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연 ㅣ 도쿄 특파원
지난 6일은 윤석열 정부가 한-일 관계 최대 쟁점인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과 관련해 일방적인 양보안을 발표한 지 1년이 된 날이다. 대법원에서 승소한 일부 피해자와 유족들은 일본 피고 기업이 아닌 한국의 재단이 돈을 내는 ‘제3자 변제’라는 정부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지금도 투쟁을 멈추지 않고 있다.
후지코시 강제동원 피해자인 아내 대신 싸우고 있는 93살 김명배 할아버지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다. 김 할아버지는 지난달 27일 후지코시 주주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경기도 용인에서 일본 혼슈 도야마현까지 왔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은 일본 피고 기업의 주식을 사서, 주총에 참여해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투쟁을 해왔다. 김 할아버지는 이번 주총에서 구로사와 쓰토무 후지코시 사장을 향해 “대법원 판결에 따라 강제동원 피해자에게 사과하고 배상하라”고 요구했다.
지난 1월 대법원의 승소 확정 판결이 나오기까지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법정 투쟁에만 21년이 걸렸다. 그사이 12살 때 후지코시에서 온갖 고생을 했던 아내는 세상을 떠났다. 김 할아버지는 “단순히 돈이 목적이었다면 이렇게 오래 싸우지 못했을 것”이라며 “(한국) 재단의 돈은 받을 수 없다. 그것은 죽은 아내의 뜻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김 할아버지를 더욱 답답하게 만드는 것은 한국 정부다. 가뜩이나 일본을 상대로 어려운 싸움을 하고 있는데, 윤 정부가 ‘제3자 변제’를 추진하면서 ‘강제동원 피해자’와 ‘한국 정부’ 사이의 새로운 갈등이 생겼기 때문이다. 일본 쪽은 ‘한국이 알아서 할 문제’라며 남의 일 보듯이 하고 있다.
윤 정부는 역사 문제와 관련해 “모두 끝났다”는 일본 정부의 기조를 그대로 따라가는 모습이다. 올해 3·1절 기념사에선 지난해에 이어 강제동원 피해자와 일본군 ‘위안부’ 등 역사 문제를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대통령실의 설명은 더욱 노골적이었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기자들을 만나 “한-일 간에 ‘위안부’, 강제징용 문제는 정부 해법 등을 통해 종료된 상황이다. 추가적인 논의를 통해 한·일 양국이 과거사에 대해 새로운 것을 모색하는 숙제는 없어졌다”고 말했다.
김 할아버지처럼 피해자와 유족의 힘겨운 싸움은 현재 진행형인데도 한국 정부가 앞장서서 ‘종료됐다’고 못을 박는 건 또 하나의 ‘윤 정부 식 입틀막’이다. 정부의 태도는 ‘이미 끝났으니 더 이상 떠들지 말고, 조용히 하라’는 압력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정부가 이 싸움을 끝내고 싶어도 끝낼 수가 없다. 윤 정부는 재단의 돈을 거부하는 강제동원 피해자의 배상금을 법원에 강제로 공탁하는 방식으로 이 문제를 서둘러 매듭지으려 했지만, 법원이 잇따라 기각 결정을 내리면서 제동이 걸렸다. 법원은 “가해 기업에 면죄부를 주게 된다”며 정부의 꼼수를 짚어냈다. 국제기구의 압박도 계속되고 있다. ‘국제노동기구(ILO) 협약·권고 적용에 따른 전문가위원회’는 지난달 9일 내놓은 보고서에서 강제동원 문제 등에 대해 ‘피해자들과 화해를 위한 모든 노력과 지체 없는 적절한 조치’를 일본 정부에 촉구했다. 무엇보다 싸움을 멈추지 않겠다는 피해자가 있다. 93살 김 할아버지는 “죽는 순간까지 아내의 뜻을 따를 생각”이라고 말했다.
김소연 기자 dandy@hani.co.kr
<2024-03-07> 한겨레
☞기사원문: 강제동원 배상 ‘셀프 종료’, 윤석열 정부의 입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