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에 남아있는 저들의 기념물 5]
조선신궁 탓에 외진 곳으로 떠밀려난 ‘한양공원 표지비석(1912년)’
왜성대공원, 경성공원, 한양공원, 그리고 결국에 남산공원
이순우 특임연구원
길을 가다가 어떤 이가 ‘남산공원’으로 찾아가는 행로를 물어온다면 퍼뜩 그 대답이 떠올려지지 않는 때가 있다. 목적지가 ‘남산서울타워’ 쪽인지, 옛 남산식물원과 분수대가 있던 ‘조선신궁 터’ 쪽인지, 충무로역에 인접한 ‘남산골한옥마을’ 쪽인지, 힐튼호텔이 자리한 남산성벽의 끝자락 쪽인지 ……, 뭐, 대략 이런 정도의 특정지점을 먼저 얘기해주지 않으면 도무지 어디를 알려달라는 것인지 잘 가늠이 되지 않을 만큼 남산공원의 범주 자체가 워낙 너르기 때문이다.
알고 보니 흔히 ‘장충단공원’으로 알려진 지역도 이미 1984년 9월 22일에 건설부 고시 제374호에 따라 “장충근린공원(297,500㎡)을 폐지하고 남산자연공원(2,971,546㎡)에 병합 처리”되었으므로 이곳 역시 일찍이 남산공원 영역에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남산공원’이라고 하면 남산의 동서남북 전체를 포괄하는 명칭이라고 보면 크게 틀리지 않는다.
그런데 이처럼 광대한 남산공원도 실상은 최초에 사방 1정(町; 1정=109.09미터) 정도의 작은 땅에서 시작되었다. 경기도(京畿道)에서 편찬한 『경기지방의 명승사적(京畿地方の名勝史蹟)』(조선지방행정학회, 1937), 35~36쪽 부분에는 ‘남산공원’의 기원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정리한 구절이 포함되어 있다.
[남산공원(南山公園): 경성부 왜성대정(倭城臺町, 와죠타이쵸)에 있고, 원내(園內)에 경성신사(京城神社)를 봉사(奉祀)한다. 여기부터 조선신궁(朝鮮神宮)에 이르는 참도(參道)의 부근 일대를 한양공원(漢陽公園)이라 부른다.]
명치 30년(1897년)에 이르러 경성일본거류민(京城日本居留民) 사이에 숙제(宿題)로 있던 공원설치의 논의가 진전되어, 당시의 공사(公使) 카토 마스오(加藤增雄)는 한국정부(韓國政府)에 교섭하여 동년(同年) 3월 17일 현 갑오기념비(甲午記念碑)를 중심으로 한 약 1정사방(町四方)의 지역에 대해 영대차지(永代借地)의 계약을 하였다. 이것이 남산공원(南山公園)의 남상(濫觴)이었는데, 동시에 우선 제1기 경영(第一期 經營)으로 3백 원(圓)을 들여 거류지(居留地)로부터 공원에 통하는 도로를 개착했다. 익(翌) 31년(1898년) 공원 내에 대신궁(大神宮) 즉 지금의 경성신사(京城神社)를 봉사(奉祀)했고, 후에 다시 소화 8년(1933년) 이곳에 인접하여 내목신사(乃木神社, 노기신사)를 건립한 것은 별항(別項)에 서술하는 것과 같다.
이곳은 통칭 ‘남산 왜성대(南山 倭城臺; 예장동 8번지 일대의 평평한 지형)’ 바로 위쪽에 터를 잡고 있었던 탓에 보통은 ‘왜성대공원(倭城臺公園; 지금의 숭의여자대학교 일대)’이라고도 불렀다. 비록 이름은 ‘남산공원’—다분히 일본인의 집단거류지였던 남산정(南山町, 지금의 남산동)을 끼고 바로 뒤쪽 산비탈에 자리한 공원이라는 의미가 반영된 결과물—이었으나 이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그것은 남산 전역을 가리키는 표현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는 달리 남산 전역을 포괄하는 명칭으로 제일 앞서 등장한 것은 바로 ‘경성공원(京城公園)’이었다. 이에 관해서는 1906년 8월 15일에 공표된 경성이사청 고시(京城理事廳 告示) 제23호에 “경성 남산 북면(北面) 일대 지역 가운데 장충단(奬忠壇), 체신성(遞信省), 주차군사령부(駐箚軍司令部), 통감부(統監府)의 각 소속지(各所屬地), 일본공원(日本公園; 왜성대공원을 가리키는 표현) 및 민유지(民有地)를 제외한 잔여(殘餘)의 전부를 경성공원(京城公園)으로 함”이라는 구절이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이보다 1년 앞서 『황성신문』 1905년 6월 23일자에 수록된 「한판질품(漢判質稟)」 제하의 기사에 이 지역에다 임의로 ‘일본영사관공원지’라거나 ‘경성공원지’라거나 하는 표목(標木)을 박는 행위를 둘러싸고 한성부(漢城府) 측과 거듭 논란이 벌어진 일이 채록되어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이걸로 보면, 경성이사청의 전신(前身)인 일본영사관 시절부터 진즉에 남산의 절반을 통째로 장악하려는 시도가 있었던 사실이 잘 드러난다고 하겠다.
