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송현공원에 ‘4월 혁명 역사관’을 세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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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송현공원에 ‘4월 혁명 역사관’을 세우자

한상권 덕성여대 명예교수

여는 글

윤석열 정권의 역사 쿠데타가 독립운동가 폄하에서 독재자 찬양으로 확대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이승만 기념관 건립모금에 동참한 가운데, 오세훈 서울시장도 ‘시민 동의가 우선’이라는 당초 입장을 바꾸고 종로구 송현동 공원에 이승만 기념관을 건립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오 시장은 시정질문에서 “이승만 기념관을 건립해야 된다고 생각하느냐”는 질의에 “네”라며 “가능성이 제일 높게 논의되는 데가 송현동 공원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고 답했다.

대한민국 어디에도 독재자를 기리는 기념관을 세우면 안 되겠지만 특히 송현동 공원은 안 된다. 이곳은 4월 혁명의 ‘장소성’을 내포한 특별한 의미를 지닌 공간이기 때문이다. 송현공원은 1960년 4월 19일 이승만 정부가 민주시민을 향해 발포한 중앙청(지금의 광화문) 현장에서 가장 가까운 공터이다. 발포 현장의 지근거리에 이승만 기념관을 건립하겠다는 것은 광주 금남로에 전두환 기념관을 짓겠다는 발상과 진배없다. 또한 송현공원과 이웃하고 덕성여자중학교가 있는데 4월 혁명에서 덕성여중생 두 명이 희생당했다. 이와 같은 장소성에 비추어 볼 때, 송현공원에 독재자 이승만 기념관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위해 쓰러져간 영혼들을 달래는 ‘4월 혁명 역사관’을 세우는 것이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 이념을 계승”한다는 헌법정신에 부합한다.

1. 경찰 발포와 피의 화요일

1960년 4월 19일 3·15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서울 시내 거의 모든 대학의 학생들과 중고생들이 태평로 국회의사당(지금의 서울시의회) 앞으로 모여들었다. 10만여 명으로 불어난 시위대는 국회의사당 앞에 집결하여 크게 기세를 올린 다음, 경무대(지금의 청와대), 대법원(지금의 서울시립미술관), 이기붕의 집(지금의 서대문 강북삼성병원 옆), 내무부(지금의 을지로 구외환은행 본점) 등 크게 네 갈래로 나뉘어 진격하였다. 오전 11시 40분경 경무대 방향의 시위대가 동국대생을 선두로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서울대에서는 사범대생들이 앞장섰으며 문리대생들과 미대생 그리고 약대생이 그 뒤를 따랐다. 시위대는 경찰의 저지선을 하나씩 돌파하며 조금씩 경무대로 접근했다.

오후 1시 40분경, 시위대가 소방차를 앞세우면서 경찰의 최후 저지선 10미터 앞까지 접근했을 때 경찰의 무차별 총격이 시작되었다. 이승만 독재정권의 붕괴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날 서울 거리에서 아침나절부터 초저녁까지 관찰한 하와이대 명예교수 Glen Paige는 경무대 어귀에서 벌어진 첫 발포 상황을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학생들이 접근해오자 지휘관은 실탄을 장전하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 떠나라는 말을 듣고 본인이 그 자리를 떠나려는데 갑자기 외로운 선도사격을 하는 칼빈 자동소총의 총성이 30발 탄창을 연발로 다 쏘아버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30발 연발 사격이 거의 끝날 무렵 완전한 1개 소대의 병력이 소총으로 치명적인 일제사격을 개시했습니다. (……) 경무대로 가던 행진은 분열이 되었으나 시위는 계속되었고 부상자들을 병원으로 급히 후송하는 앰블런스와 택시들이 뒤따랐습니다.

경찰의 실탄 발포로 삽시간에 경무대 어귀는 아수라장이 되었고, 길바닥에는 7, 8구의 시체가 나뒹굴었다. ‘피의 화요일’이 시작된 것이다.

