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현충원에 묻힌 이야기] 민복기와 이초생, 상록회 4인이 함께 안장된 모순된 상황
대전현충원 국가사회공헌자묘역 18호에 안장된 민복기는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입니다. 민복기가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린 데는 민족혁명당 활동으로 체포된 이초생의 재판과 강원도 춘천의 비밀결사 조직 상록회(常綠會) 사건 재판을 들고 있습니다.
독립운동 나선 이초생과 상록회
이재상으로도 불린 이초생은 1930년 상해로 건너간 후 1935년 12월에 문일민의 권유로 조선민족혁명당에 입당한 후 독립운동에 나섰습니다.
1938년에는 일본군에 밀려 중국 한구(漢口)에서 중경(重慶)으로 후퇴하는 도중, 사천성(四川省)에서 조선민족혁명당 당원 60여 명과 함께 3.1절 기념행사를 거행하고 애국가를 불렀고, 도산 안창호 선생의 유지를 계승해 분투를 역설하는 등 독립정신 계몽에 적극적으로 앞장섰습니다.
그러다 그해 10월, 일본군 점령 아래 있는 남경(南京)에 침투해 공작 활동을 전개하던 중 일본 경찰에 체포됐습니다. 이초생은 국내로 압송돼 1939년 12월 1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습니다.
상록회는 강원도 춘천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일제의 민족차별교육에 반대하며 1937년 3월에 조직한 항일 학생결사 조직이었습니다. 상록회의 활동은 월례회·토론회·독후감발표회 및 귀농운동 등으로, 주로 독서 활동을 통해 항일의식을 고양하는 것이었습니다.
상록회 회원들은 졸업 후에도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각기의 정착지에서 새로운 상록회 조직을 결성하면서 춘천뿐 아니라 만주 등지에서도 독립운동을 전개했습니다.
1938년 가을, 춘천에서 상록회의 조직과 활동이 일경에 발각돼 무려 137명이나 연행됐고, 그중 12명이 치안유지법 위반 등으로 경성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았습니다.
1939년 12월 27일에 진행된 선고 재판에서 남궁태, 이찬우, 문세현, 용환각, 백흥기, 조규석, 배근석, 조흥환, 이연호, 신기철 10명은 징역 2년 6개월의 형을 받았고, 전홍기, 차주환은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받았습니다. 이중 백흥기는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1940년경 스무 살의 나이에 옥사했습니다.
조선총독부 판사, 민복기
이초생의 재판은 조선총독부 판사 부옥영개(釜屋英介)를 재판장으로, 송전수마(松田數馬)와 화기청승(和氣淸勝) 판사가 배석해 진행했습니다. 그런데 선고를 앞두고 판결문까지 작성한 시점에 배석판사가 바뀌었습니다.
이즈음인 1939년 12월에 경성지방법원 예비판사로 임명된 민복기는 같은 달 19일에 진행된 이초생의 제2회 공판에 참여하면서 공판조서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12월 27일에 진행된 상록회 사건 선고공판에서는 이초생의 2회 공판을 맡았던 재판부가 판결문을 작성하면서 이때는 민복기도 판결문에 이름을 올리게 됐습니다.
이런 일에 대해 민복기는 “일제치하에서 한국인 법관들에게 한국인 사상사건에 간여 못하도록 하는 것은 하나의 불문율이었다”고 말하며 “내가 임관된 뒤 얼마 안 돼 백백교 사건에 딱 한 번 배석한 일이 있었을 뿐 특히 독립운동 사건에는 얼씬도 못 하게 했다”고 부인했습니다.
민복기는 독립운동사건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부인했지만, 이초생 재판의 공판조서와 상록회 사건의 판결문에서 ‘민복기’의 이름을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어딘가에 서명을 한다는 것, 어떤 선언에 자신의 이름을 올리는 것, 어떤 문서에 자신의 이름을 남긴다는 것은 그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는 것을 의미입니다.
