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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독립운동가 묘역 앞 엉뚱한 운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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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의 효창공원 재구조화는 왜 성공하지 못했나

김구(38.0%), 안중근(33.4%), 윤봉길(26.3%)

2019년 2월 문화체육관광부는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국민인식 조사’ 결과를 발표한다.

국민 1,004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항일독립운동가 하면 떠오르는 인물”을 묻는 질문의 1, 2, 3순위 응답을 합한 결과, 응답자들은 위 세 명의 독립운동가를 가장 많이 언급했다. (4위 유관순 22.8%, 5위 안창호 12.5%)

공교롭게도 가장 앞서 언급된 3인의 묘역이 모두 용산구 효창공원에 자리해 있다.

해방 후 조성한 첫 순국선열 묘역

효창공원에 독립운동가 묘역을 조성한 역사는 1946년 7월 6일로 거슬러 오른다. 지금의 삼의사(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묘역이 이 날 조성됐고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모실 자리도 함께 마련해 두었다. 해방 후 환국한 독립운동가들이 직접 조성한 첫 번째 순국선열 묘역이었다. 관련 내용을 보도한 1946년 7월 7일 자 <동아일보> 기사 “祖國光復(조국광복)에 바친 세血祭(혈제)”는 당시를 이렇게 기록해 두었다.

삼(三)열사의 국민장은 서울의 성지 효창원에서 이승만 박사, 김구 주석, 오세창·이시영·여운형 제씨(諸氏)와 한국민주당·조선공산당·한국독립당·민전·대한독립촉성국민회·전평·부총·애국부인회·여자국민당 등 각 정당·단체 대표자와 각 정회, 각 학교의 대표자들 5만여 명이 참예하여 하오 1시부터 엄숙히 거행되었다.

해방 후 처음으로 조성한 순국선열 묘역인 만큼 당대 유력인사, 제 정당과 사회단체가 대거 참여한 가운데 국민장이 치러졌음을 알 수 있다.

▲ 해방 후 조성한 첫번째 순국선열(삼의사) 묘역 ⓒ 퍼블릭도메인

이어서 1948년 9월 임시정부요인 묘역이 조성되어 이동녕, 차리석, 조성환 3인이 자리했고 1949년 7월에는 효창원 조성을 주도했던 백범 김구의 묘역도 이곳에 마련된다.

백범이 흉탄에 서거한 후 효창원에 추가로 안장된 이는 없다. 해서 (유해를 찾지 못한 안중근 의사를 포함) 이곳에 안장된 독립운동가는 모두 8명으로 다른 곳에 비하면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해방 후 처음 조성한 순국선열 묘역이라는 상징성, 시민들이 가장 앞서, 가장 많이 언급한 이들이 모두 자리해 있다는 대중성 등을 고려하면 효창공원의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다.

동암 차리석 선생의 외아들 차영조씨는 “효창공원은 해방 후 백범 김구를 필두로 임시정부 요인들이 직접 독립유공자를 모신 공간”이라며 “이곳이야말로 민족정기의 원조, 뿌리가 되는 곳”이라고 효창공원이 갖는 국가적 정통성을 강조한다.

이에 문재인 정부는 임기 동안 수차례 이곳을 찾아 참배하는 등 효창공원의 상징성에 주목했다. 3·1운동 100주년을 앞둔 2019년 2월 26일 국무회의를 효창공원의 백범김구기념관에서 개최한 것이 대표적이다.

▲ 2019년 2월 26일 문재인 대통령이 서울 용산구 백범 기념관에서 열린 국무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 연합뉴스

전쟁기간을 제외하고 공공청사가 아닌 곳에서 국무회의가 열린 건 이때가 처음이었다. 나아가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을 개정하면서 근린공원 수준에서 관리 중이던 효창공원을 국가관리묘역으로 지정하는 법적 근거도 마련한다.

이같은 노력은 역설적으로 효창공원이 순국선열 묘역에 걸맞지 않은 이질적 요소가 난립하며 오늘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시작은 효창운동장이었다.

