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중국 대륙의 조선인 김성호를 아십니까?
원희복 민족일보기념사업회 이사장
북경 천안문 동쪽으로 17km 떨어진 곳에 통주(通州)라는 곳이 있다. 이곳은 현재 북경시 통주구지만 원래 통현(通縣)이라 불리는 별개 도시였다. 이곳은 조선에서 북경으로 가는 길목에 있어 『열하일기』에 나오는 팔리교(본명 영통교)가 있다. 북경 대운하의 종착지로 북경으로 들어가는 물자의 기착지이기도 했다.
1922년 중국 여행증명제도가 철폐되고, 1923년 조선인이 대거 학살된 관동대지진이 일어나고, 북경에 있는 중국 대학교 진학이 상대적으로 쉬워 교육에 유리했고, 또 상해처럼 일본의 경찰권 행사가 허용되지 않았다. 게다가 북경에 비해 땅값도 저렴하고, 조선에서 오는 소식도 빨랐기 때문에 일제 강점하 조선인 정착이 많았다.
1925년 일본 조사자료에 따르면 통현에 정착한 조선인은 세 가구, 22명이다. 이중 최초의 정착인은 1915년 평북 의주 출신의 기독교 장로로 1911년 105인 사건에 연루됐던 김기창(金基昌)이고 다음이 황해도 진남포 출신으로 역시 기독교 장로였던 김병순(金炳恂) 가족이 1921년 이주했다. 한편 강원 철원 출신으로 미국에서 군사학을 공부하고 이승만과 의형제 사이일 정도로 가까웠던 박용만(朴容萬)도 이주했다. 박용만은 이곳에 어머니가 먼저 이주해 있던 것으로 보아 박용만 가족은 이미 이전에 이주했을 것이다.
김병순은 큰아들 환(煥), 둘째아들 우경(又卿), 큰딸 일경(日卿), 막내아들 찬(燦), 막내딸 순경(順卿) 등 3남 2녀를 뒀다. 김병순은 김기창과도 교회 장로로 친했지만, 동향인 백범과 친했다. 그래서 백범이 북경에 오면 김병순 집에 묵었다고 한다. 김병순의 자식 중 김찬과 순경은 각각 중국인 여성 도개손(陶凱孫)과 중국인 남성 장문열(張文烈)과 결혼해 가열찬 항일투쟁을 하다 부부가 연안에서 처형됐다.(자세한 내용은 원희복, 『사랑할 때와 죽을 때-한중 항일혁명가 김찬 도개손 평전』, 2015 참조)
통주에 정착한 최초의 조선인 김기창 집안을 통현 사람들은 ‘고려김가’로 불렀다. 김기창은 평북 의주에서 양실학원을 운영하는 등 청년운동을 하고, 105인 사건에 연루돼 투옥되고, 1919년 10월 임정선언서 서명 등의 활동을 했다. 통주로 이주한 이후에도 여운형, 박은식, 김원봉과 함께 일제의 불령선인 명단에 올라있을 정도였다. 김기창은 200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이 추서됐다. 김기창은 큰딸 신경과, 큰아들 승호, 둘째아들 영호, 셋째아들 성호(成鎬), 넷째아들 상호(祥鎬), 그리고 막내딸 신정(信貞)을 뒀다. 통주에 일찌감치 정착한 김기창과 김병순은 백범 김구뿐 아니라 도산 안창호, 이철부 부부 등 중국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가들에게 재정적 후원을 했다.
통주에는 1867년 미국 전교사(강대덕 부부)가 세운 기독교 학교인 로하중학(潞河中學)이 있다. 로하중학은 미국인 선교사가 상주해 중국 군벌도 함부로 못했고, 학풍은 자유주의적이었지만 당시 사회주의적 사회 분위기가 지배하고 있었다. 통현에 정착한 조선인 자녀들은 대부분 로하중학에 다녔고, 1921년부터 1928년 전후 로하중학에는 40여 명의 조선인 학생이 있었다.
