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천황의 칙사가 다녀간 마을에 생긴 ‘군위 팔공산 수해기념비(193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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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 남아있는 저들의 기념물 4]

천황의 칙사가 다녀간 마을에 생긴 ‘군위 팔공산 수해기념비(1931년)’
산사태와 급류로 굴러 내린 바윗돌에 새겨진 최악의 자연재해사

이순우 특임연구원

경부고속도로와 중앙고속도로를 연결하는 상주영천고속도로를 타고 서울 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도중에 ‘삼국유사 군위휴게소(상주 방향)’를 만나게 된다. 이 지역의 상징물과도 같은 이 휴게소는 보각국사 일연(普覺國師 一然, 1206~1289)이 머물며 『삼국유사(三國遺事)』를 편찬했던 곳으로 유명한 인각사(麟角寺)가 인접 지역에 자리하고 있는 탓에 이러한 이름이 붙었다. 2023년 7월 1일 대구광역시로 새로 편입된 군위군(軍威郡)은 일찍이 “삼국유사의 고장, 군위”를 슬로건으로 내걸 정도로 이를 대표적인 역사문화 브랜드의 하나로 내세워 크게 자랑하고 있다.

그리고 군위군이라고 하면 또 한 가지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역시 ‘경상북도 군위군 부계면 남산리’에 있는 이른바 ‘제2 석굴암’의 존재이다. 돌이켜 보면 이곳이 본격적으로 알려진 것은 1962년 9월말의 일이었다. 일제 때의 고적조사자료에도 엄연히 채록되어 있던 석굴이 새삼스레 ‘역사적인 대발견’의 대상으로 둔갑하여 여러 날 신문지상에 특종 보도되었던 것이 그 계기였다.

이렇게 짧았지만 강렬했던 대소동은 새로 발견되었다는 석굴을 불과 3개월 남짓인 1962년 12월 20일에 국보(國寶)의 반열에 올려놓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이 당시 국보 문화재의 정식 지정 명칭은 ‘군위삼존석굴(軍威三尊石窟)’이었으나, 훨씬 더 직감적이면서도 관광객 내지 문화재 탐방객을 유치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 것인지 언론매체의 작명인 ‘제2석굴암’이라는 표현은 지금도 여전히 통용되고 있는 상태이다.

그런데 ‘군위삼존석굴’의 소재지인 ‘부계면 남산리(缶溪面 南山里)’에서 면사무소 방향으로 골짜기 물길과 나란히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 내려가면 그 아래에 곧장 나타나는 동네가 바로 ‘대율리(大栗里, 한밤마을)’이다. 대율리 하면 또 하나 퍼뜩 생각나는 것이 지난 2006년에 벌어진 ‘군위 부계 한밤마을 옛 담장’에 대한 등록문화재 등재 거부사건이다.

그 당시 문화재청에서는 “고성 학동마을 옛 담장”을 비롯하여 전국 각처의 10곳에 달하는, 옛 돌담길의 등록을 예고하는 문화재청 공고 제2006-112호(2006년 4월 18일)를 냈으나 이 가운데 한밤마을의 것은 마을주민들이 거부를 결정하는 통에 끝내 문화재 등록이 이뤄지지 못한 일이 있었다. 비록 근대문화재의 목록에 등재되는 것은 무산되었으나 그때 문화재청이 등록예고사유로 함께 제시한 내용 중에 매우 주목할 만한 구절이 들어있었던 사실도 새삼 기억에 또렷하다.

…… 마을의 담장은 대부분 돌담으로 경오(1930)년 대홍수로 떠내려 온 돌들을 이용하여 축조하였다고 전해진다. 축조방법은 막돌허튼층쌓기로 하부가 넓고 상부가 다소 좁은 형태로 넓은 곳은 1m 이상인 경우도 있다. 전체적으로 이 지역에서 채집된 강돌로 자연스럽게 축조된 돌담은 전통가옥들과 잘 조화를 이루고 있고 곡선형의 매우 예스러운 골목길의 정취를 자아내고 있으며 보존 또한 잘 되어 있어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있다. (『관보』 2006년 4월 18일자, 24면)

여기에서 보듯이 이 마을의 고즈넉한 풍경과 정취를 더하고 있는 옛 돌담이 이렇게 조성된 것은 알고 본즉 — 시쳇말로 어마무시했던 — 1930년의 참혹했던 대홍수가 남긴 결과물, 바로 그것이었던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이러한 흔적의 하나로 이 마을의 위쪽 동구에는 큰 바윗돌에 이 당시에 벌어진 풍수해의 참상을 고스란히 기록한 ‘수해기념비(水害記念碑)’가 여태껏 떡 하니 자리하고 있다.

