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1907년 의병전쟁과 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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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 글방 9]

1907년 의병전쟁과 상주

심철기 연구실장

1. 일제의 침략과 경상도 의병

1904년 러일전쟁을 계기로 일본은 대한제국에 대한 침략을 본격화하였다. 그 결과 을사늑약이 체결되어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일본에게 넘어갔으며, 통감부가 설치되어 내치(內治)에 대해서도 간섭을 받기 시작하였다. 그런 상황에서 대한제국은 만주(滿洲) 문제로 일본과 갈등을 빚고 있던 러시아로부터 1907년 헤이그만국평화회의에 초청을 받았다. 고종은 이 회의를 통해 일본의 불법침략을 알리고 대한제국의 독립을 지키는 계기로 삼고자 이준, 이상설, 이위종 3인을 특사로 파견하였다. 그러나 헤이그특사사건은 일본의 방해로 실패로 돌아가고 오히려 일본이 고종황제를 강제퇴위시키고, 차관정치를 실시하여 대한제국의 사법권 등 최소한의 주권마저도 강탈하였다. 또한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 해산시켰다.

강제해산에 반발하여 서울 주둔 시위대(侍衛隊)가 봉기하여 일본군과 치열한 교전을 하였지만 탄약이 떨어지면서 결국 진압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시위대의 봉기를 시작으로 원주 주둔 원주진위대(原州鎭衛隊)가 봉기하였다. 원주진위대의 봉기는 의병전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신호탄이 되었으며, 해산군인과 의병세력의 연합의병이 출범하는 시작이 되었다.

경상북도에서도 의병전쟁이 크게 일어났는데, 경상북도 북부지역은 이강년 의병부대를 중심으로, 동부지역은 신돌석 의병부대를 중심으로, 남부지역은 산남의진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따라서 경상북도 일대에서 활동한 의병들은 이들 의병부대와 직간접적으로 연계를 맺으면서 활동하였다. 상주 출신 의병들도 이들 의병부대와 연계되거나 이들 의병부대에 가담해서 활동하였다.

2. 상주 출신 의병장과 의병전쟁

상주는 충북 보은군, 옥천군, 영동군과 접하고 있으며, 강원도와 전라도로 진출하기 용이한 지리적 이점이 있었다. 그렇기에 1592년(선조 26년)까지 경상감영이 설치되었으며, 일찍부터 상업등이 발달하였다. 이러한 상주지역의 지리적·경제적 배경은 상주의병의 특징으로 나타났다. 상주의병의 특징은 첫째, 충청도를 비롯하여 강원도, 전라도, 경상도 등지에서 활동하던 대규모 부대와 연계한 활동을 보이고 있다. 특히, 이강년(李康秊) 의병부대, 산남의진(山南義陣) 등에 가담하여 활동하거나 연계해서 활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인 인물로 김만원(金萬源), 김진구(金鎭九), 이원재(李元宰), 채섬환(蔡暹奐), 권상중(權相中) 등이 있다.

김만원, 김진구, 이원재, 채섬환은 이강년 의병부대에서 활동하였다. 그들의 활동을 살펴보면, 김만원은 1907년 충북 제천에서 이강년이 다시 의병을 일으키자, 이에 찬동하여 참여하였다. 이강년 의병부대에 참여한 시기는 이강년 의병부대가 1907년 8월 민긍호 등과 연합하여 실시한 충주성 공략이 실패하고 죽령을 넘어 풍기·문경 방면으로 남하하던 때였다. 이후 1908년까지 이강년 의병부대의 좌종사(左從事)로 활동하였다.

김진구는 이강년 의병부대가 경북 북부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시기에 상주를 중심으로 경북 일대에서 좌종사로 이강년 의병부대를 지원하였다. 이원재도 이강년 의병장이 1906년 재기하게 되자, 여기에 참가하여 좌종사에 임명되었다. 이후 1908년 7월에 이강년이 붙잡힐 때까지 좌종사로 활동하였다. 채섬환은 1907년 이강년 의병부대에서 좌종사로 활동하였다. 그러다가 이강년 의병장이 순국하자 의병활동을 접고 이강년 의병장 유족들의 생계를 돌보며 서당을 열어 후진양성에 힘썼다.