중국공산당 중앙당교 최용수 교수는 김기창의 아들 넷은 모두 로하중학을 다녔는데 큰아들 김승호는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부모를 도왔다.―리광인은 그의 책 『겨레항일지사들』(북경)에서 김승호가 일제와 싸우다 전사했다고 밝히고 있다― 둘째 영호는 1923년 중국을 대표해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제6회,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제7회 원동운동회에 참여해 4등을 하기도 했다. 김영호는 1925년 로하중학을 졸업하고 광주 황포군관학교에 진학한 후 북벌에 참가하고 1928년 러시아로 갔다. 이중 셋째 김성호(중국이름 주문빈周文彬)가 중국공산당사에서 가장 특출난 인물이다. 그는 1917년 로하중학에 입학해, 1927년 2월 비밀리에 로하중학에 ‘사회주의과학학습조’를 조직하고 북경 지하당과 연계해 활동했다. 1927년 가을에는 형 김영호와 함께 진보적 학생을 모아 통주에 공산주의청년단(공청)을 만들어 서기에 취임했는데 이는 중국공산당 최초의 지부다. 즉 김성호(주문빈)는 중국공산당 최초 지부를 만들어 세력을 확장한, 중국공산당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꼽히고 있다. 막내 상호도 1928년 로하중학 재학중 중국공산당에 입당했고, 이후 연경대학에 진학해 지하당 활동을 했다.(최용수, ‘혁명가의 보금자리’, 『민족단결』 2001)
로하중학을 중심으로 조직된 중국공산당 제1 통주지부는 평민 야학을 운영하면서 노동자 계몽교육을 실시했고, 지역의 진보학생과 연계해 장개석의 국민당 우파를 성토하는 운동을 확산시켰다. 1933년 김성호는 동북 랴오닝성(遼寧省) 무순탄광(撫順炭鑛)에 파견돼 노동운동을 벌였고, 1936년 중국공산당 당산시위(唐山市委) 공위(工委) 서기에 임명돼 당산으로 갔다. 당산에 있는 카이런 탄광은 중국에서 가장 큰 탄광의 하나로 일본 영국 중국이 공동 운영했지만, 실제는 영국이 운영권을 쥐고 중국인 노동자 착취가 극심했다.
이에 김성호는 1938년 3월 16일 탄광 노동자를 지도하고, 인근 탄광까지 연대하는 ‘선참대파업’을 단행했다. 5개 탄광 노동자 3만 명이 50일간 계속된 연대 총파업에 탄광측이 손을 들었다. 결국 16개 조항의 단체협약을 맺는 성과를 거뒀다. 김성호가 계획하고 지도한 이 ‘카이런 탄광 총파업’은 중국혁명사에 기록돼 있으며 모택동은 “참 잘 영도했다, 로동계급의 각성을 높였다”고 높이 평가했다.
동맹파업 성공으로 중국공산당에 알려진 김성호는 탄광로동자들을 규합해 기동항일련군(冀東抗日聯軍)을 조직했다. 주문빈은 기동항일련군 1지대 정치부 주임과 군정위원회 위원 등 중요한 직무를 맡았다. 이후 중공기동지위 서기 겸 팔로군 제1지대 정치부 주임, 중공 기열변구특위(冀熱邊區特委) 조직부장 등의 중책을 맡아 항일투쟁의 선봉에 섰다. 1944년 10월 16일 김성호 부대는 기열변구특위 허베이성(河北省) 풍윤현(豊潤縣) 양가포(楊家鋪)에서 일본군에 포위됐다. 김성호는 부대를 나눠 일본군의 포위망을 뚫기로 했다. 김성호는 다른 부대의 포위망 돌파를 엄호하다 머리에 총탄을 맞았다.
김성호의 시신은 동지들에 의해 양가포 전모산 아래 한 소나무 곁에 묻혔다가, 1953년 6월 석가장에 세워진 화북군구열사능원에 이장됐다. 김성호의 묘는 이 화북열사능원 제일 앞자리에 모셔졌다. 1996년 5월 화북열사능원에 주문빈 기념비가 세워졌다. 이는 조선족으로 중국에 세워진 최초의 조선인 개인 기념비였다. 이전까지 광동성 광주에 세워진 광주봉기열사능원에 세워진 ‘중조인민혈의정’ 비가 유일했다. 화북열사능원에 있는 기념당의 한쪽 벽면에는 ‘주문빈 동지’라는 팻말과 사진과 약력, 투쟁모습을 그린 설명문이 있다.
