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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만세’ 아닌 ‘반자이’…” 친일파의 황당한 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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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이재극

한국에서는 남한 대통령 생일은 거의 알려지지 않는 반면, 북한 지도자 생일은 잘 알려져 있다. 현직(1월 8일)뿐만 아니라 전직(2월 16일)과 전전직(4월 15일)의 생일까지 언론에 수시로 보도된다. 이런 날을 전후해 뭔가 발사되지 않을까 걱정하면서 남한은 물론이고 미국·일본도 촉각을 곤두세운다.

그런데 북한 3대의 생일보다 한국 운명에 훨씬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것은 일왕(천황)의 생일이다. 이 생일 파티가 ‘한국에서 어떻게 치러지는가’는 한국의 자주성을 측량하는 바로미터 중 하나다.

서울의 일본대사관 직원들이 이 행사를 조용히 치른다면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나루히토 일왕의 생일을 일주일 앞두고 거행된 지난해 2월 16일의 생일연은 사정이 달랐다. 한국 정부가 외교부 제2차관을 파견하고 남산 위에서 기미가요가 울려 퍼진 이날의 풍경은 한국의 대일 자주성 측면에서 적색 신호다.

1980년대의 인기 언론인인 조선일보사 이규태(1933~2006) 논설위원실장은 1986년 4월 20일자 일요칼럼에서 “일본 천황 생일을 축하하는 성대한 파티가 예년마다 서울 중학동에 있는 일본대사관에서 열려왔고, 또 올해도 열릴 것”이라며 히로히토 일왕의 생일인 4월 29일이 국내에서 성대하게 기념되는 현상을 언급했다.

이런 풍경은 1945년 해방으로 중단됐다가 20년 만인 1965년 한일협정을 계기로 되살아났다. 1965년을 계기로 특히 경제적 측면에서 대일 종속성이 심화된 20세기 후반 상황을 상징하는 장면 중 하나다.

1894년에 청나라를 격파한 일본은 10년 뒤에는 러시아를 제압했다. 러일전쟁은 1905년 9월 5일 포츠머스강화조약으로 종결됐다. 이 조약 38일 전인 7월 29일에는 ‘일본은 대한제국을, 미국은 필리핀을 갖는다’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체결돼 일본이 미국의 응원하에 한국 침탈에 속도를 낼 수 있게 됐다.

일본을 견제할 청나라·러시아는 물러나고, 일본을 돕는 미국의 발언권이 강해지는 이 상황은 대한제국을 둘러싼 외교 환경을 불리하게 만들었다. 이것이 그해 11월 17일에 외교권을 빼앗기는 을사늑약(을사보호조약)의 배경이 됐다.

을사조약 전부터 “천황 폐하 만세” 외친 친일파

▲ 이재극 ⓒ 위키미디어 공용

대한제국의 국제적 환경이 급격히 불리해지던 그해 11월 3일이었다. 장소는 지금의 서울 남산 기슭의 주한일본공사관이다. 이곳에서 메이지(明治)라는 연호를 쓰는 무쓰히토일왕의 53회 생일 파티가 열렸다. 훗날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에 의해 친일파로 규정될 이재극이 이날 남산에 올랐다. 왕실 사무를 총괄하는 궁내부대신 자격이었다.

고종황제와 황실을 대표해 행사에 참석한 이재극의 행동은 고종을 불쾌하게 만들었다. 연회장에서 이재극이 축배를 들고 “천황 폐하 만세(덴노 헤이카 반자이)”를 세 번이나 외쳤기 때문이다. 전문가 5인의 감수를 받은 1968년 5월 12일 자 <조선일보> 4면 특집기사 ‘개화백경(開化百景)’은 “이 말이 고종황제의 귀에 들어갔다”라며 이렇게 서술한다.

“노한 황제는 이재극을 불러 호되게 꾸짖었다. 한국에 있어 당시의 만세는 국왕의 만수를 비는 이외에 써서는 안 되었다. 하물며 궁내대신이 5백년의 전통을 깬다는 것은 불손하다고 힐문했다.”

꾸중을 들은 이재극은 멈칫멈칫했다. 그러더니 엉뚱한 해명을 내놓았다. 답변은 이랬다.

“신은 만세라 부르지 않고 반자이라 불렀나이다. 더우기 무관(無冠)으로 불렀사오니 성려(聖慮)에 누가 아니 될까 하옵니다.”

고종의 8촌 동생인 이재극은 고종보다 열두 살 어렸다. 이런 관계가 아니었으면 ‘만세라고 한 적 없습니다, 반자이라고 했습니다’ 같은 말장난을 하기 힘들었을 수도 있다.

