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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위대한 독립운동가 형을 두고 ‘전향’… 특이한 친일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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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여운홍

검찰공화국인 윤석열 정권은 야당 정치인뿐 아니라 몽양 여운형 같은 독립운동가들의 ‘약점’도 파헤치고 있다. 실상은 약점이랄 게 없는데도, 여운형이 독립유공자 서훈을 두 번 받은 것을 문제 삼고 있다. ‘추가 서훈’으로 표현해야 할 것을 ‘이중 서훈’으로 몰아세우며 대단한 문제라도 있는 듯한 인상을 조성하고 있다.

국가보훈처의 금년 3월 5일 자 보도자료에 나타나듯이, 박민식 당시 보훈처장은 여운형이 2005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을 받은 데 이어 2008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등급)을 받은 일을 ‘이중 서훈’으로 규정했다. 그러면서 훈격 재조정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국가보훈부로 승격된 뒤인 지난 8월 14일 YTN 라디오 <뉴스킹 박지훈입니다>에 출연한 박민식 장관은 “상훈법 제4조에 의하면 이중 서훈이 금지”돼 있다며 여운형을 문제 삼았다. 상훈법 제4조는 “동일한 공적에 대하여는 훈장 또는 포장을 수여하지 아니한다”고 했지, 추가 서훈을 금지하지는 않았다. 이런 법률 조문에 익숙해 있을 검사 출신 박 장관이 이를 단순한 ‘이중서훈 금지 조항’으로 소개하는 것은 정직하지 않다고 본다.

여운형에 대한 첫 번째 서훈은 해방 이전의 독립운동을 근거로 했고, 두 번째 서훈은 해방 이후의 정부 수립 및 민족통합운동을 근거로 했다. 8·15 해방이 불완전했으므로 그 후에는 독립운동 제2라운드가 분단 반대 및 친일청산 등을 쟁점으로 전개됐다. 두 번째 서훈은 첫 번째 서훈 때 고려되지 않았던 1945년 이후의 활동에 근거했으므로, “동일한 공적”에 근거한 중복 서훈으로 보기는 힘들다.

위 방송에서 박민식 장관은 여운형과 홍범도를 거명하며 “유일하게 딱 두 분이 두 번 훈장을 받은 분”이라고 강조했지만, 사실이 아니다. 유관순 열사는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3등급)을 받은 데 이어 2019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다. 의열단원 김재호(1914~1976)는 1980년에 건국포장을 받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처음 받은 서훈이 실제 공적에 비해 낮다고 판단되면, 이처럼 얼마든지 추가 서훈을 할 수 있어야 마땅하다.

윤석열 정권이 주장하는 여운형 이중 서훈은 실상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 이것을 약점으로 몰아세우려면, 상훈법을 뜯어고쳐야 할 뿐 아니라 홍범도를 공격했듯이 유관순도 공격해야 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벌어진다.

형 여운형을 따라다니며 독립운동한 여운홍, 그러나

▲ 여운홍 ⓒ 자료사진

그런데 여운형에게는 ‘이중 서훈’이 아닌, 가슴 아픈 진짜 ‘약점’이 있다. 여운형보다 다섯 살 적은 동생인 여운홍이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돼 있다는 점이다.

<친일인명사전> 제2권 여운홍 편은 “1941년 9월 전시체제하에서 조선인들의 전쟁 협력을 이끌어내기 위해 조직한 전시체제기 최대의 민간단체인 조선임전보국단의 발기인(경성)으로 참여했다”고 설명한다.

그런 뒤, 1942년 12월에 조선임전보국단의 ‘미·영 타도 대연설회’에서 발언하고, 1942년 12월에 조선총독부 기관지 발행사인 매일신보사의 ‘대동아전쟁의 전망’ 좌담회에 참석하고, 1943년 11월에 임시지원병제도익찬위원회가 서울 종로에서 벌인 가정방문 행사에 참여한 일 등을 열거한다.

이 외에 친일 기고 활동도 있었다. 1942년 2월호 <조광>에 기고한 ‘대동아전과 우리의 결의 – 신성한 의무’에서 “대동아전쟁은 숭고하고 위대한 목적을 위한 거룩한 성전”이라며 전쟁 지원을 독려했다.

금액이 많지는 않을지라도 대가 지급이 따르는 기고 활동도 했다. 친일재산이 발생하는 수익성 부역행위에도 가담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부인할 길이 없는 친일파다.

여운홍은 여운형에 관한 역사 서술에 자주 등장한다. ‘형을 따라다닌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을 정도다. 여운홍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여운형의 동생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형의 활동을 열심히 도왔기 때문이기도 했다.

