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헌병보조원 조성엽
일제강점기 역사에 자주 등장하는 것이 한국인 헌병보조원들이다. 악랄한 일제 주구의 이미지를 띠는 이들은 ‘이토 히로부미 키즈’라 할 만했다. 이토 히로부미 한국통감의 치안 정책이 낳은 역사적 산물이었기 때문이다.
을사늑약(을사보호조약) 34일 뒤인 1905년 12월 21일 초대 통감에 임명된 이토는 처음에는 일반 경찰력을 통해 치안을 유지하려 했었다. 하지만 문관 경찰로는 의병투쟁에 대처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일본군 헌병대를 한국 치안에 활용하는 한편 이들을 자신의 지휘하에 두는 방안이었다.
1906년 2월 9일 공포된 일본 칙령인 ‘한국에 주차하는 헌병 행정경찰 및 사법경찰에 관한 건’은 “한국에 주차하는 헌병은 군사경찰 외에 행정경찰 및 사법경찰을 관장한다”라고 하는 한편, “단, 행정경찰 및 사법경찰에 대해서는 통감의 지휘를 받는다”고 규정했다. 한국주차군사령관과 더불어 한국통감이 헌병을 지휘할 수 있게 한 것이다.
그런데 일본인 헌병을 증원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1908년 2월 1일 일본 제국의회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한국에 대한 군사비 지출 문제로 훗날의 조선총독인 데라우치 마사타케 육군대신이 추궁을 받았다. 그래서 식민 당국은 일본 재정이 아닌 대한제국 재정으로, 그것도 한국 인력을 충원해 헌병대를 확충하는 방안을 안출했다. 이것이 한국인 헌병보조원 제도다.
한국인으로 한국인을 제압, 헌병보조원
그런 재정적 필요 외에, 한국인 헌병보조원을 앞세워 한국인 의병을 진압한다는 이이제이 전략도 이 제도의 창설에 영향을 줬다. 1908년 6월 11일 공포된 대한제국 칙령 제31호 ‘헌병보조원 모집에 관한 건’ 제1조는 “폭도의 진압과 안녕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헌병보조원을 모집하여 한국주차일본헌병대에 의탁”한다고 규정했다. 의병 진압이 한국인 보조원 모집의 핵심 사유 중 하나였음을 보여주는 규정이다.
한국 인력과 한국 재정으로 운영되는 헌병보조원 제도를 일본헌병대에 맡긴다고 규정했다. 이 제도가 한국인 착취를 목적으로 했다는 것이 이런 데서도 드러난다.
이렇게 모집된 헌병보조원이 1908년에 4234명이었다. 한국에 주둔한 일본군 헌병 6632명의 63.8%가 한국인 보조원으로 채워졌던 것이다. 일본군 헌병대 병력은 1907년에 797명이었다. 그랬던 것이 한국인들의 가세로 1년 만에 8배 가까이 급증했던 것이다.
그렇게 출발해 1910년 8월 29일 이후의 일제강점기로 넘어간 헌병보조원 제도는 식민지 한국인들의 원성을 부르는 원인이 됐다. 헌병보조원들은 일본의 부추김을 받아 독립운동가들만 탄압하는 게 아니라 일반 한국인들까지 탄압하고 이들에게 행패를 부렸다. 1919년 3·1운동 뒤에 일본이 헌병경찰 제도를 신속히 손본 것은 헌병보조원들에 대한 원성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국인을 괴롭힌 헌병보조원 중 하나가 조성엽이다. 언제 태어났는지는 알 수 없고 1919년 9월 13일에 사망한 사실만 확인되는 인물이다. <친일인명사전> 제3권 조성엽 편은 “1919년 3월 평안북도 의주군 고령삭면 헌병주재소의 헌병보조원으로 근무했다”고 기술한다.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제4-16권 조성엽 편에 제시된 프로필도 간략하다. 1919년 3월 30일 만세시위 당시에 헌병보조원이었다는 것과 함께 그해 9월 13일에 사망한 사실만 언급돼 있다.
기록상으로 확인되는 프로필은 단출하지만, 그가 초래한 원성만큼은 하늘을 찌를 듯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위 진상규명보고서에 인용된 1920년 4월 20일자 <독립신문> 기사다. “작년 3월 30일 의주군 고령삭면 영산시장에서 시위운동이 기(起)하였을 시(時)에 장인국, 김석운, 황수정, 허창준, 백성아 등 5명이 적경(賊警)에게 총살을 당하였었는데 당시 방총(放銃)한 자는 적의 충견 보조원 조성엽이란 자라”라고 신문은 전했다.