이들은 이강년 의병부대에서 좌종사로 활동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좌종사는 각 거주지에 머무르면서 그 지역에 대한 정보나 일본군의 동태를 의병부대에 전달하고, 식량이나 숙소를 제공하는 등 여러 방면에서 의병부대를 지원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자리였다. 즉, 이들은 이강년 의병부대에 지역에 대한 정보, 군수물자 지원 등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권상중은 산남의진의 청송지대(靑松支隊)에서 활동하다가 임용상(林龍相)의 청도(淸道) 운문산(雲門山) 지대로 옮겨가 활동하였다. 특히, 1909년 (음)11월 25일 임용상 휘하의 송남면(宋南面) 등과 함께 청송군 현남면(縣南面) 낙곡동(藥谷洞, 현 청송군 현서면 수락리) 윤덕동(尹德洞)의 집으로 가서 군자금 모집에 협조해 달라고 요청하였으나 응하지 않자 복부에 자상을 입히고 10냥을 징수하였다. 이후 1910년 봄 청송 보현산(普賢山)에서 임용상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일본군에 대항하는 유격대를 조직하였다.

이후 본격적인 유격대 활동을 하였는데, 1910년 5월 임용상 대장과 함께 청송군 일본군 분파소(分派所)를 습격하여 파괴하고 순사들을 도주케 하였다. 청송분파소의 지원 요청으로 대구 주둔 일본군 수비대 300명이 청송으로 들어왔다. 임용상 대장과 함께 영천(永川) 화산(花山)을 거쳐 6월 의성(義城) 방면으로 이동하면서 포위해 오는 일본군과 여러 차례 교전하였다. 의성군 안평(安平) 전투에서 접전 중 임용상과 함께 붙잡혔다. 권상중은 산남의진 소속으로 청송 일대에서 유격대 활동을 하였다.

상주의병의 두 번째 특징은 대규모 부대에 소속되지 않고 군자금, 군수물품 모집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였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인물로 김윤황, 신돌석, 장학이 등이 있다. 김윤황은 1903년부터 군수물자 모집 활동을 하였다. 그는 1903년 9월 모(某)일 동료들과 함께 경북 청도군 팔조령(八助嶺) 근처 숙사(宿舍)에 들러 식사하던 중 마침 일본인 이노우에(井上俊太郞)라는 사람이 방에 잠을 자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 들어가 곤봉과 돌로 처단하고, 소지하고 있던 총·칼·소지품들을 모두 압수하였다.

또 1904년 6월경에는 동료들과 함께 각자 권총을 휴대하고 경북 자인 읍내에 사는 김경무(金卿武)의 집으로 가서 군자금 600원을 징수하였다. 1905년 10월경에는 동료 3명과 함께 총검을 가지고 경상북도 하양군아(河陽郡衙)를 습격하여 군수에게 관인(官印)을 압수한 뒤, 돈 450원을 가져오면 돌려주겠노라고 약정하였다. 그 후 3일 뒤 읍내에서 5리 정도 떨어져 있는 마을에서 군서기(郡書記)로부터 군자금 450원을 징수하고 관인을 돌려주었다. 1906년 5월에는 동료들과 함께 경상북도 경주군 원곡면(垣谷面) 북동(北洞)으로 가서 최모(崔某)에게 주민들로부터 군자금 280원을 모집해 오지 않으면 민가를 모두 불태우겠다는 내용을 서면으로 알렸다. 그로부터 9일 뒤 마을 부근 숲속에서 주민이 가져온 군자금 280원을 거두어 들였다. 1908년 4월에도 동료들과 함께 총검을 휴대하고, 경주군 둔굴동(屯窟洞)에 사는 권진사(權進士) 집으로 가서 그의 아들을 볼모로 군자금 300원을 납부하도록 요구하였다.