여기에 표제(標題)를 쓴 경상북도 지사는 언뜻 보면 ‘임씨’ 성에 ‘무수’라는 이름을 가진 조선인인 줄로 오해하기 십상이지만, 실상은 일본인 관리 하야시 시게키(林茂樹, 1885~?)라는 인물이다. 그는 전라북도 지사(재임 1929.1.21~1929.12.11)를 거쳐 경상북도 지사(재임 1929.12.11~1931.9.23)로 부임해 왔으며, 나중에 총독부 학무국장(재임 1931.9.23~1933.8.4)을 지내는 총독부 고위관료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팔공산 수해기념비의 비문 풀이


수해기념비
    경상북도지사 하야시 시게키
때는 소화 5년(1930년) 7월 13일(경오년 음력 6월 18일) 저녁나절, 큰 뇌우에 팔공산이 무너지고 홍수가 일어나 군내 부계면의 남부 일대에 피해가 가장 혹심하였으니 거친 물결이 밀려들어 동쪽 끝 마을 하나를 먼저 쓸고 곧장 대율리 위쪽 초입에서 막히자 머리를 깨고 동서로 나뉘어 들이치매, 유실자가 93호에 사상자가 92인이고 갈 곳을 잃고 슬피 부르짖는 자가 360여 구에, 집물과 장토의 손실은 계산하기 어려웠다. 내[不佞]가 (소식을) 듣고 곧 산 넘고 물 건너 밤을 새워 조문을 하며 떠내려간 시신을 서로 포개어놓으니, 솔개는 아궁이 연기 사라진 곳을 날며 다만 개구리울음이 들릴 뿐 상전벽해[滄桑]의 변화가 마침내 이곳에 닥치게 되었도다. 마을 사람들을 불러 타이르니 얼굴이 모두 시쳇빛이요, 이에 서로 방략을 강구하여 도[道; 경상북도]와 부[府; 조선총독부]에 보고를 올린 것이 궁성[九重, 황거]에까지 들어가게 되자 시종을 보내시었으며, 중변[衆弁]이 운집하여 위로는 내탕의 은혜를 입고 아래로는 공사의 진휼에 힘을 입어 그 혼을 부르고, 그 뼈를 감싸고, 그 배고픔에 풀칠하고, 노천을 가릴 수 있게 되었나니, 오호라, 우홍[禹洪; 우임금의 홍수]이 크다 하나 어찌 이 같은 참화에 이르렀을 것이며 한조[漢詔; 후사를 찾는 서한의 조서]가 관대하다 하나 어찌 이 같이 인심이 두터운 일을 뜻한 것이었으랴. 마침내 모두가 말하기를, 올해의 재난은 하늘이 실로 저지른 것이지만 우리를 진흙더미에서 끝내 건져냄으로써 되살려준 것은 어찌 위, 아래, 그리고 멀고 가까운 곳의 덕분이 아니었으랴. 원커니 우리 군수[吾侯]의 붓을 빌려 영원히 사라지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라 하였도다. 내가 사양치 못하고 전말을 간략히 서술함과 아울러 위문해준 여러 선비들의 씨명을 굴러온 큰 돌에 기록하는 것으로써 기념에 대비코자 하노라. 명[銘]하여 가로되,
  懷襄之患 홍수[懷襄]의 재난이/ 甚於猛獸 맹수보다 심하구나/
  缶民奚罪 부계의 백성은 무슨 죄이던고/ 偏受其疚 그 괴로움을 홀로 받네//
  旣毁我屋 벌써 우리 집들은 훼손되고/ 遂及人軀 드디어 사람몸까지 미쳤으니/
  肝腦暴沙 사나운 흙탕물에 간과 뇌가 으깨어지고/ 寃鬼夜呼 원귀는 밤을 새워 부르짖노라//
  至達聖聰 성총[천황의 귀]에 달하게 되자/ 侍臣奉勅 시신[시종]은 칙명을 받자오며/
  同胞捐義 동포들은 의연금을 내놓고/ 群官戮力 백관들도 서로 힘을 보태었네//
  計口賙飢 사람수를 헤아리고 굶주림을 구제하며/ 收骸助瘞 시신을 거둬 묻도록 도와주었으니/
  生當恩報 산 자는 마땅히 온정에 보답하고/ 死應含惠 죽은 자는 응당 은혜를 머금었네//
  顧予菲德 나를 돌이켜 보매 덕이 부족하나/ 適玆之守 마침 이곳의 군수이노라니/
  扙淚鐫石 지팡이 짚고 눈물로써 돌에 새겨/ 永示來後 다가올 뒷날에 영원히 보이려 하네//
    소화 6년(1931년) 5월 10일
    지군[군수] 황영수 짓고, 서병주 쓰다


