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이윤용
전쟁터에 나갔다가 상처를 입고 병상에 누운 사람이 있었다. 그는 상처를 만지면 만질수록 아프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슬펐다. ‘님’을 위해 전사하지 못하고 살아서 돌아왔다는 자책감 때문이었다. 친일파 조명암이 작사하고 친일파 박시춘이 작곡하고 친일파 백년설이 부른 <즐거운 상처>에 등장하는 한국인이 바로 그다.
한국인 징병제(1943년 8월 1일)가 시행되기 전인 1942년에 나온 작품이므로, 노래 속의 남성은 징병이 아닌 지원병 형식으로 강제동원됐다고 볼 수 있다. 그는 히로히토 일왕(천황)을 위해 전장에서 죽지 못한 스스로를 탓하며 “상처로 돌아온 몸 어이 할손가 / 나머지 팔다리에 불을 붙일까 불을 붙일까”라는 생각까지 해봤다.
그의 소원은 전쟁터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불현듯 가고 싶은 저 땅의 전지(戰地)”라며 애달파 했다. 그런 뒤 특이한 행동을 했다. 일왕(천황)이 준 훈장에 절을 하는 것이었다. “훈장에 절을 하며 눈물 집니다 눈물 집니다”라는 구절과 함께 노래는 끝난다.
일본이 전쟁 목적을 위해 퍼트린 이런 노래에서도 나타나듯이, 일제의 훈장은 억압과 착취하에 놓인 한국인들이 영예와 자부심을 느끼도록 하는 데 활용됐다. 이는 식민지 한국인들의 심리를 마비시키는 수단이었다. 동시에, 친일세력을 구축하는 도구로도 이용됐다. 일반 한국인들에게는 마약 같은 환상을 심어주는 용도로, 친일파에게는 충성을 요구하고 보상을 약속하는 용도로 쓰였다.
제국주의 시절 일본의 훈장은 대훈위 국화장, 훈1등 욱일동화대수장, 금치훈장, 욱일장, 보관장, 서보장, 문화훈장으로 구분됐다. 최고 훈장인 대훈위 국화장은 목에 걸어주는 훈장이라 하여 목덜미 ‘경’이 들어간 ‘대훈위 국화장 경식(頸飾)’과, 끈이 달렸다 하여 끈 ‘수’가 들어간 ‘대훈위 국화장 대수장(大綬章)’으로 구분됐다. 일본은 최고 중에서도 최고인 대훈위 국화장 경식은 한국인에게 수여하지 않았다. 한국인에게 준 것은 대훈위 국화장 대수장 이하다.
일본 훈장을 받았다고 해서 무조건 친일파로 볼 수는 없다. 고종 임금도 1897년에 외교 의례 차원에서 대훈위 국화장 대수장을 받은 일이 있다.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와 민족문제연구소에 의해 친일파로 규정되지 않은 일부 황족을 제외하고, 친일파 가운데서 가장 높은 훈장을 받은 이는 이완용이다. 사망 다음 날인 1926년 2월 12일 대훈위 국화장 대수장이 추서됐다.
친일파 중에서 이완용 다음의 공동 2위 그룹은 훈1등 욱일동화대수장을 받은 이들이다. 그중 하나는 이완용과 미묘한 관계인 친일파 이윤용이다. 이름에서 느낄 수 있듯이 이윤용은 이완용의 형제다. 이윤용은 이완용보다 3년 빠른 1855년에 태어났다.
이윤용은 이완용의 친형제는 아니다. 이완용을 입양한 친척인 이호준의 친아들이다. 이호준이 친아들인 이윤용을 두고도 열 살 된 이완용을 입양한 것은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해서였다. 가문의 대를 잇는 일은 어느 정도의 재산을 보유한 가문에서 걱정하는 일이었다. 가문이 보유한 노비와 토지를 관리하고 조상의 제사를 주재할 후계자를 필요로 하는 집안에서 그런 걱정을 했다.
그런 고민을 해야 할 정도인 명문대가 이호준의 집에 입양된 것은 소년 이완용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사교육비가 없어 자기가 직접 아들을 가르쳐야 했던 친부 이호석 밑에서 계속 성장했다면, 이완용의 삶은 크게 달라졌을 수도 있다.
일제 침략을 위한 분위기 조성하는 방식으로 친일
이윤용은 자신이 친아들인데도 아버지가 대를 잇기 위해 이완용을 입양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이윤용은 아버지의 서자였다. 그래서 세 살 어린 친척이 적장자로 입양되고 후계자 수업을 받는 과정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윤용은 나이상으로는 이완용의 위이지만, 서자이기 때문에 이완용에게 밀렸다. 이로 인해 이완용과 미묘한 관계일 수밖에 없었던 그는 이완용 못지않은 친일 활약상을 남겼다. 그런 이윤용에게 일본은 훈1등 욱일동화대수장과 각종 특권을 부여했다.
이윤용은 후계자는 되지 못했지만, 가문의 후광은 꽤 많이 입은 편이다. 사별하기는 했지만 흥선대원군의 서녀와 결혼한 것은 집안의 뒷받침이 있지 않고는 힘든 일이었다.
그는 열세 살 때인 1868년에 왕족과 외척을 담당하는 돈령부의 종9품 참봉이 되고, 2년 뒤 군주의 친위 군관인 별군직이 됐다. 30세 때인 1885년에는 전라도병마절도사가 됐다. 33세 때인 1888년에는 도읍을 관리하는 한성부판윤(정2품)이 되고, 39세 때인 1894년에는 형조판서(정2품)가 됐다. 과거에 급제하지 않고도 30대 초반에 장관급이 됐으니 친가와 옛 처가의 후광을 입었다고 볼 수 있다.