묘역 앞에 지어진 운동장

효창운동장은 1960년 10월 열린 제2회 아시안컵 축구대회를 치르기 위해 지어졌다. 한국이 홍콩에서 열린 제1회 아시안컵에서 우승하며 다음 대회 개최권을 획득한 데 따른 조치였다.

한국은 효창에서 다시 한 번 대회 우승을 차지했고, 이는 지금까지도 한국 축구의 마지막 아시안컵 우승으로 남아있다.

한국 축구의 영광을 품은 곳이지만 ‘순국선열 묘역 앞’이라는 입지로 꾸준히 논란을 야기했고 이는 건립을 추진하던 당시도 마찬가지였다.

오래전부터 우이동에다 큰 운동장을 만들고자 설계하였다는 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체육회에서도 모르게 효창공원에 운동장을 만들기 위하여 공병대에서 공사에 착수하였다는데 하필 혁명선열들의 묘지를 이장하면서까지 효창공원에다 만들어야할 이유를 알 수 없다.
– 당국처사(當局處事)는 국민(國民)을 모독(冒瀆). 조선일보. 1956.6.3.

운동장 건립을 시도한 1956년 6월 당시 기사들에 따르면, 효창운동장 건립은 체육계조차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일방적으로 추진됐다. 난데없이 묘역 앞에 운동장을 지으려하자 심산 김창숙 선생은 시 ‘효창공원을 통곡함’을 발표하며 현장의 불도저 앞에 드러누었고 국회는 본회의를 열고 ‘공사중지 건의안’을 의결한다.

그런데 기사 작성 시기인 1956년 6월은, 제 1회 아시안컵이 열리기 3개월 전이었다. 대회 우승팀 자격으로 차기 대회 개최권을 얻기도 전에 운동장 건립 시도가 있었단 의미다. 운동장 건립 시도의 전모가 밝혀진 건 1960년 4월의 혁명이 지난 후였다.

혁명이 일어났다. 그리고 이겼다. 이제는 효창공원선열묘소를 없애버리려던 음모 내용도 백일하에 드러났다. 첫째 4289년(서기 1956년) 5월 9일 자로 경무대의 이원희 비서관이 내무 재무 국방 농림의 4장관에게 내린 특명지시문이요. 다시 농림장관이 서울시장에게 사본을 붙여 지시한 공문이 있다.

그것은 10만명 정도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큰 운동장을 건설하려고 장소를 물색 중 마침 효창공원이 여러가지 점으로 보아 가장 적당하다고 인정되므로 육군 공병감 책임하에 건설하기로 되었으니 소관부처에서는 “하기 사항을 신속 처리하여 지장이 없도록 하라는 분부 지시옵기의 명 전달하나이다”라고 한 다음 분묘 이전 문제는 내무장관이 서울시장에 지시하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이 공문의 주문 말미에 있는 대로 “분부지시옵기”로써 이것이 이 박사 자신의 특명이었음이 비로소 밝혀졌다. 그러나 이 박사에게 그러한 흉모를 제시한 자가 있었는지? 있다면 어떠한 자인가는 아직도 수수께끼 속에 묻혀있다.
– 革命前後(혁명전후) (1) 孝昌公園(효창공원). 경향신문. 1960.06.11.

이 같은 시도에 맞선 각계각층의 반대 목소리에 무산됐던 효창운동장 건립은, 아시안컵 개최를 1년여 앞둔 1959년 결국 관철돼 지금 자리에 지어져 오늘에 이른다. 서울시 홈페이지 ‘역대 서울시장’ 소개란에는 효창운동장 건립을 제 9대 임흥순 서울시장의 업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임흥순 시장은 일제강점기 동민회(同民會), 조선임전보국단(朝鮮臨戰報國團) 등에서 활동한 인물이다. 일제 태평양전쟁 당시 놋그릇을 모아 일제 해군무관부에 헌납하고 청년들에게 학병지원을 권유하는 ‘학생 급속정신운동’을 전개하는 등 명백한 반민족행위를 자행했다.

이에 2002년에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과 광복회가 공동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 중 기타 부문에 수록되었고, 2008년에는 민족문제연구소 발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지역유력자 부문에 이름을 올렸다.

