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두문동 72현 기억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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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 글방 11]

두문동 72현 기억법

권시용 선임연구원

일제강점기 신문 자료를 검색하다가 두문동사원(杜門洞祠院) 건립 기사를 보게 됐다. 조선후기에 그토록 성했던 서원이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조처에 47개만 남기고 다 사라진 일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무너졌던 서원들은 흥선대원군이 실각하자 다시 슬금슬금 부활해 갔으며, 일제강점기에는 그 움직임이 두드러졌다. 1930년대 중반에 건립된 두문동사원도 그런 움직임의 일환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흔히 알려진 ‘두문동 72현’이 아닌 130명의 위패가 두문동사원에 모셔졌다고 한다. 무슨 일일까?

두문동사원 건립

두문동사원(두문동서원으로도 부른다) 건립은 전국적 규모의 사업이었다. 1932년 2월 개성 유지들이 뜻을 모았다. 임시 사무소를 마련하고 전국 유림에 통문을 보내 성금을 모으기 시작했다. 두문동 72현을 기리는 사원을 짓겠다는 계획이었다. 사업은 순조로웠다. 그해 8월 19일에는 사원을 지을 땅에서 개기식(開基式)을 거행했다.

성금은 전국에서 답지했다. 강릉의 최동길은 석재를 전부 제공하겠다고 나섰다. 개성의 전흥원은 기와를 모두 부담했다. 담양국씨 문중에서는 건축 부지 5,282평을 제공하겠다고 나섰고, 문중 대표는 우선 1,200원의 수표를 보냈다. 전라남북도에서는 건립사무소 분소를 설치하고 성금 모금에 온갖 편의를 제공했다. 광주노씨 문중은 3백 원, 위풍이씨 문중은 2백 원, 탐진최씨 문중에서는 1천 원을 내놓았다.

건축 공사는 1933년 5월부터 시작됐다. 건축비 15,900원을 들여 106칸 조선 전통 기와집으로 짓기로 하고, 그 창건 기공식은 음력 4월 15일에 열렸다. 그해 8월 6일에 열린 두문동사원 상량식에는 개성부윤 등 고관과 유지들이 내빈으로 참석했다.

드디어 1934년 5월 두문동사원이 준공됐다. 위패 봉안식은 성대했다. 이후 매년 봄가을로 열리는 제전에는 전국에서 후손들과 유림 2~3백여 명이 찾아들어 성황을 이뤘다.

두문동 72현은 누구일까

일반적으로 ‘두문동 72현’은 여말선초를 시대적 배경으로 한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끝까지 출사하지 않고 충절을 지킨 고려 유신이란 설명이다. 그래서 ‘충절, 지조, 절의’의 대명사처럼 불리고 있다. 그럼 이들이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은 언제부터일까?

조선왕조실록을 따라가 보자.

영조16년(1740) 8월 1일, 개성 행차를 앞둔 임금과 재상들이 모여 의논하고 있다. 영조는 아버지 숙종의 행차를 연구해 그대로 따르고자 했다. 옛일을 상고하고 예법에 어긋나지 않는지, 개성의 현지 실정은 어떠한지, 오가는 길에 묵을 곳은 어디인지, 행차에 관한 중요 사항을 논의했다. 수행할 인력의 규모, 개성에서 시행할 과거시험의 방식도 결정했다. 길고 긴 회의를 거친 뒤 임금이 개성에 관해 궁금한 점을 물었다. 선죽교, 정몽주, 화담서원, 서경덕 이야기가 오간 뒤,
“송도의 옛 자취가 있는가? 고려 때 집이 남아 있는가?”
우의정 송인명이 답했다.
“두문동의 옛 자취가 있습니다.”
왕이 물었다.
“어디에 있는가?”
송인명이 답했다.
“개성부 안에 있는데, 고려가 망한 뒤에 사람들이 세상과 문을 닫고 살다가 죽었기 때문에 이름을 그렇게 지은 것입니다.”

