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국제연맹에 제출된 리튼 보고서 중 조선인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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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소개]

국제연맹에 제출된 리튼 보고서 중 조선인문제

일본이 1931년 9월 18일 남만주철도주식회사(만철)의 일부를 폭파한 류탸오후(柳条湖)사건을 일으켰다. 이것은 관동군이 만주 침략의 빌미를 삼기 위해 벌인 철저한 자작극이었다. 이를 기화로 관동군은 동북 삼성 일대를 침략하고 1932년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였던 푸이를 집정으로 삼아 일제의 식민지인 ‘만주국’을 건국했다. 1932년 3월 중화민국이 국제연맹에 제소하고 일본이 동의하여 국제연맹이 류타오후사건의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리튼 조사단을 파견했다. 리튼 조사단은 3개월간 만주를 조사하고 9월에 리튼 보고서를 제출했다.
리튼 보고서는 1932년 3월 1일 일본의 조종에 따라 건국을 선언한 ‘만주국’이 중국인의 자발적인 운동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고 규정하고 만주를 중국 주권의 범위에 포함시켰다. 그러나 만주에 지방적 자치정부를 설치해 비무장지대로 할 것을 제안하고 만주에 관한 일본의 권익도 승인했다. 리튼 보고서는 10월 2일 공표되었다. 일본의 강력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리튼 보고서의 채택과 ‘만주국’을 승인할 수 없다는 내용의 19인 위원회의 보고서가 국제연맹총회에서 채택되자 일본은 1933년 3월 27일, 국제연맹에서 탈퇴했다.
이번에 소개할 자료는 『삼천리』 제4권 제12호(1932.12.1.)에 실린 「국제연맹에 제출된 리튼보고서 중 조선인문제」이다. 리튼 보고서 중에서 가장 쟁점이 되었던 류탸오후(柳条湖)사건에 대한 일본측 설명과 중국측 설명 그리고 조사단의 의견을 번역해 실었고 아울러 ‘만주 신국가 출현에 대한 제민족의 태도’ 항목 중에서 만주인과 조선인의 입장과 태도를 발췌하였다. – 편집자주

[9월 19일 사건]

9월 19일 토요일 아침 봉천시민이 잠에서 깼을 때 봉천시는 일본군 수중에 든 것을 발견하였다. 밤중에 포성을 들었으나 별로 이상하게 생각지 않고 일본군이 소총과 기관총의 맹사(猛射)하는 것을 야간연습으로만 알고 지낸 것이 그 주간 야밤의 일이다.

9월 18일 밤에는 대포의 터지는 소리와 포탄의 음향 때문에 이것을 식별하고서 소수의 사람이 공황을 느낀 것은 사실이다. 그래도 시민의 대부분은 포성을 가지고 단지 일본군 연습의 재개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은 평상시보다 조금 더 요동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후술하는 바와 같이 거의 전만주의 군사적 점령을 야기한 운동의 제일보로는 본 사건이 심히 중대함을 인식하고 조사단은 9월 19일 밤의 사건에 대하여 광범하게 조사하였다.

[일본측의 설명]

일본측 설명에 의하면 고모토(河本) 중위는 병사 6명을 인솔하고 9월 18일 밤 경계임무를 받아 봉천 북방 남만주철도 선로에 연하여 방어연습을 행하였다. 그들은 봉천 방향에 남진하고 있었으나 그날 밤이 칠흑같이 어두워 시야가 그리 넓지 못하였다.

그들은 소로가 선로를 횡단하는 지점에 달하였을 때 후방에서 커다란 폭발 소리를 귓결에 들고 방향을 고치며 주환(走還)한 곳이 약 이본군백마(二本軍百碼)나 되는 지점에서 내려가는 선궤도 한쪽이 폭파된 것을 발견하였다.

