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에 남아있는 저들의 기념물 3]
토막 난 몰골로 전해지는 ‘하나부사 공사 일행 조난지비(1933년)’
함께 세워졌다는 ‘정지용 인천부사 기념비’는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이순우 특임연구원
근대 개항기 이래 우리나라와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국가는 일본(1876년), 미국(1882년), 영국(1883년), 독일(1883년), 이탈리아(1884년), 러시아(1884년), 프랑스(1886년), 오스트리아(1892년), 청국(1899년), 벨기에(1901년), 덴마크(1902년) 등 11개국에 이른다. 이에 따라 이들 국가가 개설한 자국의 공사관 또는 영사관이 — 오스트리아와 덴마크는 미개설 — 속속 이 땅에 들어섰고, 이것들을 통칭하여 ‘각국공사관(各國公使館)’이라고 일컫는다.
이들 가운데 그 선두에 선 나라는 의당 일본(日本)이었는데, 조선주차 일본공사관(朝鮮駐箚 日本公使館)이 한성(漢城)에 처음 개설된 것은 1880년 12월의 일이었다. 일제의 강압으로 일찍이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 강화도조약)가 맺어진 때가 1876년 2월 26일(음력 2월 2일)이었으니, 대략 따져도 그로부터 4년하고도 10개월이 지난 시점이었다.
그렇다면 이만한 편차가 생긴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그 해답은 다음의 몇 가지 자료를 통해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다.
[1]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 제2관(第二款);
일본국 정부는 지금부터 15개월 후에 수시로 사신을 파견하여 조선국 경성(京城)에 이르러 친히 예조판서(禮曹判書)를 접해 교제사무를 상의하며, 해사신(該使臣)이 주류(駐留)하는 기간의 길고 짧음은 다 그때의 형편에 맡긴다. 조선국 정부도 역시 수시로 사신을 파견하여 일본국 동경(東京)에 이르러 직접 외무경(外務卿)을 만나 교제사무를 상의할 수 있으며, 해사신이 주류하는 기간의 길고 짧음은 역시 그때의 형편에 맡긴다.
[2] 『고종실록』 1877년 10월 12일 기사;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일본 외무대승(外務大丞)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가 호남(湖南) 개항지방의 수심(水深)을 측량하고 뒤이어 서울로 올라오고 있다 합니다. 개항처를 지점(指點)하는 것은 비록 약조(約條)에 있긴 하지만, 통상하는 일로 서울에 주재하는 것은 아직 허락한 바 없습니다. 그래서 동래부(東萊府)에서 여러번 타일렀지만 그는 기어코 올라오려고 하는데 우호를 지속하려는 입장에서 또한 강하게 거절하기도 어렵습니다. 접대하는 절차는 각 아문(衙門)으로 하여금 작년의 전례를 참작해서 시행토록 하고(하략)
여길 보면 애당초 조선과 일본은 각각 상대국에 사신을 파견할 수 있었지만, 이것만으로 외교단의 상주(常駐)하는 권리가 확보됨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일찍이 우리의 전통적인 외교관례로 보더라도 다른 나라의 외교공관이 국내에 설치된 전례가 없었을 뿐더러 조약문 자체에도 잠시 머무는 것만 가능했을 따름이지 주차(駐箚)를 허용하는 구절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탓이다. 실제로 초대 조선주차 일본공사로 부임하는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 1842~1917)는 1877년 10월과 1879년 4월, 그리고 1879년 7월에 걸쳐 몇 차례 서울을 찾아온 적이 있으나 그때마다 한 달 남짓 또는 석 달 정도를 머물다가 되돌아간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1880년에 이르러 일본국 쪽에서는 조선에 상주공관을 개설하려는 확실한 의도를 갖고 막무가내로 하나부사 변리공사의 부임에 관한 국서(國書)를 조선국왕에게 올리는 것으로 조선주재 일본공사관의 설치를 기정사실화하였다. 이때 그들에게 새로운 공사관의 처소로 배정된 곳은 새문 밖에 자리한 청수관(淸水館, 천연동 31번지 현 동명여자중학교 자리)이었다.