김성호가 다니던 로하중학교 안에는 ‘로하교사관(潞河校史館)’이라는 학교 역사관이 있다. 필자는 지난해 10월 외부에 공개하지 않는 이 기념관을 운좋게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중학교 내의 작은 기념관이지만 나름 내실있게 꾸며져 있다. 그 역사관의 시작은 바로 김성호의 사진으로 시작된다. 전시관에는 “1927년 가을 중국공산당 북평현(북경)위원회 비준을 받아 로하중학에 중공당지부가 설립됐다. 통주 역사상 최초의 중국공산당 지부가 공식적으로 탄생했고, 통주에서 붉은 혁명의 서막이 공식 시작됐다”고 평가하고 있다.
로하중학교 학교 정문에서 본관으로 향하는 주도로는 김성호의 이름을 딴 ‘문빈로’로 명명됐다. 이 도로 말미에 100년이 넘은 본관이 있는데 그 본관 정면에는 김성호의 청동 흉상이 세워져 있다. 조선인이라는 동판 설명이 분명한 김성호의 흉상 목에는 항상 빨간 스카프가 매어져 있다. 또 1984년 학교 본관 앞에 주문빈 열사 흉상이 세워졌고, 해마다 청명에 전교 학생들이 기념비 앞에서 추모식을 갖고 공청단 입단식도 여기에서 열린다. 2008년에 주문빈렬사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주문빈 렬사』 책자가 발간됐다. 로하중학은 거의 조선인 김성호와 그 형제들의 기념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2014년 북경 대운하 삼림공원에는 통주가 중국공산당 제1지부라는 명성과 함께 거대한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처음에는 동상 조형물만 세워졌지만, 나중에 좌우에 자세한 설명 비문도 들어섰다. 조형물은 중국공산당 지부 설립 핵심 인사 조각과 그 과정을 자세히 새겨놓았다. 이 조형물의 주된 인물이 바로 김성호(주문빈)이다. 중국 땅에서 조선인으로 이렇게 거대한 조형물로 추앙받는 사람은 김성호 외에 없다.
중국에서 이렇게 조선인의 거대한 조형물이 있고, 출신 학교에 청동 흉상, 비록 학교 안 도로지만 그의 이름을 딴 도로가 있는 경우는 김성호가 유일하다. 작고한 중국중앙당교 최용수 교수는 생전 필자와 인터뷰에서 “김기창의 4형제는 중국에서 가장 높게 평가하는 조선인 혁명가 집안”이라고 평가했다. 이렇게 중국에서 높이 평가하는 김성호지만 정작 우리나라에서 김성호에 대한 연구나 평가는 미미하다. 그나마 손염홍(孫艶紅, 건국대학 교수)의 ‘주문빈과 중국혁명’(『한국학론총』, 2008년), 동순벽(董順擘, 천진사회과학원 일본연구소)의 ‘기동지구 조선민족 항일영웅 주문빈’(연변대학 력사학부 2009년 석사학위 논문)가 있는데 모두 중국 국적의 연구가들이다.
김기창은 서훈을 받았지만 그 아들 김성호에 대해서 국내에서는 아무도 몰랐다. 서훈은커녕 학계에서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심지어 그의 아들 정삼(鄭森 김기창의 외손자)은 돈을 벌기 위해 한국에 들어와 공사현장에서 일하다, 불법체류자로 몰려 임금이 떼이고 추방되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경향신문』 2005.6.14.) 다행히 이 보도를 본 청와대에서 건설업체를 조사해 떼인 임금을 받아 전달했고, 정부(노무현 대통령)도 2005년 김성호 열사에게 대통령 표창을 수여했다. 이 후 중국에서 김성호에 대한 연구가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