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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로비의 달인’의 노골적인 친일 구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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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윤갑병

▲ 1919년 8월 30일 자 <매일신보> ⓒ 국립중앙도서관

1919년 3·1운동은 일본을 멈칫하게 했다. 강압적인 무단통치로는 더 이상 안 되겠다고 판단하게 만들었다. 3·1운동 뒤에 취임한 사이토 마코토 조선 총독은 전임 총독들이 즐겨 쓰던 ‘동화’라는 용어의 사용도 극도로 절제했다.

1919년 8월 30일 자 <매일신보> ‘조선통치방침’에 따르면, 사이토 신임 총독은 “종래 조선 통치를 언론하난 자는 필히 내선인의 동화를 태급히 하난 고로 기처(其處)에 난관이 생하난도다”라고 말했다. 내지인과 조선인의 동화를 너무 급히 추진해 거기서 난관들이 생겼다고 평가한 것이다. 그러면서 “백년 후의 동화를 망(望)함이 근본적 통치이라”라고 말했다. 동화정책을 천천히 추진하겠다며 한국인들을 안심시켰던 것이다.

이처럼 일본이 잠시 멈칫하는 사이에 독립운동가들은 임시정부를 세워 독립운동을 업그레이드시킨 반면, 친일파들은 새로운 논리를 만들어 ‘포스트 3·1운동’에 대비해 나갔다. 이 시기 친일파들이 어떤 방식으로 활로를 모색했는지를 보여주는 것 중 하나가 국민협회에 참여한 윤갑병의 사례다.

1919년 8월에 결성된 협성구락부를 모체로 1920년 1월 18일 설립된 것이 국민협회다.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제3-3권 국민협회 편에 따르면, 이 단체는 설립 취지문에서 “일본은 이미 옛날의 일본이 아니라 조선의 토지와 인민을 포괄하는 새로운 일본이 되었다”라며 “바꾸어 말하면 일본민족만의 일본이 아니라 일·선 양 민족의 일본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나타난 신일본주의의 핵심 메시지는 일본과 더불어 한국도 주체가 되는 신일본이 형성돼 있으니 일본에 적개심을 품고 대한독립 만세를 외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위 취지문은 “우리는 이러한 사실과 자각에 입각하여 내선인 간에 존재하는 구거(溝渠)를 철거하여 혼연일가가 되고 공고한 국가를 형성하여 일·선 민족공존의 대의를 완수하려 한다”고 선언했다. 식민지 한국과 일본 사이의 도랑을 철거하고 완전히 하나의 집안을 이뤄야 한다고 역설한 것이다.

국민협회를 조직한 인물은 친일 언론인인 민원식(1886~1921)이다. 생몰 연도에서 확인되듯이 그는 국민협회 설립 이듬해에 사망했다. 국가보훈부가 1990년에 발간한 <독립유공자공훈록> 제8권 양근환 편에 따르면, 3·1운동 이듬해에 민원식은 도쿄 제국호텔에서 만난 유학생 양근환이 한국 상황을 질문하자 “국내는 아주 평온하지”라며 독립운동가들을 폭도로 불렀다가 현장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런 뒤에 국민협회를 떠맡은 인물 중 하나가 윤갑병이다. <친일인명사전> 제2권 윤갑병 편은 “1925년 1월 민원식·김명준의 뒤를 이어 국민협회 회장을 맡았다”고 한 뒤 “1926년 이후 국민협회 회장에서 물러나 고문으로 활동했다”고 설명한다.

일본이 장악한 상태에서 행정 관료로 변신해 복귀

윤갑병의 출생 연도는 명확하지 않다. <친일인명사전>에는 1864년으로 적혀 있고,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제4-11권에는 1863년으로 쓰여 있다. 이 시기에 평안도 의주에서 출생한 그는 임오군란이 일어난 해인 1882년에 종9품 무관인 어영청 초관(哨官)이었다. 중앙군인 어영청의 하급 장교로 있었던 것이다.

그는 20대 후반인 1890년에 군인 신분으로 유배형을 받았다. 주상 비서실 일지인 음력 고종 27년 11월 7일 자(양력 1890년 12월 18일 자)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전보총국 직원과 짜고 전보를 훔쳐본 뒤 거짓 전보를 쳐서 상인에게 손해를 끼친 일이 발각돼 함양군에 약 1년간 유배를 가게 됐다. 전보통신의 신뢰성을 깨뜨린 점이 재판에서 비중 있게 고려됐다.

1891년 12월까지 유배형을 산 그는 그 뒤 중요한 변화를 겪는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전신인 반민족문제연구소가 1993년에 펴낸 <친일파 99인> 제1권 윤갑병 편은 “일본에 건너가 근대 문물을 견학하였으며, 중국에도 가서 중국의 변화하는 정세를 살피고 돌아왔다”고 설명한다.

그런 다음인 1894년에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조선 정부의 요청하에 청나라군이 들어오고 그런 요청 없이 일본군이 덩달아 들어왔다. 인천에 상륙한 일본군은 고종 31년 6월 21일(1894년 7월 23일) 동학군 본부가 아닌 경복궁을 점거하고 조선 정부를 장악했다.