원래 청수관은 영조시대에 세워진 경기중영(京畿中營)에 속한 곳으로 서지(西池, 천연동 13번지 현 금화초등학교 자리)를 끼고 천연정(天然亭)이 구내에 있었으며, 이미 하나부사 공사가 여러 차례 조선을 오갈 때마다 그 자신과 수행원을 접대하던 관소(館所)로 사용되던 공간이었다. 이러한 내력을 지닌 자리에 일본공사관이 처음으로 개설되었으나 그 존속기간은 실상 그리 오래가지 못하였다. 불과 1년 7개월이 지난 시점에서 이곳은 임오군란(壬午軍亂)의 현장으로 돌변하였고, 더구나 이 난리가 벌어지는 와중에 이 일대가 완전히 소실되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분노한 조선 병졸들의 공격으로 별기군(別技軍)의 훈련교사(訓練敎師)이던 일본군 육군공병중위 호리모토 레이조(堀本禮造, 1848~1882)를 비롯한 다수의 육군어학생과 공사관원들이 피습되어 숨지고 성난 민중들이 청수관 주변을 겹겹이 에워싸며 공세를 취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되자, 하나부사 공사 역시 한밤중을 틈타 총원 28명에 달하는 일행과 더불어 포위망을 뚫고 탈출의 행로에 오르게 되었다. 이들은 비가 세차게 내리는 가운데 양화진을 거쳐 이튿날 오후가 되어서야 겨우 인천도호부(仁川都護府)에 당도하였는데, 그곳에서 뜻밖에도 인천부사 정지용(仁川府使鄭志鎔)의 환대와 선의로 휴식처를 제공받아 젖은 옷을 말리고 일단 안도의 한숨을 돌리게 된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곧이어 추격해온 군인들과 여기에 합세한 인천부의 병졸들에 의해 다시 수행원 6명이 피살되었고, 이에 부랴부랴 제물포로 피신하여 월미도로 건너간 뒤 그곳에서 남양만(南陽灣)에 영국 군함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작은 돛배에 올라 그곳을 향해 출범하는 과정이 이어졌다. 맞바람과 해무(海霧)를 헤치고 이튿날 오후가 되어서야 간신히 영국 측량선인 비어호(飛魚號, Flying Fish)를 만나 이들에 의해 구조되면서 이 배의 도움으로 하나부사 공사 일행은 일본 나가사키항으로 무사 귀환하게 되었던 것이다.
곧이어 하나부사 공사는 자신의 본국에서 전열을 재정비한 다음 해군소장 니레 카게노리(仁禮景範)가 통솔하는 콩고(金剛), 닛신(日進), 후쇼(扶桑), 세이키(淸輝) 등 4척의 군함, 그리고 육군소장 타카시마 토모노스케(高島鞆之助)가 이끄는 1개 대대의 병력과 함께 인천항을 거쳐 서울로 되돌아왔다. 이러한 무력을 과시하면서 조선정부를 압박한 끝에 그가 얻어낸 것이 바로 흔히 ‘제물포조약’으로 알려진 1882년 8월 30일(음력 7월 17일)의 조일강화조약(朝日講和條約) 및 조일수호조규 속약(朝日修好條規 續約)이었다.
그런데 이로부터 반세기의 세월이 흐른 1933년 11월의 시점이 되었을 때, 몇 군데의 신문지상에는 ‘하나부사 공사 일행의 조난사실을 기리는 기념비’를 세웠다는 소식이 일제히 등장하였다. 예를 들어, 『조선신문』 1933년 11월 20일자에 수록된 「인천개항(仁川開港)의 공로자(功勞者) 정지용씨 기념비(鄭志鎔氏 記念碑), 부천군 문학면 관공리 공보교내(富川郡 文鶴面 官公里 公普校內) 엄숙리(嚴肅裡)에 제막식 거행(除幕式 擧行)」 제하의 기사에는 이러한 내용이 채록되어있다.
