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김교성
일제강점기의 ‘금배지’는 중추원 참의였다. 중추원 의관(議官)으로도 불리는 직책이다. 이들은 국회의원 비슷한 위상을 띠었다. 지금의 국회의원처럼 국정을 견제했던 아니지만, 외형상으로는 비슷한 일을 하는 것처럼 비치는 한국인 유력자들이었다.
1910년 8월 29일에 대한제국을 멸망시킨 일본은 그해 10월 1일 칙령 제355호로 ‘조선총독부 중추원 관제’를 시행했다. 이 법령 제1조는 “조선총독부 중추원은 조선총독에 예(隸)하여 조선총독의 자순에 응하는 바로 함이라”라고 규정했다. 총독에 예속된다는 한계를 띠긴 했지만, 형식상으로는 총독에게 자문을 제공하는 기구였다. 한국인들의 의견을 총독에게 전달한다는 점에서 형식상이나마 민의 전달 기관의 성격을 띠었다.
당시의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중추원은 그로부터 15년 전인 1895년에 정비된 중추원이다. 1895년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제2차 김홍집 내각을 움직여 조선 내정에 간여할 때였다. 그해 4월 19일(음력 3월 25일), 조선왕조 법령인 칙령 제40호 ‘중추원 관제와 사무장정’이 공포됐다.
음력으로 고종 32년 3월 25일 자 <고종실록>에 수록된, 세로쓰기로 작성된 이 사무장정 제1조는 “중추원은 내각의 자문에 응하여 왼쪽에 나오는 사항을 심사하고 의정하는 처소로 함”이라고 한 뒤 “법률·칙령안”과 “임시로 내각에서 문의하는 사항”을 다루는 기관이라고 규정했다.
동학운동과 독립협회 활동이 있은 뒤인 1898년 11월 2일에는 중추원의 권한이 형식상으로나마 강화됐다. 이날 개정된 중추원 관제는 중추원이 법률·칙령의 제정 및 개폐는 물론이고 “인민의 헌의하는 사항”도 심의·의결하도록 했다.
몰락해 가는 조선왕조를 되살리기 위한 혁신적 에너지는 크게 세 방향에서 나왔다. 김옥균 같은 고종의 측근들로 대표되는 1884년 갑신정변은 조선 정부에서 나온 에너지다. 전봉준으로 대표되는 1894년 동학혁명은 민중 내부의 혁명세력에서 나온 에너지이고, 서재필로 대표되는 1896년 독립협회운동은 민중 내부의 온건개혁세력에서 나온 에너지다. 이 세 에너지가 모두 잠잠해지면서 조선은 일본에 급격히 넘어갔다.
조선 정부가 독립협회의 요구 사항을 부분적으로 수용해 중추원이 인민의 건의 사항을 심결하도록 한 것은 그 직전의 동학혁명으로 왕조가 무너질 뻔했던 경험과 무관치 않다. 혁명세력으로 인한 호된 경험이 온건세력에 대한 타협의 제스처로 연결된 측면이 강하다. 중추원이 의회 기능을 부분적으로 갖게 된 데는 그런 배경도 작용했다.
그런 일들이 있고 난 뒤에 일본이 식민지 한국에 중추원을 설치했다. 대한제국 중추원 역시 유명무실하기는 했지만, 그것과 비슷한 제도를 일본도 시행한다는 인상을 주기 위한 조치라고 할 수 있다. 식민지 한국의 민의를 수렴하겠다는 제스처를 그렇게 표시한 셈이다.
‘중추원 참의’ 김교성이 실제로 한 일
총독부 중추원의 민의수렴 기능이 허상에 불과했다는 점은 중추원 참의인 김교성(1861~1943)을 통해 잘 드러난다. 그가 중추원로부터 수신한 문건들은 중추원이 어떤 기관인지를 증명한다.
김교성은 철종 임금 말기인 1861년 4월 26일 한성부에서 출생했다.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제4-1권 김교성 편에 따르면, 그는 26세 때인 1897년 11월 지금의 기획재정부인 탁지부 재무관이 되어 관직의 길로 나아갔다.
<친일인명사전> 제1권 김교성 편에 의하면, 그가 대한제국에서 역임한 마지막 관직은 멸망 6개월 전인 1910년 2월에 임명된 한성재무감독국 양주재무서장이다. 양주 지역의 재무와 세무를 관장하는 관직이었다.
고관 출신이라고 할 수 없지만, 그는 대한제국이 문을 닫자마자 중요 인물로 부각됐다. 멸망 2개월 뒤인 1910년 10월, 중추원 부찬의에 임명됐다. 일제 지배가 전면적으로 시행되자마자 국회의원과 비슷한 위상을 갖게 된 것이다.
중추원 의장은 일본인인 정무총감이 겸직했기 때문에 한국인이 임명될 수 없었다. 1910년 당시에 한국인에게 허용된 것은 부의장 1인, 고문 15인, 찬의 20인, 부찬의 35인이었다. 일반 의원급에 해당하는 찬의와 부찬의는 1921년에 참의로 통일됐다. 김교성이 임명된 자리는 1921년 이후의 참의에 해당됐다.