적의 충견 보조원, 조성엽과 그들
3·1운동 때 일본군과 함께 헌병보조원들이 벌인 이 같은 만행은 사전에 훈련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대한제국 멸망 전부터 한국통감부의 묵인하에 악행을 자행했다. 위 진상규명보고서 제3-2권이 <대한매일신보>를 토대로 열거한 헌병보조원들의 행태는 기가 막힐 정도다.
경기도 양주군에서는 헌병보조원이 농사에 쓰는 소를 마음대로 끌고 가버렸다. 포천군에서는 수색을 빙자해 주민을 구타하던 보조원이 도망가는 아이들을 겁주려고 발포를 했다. 양천군에서는 술과 음식을 배부르게 먹은 보조원이 술집 주인을 때려 죽었다.
경기도 풍덕군과 경북 상주군에서는 보조원이 주민에게 ‘의병과 연관돼 있지 않느냐’며 트집을 잡다가 돈과 재물을 강탈했다. 황해도 금천군에서는 보조원이 시장 상인들의 영업을 방해해 50여 세대가 수입원을 잃고 아사 상태에 빠지게 만들었다. 황해도 평산군에서는 보조원이 여성과 강제 결혼해 남편이 고소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 정도면 헌병이 아니라 점령군 그 이상이었다. 이 때문에 원성이 끊이지 않았지만 일제 당국은 아랑곳도 하지 않았다. 대한제국을 무너트린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위 제3-2권은 “한국 병합 후인 1911년경 한국민 사이에서 헌병보조원의 불의에 분노하여 이를 지적하고 자신의 무죄를 호소하는 다수의 투서가 있었다고 한다”라고 한 뒤 “이러한 반발에 대해 일제는 오히려 헌병보조원의 행위는 정당하고 헌병보조원에 대한 악평은 허구와 중상적 날조에 지나지 않는다며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고 기술한다.
일제가 그런 만행을 묵인하고 방조한 결과가 3·1운동 시기에 자행된 조성엽 등의 만행으로 이어졌다. 한국인들의 생명과 재산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도록 ‘훈련’받은 결과로, 조성엽이 영산장터에서 다섯 명을 사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고 볼 수 있다.
국권침탈 이듬해인 1911년 4월 8일 조선총독부령 제45호로 제정된 헌병보조원규정에 따르면, 보조원들의 월급은 침식 제공 없이 원칙상 7원에서 16원 사이였다. 한국어 이외의 언어를 이해하는 경우에는 1원에서 5원 이내의 특별수당이 추가로 지급됐다.
독립운동가 조봉암은 회고록 <나의 정치백서>에서 “열여덟 살 때에 월급 7원 받고 군청 고원(雇員) 노릇도 했습니다”라고 말했다. 1898년 생으로 4년제 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비인가 중학교급인 2년제 보습학교를 나온 조봉암이 한국 나이 18세가 되는 1915년에 월급 7원을 받았다. 헌병보조원들의 월급은 아주 많지는 않았지만 일반 한국인들에 비하면 괜찮은 편이었다.
이용만 당하다 결국 비참한 최후
조성엽은 그런 친일재산을 축적하면서 헌병보조원 생활을 했다. 그러다가 3·1운동 현장에서 일제에 대한 충성심을 발휘해 총탄을 마구 발사했다. 이는 그 자신의 생명을 단축시키는 결과로 귀결됐다. 그해 9월 13일의 보복 공격으로 목숨을 잃었다고 <친일인명사전>은 기술한다.
경찰력만으로는 의병을 진압할 수 없으니 한국인들을 헌병보조원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이토 히로부미 등의 정책이 악랄한 헌병보조원의 신화를 만들어냈다. 이들은 의병 진압에 이어 3·1운동 진압에도 투입돼 한국인들을 분노케 만들었다. 조성엽은 그런 식으로 활용하다가 끝내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일제 헌병과 헌병보조원들은 3·1운동을 초래한 원흉이라는 비판을 받았고, 이에 대해 일제는 무단통치를 문화정치로 바꾸고 헌병경찰제를 보통경찰제로 바꾸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마치 헌병과 그 보조원들에게만 원인이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조치였다.
그들이 악행을 범한 것은 사실이지만, 더 큰 원인은 그들의 상부에 있었다. 그런데도 그들의 권한을 약화시키는 방법으로 일제는 수습책을 모색했다. 조성엽 같은 한국인 헌병보조원들은 이이제이의 도구로 쓰이는 데 그치지 않고 어느 정도는 3·1운동 수습에 활용된 측면도 없지 않다.
김종성 기자
<2024-01-14>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일본의 충견, 한국인을 쏘아 죽인 한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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