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대관령 굽이길의 바위면에 새겨진 ‘도로개수 준공기념 석각(191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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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 남아있는 저들의 기념물 2]

대관령 굽이길의 바위면에 새겨진 ‘도로개수 준공기념 석각(1917년)’
제1기 치도공사의 막판을 장식한 이천 강릉선의 이등도로 개설공사

이순우 특임연구원

1917년 10월 7일은 그 시절에 흔히 ‘초도식(初渡式)’, ‘시도식(始渡式)’, ‘도교식(渡橋式)’ 따위의 이름으로 표현되던 한강인도교(漢江人道橋)의 개통식이 거행된 날이다. 굽이치는 한강의 한쪽에 모래톱이 넓게 펼쳐져 있었으므로 중간 부분에 제방 형태의 섬[이른바 ‘중지도(中之島, 노들섬)]’을 조성하고 이곳을 각각 노량진 쪽의 한강교(漢江橋, 큰 다리)와 용산 쪽의 한강소교(漢江小橋, 작은 다리)로 연결하는 방식으로 이 다리는 만들어졌다.

이 자리에는 하세가와 조선총독(長谷川 朝鮮總督)을 비롯하여 야마가타 정무총감(山縣 政務總監), 마츠카와 조선주차군사령관(松川 朝鮮駐箚軍司令官), 미노베 조선은행총재(美濃部 朝鮮銀行總裁), 우사미 토목국장(宇佐美 土木局長) 등이 참석했고, 조선귀족(朝鮮貴族)으로는 이완용 백작(李完用 伯爵)과 조중응 자작(趙重應 子爵)도 행사장에 함께 했다. 그런데 이날의 행사는 한강인도교의 개통식이기에 앞서 일찍이 조선총독부가 철도건설, 토지조사, 축항(築港)과 더불어 4대 급무사업(四大急務事業)의 하나로 추진해오던 제1기 치도사업(第一期 治道事業)의 완성을 경축하는 내용을 동시에 담고 있었다.

한강인도교는 ‘일등도로 경성 인천선(一等道路 京城 仁川線)’을 겸하여 ‘이등도로 경성 이천선(二等道路 京城 利川線)’ 가운데 미완성으로 남아 있던 한강 구간을 마지막으로 연결하는 것으로, 그 자체의 완성은 곧 1911년 이후 6년간이나 지속해왔던 제1기 치도공사사업의 마무리를 뜻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매일신보???? 1917년 10월 7일자에 수록된 「조선(朝鮮)의 치도계획(治道計劃)」 제하의 기사에는 총독관방 토목국장(總督官房 土木局長, 당시 내무부 장관 겸직) 우사미 카츠오(宇佐美勝夫)가 제1기 치도사업의 의미와 목적에 대해 설파한 내용이 다음과 같이 정리되어 있다.