그해 9월 개성에 행차한 영조는 이번엔 ‘부조현(不朝峴)’이란 이름의 유래를 물었다.

주서 이회원이 답했다. “태종 임금께서 과거시험을 열었는데 이곳의 대족(大族) 50여 가(家)가 과거에 응하지 않아 그 이름이 생겼습니다.” 부조현은 개성에 있는 고개 이름인데, 새로운 왕조를 섬기지 않는다는 뜻이 담겼다. 이회원이 이어 말했다. “그리고 두문불출했으므로 그 마을을 두문동이라고 했습니다.”

임금이 교자를 멈추고 명했다. “고려의 충신들처럼 대대로 계승하도록 힘쓰라.” 임금은 직접 부조현이란 세 글자를 써서 비석을 세우게 했다.

영조16년(1740)은 경신년이다. 영조가 ‘경신처분’을 내린 해다. 영조는 즉위 후 정통성 시비에 시달렸다. 노론이 경종을 시해하고 영조를 왕위에 올렸으며 영조도 거기에 가담했다는 혐의였다. 남인이나 소론 쪽에서는 ‘무신란’이라고 하는 역모를 일으키기도 했다. 그래서 영조는 즉위 후 여러 가지 조치를 통해 서서히 자신의 혐의를 털어 내고자 애를 썼다. 경신처분은 자신에게 씌워진 혐의가 무고였다는 선언이었고, 정치세력으로서 노론이 정국을 주도하게 된 전환점이었다. 영조가 두문동 72현을 소환해 의리, 충절을 강조하는 배경이다. 두문동과 부조현이란 이름이 이렇게 역사에 등장했다.

10년이 흘렀다. 영조가 개성 행차에서 두문동 이야기를 듣고, 새 왕조를 거부한 고려왕조의 충신들을 기념하란 어명을 내린 지 10년이 지났다. 영조27년(1751) 9월 27일, 임금은 두문동 충신에게 제사를 지내도록 명했다.

“두문동 72인 가운데 단지 임(林) 조(曺) 두 성이 있을 뿐이라고 하니 매우 개탄스럽다. 두성 가운데 직임을 감당할 수 있는 자는 등용하게 하라”

이때 우리에게 익숙한 ‘두문동 72현’이란 명칭이 등장한다. 그런데 영조의 말에서 보듯 72인 가운데 당시까지 알려진 것은 임씨와 조씨 둘뿐이었다. 그것도 성씨뿐이었다. 영조는 임씨와 조씨의 후손 가운데 능력 있는 자를 뽑아 개성부에서 등용하도록 명령했다. 이제 72인의 후손이 된다는 것은 임금의 공인을 받은 가문의 후예가 됨이며, 동시에 현실적으로는 벼슬길에 나갈 수 있는 혜택이 주어지는 것이었다. 요즘 논란이 되는 군가산점이나 국가유공자 가산점 정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혜택이었다.

그런데 ‘72’란 숫자는 어떻게 나온 것일까? 겨우 성씨 둘만 알려진 형편인데, 그 수가 72명이란 것이 집계되고 전해질 리 없다. 그것은 상징적인 숫자였다. 이미 고려 초부터 ‘공자의 많은 제자 가운데 뛰어난 72명’을 일컫는 ‘72현’이란 말이 쓰이고 있었다. 따라서 영조 대에 와서 두문동과 72현의 결합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정조가 영조의 뒤를 이었다. 정조7년(1783) 개성 유수가 상소를 올렸다.

“두문동 72인은 우뚝한 충절이 진실로 정몽주·길재의 성취에 부끄럽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 72인 중에 성명이 전해지고 있는 사람은 조의생(曺義生), 임선미(林先味)와 성이 맹(孟)인 세 사람뿐이며, 맹가는 성만 전해지고 이름은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개성 유수는 세 사람을 개성 숭절사(崇節祠)에 배향하자고 건의했다. 정조는 허락했다.