며칠 뒤 경북 영천군 남창동(南蒼洞)에서 권진사의 동생에게 돈 300원을 받고 진사의 아들을 돌려보냈다. 또 4월 16일에는 동료들과 함께 총검을 가지고 신녕군(新寧郡)에 사는 김천서(金千瑞)의 집으로 들어가 군자금 100원을 징수하였다. 1908년 5월에는 동료들과 함께 총검을 휴대하고 경산군(慶山郡) 읍내 안의관(安議官)의 집으로 들어가 그의 아들을 붙잡고 군자금 5,000원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당장 현금을 조달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고 소작미(小作米)가 있는 영천군 평사면(平沙面)으로 가서 그곳에 머무르는 중 친형으로부터 돈 500원을 마련해 올 터이니 아들을 풀어달라고 요청하자 돈을 가져오면 풀어주겠다고 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경상북도 하양군 중림면(中林面) 아사동[阿沙洞, 현 경북 경산시(慶山市) 진량면(珍良面) 아사리(阿沙里)]에서 일본 경찰에게 붙잡혔다. 이후 소위 ‘강도 살인죄’ 교수형을 받고 순국하였다.

신돌석은 영덕에서 활동한 평민의병장으로 유명한 신돌석과 동명이인이다. 그는 동료들과 함께 1907년 음력 11월 20일경 충북 옥천군 이내면(伊內面) 기탄리(岐灘里) 이시근(李始根)의 집에 들어가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또한 같은 날 같은 면 다른 동에 사는 이과부(李寡婦)에게서 군자금을 모집하였으며, 동면(東面) 삼정리(三丁里)에 사는 최용호(崔龍浩)에게서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1908년 음력 11월 24일 민한식·곽준희 등과 함께 옥천군 이남면(伊南面) 적령리(赤嶺里)의 김동시(金東始)에게서 군자금을 모집하였으며, 같은 면 소도리(所道里)의 김동욱(金東旭)에게서도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었다.

장학이는 1907년 음력 9월 30일 박연백(朴淵伯) 의병부대에 가담하여 경북 의성군(義城郡) 일대에서 수십 명의 동료와 함께 총기 20여 정을 휴대하고 군자금 모집과 밀정 김명준(金明俊)을 처단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08년 음력 6월에는 이토옥(李土玉) 의병부대에 가담한 후 부하 8명 등과 함께 총기 7정을 휴대하고 의성군 사곡면(舍谷面)과 채동면 등지에서 마포(麻布) 3필·목면(木綿) 1필·돈 3관 등의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붙잡혔다.

이러한 군자금, 군수물품 모집은 1908년 이후 의병전쟁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것이지만 상주의병은 1903년부터 꾸준히 전개되고 있으며, 강제병합 이후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것이 상주 의병의 세 번째 특징이다.

상주지역은 강제병합 이후에도 추진한 의병봉기가 독립운동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이병억, 이원녕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병억은 1914년 음력 5~6월경 의병장 출신이었던 김재성(金在性, 이명 雲路·三奉)과 함께 의병봉기를 계획하고, 이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경기도 안성(安城)·충북 괴산(槐山) 등지에서 군자금 모집활동을 벌이다 붙잡혀 1915년 3월 11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원녕은 1912년 2월 10일 경북 상주군(尙州郡) 동관음동(東觀音洞)에서, 1910년 강제병합 이전에 의병활동을 한 경험이 있는 이용규(李容珪)·손진형(孫晋衡)·장남기(張南基)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킬 것을 계획하고 단(壇)을 쌓아 고천제(告天祭)를 지내 국권회복의 의지를 결연히 하면서 각자 책임을 분담하여 활동하려 하였으나 발각, 붙잡혀 7개월여의 옥고를 치렀다.

이병억, 이원녕의 경우에서 알 수 있듯이 상주 일대는 강제병합 이후에도 의병봉기가 추진되고, 이는 이후 독립운동을 위한 군자금 모집활동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한편, 상주와 그 인근지역을 배경으로 독자적으로 활동한 의병부대도 있었다. 조운식 의병부대가 대표적이었다. 조운식 의병장은 1909년 7월 경북 풍기(豊基)에서 기의(起義)한 후 한봉서(韓奉西)·박황성(朴璜成)·이인만(李仁萬)·김용태(金龍泰) 등을 부장(部將)으로 선임하였다. 이후 고유문(告諭文)을 작성, 각처에 배포한 뒤 의병 모집을 적극적으로 전개하는 동시에 충북 보은군(報恩郡), 청주군(淸州郡) 등지에서 면장 이상락(李相洛) 외 3명으로부터 각각 군자금을 모집하기도 하였다. 1909년 8월에는 의병 30여 명을 인솔하고 경북 상주군 화북면(化北面)에서 밀정 정화춘(鄭化春)·김경모(金京模) 등을 처단하였으며 같은 달 영천군(榮川郡) 주막에서 부하 500여명을 인솔하고 머무르던 중 일본군의 포위 습격을 받고 교전하다 부하 5명이 전사하기도 하였다.

