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신흥무관학교 의감(醫監)을 지낸 안사영과 그 형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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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 글방 10]

신흥무관학교 의감(醫監)을 지낸 안사영과 그 형제들

박광종 특임연구원

연구소는 오랫동안 신흥무관학교 출신 및 관련 인물에 대한 상세한 이력을 추적해왔다. 1911년 6월 개교부터 1920년 가을 폐교 때까지 10년 간 신흥무관학교를 수료한 졸업생 수를 최대 3,500여 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엄청난 졸업생 수에 비해 정작 구체적인 이름이 기록된 사람은 300여 명 안팎에 불과하다. 물론 신흥무관학교를 세우는데 크게 기여한 서울의 이회영·이시영 일가, 경북 안동의 이상룡·김대락 일가에서 배출한 졸업생들은 이름 뿐 아니라 그 족적이 남아있으나 대부분의 졸업자는 이름 석 자에 출신지 정도만 나와 있어 그 이력을 추적하기가 만만치 않다.

신흥무관학교 의감을 지낸 안사영(安思永, 1890~1967)도 그런 분들 중의 한 분이다. 신흥무관학교 교관이었던 원병상이 쓴 「신흥무관학교」(『신동아』 1969.6월호, 243쪽)에 “(신흥무관)학교가 이곳 (고산자) 대두자로 옮길 때의 교직원 부서…의감 안사영”이라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안사영에 대한 일제강점기 신문잡지, 각종 문헌과 문건뿐 아니라 온라인 정보를 뒤지던 중 어느 블로그에서 ‘음악가 안기영 인물 발표회’ 발표 : 안기영의 생질 이화옥, 「KBS 社友會」 라는글을 찾았다. 거기서 안사영의 이력뿐 아니라 그의 동생 안기영(安基永, 1900~1980)1이 신흥무관학교 졸업생인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안사영과 안기영을 비롯한 6남 3녀의 형제자매와 그들의 이름이 실린 안사영 일가의 기념사진을 찾은 것은 큰 수확이었다. 무슨 잔치인지 모를 이 가족사진(1944년)에서 부친 안석호(安奭鎬, 1874~1948)와 모친 이경애(李敬愛) 슬하의 형제자매가 부모님을 가운데 두고 여느 회갑 잔치 사진처럼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다. 이후 아홉 오누이들이 이렇듯 한자리에 모일 기회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한국현대사의 격랑 속에서 셋째 안기영이 한국전쟁 무렵 월북하여 이산가족이 된 안타까운 사연이 있기 때문이다.

서울 양반 태생의 독실한 기독교인 안석호

안사영의 조카딸인 이화옥의 기록에 따르면, 부친 안석호의 고향은 서울이고 대대로 중국 사신을 지냈던 양반 집안이었다고 한다. 안석호는 구한말에 일본의 국권침략이 심해지자 서울을 떠나 충청남도 청양읍 적곡리 칠갑산 밑으로 이사했다. 하루는 서울을 방문하는 길에 서양 선교사가 기독교 교리를 가르치자 이를 듣고 “나라의 주권이 일본으로 넘어간 이 마당에 기독교만이 나라를 살리는 길”이라 생각해 기독교에 귀의했다. 청양에 돌아와 주위 사람에서 적극적으로 기독교를 전도하다가 무당의 사주를 받은 동네 사람들의 괴롭힘에 못 이겨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그 후 안석호의 간곡한 권유로 여섯 아들들이 기독교 계열 학교인 배재학당,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연희전문학교, 딸 셋이 윤성열 목사와 결혼한 둘째 안덕희 빼고는 이화학당을 졸업했다. 안석호는 미국 선교사들에게 한국말을 가르쳤고 조그만 수첩에 깨알 같은 글씨로 성경 구절을 베끼어 외우고 다니며 동대문교회, 새문안교회, 상동교회 등에서 전도사로 일하였다고 한다.