그 폭발은 2궤도 접합점에 일어난 것으로써 양 궤도의 첨단은 전혀 분리되고, 이것 때문에 선로는 31인치나 사이가 벌어졌다. 폭발점에 도달하니 보초대는 선로 동측 밧사히에서 격파함 으로 고모토 중위는 곧 부하에게 명하여 전개 응전하였다. 이곳에서 약 5, 6명쯤 되는 공격은 사격을 그치고 북방으로 퇴각하였다.

일본보초대는 곧 추격 개시하였었으나 약 200미터 전진한 곳에서 약 3, 400명에 달하는 한층 유력한 부대로 말미암아 두 번째 사격을 당하였다. 고모토 중위는 이 유세(有勢)한 부대에 포위되어 위험을 인식하고 부하 한 명을 시켜 약 1,500미터 북방에 있어서 동양(同樣)으로 야간연습 중의 제3중대장에 보고시키고 동시에 다른 한 명으로써 현장 부근에 있는 전화통으로 재봉천 대대 본부에 구원을 청하였다.

이때 장춘발(長春發) 남하 열차에 접근됨을 듣고 열차가 파손 선로에 도달하면 파괴할 줄 알고 일본보초대는 교전을 정지하고 열차에 경고하려고 선로상에 음향신호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열차는 전속력으로 진행하여 와서 폭파지점에 도달하자 약간 동요되었으나 회복되어 정차치 않고 통과하였다. 열차는 10시 반 봉천 도착이므로 정각대로 도착될 줄 알고 고모토 중위는 처음 폭발을 들은 것은 10시경이라고 말한다.

다음 전투 재개된 것이 제3중대를 지휘하는 가와시마(川島) 대위가 폭음을 듣고 남하도중 고모토 중위의 사자와 만나 그 안내로 현장에 간 것이 10시 50분경 도착이다.

한편 대대장 시마모토(島本) 중좌는 전화를 접하자 곧 봉천에 있는 제1 및 제4중대에 현장에 향할 것을 명하고 또 1시간 반의 거리에 있는 무순 주재의 제2중대에 대하여 될 수 있는 데 까지 속히 올 것을 명하였다.

제1, 4중대는 봉천으로부터 기차로 유조구(柳條溝)에 이르러 도보로 현장에 향한 것이 한밤중에나 도착하였다. 가와시마 중대의 원조를 받아 고모토 보초대는 번성한 옥수수 속에 숨어 중국군의 사격을 받고 있을 때 제1, 4중대가 봉천으로부터 도달하였다.

시마모토 중좌는 그 병력이 500에 불과했고 북대영(北大營) 중국군은 1만 가까이 준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공격은 최상의 방어다”라고 믿고 영사(營舍)의 공격을 명하였다.

선로 영사간 약 250미터의 지면은 수류지(水溜地)임으로 집단으로써는 횡단이 곤란하였으나 중국군이 지면을 넘어 격퇴하고 있을 때 노다(野田) 중위는 제3중대의 1개 소대를 가지고 그들의 퇴로를 차단하려고 철도에 연하여 진출할 것을 명하였다. 일본군이 황황히 점등된 북대영사에 도달하자 제3중대는 공격을 행하여 좌익 모퉁이 점령에 성공하였다. 이러한 공격에 대하여 영내 중국군은 수 시간이나 완강히 격전을 치뤘다. 제1중대는 우익을, 제4중대는 중앙부를 공격하였다.

오전 5시 영사 남문은 그 직전에 어느 부속 가옥 내에 중국군의 방치된 대포의 2발에 의하여 파괴되고 동 6시 전 병사(兵舍)가 점령되어 일본측 병사 전사자 2명, 부상자 22명을 내었다.

병사 건물 중에는 교전 중 화재가 난 곳도 있었지만 잔여는 19일 아침 일본군의 손으로 소진되고 일본측에서는 중국병 320명을 매장하고 부상자는 20명을 발견하였다고 진술하였다.