이초생은 ‘조선민족혁명당’에 자신의 이름을 걸고 입당해 활동하다가 일경에 체포돼 고초를 당했습니다. 춘천고등보통학교 학생들도 자신의 이름을 걸고 ‘상록회’에 입회해 활동했고, 탄압을 당하며 그 책임을 졌습니다.
반면 민복기는 일제의 녹을 먹으며, 조선총독부 판사로 독립운동가에 대한 재판에 자신의 이름을 올렸습니다. 심지어 책임을 지고 대가 또한 치려야 하는 그는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기는커녕 거짓말까지 서슴없이 했습니다.
민복기는 이 재판 이후인 1940년 5월 경성지방법원 정식 판사가 됐고, 고등관 7등에서 시작해 고등관 5등까지 승진을 했습니다. 1945년 6월에는 경성복심법원 판사까지 돼 해방될 때까지 조선총독부의 녹을 먹었습니다.
불과 60m
해방 후, 독립운동가를 처벌하는 재판에 참여했던 민복기는 일제에 부역한 죗값을 치르기는커녕 법관으로 승승장구했습니다. 그는 법무차관, 검찰총장을 거쳐 1963년 4월 22일부터 1966년 9월 25일까지 16대~18대 법무부장관을 지냈고, 1968년 10월 21일 제5대 대법원장에 취임해 제6대 대법원장까지 연임해 10년 2개월이라는 역대 최장수 대법원장이라는 기록도 세웠습니다.
민복기가 대법원장으로 있던 1975년 4월 8일, 이른바 인혁당 재건위 사건 8명에게 사형을 확정한 상고심에 재판관으로 참여해 사법살인을 저지른 전력도 가지고 있습니다.
민복기는 2007년 7월 13일, 94세의 나이로 사망했고, 대법원장 등을 지낸 공로로 대전현충원 국가사회공헌자 묘역에 안장됐습니다. 친일 판사가 국립묘지에 안장된 것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더 어처구니없는 일은 그가 참여한 재판에서 독립운동의 대가로 유죄를 받고 징역살이를 한 독립운동가들도 대전현충원에 안장돼 있다는 사실입니다.
춘천 상록회 사건 관련자 중에서 용환각 애국지사는 독립유공자 1묘역 427호에, 이찬우, 이연호, 신기철 애국지사는 각각 독립유공자 제2묘역 245호, 764호, 1070호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이초생은 독립유공자 제1-1묘역 497번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제1-1묘역은 국가사회공헌자묘역이 샌드위치처럼 위아래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조선총독부 판사로 이초생을 유죄로 판결한 재판에 참여했던 민복기 판사와 이재상 애국지사가 같은 곳에 안장된 것과 마찬가지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실제 두 무덤의 거리는 직선거리로 60m에 불과합니다. 민복기의 묘가 이재상 지사의 묘보다 위쪽에 자리하고 있어 친일 판사의 묘가 독립운동가의 묘를 내려다보고 있는 형국입니다.
민복기 이외에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규정한 친일반민족행위자나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여러 명이 대전현충원뿐 아니라 서울현충원에도 안장돼 독립운동가와 같이 국립묘지에 안장돼 있는 사실은 이미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법정에서 친일 판사와 피의자로 만난 애국지사가 이렇게 가까이 안장돼 있다는 사실에 더욱 기가 찹니다. 국립묘지법에는 국립묘지의 영예성을 훼손한다고 인정한 사람은 안장대상심의위원회에서 판단해 국립묘지 안장에서 제외할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독립운동가를 재판한 친일 판사가 독립운동가와 함께 안장돼 있는 대전현충원의 모순된 상황이 바로 국립묘지의 영예성을 훼손하고 있습니다.
[참고 자료]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46>, 2001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2009
이초생 제2회 공판조서 및 판결문(1939.12.19)
상록회 사건 남궁태 외 11인의 판결문(1939.12.27)
민복기 ‘나의 법관시절5’, <법률신문>(1981.09.14)
임재근 기자
<2023-12-08>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불과 60미터… 친일판사와 애국지사의 불편한 동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