구국과 애민의 의술을 펼친 안사영

서울에서 태어난 안사영은 청양으로 이주한 후 감리교 계열의 공주영명학교(公州永明學校)에서 수학하였다. 다시 서울로 돌아와 의술에 뜻을 두고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여 1917년 졸업했다. 1919년 초에 국권회복의 웅지를 품고 신흥무관학교가 있는 서간도로 망명했다. 당시 유하현 삼원보에는 한족회(韓族會)가 조직되어 서간도 일대의 한인 자치기관들을 통합하고 행정과 군사 편제를 체계화했다. 안사영은 한족회의 군의과장(軍醫課長)을 맡아 재만 동포들의 건강을 보살폈다. 한족회는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을 위해 서간도로 이주해온 수많은 조선청년들을 수용하기 위해 고산자 대두자에 신흥무관학교의 신축 교사를 지었다. 이 무렵 일본육군사관학교 출신의 김경천·지청천, 이범석 등 최신 군사교육을 받은 지휘관들이 교관으로 참여하여 어느 때보다 독립투쟁의 열기가 드높았다.

안사영은 신흥무관학교 의감에 선임되어 독립군의 동량이 될 조선청년들의 부상을 치료해 주었다. 이때 맺은 인연과 관련한 후일담이 있다. 이화옥의 증언에 따르면, 이승만 정권 초기 국무총리를 지낸 이범석 장군이 자기 집에 여러 번 찾아왔다고 한다. 대전에 살던 안사영 삼촌이 서울에 들를 때마다 자기 집에서 머물렀는데 “만주에서 총상을 치료해 준 자기 생명의 은인”이라며 삼촌을 만나기 위해 이범석 장군이 방문했다는 것이다.

1920년경 유하현 삼원보 소재의 신제병원(新濟病院) 원장을 역임했고, 삼원보에 근거지를 둔 항일운동단체인 ‘독립단’의 검찰(檢察)을 지냈다. 1920년 중반 일본 경찰에 검거돼 안동일본영사관에 넘겨져 평양에서 재판을 받고 평양형무소에서 2년간 복역했다고 한다.

평양형무소에서 출소한 뒤 1922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서 몸담았다가 1926년 강원도 원주로 이주해 안동의원에서 내과 의사로 근무했다. 이 무렵 원주 지역 노동회원 100여 명에게 치료비를 할인해주었다는 미담이 기사화되었다.(『중외일보』 1927.7.28.) 1927년 12월에는 신간회 원주지회 발기로 16개의 사회단체가 조직한 재만동포옹호동맹에서 구제부 위원을 맡았다. 이렇듯 원주 사회에서 지도적 위치를 차지했으며, 『조선일보』 1931년 11월 5일자의 원주 지역 각계 인물을 소개하는 기사에서 “이곳에 오기는 5년 전으로 지금 도규계(刀圭界: 의료계)를 위하여 많은 공헌을 쌓고 있다. 특히 내과에서 장하고 기독교 신자인만치 각별한 친절미가 있다”라는 좋은 평판을 얻고 있었다.

1930년대 중반경에 안사영은 만주로 이주하여 길림성(吉林省) 교하(蛟河)에서 안동의원을 개업하였다. 빈민에게 무료로 시술하여 칭송을 받았고 뛰어난 의술로 인해 교하 지역 주민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조선일보』 1937.12.22.) 1937년 7월에는 동아일보사 교하지국 고문에 선임되기도 했다.

해방 후 안사영은 귀국하여 대전에서 자리를 잡았다. 미군정청 시기인 1946년 3월 대전형무소 의무관이 되었고 1962년 4월 사의를 표하고 물러날 때까지 17년간 의무과장을 맡아 재소자들의 건강관리와 교정(矯正)에 온 힘을 쏟았다. 2021년 10월 제76주년 교정의 날을 기념해 교정본부TV는 ‘기억해야 할 진정한 교정인’으로 안사영 의무과장을 선정하여 그를 기리는 기념영상을 제작하였다. 영상 속의 내레이션은 다음과 같다.

공주영명학교, 세브란스연합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청년의사 안사영은 일제 치하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헌신하다 2년간 옥살이를 한 독립투사였습니다.
사회에서 더 나은 대우, 더 좋은 조건으로 일할 수 있었음에도 57세의 나이에 그가 선택한 곳은 대전형무소! 이곳에서 의무과장으로 근무하며 17년간 수형자들의 아픔을 치료하며 교정에 헌신한 사람. 제76주년 교정의 날을 앞두고 우리가 기억해야 할 진정한 교정인입니다.

