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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좌파가 된 공안검사… 과거를 지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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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강중인

▲ 1929년 3월 6일자 <동아일보> 2면 우하단에 올라간 강중인의 사진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박정희는 친일파에서 남로당(남조선노동당)으로 전향했다. 박정희보다 불리한 조건에서 그런 전향을 한 사람이 덕전중인(德田仲仁)이란 창씨명을 가진 강중인(姜仲仁)이다.

박정희는 일제 패망으로 인해 만주국 군대와 분리됐다. 그런 상태로 1946년 5월 6일 톈진항을 출발해 이틀 뒤 부산에 도착했다. 고향 마을에 출현한 것은 그달 중순이다. 기존 조직과 절연된 뒤였기 때문에 이 시기의 그가 남로당에 가입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강중인은 37세 때인 1945년 8·15 당시에 일제 검사였다. <친일인명사전> 제1권 강중인 편은 “1943년 3월 대전지방법원 검사로 자리를 옮겨 1945년 8월 해방 때까지 검사로 있었다”라고 말한다.

경찰이나 검찰 같은 일제 공권력 기구는 8·15 뒤에도 미군정의 보호를 받았다. 일본인 상급자들이 철수한 뒤였기 때문에, 한국인 직원들에게는 고속 승진의 기회가 있었다. 기존의 공권력 기구가 이처럼 미군정과 한국인 직원들을 중심으로 강화됐기 때문에, 이런 곳에 있었던 사람이 공개적으로 좌파 진영에 넘어가기는 쉽지 않았다.

그런데도 강중인은 대놓고 좌파 활동을 했다. 위 사전은 “해방 후 좌익 활동에 가담하여 1946년 3월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 토지문제연구위원으로 활동했다”라고 말한다. 민전으로 약칭되는 이 조직이 토지문제에 어떤 입장을 취했는가는 여운형과 김규식이 주도한 좌우합작회담 때 나타났다.

민전은 그해 7월 25일의 제1차 좌우합작회담 정식회담(본회담) 때 좌파 진영을 대표해 ‘5원칙’을 제시했다. 대표적 우파 매체 중 하나인 그해 7월 28일 자 <한성일보> 1면 우상단에 따르면, 친일청산과 더불어 토지개혁이 민전이 표방한 5대 원칙에 포함됐다. 민전이 내세운 토지개혁 방식은 “무상몰수, 무상분여”였다.

민전 토지문제연구위원인 강중인은 ‘일개 연구원’이 아니었다. 1945년 11월 25일 자 <중앙신문> 2면 우중단은 그가 지금의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 3가인 죽첨정 3정목에 세워진 조선법제연구소의 소장이 됐다고 보도했다.

10여 명의 연구원과 2만여 권의 서적을 보유한 이 연구소는 자산가의 후원을 받았다. 이런 연구소의 소장이 된 상태에서 민전 토지문제에 개입했다. 거기다가 1946년 5월부터는 변호사 활동도 병행했다. 강중인의 의견이 민전의 토지정책에도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대목들이다. 민전이 좌파 진영을 대표해 내놓은 ‘무상몰수·무상분배’가 그의 생각과 상당 부분 일치했으리라고 볼 수 있다.

친일파 출신답지 않게 민전의 토지정책에까지 관여한 강중인은 박정희가 참여한 남로당에도 가세했다. 1949년 11월 27일자 <동아일보> 2면 좌상단에 따르면, 전날 법정에서 그는 “남노당에 가입하였으며, 법학자동맹의 간부로서 일한 것은 사실”이라고 진술했다.

박정희는 해방 뒤에 좌파로 전향했지만, 공개적이지는 않았다. 이와 달리 강중인은 박정희처럼 남로당 활동을 한 것에 더해, 공개적인 좌파 운동까지 벌였다. 남한 좌파가 갈 수 있는 데까지는 거의 다 가본 셈이다.

강연에 기고까지… 열혈 친일검사

강중인은 1908년 4월 5일 경북 영덕에서 출생했다. 중학교급인 경성 보성고등보통학교를 21세 때인 1929년에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법학과를 27세 때인 1935년에 졸업한 그는 총독부 체신국에 근무할 때인 1937년에 일본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했다.

1929년 3월 6일 자 <동아일보> 2면 우하단에는 빡빡머리 학생 9명의 사진이 각각 등장한다. 다른 사진은 다들 정면을 응시하는 데 반해, 강중인의 사진만 오른쪽을 바라보고 있다. 그의 사진이 신문에 나온 것은 보성고보의 우수 졸업자이기 때문이다. 같은 날짜 <조선일보> 2면 중간은 그의 이름을 우등생 3명 가운데 제일 먼저 거론했다. 수석 졸업을 한 모양이다.

이처럼 학교 공부에 최적화된 두뇌를 가진듯한 그가 남들보다 늦게 졸업장을 받았다. 또 직장 생활과 시험공부를 병행했다. 집안이 아주 넉넉하지는 않았겠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법원에 들어간 것은 사법시험 합격 이듬해였다. <친일인명사전>은 “1938년 11월부터 1940년 6월까지 경성지방법원 및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사법관시보로 있으면서 1939년 4월부터 8월까지 경성지방법원 검사대리를 맡았다”라고 기술한다. 법원과 검찰이 분리되지 않았던 이 시절 풍경을 반영하는 ‘경성지방법원 검사대리’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 뒤 강중인은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예비검사를 거쳐 1940년 11월 검사로 임용됐다. 이 시기부터 그의 행적에는 ‘밥값’을 톡톡히 하는 모습들이 나타난다. 친일행위로 월급을 받고 재산을 축적하는 것에 대한 보은 행위로 볼 수 있는 것들이 33세 때인 1941년 이후로 나타난다.