[인천(仁川)] 인천개항(仁川開港)의 공로자(功勞者) 하나부사 공사 일행(花房公使一行)의 조난자(遭難者)와 더불어 인천부사 정지용 씨(仁川府使 鄭志鎔氏)의 기념비(記念碑)는 인천경찰서장 키시카와 오토마츠 씨(仁川警察署長 岸川於松氏), 부천군수 허섭 씨(富川郡守 許燮氏), 인천부 편찬위원장 코타니 마스지로 씨(仁川府 編纂委員長 小谷益次郞氏) 등의 발기(發起)에 따라 부천군 문학면 관공리(富川郡 文鶴面 官公里, 구 인천부)의 공립보통학교 구내(公立普通學校 構內)에 건설(建設)되어 18일 오후(午後) 1시부터 성대(盛大)한 제막식(除幕式)이 거행(擧行)되었다. ……하나부사 공사 일행(花房公使一行)은 명치 15년(1882년) 개화당(開化黨)의 민일파(閔一派)와 수구당(守舊黨)의 대원군(大院君)의 양파(兩派)에 의해 행해진 항쟁(抗爭)의 비말(飛沫)을 뒤집어쓰고 경성(京城)으로부터 난(難)을 당시(當時)의 인천부(仁川府, 현재의 문학)로 피하였다가 다시 폭도(暴徒)의 추격(追擊)을 받을 때 인천부사 정지용 씨(仁川府使 鄭志鎔氏)는 국제친의(國際親誼)를 중히 여겨 일행(一行)으로 하여금 무사(無事)히 조국일본(祖國日本)으로 생환(生還)시킨 후 정씨(鄭氏)는 자살(自殺)을 이행했다고 하는 국제미담(國際美談)을 남긴 양 기념비(兩記念碑)는 우가키 총독 제자(宇垣總督 題字), 코타니 씨 선문(小谷氏 選文), 조선미술품제작소(朝鮮美術品製作所)의 역작(力作)이다. (사진은 양 기념비와 허 군수이다)
이와 동시에 『경성일보』 1933년 11월 21일자에도 비슷한 내용이 소개되어 있는데, 여기에서는 특히 이들 기념비가 ‘인천개항오십주년기념사업(仁川開港五十周年記念事業)’의 하나로 추진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그러고 보면 인천부청(仁川府廳)에서 펴낸 『인천부사(仁川府史』(1933) 역시 동일한 맥락의 기념사업으로 추진된 결과물이었다.
알고 보니 이 책의 편찬을 책임지고 있던 코타니 마스지로(小谷益次郞)가 인천개항에 관한 사료를 추적 정리하는 과정에서 임오군란 당시 하나부사 공사 일행의 피난에 관한 세부적인 사실관계를 새롭게 포착한 것이 바로 이러한 기념비의 건립을 추진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였던 모양이었다. 실제로 『경성일보』 1933년 9월 1일자에 수록된 「개항(開港)의 사적(史跡) 새롭게 발견(發見), 기념비 건설(記念碑 建設)」 제하의 기사에는 이러한 내용이 정리되어 있다.
[인천(仁川)] 하나부사 공사(花房公使)의 영국군함(英國軍艦)에로의 피난(避難) 및 제물포조약 체결(濟物浦條約 締結)의 2사실(史實)은 인천개항사(仁川開港史)의 제1엽(第一頁)을 장식하고 있으나 금회(今回) 인천부사 편찬(仁川府史編纂)의 임무를 맡고 있던 코타니 마스지로 씨(小谷益次郞氏)의 엄밀(嚴密)한 조사(調査)에 의해 지금까지 판명(判明)되지 않았던 전기(前記) 2사실(史實)의 인연(因緣) 깊은 개소(箇所)가 판명(判明), 부(府)에서는 이를 영구(永久)히 기념(記念)코자 해개소(該箇所)에 머지않아 기념비(記念碑)를 건설(建設)할 계획(計畫)을 진행하고 있다.