적장자 이완용의 친일은 늑약 체결을 주도하는 방식으로 전개됐다. 외교권을 넘기는 1905년 을사늑약(을사보호조약)을 주도해 을사오적이 되고, 주요 내정권을 넘기는 1907년 정미조약(한일신협약)을 주도해 정미칠적이 되고, 나라를 통째로 넘기는 1910년 병합조약(한일합병조약)을 주도해 경술국적 반열에 올랐다.
이완용이 공금 유용 혐의와 부친상(이호준)으로 관직을 떠났다가 복귀한 것은 을사늑약 1년 전인 1904년 11월이다. 학부대신이 되어 조약에 서명할 권한을 갖게 된 것은 늑약 두 달 전인 1905년 9월이다. 이완용이 을사늑약을 계기로 친일파로 부각될 수 있었던 것은 때마침 그가 내각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윤용은 1904년 9월에 군부대신이 됐다. 이 직을 떠난 것은 1905년 3월이다. 그해 11월에 군부대신 이근택은 늑약에 찬성해 을사오적이 됐다. 이윤용의 군부대신 이임이 늦춰졌다면 그 역시 이완용과 함께 오적이 됐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내각을 떠나는 바람에 오적이 될 가능성으로부터 멀어진 이윤용은 이완용과는 다른 방식으로 친일을 했다. 이완용이 결정적인 늑약 체결을 주도하는 방법으로 친일을 했다면, 이윤용은 일제 침략을 위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방식으로 친일 이력을 남겼다.
이윤용은 1908년에는 한국 식민지화를 촉진하기 위한 일본 동양협회에 거액을 기부했다. “1909년 7월에는 의병 진압을 위해 보부상과 교섭한 후 이를 내각회의에 안건으로 제출해 보부상에 경비 20만 원을 지출하도록 했다”고 <친일인명사전> 제3권 이윤용 편은 설명한다. 보부상들이 정부 지원금을 받고 의병 진압에 나설 수 있게 해줬던 것이다.
훈1등 욱일동화대수장 받은 열혈 친일파
해방 이후의 극우세력은 ‘한국의 국시는 반공’이라는 이념을 유포했다. 이윤용은 ‘한국의 국시는 한일 교제에 기반한 이해공통주의’라는 이념을 유포하는 국시유세단을 이끌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제4-13권 이윤용 편에 따르면, 1910년 3월 23일자 <황성신문>에 “국시유세단에서 일작(日昨) 총회를 개(開)하고 제반사무를 처리한 후에 궁중고문 이윤용 씨로 단장을 추선(推選)하였다더라”라는 기사가 실렸다. 3월 23일로부터 며칠 전에 개회된 국시유세단 총회에서 단장으로 선출됐다. 국권침탈 5개월 전에 ‘한국의 국시는 합방’이라는 논리를 퍼트리는 단체의 리더가 됐던 것이다.
이윤용의 친일은 일제강점 이후로도 계속됐다. 불교 친일화를 위한 불교옹호회의 고문이 되고, 이토 히로부미 10주기 행사 발기인이 되는 등의 방법으로 친일을 이어갔다. 이토 히로부미 10주기는 1919년에 있었다. 3·1운동이 일어난 살벌한 해에 이런 행사에 관여했다는 것은 그가 한국인들을 더 두려워했는지 일제를 더 두려워했는지를 알려준다.
일본은 그런 이윤용을 크게 칭찬했다. 1910년, 그에게 남작 작위를 수여했다. 1911년에는 2만 5000원짜리 은사공채를 수여했다. ‘5년 거치 50년 상환’ 조건으로 2만 5000원권 증서를 지급하고 연 5% 이자를 지급받을 권리를 부여했다. 지금으로 치면 한화 5억 내지 25억 원짜리 일본 국채를 받고 해마다 5%의 이자를 받을 권리였다.
이완용에게는 2단계 높은 백작 작위와 6배 많은 15만원권 은사공채가 주어졌다. 아버지 이호준처럼 일본 정부도 이완용의 쓰임새를 더 높이 평가했던 것이다.
이완용보다는 못하지만 이윤용 역시 일본의 보답을 크게 받은 편이다. 조선총독부 자문기관인 중추원의 고문으로 10여 년간 활동하면서 연봉 3000원을 받았다. 또 친일파 지위를 발판으로 각종 수익사업도 벌였다. 1909년에 우선협동회사와 대한상업주식회사를 세우고 일제강점기 내내 각종 회사에 간여했다. 친일파 지위를 기반으로 벌어들인 간접적인 친일재산도 상당했다고 볼 수 있다.
이윤용은 세 살 적은 이완용보다 12년을 더 살다가 중일전쟁 중인 1938년 9월 8일에 83세 나이로 사망했다. 조선총독부는 그의 죽음을 애석해 했다. 오노 로쿠이치로 정무총감은 그달 10일자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이같이 급작히 서거한 것은 조선 통치상 실로 애석하기 짝이 없는 일”이라며 애도하는 글을 남겼다.
이완용을 따라가지는 못했지만, 훈1등 욱일동화대수장을 받은 열혈 친일파였다. 전쟁 수행을 위해 친일파가 더욱 절실히 필요해진 시점에 그런 열성파가 사라졌으니, 총독부 입장에서는 ‘실로 애석하기 짝이 없다’고 한탄할 만했을 것이다.
김종성 기자
<2023-12-31>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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