총독부 설치(總督府 設置)의 초(初)에 당(當)하여 폐퇴위미(廢頹萎靡) 기극(其極)에 달(達)한 당시(當時)의 조선(朝鮮)으로 질서(秩序) 있는 발달(發達), 건전(健全)한 진화(進化)를 수(遂)케 하기 위(爲)하여 시설계획(施設計畫)된 사항(事項)은 기수(其數)가 본래(本來) 불소(不少)하였으나 기중(其中)에 급무중(急務中)의 급무사업중(急務事業中)의 사업(事業)으로 제일(第一)에 착수(着手)된 대사업(大事業)이 사(四)가 유(有)하니 철도건설(鐵道建設), 토지조사(土地調査), 축항(築港) 급(及) 치도사업(治道事業)이 시(是)라. 토지조사(土地調査)는 종말(終末)에 근(近)하였으나 상금(尙今) 계속중(繼續中)이오, 철도(鐵道)도 수년전(數年前) 일천리(一千哩; 1,000마일)의 개통(開通)을 견(見)하였으나 예정(豫定)의 계속계획(繼續計畫)은 아직 완료(完了)치 않았고, 축항(築港)도 부산(釜山), 인천(仁川)과 여(如)히 주요항만(主要港灣)은 상(尙) 공사중(工事中)이나 일천만원(一千萬圓)의 일기치도(一期治道)는 금일(今日)로써 전부(全部)의 준공(竣工)을 고(告)함을 득(得)하였다.
…총독부(總督府) 설치 당시(設置 當時)의 조선(朝鮮)은 하지방(何地方)을 견(見)하든지 차량(車輛)을 통(通)할 만한 도로(道路)는 없고 조선(朝鮮)의 도로도(道路圖)는 태(殆)히 백지(白紙)이었었다. 무론(無論) 평양 진남포간(平壤 鎭南浦間), 전주 군산간(全州 群山間), 광주 목포간(光州 木浦間), 기타 수선(其他 數線)과 여(如)한 구한국정부시대(舊韓國政府時代)에 개수(改修)된 것도 있지만은 차등(此等)은 일지방 소구간(一地方 小區間)에 대(對)하여 단편적(斷片的)의 개수(改修)로 기(其) 연장(延長)도 총계(總計) 이백리(二百里)에 불과(不過)하여 조선(朝鮮)의 도로전체(道路全體)로 견(見)하면 역시(亦是) 백지(白紙)의 역(域)을 탈(脫)하지 못하였다. 고(故)로 차(此) 백지(白紙)의 상(上)에 대체(大體)의 윤곽(輪廓)을 화(畵)하는 사(事)가 제일기 치도(第一期 治道)의 주안(主眼)되는 바로 종(從)하여 도(道)의 구획(區畫)과 일지방(一地方)의 이해(利害)에 구니(拘泥)되지 않고 조선 전반(朝鮮 全般)의 교통망(交通網)에 조(照)하여 최급요(最急要)한 간선도로(幹線道路)를 통일적(統一的)으로 개수(改修)함을 목적(目的)으로 하였다.
차(此) 일기치도(一期治道)는 명치(明治) 44년(1911년)에 착수(着手)하여 6년유반(年有半)의 공정(工程)을 진(進)하여 금일(今日) 기(其) 전부(全部)의 준공(竣工)을 고(告)한 공비총액(工費總額) 일천만원(一千萬圓), 개수리수(改修里數) 685리(里)라.(하략)

제1기 치도공사의 세부적인 진행상황에 대해서는 조선총독부가 정리 편찬한 『조선토목사업지(朝鮮土木事業誌)』(1937), 117쪽에 「제1기 치도공사 실적표(實績表)」가 일목요연하게 잘 정리되어 있으므로 이 자료를 참고하여 살펴볼 수 있다. 그런데 이 표에서 공사기간도 가장 길었고 준공시점도 가장 늦었던 노선(路線)이 어디였는지가 궁금하여 찾아봤더니, 이 가운데 단연 ‘이천 강릉선(利川 江陵線, 190.472km)’ 구간이 제일 두드러진다.

그렇다면 전체 공사구간이 이보다 훨씬 더 긴 곳도 3년 안팎이면 대략 준공에 이르렀던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과는 달리, 이곳만은 유달리 꼬박 5년 4개월(1912년 4월~1917년 8월)이라는 최장기간이 소요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여기에는 무엇보다도 예로부터 ‘아흔아홉 구비’로 일컫던 ‘대관령(大關嶺)’이라는 자연적인 난관이 이 공사구간에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이와 관련하여 『대정원년 조선총독부통계요람(大正元年 朝鮮總督府統計要覽)』(1912), 301쪽에 수록된 「(조선총독부 직할 치도공사)개수도로」의 표를 살펴보니, ‘이천 강릉 구간’의 당초 ‘준공예정년월(竣工豫定年月)’은 ‘대정 5년(1916년) 3월’이었던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지형적인 제약요인으로 인해 실제 공사의 마무리는 예정보다 지연되고 있었던 것이다.

『매일신보』 1916년 7월 22일자에는 강릉생(江陵生)이라는 필자의 기고문인 「대관령(大關嶺)에서(1)」라는 글이 수록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이 무렵 대관령 치도공사의 진행상황을 이렇게 적어놓고 있다.