이러한 결과로 비석의 제명(題名)은 당시의 조선총독이던 우가키 카즈시게(宇垣一成, 재임 1931.6.17~1936.8.5)의 휘호(揮毫)로 이뤄졌고, 여기에는 각각 ‘하나부사 공사 일행 조난지비(花房公使一行遭難之碑)’와 ‘인천부사 정공지용비(仁川府使 鄭公志鎔碑)’라는 글자가 새겨지게 되었다. 그리고 비문(碑文)의 정리는 기념비 건립주창자이기도 했던 코타니 마스지로 그 자신이 맡았으며, 높이 5척(尺) 4촌(寸), 너비 2척(尺)의 화강석(花崗石)을 사용하여 만든 비석의 조각은 조선미술품제작소(朝鮮美術品製作所)의 손으로 이뤄졌던 것이 확인된다.
하나부사 공사 일행 조난지비의 비문 풀이
花房公使一行遭難之碑 하나부사 공사 일행 조난지비 (*) 자료출처는 경기도 편찬, 『경기지방의 명승사적(京畿地方の名勝史蹟)』(1937), 222쪽이며, 밑줄 친 곳은 현재 파손된 비석의 후면에 글자가 그대로 남아 있는 부분이다 |
‘하나부사 공사 일행 조난비’와 ‘인천부사 정지용 기념비’의 설치장소는 옛 인천도호부가 자리했던 부천공립보통학교(富川公立普通學校)의 구내였다. 이 학교는 1917년 9월 20일에 설립인가를 받았으며, 나중에 1938년 4월 1일에 이르러 조선교육령의 개정에 따라 ‘문학공립심상소학교(文鶴公立尋常小學校)’를 거쳐 1941년 4월 1일에는 다시 ‘문학공립국민학교(文鶴公立國民學校)’로 개칭되었다.
현재 인천광역시 연수구 옥련동 청량산 기슭에 자리한 인천시립박물관 야외전시구역에는 바로 이때 제막된 ‘하나부사 공사 일행 조난비’의 잔존물이 남아 있다. 어찌 된 영문인지 비석 자체는 세로 방향으로 쪼개진 상태로 가운데 토막만 전해지고 있으며, 그 앞에 세워진 안내문안에는 “2002년 3월 문학초등학교 인근 공사장에서 발견되어 박물관으로 옮겨졌다”고 하여 비석의 잔편이 수습된 과정을 알려주고 있다.
하지만 이것과 함께 조성되고 같은 날에 제막된 ‘인천부사 정지용 기념비’는 그 행방을 전혀 알 수 없는 상태이다. 해방 이후 누군가의 손에 의해 파괴되어 사라진 것인지, 아니면 ‘하나부사 공사일행 조난비’처럼 문학초등학교 주변의 어느 곳에 여전히 매몰되어 있는 것인지는 그 내막이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
『고종실록』 고종 19년(1882년) 6월 22일(양력 8월 5일) 기사를 보면, 이날 “특별히 인천부사 정지용을 발탁하여 한성부 좌윤(漢城府 佐尹)으로 삼았다”는 내용이 눈에 띈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나라의 부름이 — 하나부사 공사 일행에 호의를 베풀고 그들의 도주를 도와줬다는 것에 대해 —자신에게 죄를 주려는 의도로 파악한 것인지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고 만다.
인천부사 정지용은 정말로 임오군란 과정에서 저지른 자신의 처신에 대해 벌이 내려질 것을 두려워하여 자결을 택한 것인지, 그리고 그가 죽음의 장계를 올리는 바로 그 순간에 조정(朝庭)에서는 되려 그에게 한성부 좌윤의 자리를 제수한 것은 또 무슨 의미인지 ……. 그야말로 이런 것들은 간곳을 전혀 알지 못하는 ‘인천부사 정지용 기념비’의 행방만큼이나 여러모로 궁금증을 자아내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