[중국측의 설명]

중국측의 설명에 의하면 일본군의 북대영 공격은 하등의 도발에 의한 것이 아니고 전연 기습에서 나온 것이다.

9월 18일 밤 제7려(旅) 전군 약 1만이 북대영에 있었다.

9월 6일 장학량(張學良) 원수로부터 당시의 긴장된 상태에 있어서 일본과의 충돌은 일체 이것을 피하려고 특별히 주의하였다.(電文)(略)

그 전문을 받은 병영 성문의 위병(衛兵)은 대소총을 휴대할 것을 알았다. 그러나 동일한 이유에 의하여 병영 주위 토벽 내의 철도선로에 연하여 서문은 폐쇄하였다.

9월 14, 15, 16, 17일 밤 일본군은 병영 부근에 있어서 야간연습을 행하고 18일 밤 오후 7시에는 문관둔(文官屯)이라는 한 촌락에서 연습하고 있었다.

오후 9시 장교 채모는 통상형의 기관차가 없는 3, 4량의 객차로 된 열차가 같은 곳에 정차됨을 보고하나 오후 10시 폭발의 대음향이 있자 계속해서 총성이 들렸다. 그리하고 곧 전화로 참모장은 이것을 병영 남방 6, 7리 철도선로 부근의 사택 부근에 있는 사령관 왕이철(王以哲)에 보고하여 참모장이 또 전화로 일본군의 병영 습격을 보고하였다.

11시경 병영 남서 모퉁이에 대한 총공격을 개시한 것은 11시 반 일본군은 성벽 틈으로 침입하였다. 공격이 개시되자 참모장은 소등을 명하여 두 번이나 왕이철에게 전화로서 보고하였던바 왕은 저항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11시 반 남서 및 서쪽 원방(遠方)에서 큰 대포 소리를 들으면서 야반에 이르러 병영 내에 포탄이 낙하하기 시작하였다.

퇴각 중의 제621군 남문에 달하자 일본군이 동군을 공격하고 있어 수비병 퇴각중임으로서 동군은 일본군의 내부에 침입하기까지 참총토호(塹塚土壕) 내에 도피한 후 남문을 지나 도주 하여 오전 2시경 영사 동방의 이대자(二臺子) 촌락에 도착하였다. 다른 군대는 동문 및 동문 밖 가까운 거리의 빈 병사를 거쳐 드디어 3시부터 4시까지의 사이에 동 촌락에 도달하였다.

유일한 저항은 북동의 모퉁이 건물과 그 남방 2층 건물 내에 있던 제620단이 시도하였다. 동단장은 일본군이 오전 7시 남문으로 침입하여오자 중국군은 건물에서 건물로 도망하여 일본군으로 하여금 공허한 건물을 공격케 하였다.

중국군의 주력이 철수한 후 일본군은 동쪽으로 나아가 동방 출구를 점령하였다. 이리하여 620단은 연락이 끊겼으므로 스스로 싸워 활로를 여는 이외에 길이 없었다. 그들은 오전 5시에 이르러 돌파를 시작하였으나 전연 탈출한 것은 오전 7시였다. 이 영사 내에 일어난 유일의 실전에 있어서 사상자의 대부분도 여기서 나왔다.

본단은 최후에 이대자 촌락에 도착한 부대이다.

[조사단의 의견]

이상은 소위 9월 18일 사건에 대해 양국 당사자가 조사단에게 말한 것이다.

양자가 모두 상이되고 또 모순된 것은 밝히 판명된 것이나 이것이 그 사정을 살펴서 별로 다르게 할 것이 없다고 본다.

일중 양군 사이에 긴장한 기분이 존재하는 데 있어서는 의심할 여지도 없다.

조사단에게 명백하게 설명한 바와 같이 일본군이 중국군과의 사이에 있는 적대행위가 일어날 것을 예상하고 신중하게 준비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나 9월 18일, 19일 밤 본 계획은 빠르게도 정확하게 실시되었다.