1909년 9월에서 10월 사이에는 회덕(懷德)·풍기(豊基)·청산(靑山)·청주(淸州)·보은(報恩) 지역에서 활동하다가 동년 10월 13일 러시아에 있는 이범진(李範晋) 의병대장으로부터 국내의 모든 의병이 러시아로 모여 병비(兵備)를 정리한 후 다음 해 3월을 기하여 일시에 항거하자는 제의를 받고 한봉서 등 부장 4명 및 부하 350여 명에게 무기를 휴대케 하여 이범진에게 보낸 후 의병을 더 모집하여 합진코자 국내에 머무르던 중 동월 15일 충북 영동경찰서 순사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처럼 상주의병은 대규모 의병부대에 소속되어 활동하거나 독자적으로 군자금·군수물자 모집 활동을 전개하고 강제병합 이후에는 독립운동으로 이어지고 있었던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러한 상주의병의 특징을 모두 보여준 대표적인 인물이 노병대 의병장이었다. 이에 노병대 의병장에 대해 별도의 장으로 알아보고자 한다.

3. 노병대 의병장과 상주의병전쟁

1) 노병대 의병장의 생애
노병대 의병장은 조선시대 문신이자 학자인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의 아우 후재(厚齋) 노극신(盧克愼)의 14대 손으로 1858년 경상북도 상주군 화동면(化東面) 이소리(以所里)에서 아버지 노종구(盧宗九)와 어머니 의성김씨(義城金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광산(光山)이고, 초명은 노병직(盧炳稷)이었다. 자는 상요(相堯), 호는 금포(錦圃)이다.

7세에 공부를 시작하였고 10세에 글을 지었다. 성장해서는 기호 남인학자이며 당대 유림의 거두인 성재 허전(許傳)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부친이 사망하고 3년 후인 1880년 25세 때 경북 의성군(義城郡) 문소리(聞韶里) 김원덕(金遠德)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1882년 구식군대에 대한 차별로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나자 김오랑(金吾郞) 윤모(尹某)를 비롯한 인사들과 뜻을 같이하고 무사(武士)를 모집하여 군란에 관련된 관리들을 처단하려고 모의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후 1889년 34세에 창릉참봉(昌陵參奉)이 되었다. 이듬해인 1890년에 어머니 의성김씨가 사망하였다.

1895년 10월에는 향교(鄕校)를 폐지한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성인(聖人)을 위해 죽겠다’며, 상경(上京)하여 허전의 문하에서 같이 공부했던 진사 허운(許運) 등과 함께 반대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국왕의 비답(批答)을 받지 못하자 중국의 도움을 얻기 위해 1898년 정월, 허운 등 몇몇 사람들과 함께 중국으로 갔다. 곡부(曲阜)로 가서 공자의 사손(嗣孫) 연성공(衍聖公) 공령이(孔令貽)를 만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가 만나주려 하지 않자 글로서 “공자 집안의 사람이 어찌 이렇게 예의가 없는가” 하고 나무랐다. 놀란 연성공은 사과하고 일행을 맞이하였다. 돌아올 무렵 조정(朝廷)과 태학(太學)에 글을 보내 다시 한 번 향교 폐지를 막아보려 했으나 성과가 없었다. 호남지방에서 향교 부근에 묘를 쓴 곳이 열여덟 군데나 있었다. 그는 곧 사림(士林)에 통고하고, 관리를 책망하여 모두 파 가게 하기도 하였다. 위정척사론에 입각하여 무너져 가는 조선의 현실 타개를 위해 적극 참여하였다.