경찰의 무차별 총격에 쫓겼던 시위대는 잠시 후 대열을 정비하고 다시 경무대 어귀로 육박해 들어갔다. 경찰은 거듭 무차별 총격을 가하였다. 쫓기던 시위대 가운데 동성고등학교 등 고교생들은 교모의 가죽끈을 턱에 걸고는 경무대를 향해 다시 돌진하였다. 죽음을 각오한 이들 고교생들의 대열에 이제 막 도착한 연세대 시위대가 합류하였다. 경찰은 또 한 차례 미친 듯 총을 난사했다.

경찰의 총격에도 불구하고 경무대 어귀에는 시위대들이 파상공세를 펼치는 듯 교대로 밀려들었다. Glen Paige 교수는 시위대가 안국동에서 지금의 송현공원 앞을 지나 중앙청으로 진격하는 광경을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안국동 근방에서는 대학생, 고등학생, 중학생 그리고 수백 명의 여학생들까지 노래를 부르고 구호를 외치고 계속하여 중앙청 쪽으로 행진해 나갔습니다. 이들은 조금 전에 경찰이 경무대로부터 쫓아버리는 수백 명의 군중이 등 뒤에서 총을 맞지 않으려고 도망해 온 것을 불사하고 그 방향으로 행진해 나갔습니다.

당시 중앙청 일대의 시위 참가자는 20여 만 명으로 추정된다. 경무대를 향한 죽음의 행진은 오후 5시, 경찰이 시내 일원에 걸쳐 일제 소탕전을 개시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말 그대로 ‘피의 대제전(大祭典)’이었다. 중앙청 앞 시위 희생자는 노희두(22, 동국대), 김치호(21, 서울대) 군 등 사망 21명, 부상 172명이었다.

오후 5시 정부는 서울 등 4개 도시(부산·대구·광주·대전)의 경비계엄을 비상계엄으로 바꾸고 통금시간 연장(오후 7시∼이튿날 오전 5시) 등을 내용으로 하는 포고문 1호, 2호를 발표하였다. 비상계엄을 기화로 그동안 분산되어 산발적으로 총격을 가하던 경찰은 오후 5시 반경 병력을 경무대 앞에 집결시켰다. 집결된 경찰 300여 명은 M1총, 카빈총 등으로 무장한데다가 기관총까지 장비된 장갑차 2대를 앞세우고 일렬횡대로 나가면서 일제사격을 퍼부어 흡사 시가전과도 같은 시위대 소탕을 시작하였다. 경찰은 중앙청 앞에서부터 일렬로 ‘앉아 총!’ 자세로 맹렬한 일제사격을 퍼부으면서 시위 군중이 가득 차 있는 세종로 사거리를 뚫고 시청 앞, 화신(지금의 종로타워) 앞, 서대문 쪽으로 향하여 시가전과 같은 돌격태세를 취하였다. 이 바람에 시위 군중은 말할 것도 없고, 길옆에서 방관하던 시민들이 수없이 쓰러졌으며 심지어 일부 잔인한 경찰관은 달아나는 학생들의 등에 마구 총을 쏘기도 했다.

이날 서울에서만 101명의 학생과 시민이 경찰의 발포로 희생되었다. 특히 경무대를 향해 진격 할 때 앞장섰던 대열에서 희생자가 많이 나왔다.

2. 중앙청 앞 희생자들

1) 서울대생 김치호
서울대 문리대 3학년에 재학중이었던 김치호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과학자를 지망하는 장래가 촉망되는 대학생이었다. 그는 고교생 10여 명으로 결사대를 편성하여 경무대로 진격하다가 경찰이 난사하는 총탄에 복부가 관통되어 소격동에 있는 수도육군병원에 이송되었다. 군의관은 출혈이 심한 김치호 학생을 먼저 수술하려 했으나 그는 “제발 저 어린 고등학생 먼저 치료해 달라”면서 끝내 수술을 사양하였다. 군의관은 그의 뜻에 따라 고교생들을 먼저 돌본 다음 치료하려 했으나 그때는 이미 출혈이 너무 심해 상태가 극도로 악화되어 있었다. 치료 시기를 놓친 김치호는 군의관과 간호장교들이 눈물로 지켜보는 가운데, 다음 날 새벽 숨을 거두었다.