중국군은 이상에 언급한 훈령에 기초하여 일본군에게 공격을 가하고 또는 특히 앞에서와 같은 때와 장소에 있어서 일본인의 생명 혹은 재산을 위협할 것 같은 계획을 가진 것이 아니다.

그들은 일본군에 대해 연격(連繫)이 있는 또는 명령을 받은 공격을 행한 것이 아니고 일본군의 공격과 그 후의 행동에 낭패한 것이다.

9월 18일 오후 10시부터 10시 반 사이에 철도 노선상 혹은 그 부근에 있어서 폭발이 있었던 것은 의심할 수 없는 바 철도에 대한 손상은 혹 있었다고 해도 사실 장춘부터의 남행열차의 정각 도착을 방해하지 않은 것으로서 군사행동을 정당하게 한 것이 아니다.

같은 밤에 앞서 서술했듯이 일본군의 군사행동은 정당한 자위수단이라고 인증받을 수 없다.

더욱이 여기에 의하여 조사단은 현지에 있는 일본 장교가 자위 때문에 행동하고 있었다고 믿었다는 가설을 배제하려고 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 후의 사건에 대해서 기록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본다.

○ 일본군대 이동
9월 18일 밤 재만 일본군은 다음과 같이 분포되었었다.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이 북대영의 공격에 참가한 철도수비대대 4중대 및 봉천성시를 점령한 히라타(平田) 대좌 부하의 제2사단 제29연대 외 제2사단부는 각지에 분포되어 있고 제4연대 본부는 장춘, 제16연대본부는 요양, 제30연대본부는 여순에 있고 이리하여 이를 각 연대에 속한 타 부대는 안동, 영구, 안동선 연선(沿線) 이외 몇 개의 소도시에 주둔되었다. 또 철도수비대 1개 대대는 장춘에 있고 또 철도수비대 및 헌병대는 상기 각 소도시에 제2사단과 같이 분포되었다. 그리고 최후에 조선경비군이 있었다.

재만 전군 및 조선군 얼마는 9월 18일 밤 장춘으로부터 여순에 이르는 남만주철도 전역에 한하여 전부 동시에 행군을 개시하였다.

그 전 세력은 다음과 같다.
제2사단 5,400, 야포 16문
철도수비대 약 5,000
헌병 약 500

안동, 영구, 요양, 기타의 소도시에 있는 중국군은 어찌할 줄 모르고 무저항으로 무장을 해제하였었다. 철도수비대 및 헌병은 이 장소에 모여서 제2사단부대는 곧 봉천에 집결하여서부 터 중요한 행동에 참가하게 되고 제16 및 30연대는 일찍 도착하여 히라타 대좌에 합해서 동대영의 점령을 도왔다.

제20사단 소속 제39 혼성여단(병사 4,000 및 포병)은 19일 오전 10시 조선국경 신의주에 집결 21일 압록강을 넘어서 밤중에 봉천에 도착하여 이곳에서 분견대는 정가둔 및 신민에 파견 하여서 22일에 여기를 점령하였다.

9월 18, 19일 장춘 점령
9월 21일 길림 점령

병력 약 1만, 대포 40문을 가진 장춘에 있는 관성자 및 남령(南領) 중국병영은 9월 18일 밤 이곳 주둔의 제2사단 제4연대 및 제1철도수비대(長谷部 소장 지휘)에서부터 공격하였으나 같 은 곳에서는 다소 중국군의 저항이 있었다. 야반에 전투를 개시하고 남령병영은 19일 오전 11시, 관성자병영은 같은 날 오후 3시 점령하였다.

여기에 의한 일본측 총 사상자는 사망자 장교 3명, 병졸 64명, 부상자 장교 3명, 병졸 85명이었다.

봉천의 전투종료와 같이 제2사단의 각 연대는 장춘에 집결하고 다몬(多門) 중장 및 참모부, 제30연대 및 야포병 1대대는 20일 야마노(天野) 소장 지휘하의 제15여단은 22일 도착하였다.