이제 두문동 72현 중 두 사람의 이름이 확인된다. 조의생과 임선미이다. 한 명이 더 붙었다. 맹씨인데, 아직 이름은 몰랐다. 이제 세 사람이 되었다. 이때 개성의 성균관 서쪽에 임선미, 조의생 등을 배향해 세운 사원이 표절사(表節祠)였다.

또 한 가지 선례가 만들어졌다. 이제 두문동 72현은 원사(院祠, 서원과 사우)에 모실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이다. 임금이 공인한 것이다. 두문동 72현이 본격적으로 발굴되는 계기가 이것 이었다.

이제 두문동 72현이 차츰 그 이름을 세상에 드러내기 시작했다.

정조13년(1789) 경기도 선비들이 고려 충신 민보문을 표절사 배향을 허락해 달라고 상소하다.
정조22년(1798) 두문동 72현에 속한 인물로 알려진 김주, 김제의 형제에게 시호를 하사하다.
순조8년(1808) 성사제, 황일호, 이만성을 표절사에 추가 배향했다.
순조10년(1810) 성여완, 박문수를 표절사에 소급 배향했다.
순조22년(1822) 민안부, 김충한을 표절사에 추가 배향했다.
순조31년(1831) 고려 충신 장안세에게 시호를 내렸다.

근거는 주로 가승(家乘, 족보나 문집 같은 집안 기록)과 세간의 칭송이었다. 표절사에 배향한 세 사람 못지않게 다른 사람들도 우뚝한 충절과 뛰어난 절개가 있는데, 자손들이 멀리 있어 임금께 미처 아뢰지 못했다는 말이다. 물꼬가 트이면 걷잡을 수 없는 것이 이치다. 세 사람을 내세워 사우를 세웠더니, 한 사람을 더 올려달라고 청하고, 그러면 물꼬가 트이게 된다.

고종8년(1872)에는 두문동 72현의 실명 명단이 처음으로 갖춰졌다. 이때 간행된 『기우집』 부록에 「두문동칠십이현록」이 실렸다. 물론 『기우집』에 앞서 1774년에 처음 완성된 『철감록』에도 「부조현언지록」이 있었다. 『철감록』은 여주이씨 가문에서 만들었다. 여기에는 66명이 실렸다. 66명 가운데 기우집에도 실린 사람은 27명뿐이다. 기우집에 실린 45명은 새로 등장한 사람이다. 또 다른 리스트도 있다. 1924년 간행된 ????전고대방????에는 「여조두문72인」 명단이 있다.

이 자료는 평산신씨 쪽에서 유래했다. 계통이 다른 것이다. 그리고 『기우집』과 『전고대방』에 실린 명단에 공통적인 인물은 30명뿐이다. 명단은 일목요연하지 않다.

세상의 시선

1933년 8월 6일, 두문동사원 상량식이 열렸다. 이를 본 개성의 대표적 문인의 한 사람인 이기소(李箕紹)가 시 한 수를 읊었다.

문 닫고 지낸 일 헛된 명성 그리워함 아니니           杜門不是慕虛名
나라 따라 죽겠다는 처음 마음 일월처럼 빛나네      殉國初心日月明
인을 행한 문왕과 무왕은 하늘의 명을 받았고         文武行仁天所命
의를 지킨 백이와 숙제는 성인 중 맑은 분이네        夷齊守義聖之淸
동량에는 단지 정결한 제수를 올리면 그뿐             棟樑祗可蘋繁潔
위패는 성씨들의 영화와 무슨 상관있으랴              位牌何關姓氏榮
텅 빈 산에서 비바람을 몇 해나 겪었던가               風雨空山經幾歲
일흔 두 분의 정령을 위로하며 봉안했네                慰安七十二精靈
[이기소, 두문동사우 상량식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읊다 觀杜門洞祠宇上樑式歸路有吟]

고려가 망함에 두문불출을 선택한 사람들이 훗날 명성을 바랐겠는가. 망한 나라를 따라 죽겠다는 빛나는 그 마음을 알아주고 정결한 제수를 올리면 그뿐일 텐데, 커다란 사원을 짓고 위패를 모시는 일은 결국 후손들의 영화를 위함이 아니겠는가. 시 한 수에 두문동사원 건립을 보는 씁쓸함이 담겼다.