당시 서울대 법대 교수였던 형 김치선은 아우의 죽음을 애도하는 글을 『사상계』(1960년 6월호)에 기고하였다.

나는 1960년 4월 19일 오전 10시 반에 서울대 법과대학 제8강의실에 들어갔다. 평시에 비하여 수강 학생의 수가 퍽 적었다. 틀림없이 법대 학생들도 데모하러 간 것을 짐작하고 약 1시간 사회법 강의를 마치고 법원 구내 사무실로 돌아왔다. 시청과 광화문 쪽에서 외치는 학도 데모대의 고함소리가 파도처럼 장안을 진동시킨다. 오후 1시경 총성이 잦아졌다. 소방차가 타고, 파출소가 타고, 반공회관(현 KT 광화문 사옥)도 불길에 휩싸였다. 총탄에 피살된 학도들의 선혈이 흐르는 거리를 내려오면서 의거 학생들의 흥분은 점점 거세졌다.
드디어 계엄령 선포 뉴스가 들리고 멀리 효자동 쪽에서는 기관총 소리까지 들려온다. 그래도 “설마 실탄이야 쏠라고?” “아침에 데모대에 합류한 아우 치호와 조카 성두는 무사하겠지”라는 정도의 생각만 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아우 치호가 경무대 대문 앞에서 세 발의 카빈 총탄에 복부 관통을 입고 자기가 각오했던 바대로 그 귀한 피를 이 땅 위에 뿌린 시각이었다.(……)
다음 날 새벽부터 시내 병원을 찾아다니다가 오후 1시 반에 수도육군병원에서 아우의 위대한 주검을 발견했다. 그의 죽음을 확인하고 한 시간 후 그의 서재에 들어갔다. 그의 책상에는 수학 서적과 노트, 그리고 일기장이 놓여 있었다. 벽에는 그의 교복이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주인을 기다리는 듯 초라한 모습으로 걸려 있었다. 나는 일기장을 두 손으로 엄숙하게 어루만졌다. 마치 아우의 손목을 잡는 듯 그 일기장을 잡는 순간 생(生)의 감각이 느껴졌다. 분명히 그 일기장이 무엇인가를 말해주고 있었다.
나는 어떤 위대한 존재의 안전에 서는 듯 흥분되어 주저하며 일기장을 펼쳤다. 우선 일기장 속에 끼워져 있는 교회 주보를 뽑아 보니 뒷면에 영어로 다음과 같이 씌어 있었다. ‘Man will die when He calls.’ 그가 교회에서 목사의 설교를 들으면서 감명을 받은 구절을 써 놓은 듯하다. (……)
아우의 일기에는 그의 단순한 생활이 기록돼 있었다. 수학도이니까 생각도 단순하였을 것이고, 생활도 단순했을 것이다. 일기를 읽다 보니 아우의 인간적 가치가 더욱 높아지는 듯했다. 비록 친동생이었지만 나는 그의 인간성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같이 생각되었다. (……)
눈물을 머금고 일기장을 들고 방을 나오려고 하였으나 무엇인지 뒤를 붙잡는 듯했다. 마치 일기장을 훔치기라도 하는 듯 가슴을 졸여 가면서 간신히 밖으로 나왔다. 일기장을 갖고 집으로 돌아와 떨리는 손으로 펜을 들었다. 눈물이 앞을 가렸지만 간신히 눈을 뜨고 일기장 4월 19일 페이지에 다음과 같은 글을 적었다.
‘내 아우 치호는 4·19 학도 의거에 참여하여 22세의 한국 청년으로 용감하게 세상을 떠나다.’
다음 날인 4월 21일 우리 형제들은 아우 치호의 시신을 인수코자 수도육군병원으로 갔다. 정확한 숫자는 헤일 수 없었지만 시체실에는 많은 학도들이 마치 대(隊)를 지어 잠을 자듯이 눕혀 있었다. 교회에서 오신 목사와 여자 권사들이 아우의 시체를 어루만지며 옷을 갈아입혔다. 죽은 아우의 몸에 내 손을 얹었다. 피는 한 방울도 남김없이 모두 뽑히었고 몸은 냉기로 가득 차 있었다. (……)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치던 영웅을 책에서만 알았었는데 내 아우가 바로 그 주인공인 것을 발견했다. 우리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자유권, 이것을 위해서 내 아우는 죽음을 택했던 것이다. 그는 우리 한국 민족 개개인의 자유 주권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갔다.