1905년 11월,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보호’라는 미명 하에 ‘을사늑약’을 강제하고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였다. 노병대는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에 북쪽을 향해 통곡하고 바로 서울로 올라갔다. 판서(判書)를 지낸 이용원(李容元)을 만나 “지금 나랏일이 그릇되었으니 만약 비밀 조칙(詔勅)이라도 얻는다면 의병을 일으킬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간곡히 부탁하였다. 이용원이 상소하여 “전 참봉 창의신(倡義臣) 노병대를 선조(宣祖) 계사년(癸巳年)의 예에 따라 분충정난(奮忠靖亂) 2등(二等)을 내리고 별도로 비서원 비서승(秘書院秘書丞)에 특별히 임명하노라”는 내용의 비밀 조칙을 받았다고 한다. 바로 그날 고향으로 돌아와 몇몇 동지들을 규합하여 의병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뜻을 달리하는 사람들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2) 노병대 의병장의 의병활동
1907년 8월 충남 연산군(連山郡)에 사는 김운로(金雲老), 송창헌(宋昌憲) 등이 의병 70여 명을 이끌고 보은군(報恩郡) 속리면(俗離面)으로 가서 노병대 의병부대와 합진하였다. 또한 경기도 광주군에 사는 임용헌(林容憲) 등도 의병을 이끌고 와서 함께 속리산에서 창의(倡義)하였다. 이때 의병 규모는 200여 명에 이르렀다. 8월 21일에는 서울 주둔 시위대(侍衛隊)와 청주진위대(淸州鎭衛隊)의 해산군인 등도 모집하여 1천여 명에 이르는 의병부대로 그 규모를 확대시켰다. 이처럼 의병부대가 확대되면서 의병부대를 재정비하였는데, 이때 김운로를 의병대장으로 추대하였다.

이후 보은(報恩) 관청을 습격하여 일본인 2명을 처단하였다. 이어서 경북 상주 청계사(淸溪寺)로 부대를 옮겼으나 일본군의 기습 공격을 받아 청주 미원(米院)으로 이동하였다. 그곳에서 다시 치열하게 전투를 펼쳐 일본군 5명을 사살하였다. 그러나 사방이 포위되고 적병의 공격이 계속되자 하는 수 없이 부대를 나누어서 물러났다. 부대를 이끌고 호남지방을 거쳐 경북 성주로 이동하여 전투를 계속 펼쳤다. 여기서 일본군 10여 명을 사살하였으나 의병들도 부상자가 많았다. 경남 거창에 이르러서도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노병대 의병부대는 이후 보은·청주·상주·거창·안의·무주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그 뒤 거창 우두령(牛頭嶺)에 이르러서 크게 패하고 속리산으로 이동하였다. 이때 남은 군사는 겨우 50명에 불과하였다.

당시 상황에 대해 청주경찰분서장 경부 시노다 하루스케(篠田治介)가 경무국장(警務局長) 마츠이 시게루(松井茂)에게 보낸 정보문서에서 나와 있다. 청주경찰분서장의 보고에 의하면, 1908년 8월 상주 의병장 노병대 의병부대 약 50여 명이 서구식 소총 30여 정과 화승총 약간으로 무장하고 8월 20일경 충북 보은 주성면(朱城面)에서 청주군 미원(米院) 추동(楸洞)으로 이동해 왔다고 하였다. 노병대 의병부대는 전라도에서 이동해 오는 의병부대와 연합하고자 추동으로 이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같은 정보문서에 전라도의 의병 20여 명도 내집(來集)하여 이목정(梨木亭) 묵정리(墨井里, 묵정리는 미원(米院) 부근의 산재(山材)이다)에 유숙(留宿)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 수 있다. 이들은 8월 22일 보은 방면으로 이동하였다고 보고하고 있다.

그러나 보은군 관기면(官基面)의 관주점(冠酒店)에서 보은군 주재소 순사와 청주수비대 소속 일본군에게 체포되었다. 일본군 수비대 분대장이 심문하였는데 당시 문답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문: 너는 어째서 의병을 일으켰느냐?
답: 너희는 우리 원수다. 너의 종족을 다 없애려 한 것이다.
문: 함께 일을 꾀한 사람이 몇 명인가?
답: 내가 주모자이니, 다른 사람은 알 것 없다.
문: 죽음이 두렵지 않느냐?
답: 거사할 때 죽을 사(死) 자를 이마 위에 붙여 놓았다. 속히 죽여라.