* 바위의 후면에는 ‘위문방명록(慰問芳名錄)’이 새겨져 있으며, 여기에 궁내성 시종 카이에다 코키치(宮內省 侍從 海江田幸吉), 척무성 사무관 무라야마 미치오(拓務省 事務官 村山道雄) 등 이곳 수해지역을 위로차 방문했던 칙사 일행과 일본인 관리 등의 이름이 죽 나열되어 있다.


지금으로부터 90여 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는 1930년 7월 13일, 바로 그날에 대만(臺灣) 부근에서 생성하여 북상한 태풍(颱風)의 직접적인 영향과 한반도 주변으로 기압골의 형성이 맞물리면서 중부 조선(中部 朝鮮)의 곳곳은 최악의 자연재해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 와중에 팔공산(八公山)의 북쪽 사면을 끼고 있는 군위군 부계면 남부 일대(동산동, 남산동, 대율동 등)에 집중호우가 내린 탓에 무지막지한 산사태와 물폭탄이 쏟아지면서 이들 마을은 그야말로 삽시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던 것이다.

이 당시의 참상에 대해서는 『매일신보』 1930년 7월 18일자에 수록된 「산홍(山洪)이 창일(漲溢)하여 팔공산(八公山) 아연 붕괴(俄然 崩壞), 재변시간(災變時間)은 불과 입분(不過 廿分, 20분), 희(噫)! 이백여 명(二百餘名)이 참사(慘死)」 제하의 기사에 다음과 같이 채록되어 있다.

[대구(大邱)] 이번 경북(慶北)의 산홍수피해(山洪水被害)는 전율(戰慄)을 느끼게 한다. 달성(達城), 군위(軍威), 칠곡(漆谷), 영천(永川) 4군(郡)의 피해(被害)는 상상 이상(想像 以上)이다. 아직 정확(正確)한 수(數)는 판명(判明)치 안 하나 대개(大槪) 사자(死者) 200명(名) 이상(以上)일 것이다. 가옥(家屋)의 도궤(倒潰) 이백여 호(二百餘戶), 부상자(負傷者) 10명(名)인 것 같다. 그 외(外)에 전답(田畓)의 유실(流失) 수백 정보(數百町步), 산붕(山崩) 37개소(個所), 교량(橋梁)의 유실(流失) 백여(百餘)나 될 것 같다. 실(實)로 경북 미증유(慶北 未曾有)의 수해(水害)이다. 근근(僅僅) 20분간(分間)에 비참사(悲慘事)가 일어난 것이다. 더욱 산비사(酸鼻事: 애통한 일)는 군위군 부계면 동산동(軍威郡 缶溪面 東山洞)이 전멸(全滅)하여 이전(以前)의 종적(踪跡)조차 없다는 것이다.
[사체 속속 유래(死體 續續 流來), 두 번도 볼 수 없는 참상]
군위군 효령(軍威郡 孝令)에서는 부계면 대율동(缶溪面 大栗洞) 동산동 방면(東山洞 方面)에서 익사자(溺死者)가 15일(日) 조조 이래(早朝 以來) 유하(流下)하였으므로 면직원(面職員), 주재소원(駐在所員), 소방대원(消防隊員)이 총출동(總出動)하여 4반(班)으로 나누어 면내(面內)를 흐른 사창천(社倉川)을 끼고 상류(上流)에서 유래(流來)하는 사체(死體)를 수색(搜索)하고 있다. 16일(日)의 오후(午後) 4시(時)까지 효령면(孝令面)에서 발견(發見)한 사체(死體)는 36명(名)이다. 모두 비참(悲慘)을 극(極)하며 의류(衣類)는 단절(斷切)되어 근(僅)히 베 1, 2편(片)이 족(足)에 붙었고, 사체(死體)는 유목(流木)과 암각(岩角)에 많이 상(傷)하였으며 수(誰)인지 판명(判明)할 수 없는 사체(死體)는 초원(草原)에 누적(壘積)하고 유족(遺族)이 오기만 기다리는데 발견(發見)된 사체(死體)를 찾으러 온 유족(遺族)은 아직 1인(人)도 없다.

