편찬, 식민지역사박물관 개관 등 연구소의 주요 행사 때마다 필요한 글을 정성껏 보내주고 있다. 연구소와의 인연은 언제부터일까.

“전교조 활동을 통해 민족문제연구소와 자연스럽게 인연이 닿았습니다. 친일문제가 우리 사회의 핵심 화두 중 하나라고 믿고 있었으니까요. 현재의 사회 갈등과 분열을 초래한 첫 번째의 원인이 해방후 친일파 청산 실패라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다른 단체 활동을 주로 하면서 민족문제연구소 활동에의 참여가 다소 적었는데 퇴직하고 나서 시간적 여유가 생겨 요즘 자주 참여하고 있습니다.”

퇴직 후 세종시로 이사하여 손글씨연구소를 운영하는 김성장 소장은 최근 연구소가 출간한 『신흥무관학교 교관 원병상 회고록』의 표지 글씨를 써주었고, 세종시에 있는 국가보훈부 앞에서 박민식 장관의 역사퇴행을 규탄하는 1인 시위도 참여하는 등 그야말로 동분서주하고 있다.

이처럼 전국을 내 집처럼 다니는 김성장 소장이지만 그의 손글씨에 대한 평가는 이미 국가공인이라 할 만하다. 오랫동안 태릉에 있던 국가대표선수촌이 2017년 9월 충북 진천으로 이전하여 문을 열었다. 새로 연 선수촌 로비에 ‘스포츠 강국에서 스포츠 선진국’이라는 제목의 문재인 대통령 어록은 김성장 소장의 작품이다. 가로 5m, 세로 2.5m의 대형작품으로 꼬박 한 달 걸렸다고 한다.

사범대학 시절 건강이 좋지 않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김성장 소장은 자신의 글씨가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려 한다. 신영복 선생이 민체를 창안했다면 김성장 소장을 비롯한 많은 시민 작가들이 민체를 배우고 익혀 사회 개혁의 현장에서 맹활약 중이다. 한글서체운동이라는 새로운 운동을 펼치고 있는 김성장 소장을 열심히 응원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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