이 와중에 일본인 거류민 쪽에서는 이른바 ‘을사조약’ 이후 자신들의 세력권이 크게 확장되고 있는 것을 빌미로 남산공원(즉, 왜성대공원)에 이어서 남산 중턱 일대를 차지하고 이곳에도 새로운 공원을 하나 더 개설하려는 욕심을 드러냈다. 서울 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사방으로 트인 전망이 빼어난 곳으로 알려진 이곳에 들어선 것이 바로 ‘한양공원(漢陽公園)’이었다.
경기도(京畿道)에서 편찬한 『경기지방의 명승사적(京畿地方の名勝史蹟)』(조선지방행정학회, 1937), 36쪽 부분에는 ‘한양공원’의 개설과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된 내용이 남아 있다.
…… 그런데 이 소규모의 공원이 나타날 무렵부터 재한영미인등(在韓英米人等)은 빈번하게 남산에 주목하여, 교회(狡獪)하게도 이를 점유하려고 암암리에 획책을 줄곧 하여왔으나, 일본거류민(日本居留民) 이케다 쵸지로(池田長次郞) 등이 이를 알고 크게 분개(憤慨)하여 당시의 한국정부(韓國政府) 농상공부대신 조중응(農商工部大臣 趙重應), 내부대신 송병준(內部大臣 宋秉畯) 양씨(兩氏)를 움직여 일한인 공동공원(日韓人 共同公園)으로 부른다는 명목(名目)으로 마침내 명치 41년(1908년) 구 한국정부로부터 남산 북면 일대의 땅, 지금의 조선신궁경내(朝鮮神宮境內)를 포함하는 약 30만 평(坪)의 영대대하(永代貸下)를 받는 것으로 되었다. 이로써 42년(1909년) 가을, 경성재주 독지가(京城在住 篤志家)의 기부로써 공원공사에 착수하여 청학정(靑鶴亭), 황조정(黃鳥亭), 전관정(展觀亭) 등의 청쇄(淸洒)한 소정자를 여러 곳에 세우고 명치 43년(1910년) 5월 대체의 공사를 마치게 되어, 5월 29일 개원식(開園式)을 거행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이 곧 한양공원(漢陽公園)이다. 당시 그 식에는 이태왕(李太王, 고종)의 칙사(勅使)를 위시하여 일한양국(日韓兩國)의 유지자(有志者) 약 2천이 내회(來會)하였으며, 특히 고종(高宗, 이태왕)은 친필(親筆)로써 한양공원(漢陽公園)이라 명명(命名)하고 또 청학(靑鶴), 황조(黃鳥), 전관(展觀) 각정(各亭)의 어염필(御染筆)을 하사하였다. 이 공원의 시설은 조선신궁이 조영될 적에 모두 철거되어, 현재는 오로지 동참도(東參道)의 곁에 한양공원(漢陽公園)이라는 석비(石碑)가 남아있을 따름이다.
여기에서 보듯이 일본인들은 남산 일대를 자신들의 유락지(遊樂地)로 독식하려는 처사에 대해 비난이 쏟아질 것을 염려한 것인지 구태여 그 형식을 ‘일한인 공동공원(日韓人 共同公園)’으로 하는 한편, 특히 태황제(太皇帝)의 신분으로 물러나 있던 고종황제(高宗皇帝)에게서 ‘한양공원’의 명명(命名)과 글씨를 받아낸 것으로 방패막이를 삼았던 것이다. 이때 한양공원 내에 설치된 청학정, 황조정, 전관정 등 세 곳에 대한 편액과 별도로 ‘한양구락부(漢陽俱樂部)’의 휘호도 함께 내린 것으로 알려진다.