이 소식을 접한 하야시 경북도지사는 즉각 현지로 나가 현황파악과 사태수습에 나서게 되었는데, 『매일신보』 1930년 7월 19일자에 수록된 「아비규환(阿鼻叫喚)의 생지옥(生地獄), 군위 수해(軍威 水害)의 참적(慘跡), 하야시 지사 위문시찰(林知事 慰問視察)」 제하의 기사는 그때의 상황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대구(大邱)] 지사(知事)는 수해(水害) 있는 14일(日) 조(朝)에 도착(到着)하여 요시나가 사회주사(吉永社會主事)를 군위군(軍威郡) 부계면(缶溪面)에, 모토다 기수(元田技手)를 효령면(孝令面)에 특파(特派)하여 실상조사(實狀調査)에 착수(着手)케 하였으며, 지사(知事)는 구호반(救護班)과 함께 15일(日) 오후(午後)에 군위군(軍威郡)에 급행(急行)하여 효령경찰관주재소(孝令警察官駐在所)에서 피해참상(被害慘狀)을 청취(聽取)하고 15일(日) 야반(夜半)에 귀임(歸任)하였는데 말하되,
“효령(孝令)에서는 자동차(自動車)는 도저(到底)히 불통(不通)이다. 처절(悽絶)한 사창천(社倉川)의 와류(渦流)를 우편(右便)에 끼고 유세파괴(流洗破壞)된 도로(道路)를 약(約) 2시간(時間) 동안 답파(踏破)하여 부계면 대율동(缶溪面 大栗洞)에 이르렀는데 떠내려온 가옥(家屋), 이토화(泥土化)한 유허(遺墟)를 망연(茫然)히 서서 보고만 있는 부인노유(婦人老幼)의 가련(可憐)한 형상(形狀)과 각처(各處)에 누워 있는 부상자(負傷者), 사자(死者) 및 이를 중심(中心)으로 호읍(號泣)하는 광경(光景)은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아비규환(阿鼻叫喚)의 생지옥(生地獄)이다. 440여 호(餘戶)의 촌락중(村落中) 월편(越便)의 백여 호(百餘戶)는 유실(流失)되어 황량(荒凉)한 평원(平原)이 되었다.”

한편, 20여 일가량 앞서거니 뒤서거니 혹독한 피해를 남긴 풍수해가 조선 전역을 휩쓸고 지나갔다는 소식에 일본 천황은 이러한 상황을 수습하고자 그해 7월 28일에 3만 원(圓, 엔)에 달하는 구휼내탕금(救恤內帑金)을 내리는 동시에 특별히 칙사(勅使)를 차견(差遣)하여 재해지역을 시찰 위문토록 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에 보낼 칙사로 선발된 궁내성 시종 카이에다 코키치(宮內省侍從 海江田幸吉)는 7월 29일 밤에 일본 도쿄를 출발하여 현해탄(玄海灘)을 건너고 부산을 거쳐 31일 오전에 경성역에 당도하였다.

그는 곧장 총독부 제1회의실에서 코다마 정무총감(兒玉 政務總監)에게 구휼하사금을 직접 전달하고 8월 1일 이후 강원, 전북, 경북 등의 이재지역을 위문 시찰하는 행로에 올랐다. 카이에다 칙사(海江田 勅使)가 군위군의 수해현장을 몸소 방문한 것을 8월 8일의 일이었는데, 『조선신문』 1930년 8월 10일자에 수록된 「팔공산(八公山)으로 향(向)했던 카이에다 시종(海江田侍從), 약(約) 2시간(時間) 상세(詳細)히 조사(調査)」 제하의 기사에는 그의 시찰행로가 잘 그려져 있다.

