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기사

[오마이뉴스] 학교가 준 일장기 찢은 할아버지… 충격받은 손자가 커서 한 일

364

[기사원문] 오마이뉴스(2024-02-05) ☞ 학교가 준 일장기 찢은 할아버지… 충격받은 손자가 커서 한 일

▲ 애국지사 조문기의 묘 (애국지사 3묘역 705호) ⓒ 임재근

“이 땅의 독립운동가에게는 세 가지 죄가 있다. 통일을 위해 목숨 걸지 못한 것이 첫 번째요.친일 청산을 하지 못한 것이 두 번째요. 그런데도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이 세 번째다.”

대전현충원 애국지사 3묘역 705호 조문기 지사의 묘비에 쓰인 묘비명입니다. 일제강점기 최후의 의열투쟁이었던 ‘부민관 폭파 의거’의 주인공 조문기 선생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독립운동가로 살았습니다.

조문기 지사는 1926년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났습니다. 집안의 가세가 기울자 선생은 어머님을 따라 외갓집에서 유년기를 보내게 되는데요. 외조부 이조영은 고종 31년(1884)에 과거에 급제해 승지 벼슬을 지낸 인물이었습니다. 조선이 강제로 병탄된 이후 관직을 버리고 낙향해 살고 있었는데요. 일제와 친일반민족행위자들에 대해 분노한 민족주의자였습니다.

일장기 찢은 할아버지

어린 조문기는 학교에서 우민화 교육을 받았습니다. ·········(중략)·········어린 조문기 선생은 전쟁터로 가는 군인들을 실은 기차에 일장기를 흔들었고, 어느 날 하루 일장기를 들고 집에 돌아가게 됐습니다. ·········(중략)·········격노한 외할아버지는 일장기를 박박 찢어 버리고, 어린 조문기 선생에게 불호령을 내렸습니다. ·········(중략)·········그날 밤 조문기 선생은 평생에 잊을 수 없는 충격적인 역사의 진실을 마주했습니다. ·········(중략)·········명성황후 시해, 을사늑약의 체결, 헤이그 밀사 파견, 고종의 강제 퇴위와 승하 등 조문기 선생의 가슴 속에 민족의식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조선 청년의 파업

1944년 5월에 회사에서 배포한 ‘훈련공 교양서’라는 책자로 인한 사건이 터집니다. 그 책에는 “훈련공들은 모두 농땡이를 잘 부린다. 밥만 많이 먹는다. 쌈질을 잘한다. 여자를 잘 후린다” 등 조선인 청년들을 모욕하는 차별적인 내용이 가득했습니다. 조문기·유만수 두 지사는 그 즉시 영향력 있는 조선인 청년들을 방으로 불러 투쟁을 기획하고 조직해 나갔습니다. 다음날 아침 3000여 명에 달하는 청년들이 식당에 모여, 출근을 거부하며 파업에 돌입했습니다. 이 사건은 전쟁 중에 군수공장에서 일어난 유일한 파업이었습니다.

·········(중략)·········

‘정치깡패 친일파’ 박춘금 처단 계획

▲ 부민관 폭파 의거 터 ⓒ 임재근

조문기·유만수 두 지사는 1945년 1월, 일본 생활 3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와 애국심이 강한 청년들을 찾아 동지로 규합하고 1945년 3월 ‘대한애국청년당’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했습니다. 첫 번째 처단 대상을 박춘금으로 정합니다. 박춘금은 악질 친일파이자 정치깡패였습니다. 일본에서 ‘상애회’라는 단체를 조직했는데요. 일본에서 일자리를 찾던 조선인에게 일자리를 섭외하고, 조문기 지사와 대한애국청년당 동지들은 박춘금 처단을 위해 무기부터 확보하는데요. 알선료를 받아 챙겼습니다. 힘없는 여성 노동자들의 급여는 모두 횡령하기도 했습니다. 조선인 여성들을 폭행하고 사창가에 팔아넘기기도 했습니다.

·········(중략)·········

무기를 준비한 조문기 지사와 동지들은 거사날을 정합니다. 친일파 박춘금이 마침 7월 24일 저녁 7시에 부민관에서 ‘아시아민족분격대회’라는 행사를 개최하기로 했는데 이 곳을 치기로 결정합니다. ·········(중략)········· 정해진 시간에 폭탄은 정확하게 터졌고, 행사장은 아수라장으로 변해버렸습니다. 그렇게 부민관 폭파 의거는 대회를 쑥대밭으로 만들었고, 아시아민족분격대회는 그 자리에서 무산돼 버렸습니다. 세 지사의 완벽한 성공이었습니다.

마지막까지 ‘친일청산’ 외친 선생

▲ 부민관에 정의의 폭탄 이면 벗은 3청년 용사 ⓒ 국립중앙도서관

일제는 이후 부민관 의거의 배후를 찾기 위해 혈안이 돼 전국을 들쑤셨습니다. 범인 검거에 총 5만 원 현상금을 걸었는데요. 3만 원은 일제가 2만 원은 박춘금이 걸었습니다. 당시 쌀 한 섬이 100원이었으니 실로 어마어마한 현상금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도 체포되지 않았던 조문기 지사는 오히려 해방된 이후에 체포되고 고초를 겪게 되는데요. 이승만 정권과 미군정의 단독정부 수립과 분단에 반대하며 ‘인민청년군’을 조직한 조 지사는 1948년 6월 2일 삼각산에서 봉화를 올리고, 서울 시내 빌딩에 ‘통일정부 이룩하자’ ,’단일정부 수립반대’ 등 현수막을 펼치려고 계획합니다. 그런데 조직 내 끄나풀로 인해 체포되고 교도소 생활을 하고요. 1959년에는 ‘이승만 대통령 암살, 정부전복음모 조작 사건’으로 다시 한번 투옥됩니다.

·········(중략)·········

조문기 지사는 “친일청산은 바로 오늘의 독립운동”이라고 외치며 <친일인명사전> 발간에도 온 힘을 쏟았습니다. ·········(중략)·········

▲ 조문기 선생 16주기 추모식 ⓒ 임재근

·········<상세는 기사원문>·········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