이러한 한양공원은 반년가량에 걸쳐 지반조성과 시설공사를 진행한 끝에 — 그것도 하필이면 ‘경술국치’를 딱 석달 앞둔 시점인 — 1910년 5월 29일에 이르러 성대한 개원식이 거행되었는데, 여기에는 고종 황제의 칙사(勅使) 서병협(徐秉協, 승녕부 시종)을 포함하여 한국정부의 고관대작들도 다수가 참석하였다. 『대한매일신보』 1910년 5월 31일자에 수록된 「한양공원 개식(漢陽公園 開式)」 제하의 기사에는 이날의 풍경을 이렇게 그려놓고 있다.
기보(旣報)와 여(如)히 한양공원 개식은 29일 오후 1시부터 개원식(開園式)을 거행하였는데 이케다 씨(池田氏)는 발기인을 대표하여 식사(式辭)를 술(述)하고 칙사 서병협 씨(勅使 徐秉協氏)가 태황제 폐하(太皇帝 陛下)의 축사(祝辭)를 대독(代讀)하고 경성민장(京城民長)은 우(右)에 대하여 답사(答辭)를 술(述)하였으며 조 농상(趙農相; 조중응 농상공부대신), 카이즈 용산민회의장(海津 龍山民會議長) 등은 공원에 대한 소감(所感)을 연술(演述)한 후 각종(各種)의 여흥(餘興)으로 성황(盛況)을 정(呈)하였다더라.
여기에 등장하는 이케다 쵸지로(池田長次郞, 1878~?)라는 일본인 유지(有志)는 한양공원의 발기인 총대(發起人 總代)로서 이 공원의 개설을 주도했던 이로 알려져 있다. 특히 그는 1926년 5월 28일에 창덕궁 금호문(昌德宮 金虎門) 앞에서 벌어진 ‘송학선(宋學先) 의거’ 당시 사이토 총독 일행으로 오인된 ‘일본인 3인’ 중의 한 사람으로도 기억되는 인물이다. 어쨌건 한양공원의 경우, 운영유지에 관한 사항은 개설 직후에 공공단체(公共團體)에 위임하는 형태로 정하였으므로, 이에 따라 유지 대표인 이케다는 그해 7월 23일에 경성이사청의 인가를 받아 약 1만 원에 달하는 설비비(設備費) 중 미불금(未拂金) 1,800원을 보상받는 조건으로 공원 시설 전체를 경성거류민단(京城居留民團)의 조영물(造營物)로 귀속시키게 된다.
그러나 이로부터 9년가량이 시간이 흐르고 한양공원은 사실상 본연의 기능을 상실하는 처지가 되고 만다. 1919년 7월 18일에 이르러 장차 식민지 조선의 수호신(守護神)으로 삼을 관폐대사 조선신사(官幣大社 朝鮮神社; 1925년에 ‘관폐대사 조선신궁’으로 개칭)의 건립부지로 바로 이곳 ‘한양공원 일대’가 낙점되었기 때문이다.
이른바 ‘천조대신(天照大神, 아마테라스오미카미)’과 ‘명치천황(明治天皇, 메이지텐노)’의 2주(二柱)를 반도진호(半島鎭護)의 신(神)으로 삼으려는 조선신사의 창립계획은 원래 명치천황이 죽은 1912년 이후 지속적으로 거론되어 오던 상태였다. 그 사이에 조선신사의 건립 후보지로는 효창원, 경복궁 신무문 외 북악산 중턱, 남산공원(왜성대공원), 남산총독관저 주변 등이 검토된 바 있고, 최종적으로 가장 조망(眺望)이 좋고 명승지로도 이름 높은 남산 중턱의 한양공원 일대가 선정되었던 것이다.
『매일신보』1919년 7월 20일자에 수록된 「굉장(宏壯)한 신전조영(神殿造營), 금추(今秋) 지진제(地鎭祭)를 행(行)한 후(後) 공사(工事)에 착수(着手)할 예정(豫定), 부지(敷地)는 남산 한성공원(南山漢城公園), 총독부 영선과장(總督府 營繕課長) 시오야 씨(鹽屋氏) 담(談)」 제하의 기사에는 조선신사의 축조계획에 대한 개요가 다음과 같이 언급되어 있다.