그가 정식 검사가 된 뒤에 담당한 사건 중 하나는 1941년의 보안법 및 육군형법 위반 사건이다.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이 운영하는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사이트에 게시된 풍본영길(豊本英吉, 조남권) 판결문에서 그의 창씨명을 확인할 수 있다.

“보안법 위반 피고 사건에 대해 조선총독부 검사 덕전중인 관여 심리를 마치고 다음과 같이 판결한다”라는 문장이 있는 이 판결문은 하숙방에서 시국 대화를 나눈 한성상업학교 학생들에게 각각 징역 2년과 8월을 선고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판결문에 따르면, 학생들의 대화 내용은 ‘중국의 장제스(장개석)는 위대한 인물이다’, ‘조선 민중도 일치단결하면 독립이 가능하다’, ‘똑같은 노동을 해도 조선인은 봉급을 적게 받는다’ 등등이었다.

이들이 독립운동을 위해 이런 대화를 나눴다 해도 하숙방 대화 자체만으로 일제의 치안 질서가 훼방을 받았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런데도 판결문 곳곳에는 “불온한 언동을 함으로써 치안을 방해하고”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불온한 말’을 한 것을 ‘불온한 언동’을 했다고 표현해 구체적인 행위도 함께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을 풍기는 표현이 사용됐다.

검사가 기소하지 않은 내용을 판사가 판결문에 담았을 가능성은 적으므로, 이런 표현은 검사 강중인에게서 나왔다고 볼 수밖에 없다. ‘학생들의 대화가 치안질서를 방해했’다는 과도한 결론이 나온 것은 이 시기의 공안정국 분위기를 반영한다. 강중인은 그런 분위기에 일조하는 공안검사였다.

특이한 것은 강중인이 기소나 공판을 통해서만 친일을 한 게 아니라, 방송과 기고 활동을 통해서도 그렇게 했다는 점이다. 경성중앙방송국 방송에 연사로 출연해 ‘필승 사상전’이라는 친일 강연을 한 일도 있고, 대중잡지인 <삼천리>에 ‘대동아 건설’, ‘일사보국(一死報國)’, ‘성업(聖業) 완수’ 등을 운운하는 글을 기고한 일도 있다. 한목숨 바쳐 나라에 보답하자며 공개적으로 친일을 외치고 다녔던 것이다.

▲ 1949년 11월 27일 <경향신문>에 실린 기사 ‘말성 이르키는 강 피고’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좌파로 변신했지만… 지울 수 없는 과거

강중인은 일반적인 친일 검사들과 달리 방송과 언론 활동을 통해서도 반민족행위를 했다. 이 정도면 누가 봐도 열혈 친일검사였다. 그랬던 그가 8·15 뒤에 180도로 달라져 토지개혁과 친일청산을 외치는 민전에도 가담하고 미군정과 대립하는 남로당에도 관여했던 것이다.

강중인은 미군정하에서 사법부 총무국장에도 임명됐다. 해방정국하의 법조계에서 주류적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좌파와 합세해 토지개혁과 친일청산을 외쳤다. 박정희처럼 기회주의적으로 좌파 활동을 한 게 아니라, 어느 정도는 확신에 기초해 그렇게 한 것 같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그런 느낌에 힘을 실어주는 장면이 위에 언급된 1949년 11월의 재판이다. 친일세력이 친일청산을 무산시키려고 일으킨 프락치 사건에 걸려든 그는 그달 26일 공판 때 일종의 ‘법정투쟁’을 벌였다. 판사나 검사의 질문에 상관없이 법정에서 자기주장을 반복적으로 선전했던 것이다.

다음날 발행된 <경향신문>은 ‘말성 이르키는 강 피고’란 제목으로 그의 법정투쟁을 보도했다. 이에 따르면, 앞서 심문을 받은 다른 피고인은 ‘남로당에 가입한 것은 사실이지만, 생명의 위협 때문에 탈당을 하지 못했다’고 진술한 반면, 강중인은 도리어 재판부를 설득하려 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 때문에 검사가 그의 발언을 제지하면서 “피고는 남로당의 노선을 되풀이하고 있어 법정투쟁을 한다”며 비공개 공판을 요구하는 일이 있었다. 재판장도 주의를 줬다고 한다.

이런 모습은 강중인이 어느 정도는 진심을 갖고 토지개혁과 친일청산을 외쳤을 가능성을 생각하게 만든다. 일제 때 본심을 감추고 살았던 것인지, 아니면 해방 뒤에 생각이 바뀐 것인지도 궁금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럴지라도 그가 일제 침략전쟁을 미화하고 공안정국에 가담한 사실은 지워지지 않는다. 위 공판 이후의 이야기를 <친일인명사전>은 아래와 같이 요약한다.

“1950년 3월 서울지방법원 제1심 재판에서 징역 3년을 언도받았다. 1950년 서울고등법원에 항소 중 6·25전쟁이 일어나자 월북했다.”

김종성 기자

<2024-02-25>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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