조선음악의 현대화에 힘을 쏟은 음악가 안기영

안기영은 충청남도 청양군 장평면(옛 지명 정산군 적곡면) 적곡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음악에 소질을 보여 여러 스승으로부터 사사를 받았다. 공주 영명학교에서 오례택과 서울 배재학당에서 김인식 교원에게 창가와 코르넷 연주를 배웠으며, 연희전문학교에서 김영환에게 성악을 배웠다.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시작된 만세시위에 동생 안신영(연희전문학교 1년생, 1902~1975)과 함께 참가했고 대한문까지 가두행진하면서 “대한독립 만세”를 열렬히 고창하였다. 4월 7일 두 형제는 경성헌병분대에 체포되어 안기영은 곤장 30대를 맞고 석방되었고 안신영은 구속되어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경성헌병분대에서 풀려난 안기영은 곧바로 큰형 안사영이 있는 서간도 유하현으로 가서 안사영의 권유로 신흥무관학교 속성반을 졸업했다. 졸업 후 상해로 가서 버스 차장 일을 하면서 고학으로 금릉(金陵)대학을 다녔다. 1921년 12월 상해 인성학교(仁成學校)에 개최된 음악회에서 여러 가곡을 열창하여 교민들부터 박수갈채를 받았다.

1923년 귀국하여 정동교회에서 만나 교제하던 이성규와 결혼하여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결혼 후 안기영은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과 교수 메리 영의 조교가 되었다가 얼마 후 음악과 교원으로 승진했다. 1926년 미국 오리건주에 있는 엘리슨 화이트 음악학교(Eliyson White Conservatory)에 유학하여 3년간 수학하였다. 1928년 6월 귀국하여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로 취임했다. 강단에서 성악과 화성법 등을 강의하면서 한편으로 글리클럽이라는 이화여전 합창단을 만들어 전국 순회공연을 다녔다. 그해 ‘그리운 강남’ ‘우리 애기날’을 작곡하기도 했다. 9월에는 첫 독창회를 열어 우리 가곡과 영국, 이탈리아 가곡 등을 열창하였다.

1930년 7월 잡지 『삼천리』에 기고한 「춘원(春園) 석송(石松) 노래의 작곡(作曲)과 나의 고심(苦心)」에서 이광수(李光洙)의 〈우리 애기날〉과 석송 김형원(金炯元)의 〈그리운 강남〉의 곡조에 얽힌 에피소드를 아래와 같이 기술하였다.

내가 조선에 돌아와서 가요협회에서 보낸 이광수의 ‘우리 애기날’과 김형원의 ‘그리운 강남’이란 두 곡을 지었습니다. …‘그리운 강남’은 조선사람의 심금을 가장 몹시 울리는 아리랑 곡조를 순화시켜 놓은 것으로 그 곡조가 야비하지 않고 청신하며 또 알기 쉬워서 어린애들로부터 나이먹은 어른들까지 부르게 된 것이 장점이라고요. 또 한 가지 ‘우리 애기날’에 대하여는 악구가 부드럽게 흘러서 마치 봄날 후눅후눅한 풍정(風情)이 있다고 합디다. 이 비평이 가장 나의 마음을 붙잡는다 할 것이외다.(하략)

1931년에는 『동광(東光)』 제21호(1931.5.1)에 논문 「조선민요와 그 악보화」를 발표해 선율의 민요화와 화성화를 꾀함으로써 한국 음악의 방향을 설정하였고 전통민요를 합창으로 편곡한 『조선민요합창곡집 제1집』과 『안기영작곡집 제2집』을 출간하고, 같은 해 콜롬비아레코드사에서 민요합창곡을 취입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벌였다.

1934년 이화여전을 졸업한 성악가 김현순과의 스캔들로 이화여전을 사퇴하고 하얼빈, 상해, 일본 등지로 유랑하다가 1936년 김현순과 함께 귀국했다. 제자와의 스캔들은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켰고 방인근은 이를 소재로 소설 『방랑의 가인』을 쓰기도 했다.

1938년 경성음악전문학원 교원이 되었고 1941년부터 ‘향토가극’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가극으로 <콩쥐팥쥐>(1941), <견우직녀>(1942), <에밀레종>(1943), <은하수>(1943) 등을 만들 어 가극단 라미라(羅美羅)과 함께 발표하였다.

해방 직후 1945년 8월 결성된 조선음악건설본부의 성악부 위원장을 맡았고, 12월에 조직된 조선음악가동맹의 부위원장 겸 중앙집행위원을 역임했다. 1950년 6·25전쟁 직후 명동 시공관에서 예술공연을 준비하던 중 서울에 인민군이 진입하자 이때 김현순과 함께 월북했다.