그는 자신이 만세를 부를 때 관모를 쓰지 않았다는 말도 했다. 오늘날에는 실내에서 모자를 쓰면 무례하다고 말하지만, 그 시절에는 정반대였다. 만세 부를 때 관모를 벗어 일왕에 대한 불경을 표시했으므로 성상께 염려를 끼칠 만한 일은 없다는 게 그의 결론이었다. 고종은 할 말이 없어 말문을 닫았다고 한다. 이재극이 이듬해인 1906년 7월까지 궁내부대신을 역임한 사실은 만세 사건으로 인해 문책을 받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을사늑약 직전이라 아직 외교권을 빼앗기지는 않았지만, 일본이 러시아를 꺾는 모습을 보면서 일본의 영향력이 더 강해지리라고 예상할 수 있었던 때였다. 그런 시기에 이재극은 일왕 생일연에서 만세를 외쳤다. 궁내부대신이 보여준 이 행동은 일본에 대한 한국의 종속성이 한층 강화될 것임을 예고하기에 충분했다.

그 같은 선제적 행동을 하면서도 그는 신변 안전을 위한 꼼수도 함께 생각해 뒀다. 한 손에 술잔을 든 채 다른 손으로 관모를 얼른 벗은 뒤 ‘만세’ 대신 ‘반자이’를 불렀다. ‘대한제국 영내에서 외국 군주를 위해 만세를 부르지 않았다’고 변명할 단서를 만들어둔 것이다.

이재극은 왕족치고는 상당한 실력파였다. 15세 때인 1879년에 종9품 교사인 동몽교관이 된 그는 29세 때인 1893년에 과거시험 대과에 급제했다. 10대 중반에 교사가 된 일이나 서른 이전에 대과에 급제한 일은 왕족 신분에 안주하지 않고 학업을 열심히 했음을 보여준다.

그 뒤 비서실 차장인 비서원승, 차관급인 내부협판 등을 거쳐 38세 때인 1902년에 법부대신이 된 그는 학부대신 시절인 1904년 10월 일본을 시찰했다. <친일인명사전> 제3권 이재극 편은 “귀국 직전에 일본 정부가 주는 훈1등 욱일장을 받았다”고 설명한다. 외교관계상 의례적으로 주는 훈장이었지만 1년 뒤 일왕 생일연 때의 모습을 감안하면, 일본을 시찰한 것과 더불어 욱일장 훈장을 받은 경험이 친일파가 되는 데 영향을 줬으리라고 볼 수 있다.

거침없던 이재극의 친일행보

▲ 지난해 2월 16일 오후 나루히토 일왕의 생일 축하연이 열리는 서울의 한 호텔에 출입금지 안내문과 경비 인력이 배치되어 있다. ⓒ 연합뉴스

이재극은 고종이 폐위된 1907년부터는 꽤 적극적으로 친일을 했다. 조선총독부의 전신인 한국통감부의 식민정책에 동조하는 동아개진교육회에도 관여하고, 일본 왕세자(황태자)의 방한을 환영하는 신사회 같은 단체에도 가세했다.

1909년에는 한국 시조인 단군과 일본 시조인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함께 숭배하는 신궁경의회와 신궁봉경회의 부총재가 됐다. 1910년에는 한일병합(한일합방) 찬성 단체인 정우회의 부총재로 활약했다.

이에 대한 답례로 일본은 1910년에 남작 작위를 부여하고 1911년에 2만 5천원짜리 은사공채를 부여했다. 군수 월급이 50원이던 시절에 그 500배 되는 일본 국채를 은행에 예치하고 연 5%의 이자를 수령할 수 있게 됐던 것이다. 노후 걱정을 없애는 친일재산을 획득한 상태에서 일제강점기를 맞게 된 셈이다.

일본은 그 외의 방법으로 그를 칭찬했다. 위의 욱일장 외에도 한국병합기념장·황태자도한기념장을 수여했다. 이에 더해 술병도 내렸다.

<친일인명사전>은 1910년 10월과 11월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조선총독부가 비용 전액을 후원하고 일본 천황에게 사은의 뜻을 표하기 위해 조직한 조선귀족일본관광단의 일행으로 참가하여 일본의 주요 도시를 방문하고 일본 천황의 생일인 천장절 연회에 초대받아 천황이 주는 주병(酒甁)을 받고 돌아왔다”라고 설명한다.

1905년에 남산에서 ‘덴노 헤이카 반자이’를 외친 그는 고종황제 앞에서 변명을 해야 했다. 이때와 달리 1910년에는 그런 부담 없이 마음껏 외칠 수 있었을 것이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제4-13권에 따르면, 그는 1920년에도 일본 정부가 주는 금배를 받았다.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기기 직전에 일왕 생일연에서 선제적으로 만세를 외쳐 한국의 어두운 운명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이재극은 일제강점기에도 동민회와 대정친목회 같은 친일단체에 가담해 친일 노선을 이어갔다. <친일인명사전>은 “동민회 회장으로 활동하던 1927년 6월 3일 사망했다”라고 한 뒤 “작위는 장남 이인용이 이어받았다”며 이재극 편을 마무리한다.

김종성 기자

<2024-02-18>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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