길림은 21일 발포를 시작하고 점령한 중국군은 약 8리 밖에 옮겨졌다. 당시 일본의 군관 출판물이었던 ????헤럴드 오브 아시아????는 군사행동은 이것으로서 완료한 것으로 사고하고 이 이상 더 군대를 이동하는 일은 예기하지 않았던 뜻을 기술했다. 그 후에 있어서의 군사행동은 중국의 도발에 의한 것이다.

○ 만주 신국가 출현에 대한 제민족의 태도
우리는 중국인의 대다수가 만주국에 대하여 적의가 있든가 그렇지 않으면 무관심한 것을 발견함과 동시에 신 ‘정부’는 만주에 대한 소수 민족단체 몽고인, 조선인, 백계 러시아인(白系露人) 및 만주인과 같은 것으로 어떤 지원을 받고 있었다. 그들은 정도는 다르나 모두 구정권 때문에 압박을 받고 또는 과거 수십년 간에 수다한 중국 이민 때문에 경제적 불이익을 당하였다.

그래서 어떤 부족이든지 신정권에 전혀 기울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신정권으로부터 종래보다 나은 대우를 받을 것을 예상하고 신정권 또한 이들 소수민족을 지원한다.

만주인
만주인은 한인(漢人)과 전혀 완전히 동화되었다. 더구나 길림성 및 흑룡강에 있어서는 더욱 소수의 정치상 중요하지 않은 만주인의 식민지가 있어 2개의 국어를 이야기하지만 분명히 만주인으로서 잔존하고 있다.

만주국에 호의를 보내는 것은 누차 만주의 주민으로서 중국의 다른 주민과 인종을 달리한다고 하여 최후의 만주황제는 현 집정(執政)이라고 하나 현존의 분명한 만주인은 신국가의 성립 과 함께 다시 특권적 대우를 얻으리라는 희망을 가진 이가 있을 것이라.

만주인은 이러한 희망으로서 정부에 들어왔지만 만주에서의 한인 증인의 말하는 바에 의하면 그네들의 전부의 권력은(此間中略) 그들의 제의는 귀기울이지 않음을 보고 실망을 느끼고 있다. 만주인의 피를 가진 자의 사이에는 선제(先帝)에 대한 혹 정신적 충성의 염(念)이 상존한다고 하지만 하등 현저한 민족의식이 있는 만주인 운동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의 태반은 한인과 동화하였으므로 이제 새삼스럽게 만주인을 관리로 등용하여 민족의식의 진흥을 꾀하고자 하지만 그 방면으로의 신 ‘정부’에 대한 지원은 민의 대표의 이름을 모독 함에 족한 실(實)을 가진 것이 아니다.

조선인
과거에 있어 한편에서는 일본 관헌의 비호를 받는 조선 농부와 다른 한편에서 중국의 관리, 지주 및 농부와의 사이에 많은 알력이 있었다.

과거에 조선 농부는 폭행과 착취에 의하여 괴로워한 일은 의심할 것이 없다. 본 위원회에 진정한 조선 대표는 일반으로 신제도를 환영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여하한 범위까지 그들이 그 단체의 대표이었느냐 함을 확실하게 얻지 못하였다.(此間 4行略) 이들 피난민은 공산주의 선전에 좋은 목적이 되며 조선 내에 있는 ××단체와 접촉을 유지하고 있다.

결론
이상은 만주에 대한 우리의 여행 중 우리에게 전달된 지방인민의 의견이다. 공사(公私)의 회견, 서면과 성명서 등의 형식으로써 우리에 제공된 증거를 주의하여 연구한 뒤 우리는 ‘만주국정부’라는 것은 지방의 중국인에 의하여―라고 보여 중국인 일반은 이에 하등의 지원을 주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노라.(下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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