여기에 기자가 한 마디를 덧붙인다.

두문동은 여말 유신 72인이 은둔했던 곳인데, 불행히 2, 3인 외에는 그 이름이 전하지 않았다. 이는 역사가 증명하는 바다. 이제 전조선 각지 인사의 돈을 모아 새로 중창한 오늘, 막연한 가승(家乘, 집안 기록)을 근거로 함부로 성명을 위패에 기록한다는 것이 도리어 부당한 처사가 아닐까 하여 성암(省菴)이 서술한 것 같다.

위 이기소의 시와 기자의 한마디는 당시 개성에서 발행되던 『고려시보』(1933.10.1)란 신문에 실렸다. 비꼬는 시선은 『고려시보』뿐만이 아니었다.

독자 : 두문동 현인(賢人)의 사기(史記)를 알고 싶은데, 이러한 기록이 있나요?
기자 : 두문동 제현(諸賢)의 역사는 기재한 책자가 없습니다. 있다면 참이 아닌가 합니다.
(『동아일보』 1936.5.28, 「응접실」)

동아일보의 한 독자도 궁금했던 모양이다. 과연 기록이 있는지. 기자의 대답이 명쾌하다. ‘기록이 없다, 만약 있다면 거짓이다.’

고려충렬사

또 하나의 두문동사원이 있었다.

1941년 4월 14일 전남 장성의 경현사(景賢祠)에서 현판을 새로 거는 행사가 열렸다. 새로 걸린 현판에는 ‘고려충절사(高麗忠節祠)’란 글씨가 또렷했다. 매일신보는 이 행사를 크게 보도했다.

내지(일본)의 ‘아코47사무라이(赤穗四十七士)’에 뒤지지 않는 대의명분으로써 끝까지 옛 주인에 대한 충절을 지키고자 목숨을 바친 고려의 유신 정몽주 선생 등 72 두문충절사의 사적은 실로 조선 역사상 정화인데도 불구하고 일반 사회에서는 하늘에 사무친 그들의 충의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전남 장성 삼태서원의 도유사인 김기한 씨는 전부터 경성 한강통에 있는 황도회(皇道會)의 유지들과 협의한 다음, 72충절사의 사적을 널리 일반 사회에 알려서 황국신민으로서 충성을 다하도록 격려하는 동시에 그들의 충성스러운 혼령을 위로하고자 힘써 왔다.
이 사업에 충심으로 찬성하는 미나미 조선 총독이 그들의 혼령을 받들고 있는 전라남도 장성의 경현사를 ‘고려충절사’라고 이름을 고쳐 지어주고, 동시에 바꿔 붙일 현판도 친필로 써주었다. 2백만 명이 넘는 72충절사의 자손은 물론 전조선 유림들이 감격하고 있다. (『매일신보』 1941.4.14)

원래 경현사는 개성의 두문동서원과 함께 두문동 72현을 받들던 곳이다. 1932년에 송조헌, 김기상 등이 설립한 사우인데, 두문동 72현과 함께 김승길 김오행을 배향한 곳이다. 그런데 1941년 무렵 전남 장성 삼태서원의 도유사 김기한이란 사람이 황도회에 교섭한 끝에 ‘고려충절사’란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단순히 이름을 바꾸는데 머물지 않았다. 거기에는 72현의 사적을 널리 알려 조선인들이 황국신민 으로서 충성을 다하도록 격려하자, 황도정신을 길러 내선일체 운동을 더욱 철저히 하자는 의도가 담겼다. 그것을 위해 황도회 조선본부와 협의하고 조선 총독의 지원까지 이끌어냈던 것이다.