이때 일어난 일이 윤갑병의 복귀다.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음력 7월 16일(양력 8월 16일)에 그는 내무아문 주사에 임명됐다. 일본이 조정을 장악한 상태에서 행정 관료로 변신해 복귀했던 것이다.

그 뒤 궁내부 주사, 농상아문 참의, 충남 정산군수 등을 역임한 그는 러일전쟁 때인 1904년에 일진회에 가담하면서 본격적인 친일의 길을 걸었다. 이때 일본군 지원을 위한 일진회 북진수송대에 참여한 공로가 인정돼 1908년에 일본 훈장인 서보장을 받았다. 이토 히로부미의 눈에 들어 1907년에 함북관찰사가 된 그는 일제 치하에서 강원도 도지사, 총독부 자문기관인 중추원 참의 등의 고관을 지냈다.

그가 회장을 역임한 국민협회는 신일본주의를 선전해 3·1운동 이후의 한국 대중을 견제했다. 그런데 신일본주의는 일본 정부와 총독부에 대한 어필이라는 측면도 컸다. 이 주의는 일본을 상대로 친일파들의 지분을 요구하는 도구가 됐다.

2006년 <사총> 제62권에 실린 송규진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교수의 논문 ‘일제하 참정권청원운동의 논리’는 “신일본주의는 일본과 조선 민족공동의 국가인 새로운 일본제국의 신민으로서 권리를 요구하는 것”이었다며 한국인이 신일본에 충성하는 대신에 신일본은 “조선인을 향상시키기 위한 노력에 대해 공정한 태도를 지녀야 한다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일본은 과거의 일본이 아니라 한국과 하나가 된 신일본이므로 참정권 일부를 한국인들에게 떼어줘야 한다는 이들의 논리는 3·1운동의 충격을 받은 일본을 상대로 친일세력의 정치적 지분을 요구하는 데 활용됐다. 3·1운동을 조롱하고 비판한 친일파들이 이 운동을 자신들의 대일 발언권을 강화하는 쪽으로 이용했던 것이다. 이런 쪽의 이해관계에 밝은 친일파들이 모인 단체가 국민협회였다.

윤갑병은 그 같은 국민협회의 특성을 꽤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로비의 달인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상당히 노골적으로 관직을 추구했다. ‘친일 구직’의 수준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유별나게 자리에 연연

▲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파 99인> ⓒ 민족문제연구소

위 <친일파 99인>은 국민협회 회장에 취임한 1925년을 전후한 상황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사이토 총독에게 접근하기 시작하여 1924년부터 1926년 사이에 여덟 차례나 총독을 찾아가고 여러 통의 편지를 보내 자신의 친일 행적을 자랑스럽게 늘어놓으며 출세를 애걸했다”고 설명한다. 이 로비는 성공했다. 그는 1924년 12월 24일부터 지금의 국회의원급인 중추원 참의 직을 수행했다.

그가 유별나게 자리에 연연했다는 점은 또 다른 장면에서도 나타난다. 자신을 중추원 참의로 만들어준 사이토 총독에 대한 집착이 여기서 나타난다. <친일파 99인>에 따르면, 윤갑병은 퇴임한 사이토에게 의견서를 보내 “그의 퇴임 이후 한국 정세를 걱정하며 그의 조속한 재부임을 간청하였다”고 설명한다.

의견서에서 그는 또 다른 한국인의 자리를 걱정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런데 그것은 실상은 자기 자신에 대한 걱정이었다. 위 책에 이런 대목이 있다.

“그는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총독부 국장(학무국장)을 지냈던 이진호의 해직을 애석해 하며 총독으로 재부임해 오면 한국인을 더욱 많이 국장으로 임명해줄 것을 간청하고, 바로 뒷면에 자신이 한일합병 이래 얼마나 일제를 위해 분골쇄신했는가 하는 점을 상기시키는 것을 잊지 않았다.”

총독부 국장은 지금으로 치면 장관급이었다. 그런 자리에 한국인들을 많이 기용해줄 것을 요청하면서 자기 자신의 충성 경력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윤갑병은 1924년 12월부터 1933년 12월까지, 1934년 4월부터 1943년 1월까지 중추원 참의를 역임했다. 이 외에 부지사급이나 도지사 관직도 지냈고 각종 친일단체 간부직을 맡았다. 거기다가 광업권을 설정하고 임업용 토지를 대여받는 일도 있었으니, 그가 확보한 친일재산의 규모가 상당했으리라는 느낌을 갖게 된다.

그런 친일재산을 발판으로, 그는 지침 없는 친일 행각을 이어갔다.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70대 중반 때인 1939년에는 ‘일본의 진정한 적은 누구인가? 그 이유’라는 글에서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대동아 단결이 세계평화의 절대 조건이라며 “유색인종을 유린해서 번영을 꾀하는 영국으로 대표되는 서구 국가는 모두 일본의 적”이라고 규정했다.

또 1942년 중추원 회의 때는 “반도 모든 동포로 하여금 속히 황국신민의 실질을 완비토록 하는 것에 시정의 중심에 둘 것”을 촉구했다. 그렇게 맹렬한 대일 충성을 이어가던 그는 패망 2년 전인 1943년 1월 5일 사망했다.

김종성 기자

<2024-01-28>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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