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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봄’ : 잊지 말자 그들의 죄(罪)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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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봄’ : 잊지 말자 그들의 죄(罪)를

김해규 평택인문연구소장

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다

1979년 10월 27일, 평소처럼 자취방에서 일어나 습관처럼 라디오를 틀었다. 세수하고 수건으로 얼굴을 닦는데 뭔가 싸한 느낌이 들었다. 신나는 아침방송이 나와야 할 라디오에서 장송곡만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잠시 후 침통한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국민 여러분 슬퍼하십시오. 어제저녁 박정희 대통령께서 서거하셨습니다.’ 순간 다리 힘이 풀리며 털썩 주저앉았다. 세상이 끝난 것 같았다.

전국에 계엄령이 선포되고 국장(國葬)이 거행되었다. 국민들은 눈물을 흘리며, 장래를 걱정하며 국장을 지켜봤다. 계엄사령관에는 육군참모총장 정승화가 임명되었다. 최규하 국무총리는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임명되었다. 이삼일쯤 지나자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은 보안사령관 전두환 소장의 얼굴이 자주 TV 화면에 잡혔다. 빨갱이의 대명사였던 김대중과 민주투사로 각인된 김영삼, 만년 국무총리만 하다가 박정희 대통령의 눈 밖에 나서 한동안 보이지 않던 김종필도 TV에 등장했다.

또 며칠이 지나자 18년 독재, 민주회복과 같은 단어가 횡행했다. 좀 더 자유롭고 정의로우며 평등한 세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언론과 대중들의 입을 통해 흘러나왔다. 일부 지식인들은 유신독재 청산과 민주주의의 봄을 논의했다. 시민사회 원로들은 유신헌법 폐지와 민주적 선거에 따른 정권교체를 대통령에게 건의했다. 기나긴 겨울이 지나고 봄이 깨어나고 있었다.

12·12 군사반란 민주화의 봄을 얼어붙게 해

박정희 대통령 국장이 끝나자 여론은 급격히 바뀌었다. 대통령은 박정희뿐이라고 생각했던 국민이 ‘대통령은 누구나 할 수 있다’, ‘대통령은 국민들이 선택하는 것이다’, ‘사회비판은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민주화에 대한 기대와 꿈이 부풀어 오르던 어느 날 계엄사령관 정승화가 화면에서 사라졌다. 대신 대머리와 매서운 눈매가 인상적인 보안사령관 전두환이 땡전 뉴스(뉴스 첫머리)의 중심으로 등장했다. ‘본인은 ~’으로 시작되는 그의 어투와 눈매는 평범한 소시민을 바짝 얼어붙게 했다. 한 달쯤 지나자 흉흉한 소문이 나돌았다. 서울에서 쿠데타가 일어났고 그 중심에는 보안사령관 전두환과 하나회라는 신군부 세력이 있다는 소문이었다. 소문은 사실로 나타났다. 신군부는 계엄사령관 정승화를 내란음모죄로 무려 17계급이나 강등하여 전역시켰다. 그해 12월 최규하가 통일주최국민회의에서 새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지만 그가 허수아비라는 사실을 모든 국민은 알고 있었다.

쿠데타에 성공한 전두환과 신군부 일당은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보안사령관으로 합동수사본부장에 있으면서 중앙정보부장까지 겸임하여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했다. 신군부가 군부 내 요직을 독점한 뒤 반대세력은 전역시키거나 좌천시켰다.

국가 요직도 그들이 독점했고 태극무공훈장도 어깨에 둘렀다. 계엄령을 전국적으로 확대했으며, ‘언론강제통폐합’, ‘10.27 불교법난’, ‘삼청교육대’ 사건으로 언론과 종교계를 장악하고 비판세력을 억눌렀다. 신군부 일당이면 계급 여하를 막론하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했다. 상사(준위) 출신으로 보안사령부 언론대책반장을 지낸 이상재는 허문도와 함께 언론강제통폐합을 주도하였다. 민주화의 봄이 얼어붙고 동토의 계절이 다시 시작되었다.

기억은 심판의 첫 단추다

전두환과 신군부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던 대학생들은 1980년 5월부터 본격적으로 계엄해제와 신군부 퇴진운동을 전개했다. 5월 초에는 전국 대학에서 시국선언문이 발표되었다. 대학생들은 교내시위를 벌이며 계엄해제와 민주화 일정 제시를 요구했다. 5월 13일부터 연세대학교를 비롯한 서울의 6개 대학 학생 3000여 명이 학교 밖으로 나와 가두시위를 전개했다. 5월 14일에는 서울의 21개 대학 7만여 명이 ‘전두환 퇴진’, ‘계엄해제’ 등을 요구하며 시위했고, 5월 15일에는 10만여 명의 학생들이 서울역 광장에서 집회했다. 전국 대도시에서도 민주화 시위가 전개되었다. 일명 ‘서울의 봄’이었다.