서울대학교에 있는 ‘4월 학생혁명 기념탑’ 탑신의 후면에는 김치호의 19일 아침 일기의 한 구절이 새겨져 있다. “나는 정의를 위해서 오늘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련다.”

기념탑 건립위원회는 “이 간단한 명언(銘言)은 이 탑을 언제까지나 빛나게 하고 생명을 주고 있을 뿐 아니라 우리들의 자랑이요 전 국민에 대한 교훈이다”라고 하였다.

2) 덕성여중생 최신자, 구순자
4월 혁명에서 희생된 사람은 ‘공식적’으로 총 186명이다. 희생자 186명을 직업별로 나누면 학생이 79명이고 일반인이 107명이다. 일반인의 농업, 공업, 상업, 공무원, 회사원, 운전사, 조리사, 기사, 소개업, 미용사, 이발사, 구두 수선공 등과 같이 실로 다양하다. 즉 4월 혁명은 결코 지식인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대단히 광범위한 계층이 행동의 선두에 서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학생 희생자 79명을 다시 각급 학교별로 보면, 고등학생이 31명(39.2%)로 가장 많으며 그 다음이 대학생 24명(30.4%), 중학생 18명(22.8%) 순이다. 눈에 띄는 점은 고등학생 희생자가 대학생보다 많다는 사실이며, 중학생 희생자 또한 적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고등학생과 중학생을 합하면 49명(62%)으로, 중·고등학생 희생자가 대학생 희생자 24명(30.4%)의 두 배를 넘는다. 이는 4월 혁명에서 대학생보다 ‘더 먼저’ 시위를 시작한 중·고등학생이 ‘더 많이’ 피를 흘렸음을 말해주는 지표이다.

4월 혁명에서 희생된 중·고등학생 49명을 성별로 나누어 보면 남학생 45명, 여학생 4명이다. 여학생 4명 가운데 여고생은 없으며 모두 여중생이다. 4월 혁명에서 희생된 사람들 가운데 자신의 목소리를 남긴 이는 4월 19일 시위에 참여하기 직전에 어머님께 편지를 남긴 한성여중 2학년 진영숙 학생이 유일하다. 진영숙 학생은 이날 저녁 10시 반경 미아리고개에서 안면에 총상을 입고수도의대병원에서 사망하였다. 결국 유서가 된 편지글에서 진영숙 학생은 “지금 저와 저의 모든 친구들 그리고 대한민국 모든 학생들은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를 위하여 피를 흘립니다”라고 하여, 민주주의를 목숨과도 바꿀 만한 소중한 가치로 인식하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그리고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는 피로써 저항해야 하기에, 자신도 기꺼이 생명을 바쳐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대열에 동참하겠다는 의지를 결연히 밝혔다.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데모에 참여하여 싸우다 죽어도 원이 없다”라는 진영숙 학생의 증언은 4월 혁명에 중학생들이 주체적·자발적으로 참여하였음을 보여준다.

4월 혁명에서 희생된 네 명의 여중생 가운데 두 명이 덕성여자중학교 학생이다. 4월 19일 희생된 구순자(具順子, 16)와 최신자(崔信子, 16)는 덕성여중 3학년에 재학중이었다. 국립4·19민주묘지에 있는 구순자 학생의 묘비는 “1960년 4월 19일 중앙청 앞 시위 중 총상”, 최신자 학생의 묘비는 “1960년 4월 19일 중앙청 앞 시위 중 총상 사망”이라 하여, 모두 중앙청 앞에서 시위 도중 경찰이 발포한 총에 총상을 입고 사망하였다고 하였다.