…… 신사(神社)의 부지(敷地)는 금(今)의 한양공원(漢陽公園)에 과반(過般) 다점(茶店)을 파괴(破壞)한 부근(附近) 약(約) 8천 평(千坪)으로써 충당(充當)하며 굉장(宏壯)한 신전(神殿)을 조영(造營)하는 외(外)에 부근(附近)에 신원(神苑)을 설(設)하기로 하였는지라, 신사(神社)는 서북향(西北向)으로 건(建)하여 선일(先日) 발표(發表)한 신도노선(新道路線)의 부청측(府廳側)으로부터 백이의영사관리(白耳義領事館裏, 벨기에영사관 뒤)에 출(出)하여 남묘편(南廟便)으로 향(向)하는 노선(路線)에 요시노쵸(吉野町)의 성벽(城壁)을 횡단(橫斷)한 개소(箇所)로부터 일지선(一支線)을 설(設)하여 차(此)의 조선신사(朝鮮神社)에 참예(參詣)하는 일대로(一大路)를 설(設)할 터인 고(故)로 금년(今年)의 추경(秋頃)에는 선(先)히 성대(盛大)한 지진제(地鎭祭)를 행(行)하고 기후(其後)에 착수(着手)할 터이라.
이러한 결과로 조선신사의 조영공사는 1920년 5월 27일에 실시된 지진제(地鎭祭)를 필두로 그 이후 1924년 4월 3일에 상동제(上棟祭)의 순서를 거쳐 1925년 10월 15일에 진좌제(鎭座祭)가 거행되면서 최종 마무리되었다. 이 와중에 한양공원의 시설물들은 대다수 사라지게 되었고, 1912년에 건립된 ‘한양공원 표지비석’ 역시 한갓진 자리로 떠밀려나면서 왜성대공원 쪽으로 이어지는 동참도(東參道)로 그 위치가 바뀌었다.
조선신궁이 남산 일대에 들어서면서 다른 곳으로 밀려난 것은 비단 이것만이 아니었다. 우선 그 무엇보다도 엄숙하고 경건해야 할 신궁의 영역 안에서 요란하게 대포소리를 울릴 수 없다고 하여 1920년 5월 25일에 한양공원의 오포(午砲)가 효창원 동쪽 연화봉 자락(지금의 청파동 1가 97번지 위치)으로 자리를 옮겨가게 되었다. 또한 1925년에 이르러 그들만의 신성한 구역인 신궁의 머리맡에 감히 무당의 푸닥거리가 벌어지는 공간이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이유로 남산 꼭대기의 국사당(國師堂)을 헐어 인왕산 쪽으로 이전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경성부(京城府)에서 발행한 『경성도시계획조사서(京城都市計劃調査書)』(1928), 163쪽에 수록된 「경성부공원유보지일람표(京城府公園遊步地一覽表)」를 보면, 그 첫줄에 ‘한양남산공원(漢陽南山公園; 84,325평)’의 명칭이 나오는데 이것은 조선신궁의 창립과 더불어 한양공원의 존재가 희미해지고 있다는 흔적의 하나가 아닌가 싶다. 그리고 이보다 더 시간이 흘러 『조선총독부관보』 1940년 3월 12일자에 게재된 조선총독부 고시 제208호 「경성시가지계획공원 결정」에는 공원목록에 ‘남산공원(南山公園; 348,000평방미터)’만 보일 뿐 한양공원이라는 이름은 사라지고 없는 상태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남산예장공원 쪽에서 소파로를 따라 백범광장 방향으로 올라가는 도중에 남산케이블카 승강장을 막 지나자마자 150미터 남짓한 지점에 이르면, 도로 오른편으로 ‘한양공원 표지비석’과 함께 안내판이 말끔하게 설치된 구역이 나타난다. 해방 이후 시기에 제대로 관리되지 못한 탓인지 한동안 도로변 철책 안쪽의 풀숲에 방치되다시피 하다가 지난 2009년에 이르러서야 주변환경정비와 아울러 일반탐방객을 위한 공개관람구역으로 변신하게 되었다.