시위가 확산되자 신군부는 당황했다. 당시 신현확 국무총리는 서둘러 ‘연말까지 개헌안 확정’, ‘1981년 상반기까지 양대 선거실시’를 발표하며 민주화 시위를 자제시키려 노력했다. 5월 20일 국회는 계엄령 해제와 유신헌법 개정 논의를 합의했다. 하지만 신군부는 학생들의 반발과 정치권의 결의를 무시하고 비상계엄 전국 확대, 국회해산, 비상기구 설치같은 폭압적 정책을 내놓더니 권력 위의 권력인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했다. 광주민주항쟁을 피로 진압하고 민주화 세력을 겁박했다.

김대중은 내란음모죄로 체포되었으며 대학에는 휴교령이 내려졌다. 전국의 도시와 대학교에는 공수특전단과 군인들이 투입되었다. 그렇게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과 제5공화국은 ‘정의사회 구현, 복지사회 건설’을 국정지표로 내세웠다.

영화 ‘서울의 봄’은 논픽션이다

김성수 감독은 스타 감독이었다. 1990년대 허영만 원작의 ‘태양은 없다’, ‘비트’를 대히트시켰다. 영화적 감각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2000년대에는 죽을 쒔다. ‘무사’, ’감기‘, 아수라’ 같은 영화로 인지도를 높였지만 이전 감각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김성수 감독이 이번에는 12.12 군사반란을 소재로 영화판으로 돌아왔다. 일명 ‘서울의 봄’이다. 이 영화는 개봉 전부터 주목받았다. 정우성을 필두로 하는 화려한 캐스팅과 시의적절한 소재로 가뜩이나 불황에 허덕이는 한국영화판에 신선한 바람이 될 것으로 기대되었다. 영화는 개봉 첫날부터 흥행 대박이다. 이런 영화를 오랫동안 기다렸다는 듯 개봉 10일 만에 누적 관객 수 300만을 돌파했다. 관객들의 반응도 좋고 입소문도 빠르다. 이대로라면 1000만은 쉽게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

아들에게 조조 시간 영화표 예매를 부탁했다. 오전 10시 30분, 조금 이른 시간이어서 인지 관객이 많지 않았다. 물과 음료도 준비하지 않고 영화관에 들어갔다. 영화는 연기와 대본, 편집 모두 깔끔했다. 장면 장면에 군더더기가 없었다. 자칫 지루할 수 있는 상영시간 141분이 언제 지났나 싶게 금세 지나버렸다. 개봉 전 픽션임을 강조했지만 내가 본 영화는 순수 논픽션이었다. 전두환을 비롯한 주요 인물의 이름에 가림막을 쳤고 정우성(이태신)을 내세워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의 이미지 변신을 시도했지만 그렇다고 사실을 가릴 만큼은 아니었다.

나는 영화 내내 분노했다. ‘친일잔재 청산도 못한 나라에서 독재청산도 제대로 못했다’는 생각에 부끄러웠다. 문학하는 친구가 시인 서정주에 대한 평가를 놓고 고심하는 것을 봤다. 서정주의 영향을 받아 시인으로 성장한 그로서는 정체성에 혼란이 왔을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친구에게 말했다. “전시체제기 대동아공영권과 일제의 침략전쟁을 찬양하며 우리 젊은이들을 사지로 몰아넣었던 그가 해방 후 참회하지 않고 친독재 행위를 했으며 죽기까지 회개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망각하지 않는 한 나는 그의 시(詩)를 읽을 수 없다.”

1212 군사반란으로 국민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피로 억압하고 국가를 위험에 빠뜨린 역사적 죄인들은 아직도 회개하기는커녕 떵떵거리며 호의호식한다. 법적인 심판이 어려워진 지금 남은 것은 역사적 심판밖에 없다. 우리가 그들을 역사적으로 심판하기 위해서는 만행을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기억(記憶)은 심판의 첫 단추다. 만행을 역사책에 기록하여 후손들을 영원히 부끄럽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영화 ‘서울의 봄’이 고맙다. • <평택시민신문> 2023.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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