4월 19일 오후 1시경, 시내 대부분의 중·고교에서는 학생들이 집단으로 시위에 나설 것을 우려하여 오전 수업을 마치고는 서둘러 귀가시켰다. 그러나 고등학생들은 교사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시위에 뛰어들었다. 일부 중학생들도 무리를 지어 시위에 합류하였다. 구순자·최신자 학생도 학교에서 나와 안국동에서 중앙청으로 진격하는 시위대열에 합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중3인 이 둘은 2학년 때 같은 반 단짝이었다. 평소에 나란히 앉아 공부하며 우정을 주고받은 꿈 많은 두 여학생의 죽음에 대해, 언론은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자리에서, 두 넋은 똑같은 마음으로 민주주의 꽃이 되었다”라고 추모하였다.

두 여학생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이날 오후 5시 이후의 발포는 경찰의 발포 가운데 가장 잔인한 것이었다. 당시 동아일보 사옥에 머물고 있었던 주필 신상초는 목격담을 다음과 같이 전하였다.

4·19 때의 발포 중에 제일 악질적인 발포는 (4월 19일) 오후 5시 계엄령이 떨어지자마자 경찰들이 용기를 얻어서 쏘아댄 것입니다. 광화문에서 그랬습니다.(……) 그때 보니까 무차별 사격이야. 광화문에서 경찰의 장갑차가 쏘는 것을 보았는데 무차별이에요. 동아일보 건물 3층에서 보았는데 군중들은 피하느라고 들어갈 구멍을 못 찾아서 그러는데 골목을 향해서 막 쏜 것이에요.

경찰이 시위대를 해산시킬 목적으로 위협 사격을 가한 것이 아니라 도망가는 시위대를 ‘사살’하기 위해 조준사격을 하였다는 증언이다. 「사상자기록」에 적힌 최신자 학생의 사망원인은 “좌흉부 관통”, 구순자 학생의 사망원인은 “두정골절”이다. 두 학생이 가슴과 머리를 맞고 사망하였다는 사 실은 경찰이 시위군중에 대해 ‘살의’를 가지고 수평사격을 하였음을 말해주는 증거이다.

닫는 글

1960년 4월 혁명에서의 민주시민 학살이 1980년 광주에서 재연되었다. 광주민주화운동 과정에서 계엄군 총을 맞고 사망한 희생자 역시 세 명 중 하나는 얼굴이나 머리에 총탄을 맞고 목숨을 잃었다. 자위권이 아닌 고의에 의한 살상이라는 얘기다. 5·18유족회가 광주지검의 ‘변사체 검시보고’ 등을 바탕으로 분류한 ‘5·18 사망자 사인별 집계’를 보면, 당시 민간인 희생자 164명 가운데 총상으로 인한 사망이 125명으로 전체의 71%를 차지했다. 총상 사망자의 총상 부위는 △머리(31명) △안면부(10명) △경부(목·7명) △흉부(54명)가 대다수이다. 절반 이상이 목숨과 직결된 가슴과 머리 부분에 총탄을 맞은 셈이다.

1960년 4월 혁명에서의 경찰 발포와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에서의 계엄군 발포는 민주시민을 학살할 목적으로 조준사격을 하였다는 점에서 정확히 일치한다. 4월 혁명 정신이 헌법에 수록되었지만 문구에 불과하였기 때문이다.

2018년 정부는 2.28대구민주운동과 3.8대전민주의거를 국가기념일로 지정하여, 3.15마산의거와 함께 4월 혁명을 이끌어낸 연결된 역사로 기념하고 있다. 민주화운동 관련 국가기념일로는 3·15의거, 4·19혁명, 5·18민주화운동, 6·10민주항쟁에 이어, 5번째로 2·28민주운동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었다. 이 가운데 4월 혁명은 헌법전문에까지 올라간 민주화운동이다. 그런데도 4월 혁명에서 국가폭력에 저항하다 희생당한 희생자의 영혼을 위무하고 4월 혁명의 역사적 의의를 되새길 교육공간이 없다. 이참에 송현공원에 ‘4월 혁명 역사관’을 세워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민주공화국의 원칙을 외치다 희생당한 이들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민주주의 교육공간으로 만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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