1949년 6월 반민특위에 체포되었으나 같은 해 8월 불기소 처분을 받아 풀려났고 이후 제 2, 3대 국회의원과 서울시장을 역임했다. 1956년 9월 자행된 장면 부통령 저격 사건의 주범이라는 사실이 4·19 혁명을 통해 밝혀지기도 했다.

▲ 서울시 홈페이지 ‘역대 서울시장 소개’란에 소개된 임흥순 시장. 효창운동장 건립(60년 아시아 축구대회 대비 효창운동장에 축구장개설)을 주요시책으로 기재해 두었다. ⓒ 서울시 홈페이지 갈무리
▲ 효창공원 묘역 앞에 지어진 효창운동장. 일대가 파헤쳐져 있다. 1965년 전경 ⓒ 심산김창숙기념관 홍소연 전시실장

심산김창숙기념관 홍소연 전시실장은 “우리사회 전반의 원죄는 일제잔재(반민족행위자)를 청산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며 “해방 후 일제잔재를 제때, 제대로 청산했다면 효창공원 묘역을 폄훼하는 정치환경이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고, 지금 위치에 운동장이 지어질 일도 애초에 없었을 것”이라 말한다.

앞서 언급한 문화체육관광부의 인식 조사에서도 국민의 80.1%는 “친일 잔재가 청산되지 않았다. (전혀 청산되지 않았다 30.8%, 별로 청산되지 않았다 49.3%)”라고 답했다.

운동장이 건립된 후에도, 일대에는 반공탑, 원효대사 동상 등 묘역과 관계없는 이질적 요소가 난립하며 오늘에 이른다.

잘못된 문제정의, 잘못된 결론으로 귀결

이처럼 효창공원에 얽힌 사회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공간 성역화, 재구조화 요구가 꾸준히 이어졌고 당연히 ‘효창운동장 입지 문제’도 해결 과제로 제시됐다. 한겨레 역시 “효창공원, 추모·시민 공간 거듭나려면 운동장 철거가 ‘1순위’ (2018. 8. 16.)”라며 강력히 문제를 제기한 바 있다.

이에 효창공원에 많은 관심을 기울인 문재인 정부였지만, ‘효창운동장 입지’ 문제에 관해서는 이렇다 할 해답을 내놓지 못했다. 효창공원 문제를 제대로 진단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같은 시기 추진된 안동 임청각 복원 사례에 비추어 보면 오류가 자명하다.

임청각(보물 제 128호)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이끌며 국무령을 역임한 석주 이상룡 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선생을 비롯해 아들, 손자 등 독립운동가 9명을 배출한 독립운동의 산실로 꼽힌다. 일제는 이곳을 가로지르는 철길을 놓았고, 임청각은 오랜 기간 공간을 훼손당한 채 이어졌다.

이에 국가철도공단이 철길을 다른 곳으로 새로 내 기존 철로를 철거함으로써 임청각 복원의 토대를 마련했고, 현재 복원이 진행 중이다. 보물 임청각을 바로잡기 위해 문화재청이 아니라 국가철도공단이 개입했다. 공간의 문제가 철길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현재 효창공원의 문제는 묘역이 아니라 운동장이기 때문에 관련부처를 특정하자면 국토교통부, 문화체육관광부가 알맞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 하에서 효창공원 재구조화 담당부처는 국가보훈처, 문화재청이었다. 문제시 되는 운동장을 논할 수 없는 구조가 마련된 것이다.

문제를 잘못 정의하면 틀린 답이 나오기 마련이다. 효창공원 문제의 처음이자 마지막에 꼽히는 운동장에 관한 논의없이 올바른 재구조화를 기대하긴 힘들다.

결국 문재인 정부가 추진했던 ‘효창독립 100년 공원 조성’ 사업은 2022년 12월 예비타당성 조사를 통과하지 못했고 묘역에 얽힌 사회 갈등, 효창운동장 입지 문제를 발전적으로 해소할 이렇다 할 방안을 찾지 못한 채 표류 중이다.

최범준 기자

<2024-03-18>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독립운동가 묘역 앞 엉뚱한 운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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