형인 여운형은 21세 때인 1907년에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해 고향인 경기도 양평의 장터를 돌아다니며 연설을 했다. 강연의 요지는 ‘담배를 끊고 그 돈으로 나랏빚을 갚자’는 것이었다.

이때 16세였던 여운홍은 형을 위해 모니터링 활동을 했다. 독립운동가이자 민주화운동가인 이기형의 <여운형 평전>은 “여운홍은 형님의 연설을 들은 청중의 동향을 알아보았고, 잘된 점과 부족한 점을 지적해주었다”고 설명한다. 연설문을 작성하고 행사를 기획하는 이런 모습은 여운홍의 이후 삶에 계속해서 나타난다.

여운홍은 형의 항일운동을 돕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자신도 직접 이에 참여했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에 열린 1919년 파리평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한 한국 대표단에 김규식과 더불어 28세 된 여운홍이 있었다.

이때 여운홍은 독립청원서 작성도 담당했다. 김동진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겸임교수의 <파란눈의 한국혼 헐버트>는 여운홍이 1949년 8월 25일에 작성한 호머 헐버트 추모문을 근거로 “헐버트와 여운홍은 1918년 11월 16일 뉴욕의 한 호텔에서 만나 1919년 파리에서 개최되는 강화회의에 한국 문제가 상정될 것으로 보고 강화회의에 보낼 독립청원서를 둘이서 밤을 새우며 기초하였다”고 기술한다.

원리원칙 없는 행보… 결국 친일인명사전에 올라

▲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 ⓒ 민족문제연구소

이처럼 독립운동을 했던 인물이 훗날 친일파로 전향해 군국주의 전쟁 지원을 촉구하고 지원병 독려를 위한 가정방문 행사에 참여했다.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이 이런 일에 가담했으니, 그렇지 않은 일반 친일파에 비해 더욱 많은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친일의 길에 접어든 이후에 여운홍은 일반 친일파에게서는 보기 힘든 또 다른 행보를 걸었다. 대부분의 친일파들이 해방 뒤에 친일청산을 방해하고 남북분단을 지지한 것과 달리, 여운홍은 해방이 되자마자 자연스레 ‘독립운동 제2라운드’에 가담했다. 형인 여운형이 독립운동 지도자의 위상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해방 당일인 1945년 8월 15일 발족된 여운형의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에 참여한 여운홍은 형의 ‘사신’ 역할도 했다. 인천에 상륙할 미군에 대한 여운형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여운형 평전>은 “몽양은 백상규·여운홍·조한용 세 사람에게 건준 위원장의 이름으로 된 환영 메시지를 휴대시켜 인천 앞바다 덕적도 밖 해상에 파견하였다”고 설명한다.

여운홍이 독립운동 제2라운드에 참여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가 분단반대 운동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불완전한 해방의 결과로 남북이 분단됐으므로 분단을 극복하는 것이 해방의 완성이었다. 여운홍은 해방의 완성을 위한 활동에도 참여했다.

<친일인명사전>은 그의 1948년 활동을 언급하는 대목에서 “3월 남한의 단독선거를 반대하며 통일독립운동자협의회 발기회 조직에 참여했으며, 4월 평양에서 개최된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 참석차 북한에 다녀왔다”고 설명한다. 백범 김구가 김규식·김일성·김두봉과의 4자회담을 위해 평양을 방문한 그달에 여운홍도 이북에서 남북통합운동을 벌였던 것이다.

이런 이력은 여운홍이 친일파에서 제2라운드 독립운동가로 ‘재전향’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인가를 궁리하게 만든다. 재전향이든 아니든, 그의 해방 이후 행적이 일반적인 친일파와 판이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해방 이후 그의 행보에 조금의 흠결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50년 제2대 총선에서 당선된 뒤에는 이승만의 자유당에서 선전부장으로 활동했다. 박정희의 5·16 군사쿠데타로 의원 자격을 상실한 뒤에는 군부 정권인 민주공화당의 고문이 됐다.

여운홍은 원리원칙 없이 경계를 넘나들었다. 뉴욕과 파리까지 날아가서 독립운동을 벌인 사람이 훗날 서울 종로에서 지원병 참여를 촉구하는 가정방문 활동에 참여했다. 그러다가 해방이 되자마자 제2의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독립운동과 친일의 경계를 마구 넘나들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친일이라는 반사회적·반민족적 행적으로 인한 비판만큼은 두고두고 피할 수 없는 인물이다.

김종성 기자

<2023-12-24>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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