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망향의 동산에서 맞이한 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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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마당]

망향의 동산에서 맞이한 새해

전민창 인턴. 한양대학교 대학원 석사과정

2월 15일 민족문제연구소는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보추협)와 함께 특별한 2024년 새해를 맞이했다. 예년과 마찬가지로 천안에 소재한 망향의 동산에 가서 신년 차례를 올린 것이다. 이곳에는 강제동원 피해자를 비롯하여 일제에 의해 고향을 잃고 타국에서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이들이 잠들어 있다. 망향의 동산은 과거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으로 고통받은 이들을 위한 안식처이자, 식민지배의 아픔을 성찰하는 의미 있는 장소라고 할 수 있다.

이번 15일 망향의 동산 차례(茶禮)에는 이희자 보추협 대표(이사현 님의 딸, 군속으로 동원돼중국에서 사망)를 비롯하여 박남순(박만수 님의 딸, 군속으로 동원돼 남양군도에서 사망), 박진부(박선봉 님의 아들, 노무자로 동원돼 북해도에서 사망), 신명옥(박헌태 님의 며느리, 군인으로 동원돼 중국에서 사망), 정윤현(박운석 님의 며느리, 노무자로 동원돼 일본에서 사망) 보추협 회원들이 참여했다. 이들은 아버지의 얼굴을 제대로 본 적이 없다. 이들의 아버지는 일본에 의해 강제동원되었고, 태평양전쟁 시기에 모두 사망했다. 어떤 이는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아버지와 생이별하였고, 어떤 이는 시아버지의 얼굴도 모르고 결혼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아버지의 죽음에 좌절하지만은 않았다. 일본 정부를 향해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에 진정한 사죄를 요구하며 현재도 역사의 현장 위에 서있다. 이러한 투쟁을 지속한 지 30여 년이 지나, 이들의 나이는 벌써 산수(傘壽 80세)를 넘겼다. 어느덧 치열한 싸움을 이어가기에 힘에 부치는 고령이 되었지만 일본에 사죄를 받아내겠다는 의지만큼은 여전히 뜨겁다. 망향의 동산에 가는 차 안에서도 지난 추억에 함께 웃고, 오늘날의 암담한 현실에 한숨 쉬며 앞으로도 이어갈 활동 이야기에 대화가 끊이지 않았다.

새해가 되면 가정마다 조상에게 차례를 올리는데, 보추협이 망향의 동산에서 지내는 차례는 남다르다. 이들이 차례를 지내는 것은 자신들의 부모님을 찾아뵙고 예를 올리기 위함도 있지만, 보추협 회원들끼리 아버지를 잃은 슬픔을 함께 공유하고,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여타 강제동원 피해자들, 특히 위안부 피해자들도 함께 기리고자 망향의 동산에 오르고 있다.

망향의 동산에는 김학순과 황금주 그리고 송신도를 비롯해 위안부 피해자들이 잠들어 있다. 이들 모두 용기를 내어 위안부 피해 사실을 고백하고, 일평생 일본 정부를 향해 사죄를 요구했다. 송신도 할머니는 평생을 일본에서 살며, 고향을 그리워했다. 보추협 회원들에게 있어 김학순과 황금주, 송신도 할머니는 일본에 함께 맞서 싸운 동지이자, 자신들에게 또 다른 어머니, 이모와도 같은 존재였다. 그래서 김학순 할머니와 같이 자식과 가족이 없어 쓸쓸한 여생을 보낸 분들을 위해 보추협 회원들은 매년 기일과 명절을 잊지 않고 위안부 피해자들 묘역에 참배를 올렸다고 한다.

이렇듯 보추협 회원들에게 망향의 동산은 단순히 부모가 잠든 묘소가 아니다. 자신의 부모와 같이 일제 강제동원 피해를 당한 수많은 이들을 함께 추모하는 공간인 것이다. 무엇보다도 망향의 동산에 참배를 가는 것은 사죄하지 않는 일본 정부를 향한 저항과 다짐이기도 하다. 차례를 올리면서 이희자 대표는 “아버지! 일본에 사죄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라고 읊조렸다. 그들이 어떠한 마음을 가지고 망향의 동산에 오르는지를 보여주는 순간이었다.

눈발이 휘날리는 가운데 시아버지의 묘역을 바라보는 신명옥의 서러움을, 아버지의 기록을 찾아 평생을 싸우고 있는 이희자의 분노를, 야스쿠니에 합사되어있는 아버지가 “여전히 식민지배를 겪고 있다”고 말하는 박남순의 울분을 직접 경험하지 못한 우리들이 어떻게 이들의 깊은 한을 헤아릴 수 있을까? 이들의 아픔이 치유되기 위해서는 일본의 진정한 사죄가 반드시 필요하다.

이번에 망향의 동산에 함께 방문하면서 일본 정부를 향한 강제동원 유족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 앞으로의 과제는 보추협 회원들이 쌓아온 투쟁의 탑을 보다 견고히 만드는 일일 것이다. 그리고 보추협 회원들이 빼앗긴 어버이를 그리며 망향의 동산에 오르는 마음을 이어나가야 한다. 아버지를 잃은 이들의 슬픔과 현재까지도 피해기록과 유해를 찾지 못한 피해자들을 위해서 연구소와 보추협은 계속 나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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