이처럼 노병대 의병장은 의병을 일으킬 때부터 이미 죽음을 각오하였던 것이다. 노병대 의병장이 심문에 굴복하지 않자 급히 공주재판소로 보내졌다. 공주재판소에서는 한쪽 눈을 뽑히는 수난까지 당하였다. 단식으로 자결하려 했으나 감시자들이 강제로 음식을 먹이면서 실패하였다.

1908년 9월 14일 공주지방재판소 형사부에서 ‘현 정부를 전복할 목적으로, 융희 원년(1907년) 7월 13일에 군사를 일으켜 먼저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일본군대를 국경 밖으로 몰아내야 한다고 하여, 이후 보은, 상주, 청주, 안의군 등 각지에서 일본병과 교전한 것이다. 위 사실은 피고가 당 공판정에서 한 공술 및 피고의 청취서에 비추어 이를 인정할 증거가 충분하다. 법률에 비추어 보니 위 소위는 형법대전 제195조에 해당하나, 범한 죄에 용서할 만한 정상(情狀)이 있으므로 동법 제125조에 의하여 본 형에서 2등급을 감하고, 주문과 같이 판결한다.’고 하여 유배형 10년을 선고받았다. 이와 더불어 일본군은 상주군 화동면 이소리의 본 집과 재실(齋室)까지 모두 불태웠다.

1910년 8월 경술국치 특사 구실로 내보내려 하자, “너희들에게 경사가 있다고 어찌 나를 내보내는가”하고 거부하였으나 강제로 풀려났다.

노병대 의병장은 출옥 후에도 의병 재기를 위하여 군자금 모집을 시작하였다. 1911년 4월 경북 풍기에서 군자금 모집하였고, 7월에는 경북 함창(咸昌)의 한익원(韓翊源)과 함께 상주읍 공격을 계획하기도 하였다. 또 12월에는 구동식(具東植)·손일현(孫日鉉)·강봉주(姜鳳周) 등과 함께 경북 선산에서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1912년 11월, 경북 비안군(比安郡) 모창동(毛昌洞) 뒤 어느 마을 최덕로(崔德老)의 집에서 부하 강봉주(姜鳳周)·손요득(孫了得)과 함께 안동군 풍남편(豊南面) 하회동(河回洞)의 참봉 류시일(柳時一)의 집에 들어가 군자금을 모집하기로 하여, 1912년 같은 해 11월 18일, 강봉주·손요득·안병모(安炳謀)·허찬(許璨) 등이 류참봉의 집에 들어가 돈 558원과 잡품 21점을 거두어 들였다.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던 중, 1913년 4월 18일 일본 경찰에 다시 붙잡혔다. 같은 해 5월 2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강도죄로 징역 10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6월 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앞의 원판결이 취소되고 징역 2년이 더 늘어나 12년을 받았다. 다시 상고하였으나 1913년 7월 10일, 고등법원 형사부에서 기각되었다.

대구감옥에서 “내 나이 50이 넘어 어찌 살기를 바라겠느냐” 하며 단식으로 항거하였다. 음식을 끊은 지 28일 만에 피를 토하고 1913년 8월 11일 사망하였다. 일본은 이에 대해 “강도 노병직(그의 초명)은 월여 동안 복종치 않다가 단식·토혈(斷食吐血)하고 죽었는데, 병명은 뇌일혈이다.”라고 발표하였다.

노병대 의병장을 비롯한 상주 출신 의병들은 강제병합 이후에도 의병봉기를 계획하고 군자금을 모금하였다는 것이 하나의 특징인데 이것은 이후 1910년대 경상북도 일대에서 전개된 비밀결사와 이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참고문헌
「판결문」, 공주지방재판소, 1908. 9. 14.
「판결문」, 대구지방법원, 1913. 5. 21
「판결문」, 대구복심법원, 1913. 6. 5
「판결문」, 고등법원, 1913. 7. 10
張黙相, 「錦圃盧公義烈錄」
張炳逵, 「烈士錦圃光山盧公殉國碑銘」
盧天可, 「義兵將盧炳大公年譜」
『경상북도독립운동사』Ⅰ(의병항쟁), 2012.
상주문화원, 『의병대장 금포 노병대 열사』, 상주향토문화연구소, 2013.
박윤성, 「의병대장 금포 노병대선생」, 『상주문화』 제18집, 상주문화원,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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