대관령(大關嶺)은 영동(嶺東) 6군(郡), 영서(嶺西) 7군(郡)의 계령(堺嶺)이니 상(上) 30리(里), 하(下) 30리(里)라 칭(稱)하는 준험(峻險)한 봉만(峰巒)이라. 명치(明治) 41년경(年頃; 1908년경)까지는 폭도(暴徒)의 소굴(巢窟)로 토벌관헌(討伐官憲)의 누차(屢次) 고전(苦戰)하던 처(處)니 …… 중선횡관 이등도로(中鮮橫貫 二等道路)는 영서(嶺西)는 평창(平昌)에서 대관령(大關嶺)까지 150리(里)가 준공(竣工)하고 영동 강릉(嶺東江陵)에서 약(約) 40리(里) 영록(嶺麓)의 지점(地點)까지 5월말(月末)에 준공(竣工)하고 목하(目下) 산복(山腹)의 개수공사중(改修工事中)인데, 전술(前述)과 여(如)히 상(上) 30리(里), 하(下) 30리(里), 해발(海拔) 3,900척(尺)의 고령(高嶺)인 고(故)로 차(此) 공사(工事)의 청부인(請負人) 시미즈 탓페이 씨(淸水辰平氏)는 내지인(內地人) 사무원(事務員) 급(及) 공부(工夫), 석부(石夫) 40명(名), 선인(鮮人) 1,300명(名)의 다수(多數)로 공사(工事)를 독려(督勵)하여 착착(着着) 공사(工事)는 진척중(進陟中)이더라. 금년(今年) 12월(月)까지에는 전선(全鮮)의 공사(工事)가 준성(竣成)될 모양(模樣)인즉 대관령(大關嶺)의 준판험로(峻坂險路)도 마차(馬車) 인력거(人力車)의 교통(交通)이 용이(容易)하여지고 일반교통자(一般交通者)는 지대(至大)한 이편(利便)을 득(得)함에 지(至)하겠으니(하략).

여길 보면 이 당시에 평창~대관령 구간(150리)은 이미 완공되었고 강릉~대관령 산기슭 구간(40리)도 두 달 앞선 그해 5월말에 공사를 마친 상태였으나, 다만 대관령 산길만은 한창 개수공사가 진행중이며 전체 제1기 치도공사는 늦어도 12월까지는 대략 마무리될 모양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이 공사는 1917년 8월에 이르러서야 최종 마무리되는데, 이는 이러한 지형적 제약 이외에 ‘대홍수(大洪水, 1916년 8월 10일 발생)’라는 돌발변수가 생겨난 탓이었다.

『매일신보』 1916년 9월 8일자에 수록된 「대관령 도로공사(大關嶺 道路工事)」 제하의 기사에는 수재로 인하여 일시 중지되었던 도로개수공사의 현장이 다시 수습되는 과정이 짤막하게나마 다음과 같이 채록되어 있다.

대관령 도로공사(大關嶺 道路工事)는 수재(水災)로 인(因)하여 중지(中止)이던 바 총독부 토목국 서기(總督府 土木局 書記) 나카가와 타케사부로 씨(中川竹三郞氏)가 출장시찰(出張視察)한 후(後) 본월(本月) 2일(日)부터 공사(工事)에 착수(着手)하였고 구산 이하(邱山 以下) 도로(道路)는 군수 이승근 씨(郡守 李承瑾氏)가 위선(爲先) 교통편리(交通便利)를 여(與)하기 위(爲)하여 성산(城山), 상구정(上邱井), 하구정(下邱井) 3면(面)에 지휘(指揮)하여 수선(修繕)하는 중(中)이더라.