이 비석의 전면에 새겨진 ‘한양공원(漢陽公園)’이라는 큰 글자는 앞서 소개한 바와 같이 고종황제의 어필(御筆)이며, 안타깝게도—한국전쟁 때의 상흔인지는 잘 모르겠으나—군데군데 총탄 자국의 흔적이 역력한 상태이다. 그런데 뒤쪽으로 돌아가서 살펴보면 비석의 후면은 일제 식민지배에 대한 민족적 감정의 분출 탓인지 글씨 전체가 완전히 뭉개어져 깎여나가는 바람에, 맨 나중 구절인 “경성거류민단 민장 코죠 칸도(京城居留民團民長 古城菅堂)”라는 부분 정도만 간신히 읽어낼 수 있을 따름이다.
하지만 이 비석의 후면에 새겨져있던 ‘한양공원기(漢陽公園記)’의 내용에 대해서는 조선신궁 어진좌 십주년기념(朝鮮神宮 御鎭座 十周年記念)으로 조선신궁봉찬회(朝鮮神宮奉讚會)에서 편찬한 『은뢰(恩賴, 미타마노후유)』(1937)에 이 비석의 앞뒷면을 촬영한 사진자료가 남아 있으므로 이를 통해 전문(全文)을 파악하는 것이 가능하다.
한양공원기의 비문 풀이
漢陽公園記
京城朝鮮之大都而闕觀游也久矣士民以爲/ 憾焉歲在於明治戊申有志胥謀設一大公園/
相地于南山西端林壑蓊欝之處以請官允可/ 乃役夫經工撤土石而衷崇痺則崖峭而開道/
路築月阿造風階再閱年而成命名曰漢陽公/ 園四時之景備眺望最佳矣莫哉京城居留民/
團從有志之請管理之至于今日乃勒有志之/ 氏名以傅後
明治四十五年三月 京城居留民團民長 古城菅堂
한양공원기
경성은 조선의 대도시이나 보고 즐길 곳을 결여한 지 오래인지라, 사민[士民]이 이를 유감으로 여겼더라. 그리하여 때는 명치[明治] 무신년(1908년)에 유지들이 일대 공원을 설치하기로 서로 모의하여 남산 서쪽 끝산림이 으슥하고 옹울한 곳에 자리를 정하면서 관[官; 한국정부]에 윤가[允可]를 청하였고, 이에 인부를 부려 공역을 거쳐 토석을 걷어내고 숭비[崇痺, 높고 낮은 곳] 곧 애초[崖峭; 낭떠러지와 가파른 곳]를 고르게 하며 도로를 열고 월아[月阿]를 짓고 풍계[風階]를 만들어 재열년[再閱年; 2년 이상이 걸리는 것]에 완성이 되니 명명하길 한양공원이라 하였는데 사시의 경치가 조망을 갖추어 가장 아름다운 곳이 아니리오. 경성거류민단이 유지의 청에 따라 금일에 이르기까지 이를 관리하였는데, 이에 유지의 씨명으로써 새겨 후세에 전하노라.
명치 45년(1912년) 3월 경성거류민단 민장 코죠 칸도
여기에 등장하는 경성거류민장 코죠 칸도(古城菅堂, 1857~1934)는 경성의사회장(京城醫師會長) 출신으로 30여 년에 걸쳐 경성 재계의 실세이자 일본인 거류민사회의 거물로 활동했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찬화병원(贊化病院, 진고개 소재)을 운영했던 그의 동생 코죠 바이케이(古城梅溪, 1860~1931) 역시 의사 출신인데, 특히 그는 종로거리 개수공사와 관련하여 철거상태에 놓이게 된 광화문네거리 칭경기념비전(稱慶紀念碑殿) 앞 만세문(萬歲門)을 자신의 집 앞으로 버젓이 옮겨 놓았던 당사자였다는 점도 꼭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생각건대 비석 앞에 새겨진 고종황제의 글씨만 놓고 본다면 근대문화유산으로서 최소한 서울시 기념물이거나 유형문화재 또는 국가등록문화재의 반열에 들어갈 자격은 차고 넘치겠지만, 문제는 바로 한양공원의 건립주체와 비석 뒷면에 새겨놓은 비문의 작성자가 모두 일본인들이라는 사실이다. 이 때문인지 ‘한양공원 표지비석’이 이도저도 아닌 ‘서울미래유산’의 범주에 머물고 있다는 점은 이 비석의 태생적 한계와 위상을 잘 말해주는 대목이라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