천황의 칙사가 이곳을 다녀간 이후 해가 바뀌어 1931년의 여름철이 다가오자 전년도의 큰 물난리에 희생된 이들을 기리는 추도회의 준비와 함께 수해의 사실 자체를 기록으로 남기고자 이에 관한 ‘기념비’를 건설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이러한 결과로 만들어진 것이 지금껏 현장에 남아 있는 ‘수해기념비’인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매일신보』 1931년 6월 19일자에 수록된 「추억(追憶)의 고민(苦悶), 염천(炎天)에도 한율(寒栗), 팔공산 사태(八公山 沙汰)에 복몰(覆沒)된 대율동민 추도회(大栗洞民 追悼會), 당시(當時) 처참(悽慘)한 광경(光景)을 기념(記念)코자 수해기념비 건설(水害記念碑 建設)」 제하의 기사에는 기념비의 건립과정이 이렇게 적혀 있다.

[대구(大邱)] 작년(昨年) 7월(月) 13일(日) 수난(水難)으로 말미암아 수백명(數百名)의 생령(生靈)을 빼앗아간 전율적 공포(戰慄的 恐怖)의 추억(追憶)을 남긴 군위군 부계면 대율동(軍威郡 缶溪面 大栗洞)에 남은 사람들은 7월(月) 13일(日) 수난자 추도회(水難者 追悼會)를 개최(開催)함과 동시(同時)에 당시(當時) 처참(悽慘)한 광경(光景)을 영원(永遠)히 전(傳)하기로 수해대기념비(水害大記念碑)를 건설(建設)하는 중(中)이다. 기념비(記念碑)는 당시(當時) 맹렬(猛烈)한 수세(水勢)에 의(依)하여 붕괴(崩壞)된 마(魔)의 팔공산 단애(八空山 斷崖)에 있는 자연석(自然石)에 횡(橫) 5척(尺), 종(縱) 7척(尺)으로 조각(彫刻)하였는데 비명(碑銘) ‘수해기념비(水害記念碑)’란 대문자(大文字)는 하야시 경북지사(林慶北知事)의 필적(筆蹟)으로서 참상(慘狀)을 상기(詳記)한 비문(碑文)은 황 군위군수(黃軍威郡守)의 필적(筆蹟)으로 되었는데 수난기념일(水難記念日)까지는 완성(完成)하리라 한다.

앞서 얘기한 바와 같이 ‘수해기념비’의 표제는 경상북도 지사 하야시 시게키(林茂樹)가 휘호한 것이며, 비문(碑文)은 당시의 군위군수인 황영수(黃英秀)가 짓고 글씨는 대구 사람 서병주(徐炳柱)가 쓴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 비문 자체는 “소화 6년(1931년) 5월 10일”에 세운 것으로 되어 있으나, 제막식은 수해발생 1주년이 되는 ‘1931년 7월 13일’에 거행된 것으로 봄이 맞을 것 같다.

그런데 이 기념비의 표면에는 가령, 일제의 연호라든가 일본인 도지사의 이름이라든가 특히 천황의 존재를 나타내는 ‘성총(聖聰)’, ‘구중(九重)’, ‘칙(勅)’ 등의 용어가 — 통상적으로 다른 곳에서라면 벌써 해당 글자를 깎아내 버리는 방식으로 민족 감정의 표출이 많이 이뤄지는 것에 반해 — 아무런 훼손도 없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것이 눈에 띈다. 더구나 모든 글자마다 검은 색칠이 또렷하여 글자의 판독에도 아무런 어려움이 없는 것이 되려 이색적이다.

다만, 바위의 뒷면에 새겨 놓은 ‘위문방명록(慰問芳名錄)’에는 카이에다 시종(海江田 侍從)을 비롯하여 일본인 관리와 수행원들의 이름이 잔뜩 기술되어 있는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곳의 글자에는 아무런 채색작업이 되어 있지 않은 상태라서 한 글자씩 따로 판독해야 하는 상황이다. 바라건대, 이러한 내력을 지닌 수해기념비가 그냥 있는 듯 없는 듯 내버려둘 것이 아니라 일제 잔재의 한 종류라는 사실을 명백히 부각시키는 한편 제작 및 보존 경위에 대한 좀 더 명확한 설명을 담아 현장 안내판을 설치하는 쪽이 더 합당한 관리방법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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