대관령 정상(강릉시와 평창군의 경계지점)에서 1.5킬로미터가량 영동고속도로의 옛길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도로의 북쪽에 자리한 바위면에 “南無阿彌陀佛(나무아미타불)”이라는 글자가 있고 그 옆으로 나란히 “준공기념(竣工紀念, 1917년 8월 30일)”이라고 새긴 석각(石刻) 하나가 눈에 띈다. 이것은 곧 조선총독부가 시행한 제1기 치도공사와 관련하여 드물게 남아 있는 흔적의 하나이다.

여기에는 이천 강릉간의 도로개수에 관한 연혁과 아울러 공사 막바지에 느닷없는 수해를 만났으나 공사청부인 시미즈 탓페이가 큰 손실을 무릅쓰고 공사를 재개한 사연이 서술되어 있다. 그리고 애석하게도 그가 막판에 병으로 숨지는 바람에 그의 동생인 시미즈 토요마츠(淸水豊松)가 넘겨받아 최종 마무리한 과정에 대한 내용도 함께 포함되어 있다.

여기에 나오는 시미즈 탓페이의 정체에 대해서는 『부산일보』 1917년 9월 15일자에 수록된 「[강릉소개호 제2(江陵紹介號 第二)] 강릉인물월단(江陵人物月旦)(2)」의 내용에 다음과 같이 자세히 소개한 것이 남아 있다.

[토목청부업(土木請負業) 시미즈 탓페이 군(淸水辰平君)]
… 생각건대 대정 2년(1913년)부터 강릉 이천간(江陵利川間)의 이등도로(二等道路) 40리(里)가 총독부 직영사업(總督府 直營事業)으로 개축(改築)되어지자마자 이 공사(工事)를 오쿠라구미(大倉組)의 손에 의해 행하는 것이 되고 오쿠라구미(大倉組)는 역시 군(君)으로 하여금 40리(里) 가운데 8리(里)의 공사(工事), 게다가 대한령(大漢嶺; 대관령의 착오)이라고 하는 대난공사(大難工事)를 행(行)하게 했던 것이다. 그런데 공사(工事)가 장차 준공(竣工)을 고(告)하려 하기에 임(臨)하여 대홍수(大洪水)의 피해(被害)는 군(君)으로 하여금 수만원(數萬圓)의 결손(缺損)을 주었던 것이지만, 군(君)은 이것의 복수공사(復修工事)에 대해 악전일문(鐚錢一文)의 요구(要求)도 하지 않고 자복(自服)을 갈라서 견사복구(見事復舊, 훌륭히 복구)시킴과 동시(同時)에 본년(本年) 4월(月) 천명(天命)에 따라 56세(歲)를 일기(一期)로 병몰(病歿)했던 것이다. 군(君)의 죽음에 대해서는 누구도 애석해 않는 자(者)가 없었고 군(君)이 생전중(生前中)에 기다(幾多)한 공공사업(公共事業)에 금품(金品)의 기증(寄贈)을 하여 이를 지원했던 일은 지금도 여전히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니 군(君)은 죽어서 후세(後世)에 미명(美名)을 남기고 있다. 이러한 미명(美名)은 만금(萬金)보다 더욱 귀(貴)하며, 실(實)로 안타까운 인물(人物)이었다. 그런데 잔공사(殘工事)는 군(君)의 영제(令弟) 토요마츠 군(豊松君)이 계승(繼承)하여 유감(遺憾)없이 준공(竣工)시켰으며 이 무렵의 검사(檢査)도 마쳤는데, 군(君) 생전(生前)의 사적(事蹟)을 추상(追想)하여 기 공적(其 功績)을 영원(永遠)히 기념(記念)토록 하고자 각 유지(各有志)의 발기(發起)에 의해 기념비(記念碑)가 세워져 있다.

여기에는 그의 죽음과 관련하여 그가 남긴 공적을 영원히 기념하고자 기념비를 세웠다고 하는 구절이 나와 있는데, 그렇다면 저 바위면에 새겨진 ‘석각(石刻)’은 거창하게 “대관령 도로개수 준공기념비”라고 부르기보다는 실상 “일본인 토목업자 시미즈 탓페이 공적기념비”라고 표시하는 것이 딱 적합한 표현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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