1910년에 책정된 김교성의 연봉은 600원이다. 1개월에 50원이 지급됐던 것이다. 히로히토 일왕에게 수류탄을 던진 이봉창 의사가 1917년에 약국 직원으로 근무하면서 받은 월급이 숙식 제공과 10원이었다. 김교성의 연봉은 3·1운동 2년 뒤인 1921년에는 1200원으로 인상됐다. 이 상태로 1924년 4월까지 중추원 참의로 활동하면서 친일재산을 축적했다.
김교성이 받은 연봉은 한국인들에게서 수탈된 자원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 돈을 받으면서 그가 한 일은 한국인들의 여론을 총독부에 전달하는 것이 아니었다. 김교성이 중추원으로부터 수신한 통지문들을 정리해 놓은 위 진상규명보고서 제3-1권에 따르면, 그가 참여한 일들은 중추원이라는 명칭에 걸맞지 않은 것들이었다.
김교성은 제1차 세계대전 발발 5개월 전인 1914년 2월 5일에 ‘건국기념일인 2월 11일 기원절 축하식에 참석하라’는 통지를 받았다. 5월 15일에는 용산 연병장에 나와 전년도 4월에 죽은 메이지 일왕의 부인인 쇼켄 왕비를 향해 절하는 요배식에 참석하라는 통지를 받았다.
9월 2일에는 닷새 뒤 중추원에 나와 총독의 훈시를 듣고 가라는 연락을 받았다. 11월 8일에는 다음날 있을 남산 경성신사 행사에 참석하라는 전갈을 받았다. 12월 28일에는 익월 4일에 있을 관리복무규율 낭독식에 참석하라는 통지가 나왔다.
이런 유형의 행사에 참석하는 것을 제외하면 중추원은 실상은 할 일이 별로 없었다. 중추원 청사 사진과 함께 보도된 1921년 4월 29일자 <동아일보> 3면 좌중단 기사는 “양로원이니 무엇이니 하는 비평이 잇슬 뿐이오”라는 말로 이 기구를 폄하했다. 중추원 조직이 증대되는 것을 두고 ‘식구(食口)를 증(增)한 양로원’이라는 기사 제목을 뽑은 데서도 느낄 수 있듯이, 중추원은 밥이나 축내는 기구로 비쳤다.
총독부의 훈시를 대중에 퍼트리는 역할
진상규명보고서 제3-1권은 “설립된 이후 필요할 경우에만 임시로 회의를 소집하던 조선총독부 중추원은 1916년부터 정기적인 회의체를 운영하였다”라고 설명한다. 나중에는 더 많아졌지만, 이때부터 매월 말일에 회의를 갖기로 했다. 1910년에 세워진 기구가 6년 뒤에 가서야 한 달에 1일 정례회의를 갖기로 했다. 외형상으로 의회 비슷한 모양새를 띤 것과 달리, 실제로는 각종 의례에나 동원하는 기구였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중추원 구성원들에게 연봉을 뿌린 것은 아니다. 중추원 참의(찬의·부찬의)들은 일제가 볼 때는 ‘식구 역할’을 충분히 하는 사람들이었다.
김교성이 받은 통지문에서 나타나듯이, 중추원 참의의 임무 중 하나는 총독부 관계자들의 훈시를 듣는 것이었다. 일제는 참의들이 이런 훈시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는 게 아니라 두 귀로 듣고 한 입으로 나오도록 만들었다. 한국인들에게 훈시 내용을 퍼트리도록 했던 것이다. 제3-1권은 중추원의 기능에 관해 이렇게 설명한다.
“조선총독부의 시정 방향을 비롯한 주요 정책에 변화가 있을 때 중추원 의관들에게 그것을 설명하고 이를 일반 민중에게 홍보·선전하도록 독려하는 것이었다.”
중추원 참의들이 이 임무를 잘 수행했다는 점은 친일적 성향을 가진 한국 극우세력이 오늘날까지도 식민지 근대화론을 역설하는 사실로도 증명된다. 일제 식민지배 덕분에 한국이 근대화됐다고 중추원 참의들이 한국인들에게 귀가 따갑도록 선전하고 다녔기에, 아직까지도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한국에 있는 것은 아닐까.
김교성이 받은 1914년 9월 2일 자 통지는 9월 7일 총독관저에 나와서 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독의 훈시를 들으라는 것이었다. 제3-1권은 그 훈시 사항 일부를 이렇게 설명한다.
“1915년에 개최 예정인 ‘조선총독부 시정 5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에 대하여, 대한제국 시기에 비해 한일합병 후 조선 산업이 크게 신장되었음을 일반 조선인에게 보여주어 더욱 노력하도록 하는 한편 일본인에게 조선 산업의 유망한 전도를 보여줌으로써 조선총독부 신정책의 실적을 전시하여 일반 민중의 자각 분발을 촉구하고 공진회 개최의 목적을 달성하도록 노력할 것을 당부하였다.”
총독의 훈시를 들은 중추원 참의들이 밥값을 제대로 했다는 점은 그들이 퍼트린 이론이 해방 뒤에 생명력을 다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윤석열 정부 들어 더욱 강한 힘을 발휘하는 데서도 느낄 수 있다. 1943년에 사망한 김교성 같은 중추원 참의들이 일제의 뜻에 맞는 역할을 제대로 수행했기에, 지금의 대일 굴욕외교가 소수이기는 하지만 일부 한국인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김종성 기자
<2024-01-07>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일제강점기의 한국인 금배지… 그들이 저지른 짓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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