월북 후 안기영은 평양의 국립예술극장 작곡가로 활동했고 1951년 평양음악학교 성악교원, 1956년 국립음악학교 부교수를 지냈다. 작품활동으로는 『발성교본』, 『시창교본』 등을 저술하고 ‘돌격대의 노래’ ‘해바라기’ 등 20여 편의 동요와 합창곡 및 기악곡을 창작하였다.

남한에서는 월북 후 그의 모든 작품이 금지되었다가 1988년 해금되었고, 그해 10월 6일 월북작곡가의 해금가요제에서 ‘마의태자’ ‘작별’ ‘그리운 강남’ 등이 공연되었다.

교육자,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나머지 형제들

넷째 안신영은 청양군 장평면 적곡리 북실마을에서 출생했다. 공주영명학교, 배재학당, 연희전문학교를 나왔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연희전문학교 1학년 때인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 만세시위에 참가하여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3년 연희전문학교 문학과를 졸업하고 공주 영명학교에 영어와 역사 담당 교사로 부임했다. 1925년 충남공주엡좢청년회 부회장, 1929년 공주체육회발기창립준비위원을 역임했다. 1933년 공주영명여학교 교감으로 승진했다. 1935년 평양 정의여자고등학교 한글 교사로 전직했다. 12년간 봉직한 영명학교에서 송별 행사로 체육회와 음악회를 열어주었다. 1936년 평양음악협의회 상무위원으로 활동했다. 1937년 출판법 위반 혐의로 평양경찰서로 잡혀갔다가 취조 후 정식 재판을 받았다.

즉 영명학교에서 ‘공주산성’에 관한 불온한 노래를 등사하여 학생들에게 배부하고 민족주의사상을 고취했고, 정의여자고등학교에서 자본주의경제조직을 비판한 등사물을 학생들에 배포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금고 3월, 2년간 집행유예가 언도되었다.

1944년 모교인 배재고등학교 교사에 취임했다. 해방 후 배화고등여학교 교사(1945), 미국공보원 주간신문 『세계주보』 주필(1950), 기독교 간행물 『다락방』 편집인(1952), 배재중·고등학교 교장(1961), 기독교방송국 이사(1965) 등 교육계와 언론계, 출판계 등 다방면에서 많은 활동을 하였다. 2006년 3·1운동 참여와 민족교육 실시의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여섯째 안시영은 1941년 7월 10일 불온그룹사건으로 강원도 고성경찰서에서 검거되어 취조받았다. 당시 원산루씨여학교 교사였던 안시영은 학생들에게 “인간은 조국을 잊어서는 안된다.” “민족운동을 희구하는 자는 결혼하지 말아야 한다.”는 등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학생들은 여기에 감화를 받아 특별기독회(特別基督會)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신앙의 힘, 십자가, 민족운동 실천’이란 강령을 만들어 이를 실행에 옮기려 했다.

끝으로 여덟째 안순영은 김원봉이 지도하는 남경의 조선혁명간부학교 제3기생으로 1935년 4월 1일부터 10월 4일까지 민족문제, 레닌주의 등 사상교육과 권총 분해, 폭탄 제조와 같은 군사 훈련을 이수하였다. 수료 후 민족혁명당에 가입하고 김원봉의 지령에 따라 국내로 잠입하려다가 대련수상경찰서(大連水上警察署)에 검거되었고 1936년 3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관동검찰국으로 송국되었다.

안사영과 네 명의 형제(안기영, 안신영, 안시영, 안순영)는 투철한 민족의식을 갖고 각자의 분야에서 민족해방을 위해 애써왔다. 또한 이들은 굴곡진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남과 북으로 갈리는 이산의 아픔을 겪었다. 이들 중 안신영만이 공적을 인정받아 서훈된 것은 너무나도 애석한 일이다. 앞으로 이들뿐 아니라 나라와 겨레를 위해 혼신을 다한 무명의 독립운동가들을 발굴하여 그들의 넋을 기리고 그들의 민족의식을 계승하는 것이 우리 모두의 책무라고 생각된다.

참고자료
‘음악가 안기영 인물 발표회(안기영의 생질 이화옥)’,「KBS 社友會」
(http://cafe.daum.net/KBS88/NbNY/219)
朴哲熙, 「안신영 선생님」(블로그 ‘백송의 집’ 所收. https://skk9p.tistory.com/14596669)
『(온라인)20세기 북한예술문화사전』(북한대학원대학교)
한국예술종합학교 한국예술연구소, 1999, 『한국 작곡가 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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