이 지점에 ‘47인의 사무라이’가 등장한다. 위 매일신보 기사에서는 ‘아코47사무라이’라고 표현했다.

에도막부 시절이던 1701년 아코번(赤穗藩) 영주 아사노 나가노리가 막부의 고관인 기라 요시나가를 칼을 들어 다치게 했다. 일본 사무라이들의 칼부림이야 대단한 일이겠냐만, 그곳이 에도성이어서 문제가 됐다. 아사노는 에도성 안에서 무기를 지참할 수 없다는 법을 어긴 죄로 할복 자결했다. 아사노가(淺野家)는 단절됐다. 반면 상대방인 기라는 아무런 벌도 받지 않았다. 사건 이듬해, 아사노의 가신들이었던 사무라이들이 기라의 저택을 습격해 기라의 목을 베어 주군의 묘에 바치는 복수를 결행했다. 막부는 이들에게 전원 할복을 명령했다.

이 사건은 일본인들 사이에 크게 알려져 이를 소재로 한 작품도 많이 만들어졌다. 주신구라(忠臣藏)라고 하는 유명한 국민 서사가 그것이다. 지금도 영화, 드라마로 계속 만들어지고 있다.

일본 역사에는 ‘사무라이 정신’이라며 이 이야기와 연결 짓는 일이 많다. 메이지 유신 당시 막부에 대한 충성을 다짐하며 신정부군에 맞섰던 아이즈번(會津藩)의 소년병 부대 백호대(白虎隊)가 그러했고, 태평양전쟁 때 미군 전함에 돌진했던 가미카제 특공대가 그러했다. 그리고 1941년 경현사를 고려충절사로 이름을 바꾸는 장면에서 ‘47인의 사무라이’가 언급됐다. 고려에 충절을 지킨 72인을 주군의 복수를 완성하고 할복 자결한 47인의 사무라이에 비견했다. ‘황도정신’을 기르고 ‘내선일체’를 완성하자는 선동에 두문동 72현을 끌어들이고, 그 충절을 본받자고 기대하는 것이다.

마치 1943년 ‘조선인학도특별지원병제’가 공포되자 조선의 지식인들이 화랑의 세속오계를 들먹이며 조선 청년들을 전쟁판에 밀어넣었던 것과 같다. 화랑 관창의 살신성인과 임전무퇴 정신이 일본의 전쟁터에서 일왕에 대한 충성으로 변질된 것처럼. 일제는 그들의 전쟁에 조선의 역사, 상징을 이용하려 했고, 어떤 조선인들은 그런 상황을 활용해 가문과 조상을 높이는 동아줄로 삼았다.

P.S.
1936년 신문 기사를 보면 두문동사원에 봉안된 위패가 130위라고 했다. 기사에는 고려가 망할 때 충성을 다하고 절개를 지킨 72현과 함께 죽음으로 항쟁하거나 산간에 깊이 은거해 고려에 충성을 다한 인물들 130인이라고 설명한다. 두문동사원에는 방이 네 개 있었다. 72현을 봉안한 표절실이 있고, 그 외에 순절실, 항절실, 정절실이 있었다. 각기 성격에 맞춰 분리해 위패를 모셨던 모양이다. 72현 외에 나머지 인물들의 정체는 알 수 없다. 한 가지 힌트를 발견했다. 『벽은실기』에 실린 「송도지」에 두 군데 두문동이 실렸다. 보황산 10리쯤 되는 곳에 고려 유신 48명이 은둔한 두문동, 송도 서쪽 10리 만수산 아래 태학사 72명이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죽었다는 두문동이 있다고 했다. 그 수를 합치니 공교롭게 130명이 된다.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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