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독립투쟁의 계승과 항일노래 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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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노래 함께 보기 5]

신흥무관학교의 노래(마지막) :
독립투쟁의 계승과 항일노래 전승

이명숙 책임연구원

1919년 국내 3·1운동과 상해 임시정부 수립에 이어 1920년 독립군의 봉오동·청산리 전투 대승 이후, 일제와 일본군은 만주와 중국의 한국 독립운동세력을 뿌리 뽑기에 혈안이 되었다. 중국 관헌과 마적단, 군대까지 앞세워 독립운동가 탄압과 독립군 초토화 작전을 무차별적으로 감행했다. 게다가 보복성의 한인 양민학살까지 자행해 그간 항일독립투쟁에 인적·물적으로 든든한 배후였던 동포사회에 회복하기 어려울 정도의 피해를 입혔다. 서간도 지역도 예외 없는 탄압에 직면하면서, 사실상 독립운동세력의 활동이 불가능해졌다.

한편으로 1920년경은 상해 임시정부뿐 아니라 한중 접경 지역에 자리 잡고 있던 각종 독립단과 단체들이 거국적 3·1운동에 힘입어 국내로 진격하는 독립결전을 준비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그간 일제 관공서와 경찰 등을 대상으로 한 소규모 게릴라전에서, 독립운동 제 세력과 단체가 모두 연합한 대규모 전투를 상정했던 것이다. 즉 고립분산된 형태의 대일투쟁은 한계가 있음을 절감하고 각종 조직을 통합하여 효과적인 대일항쟁을 전개하고자 했다. 우선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다양한 방안들이 모색되고 그 실행을 위한 노력들이 경주되던 시기였다.

신흥무관학교의 후신 검성중학교의 「국치일 노래」

1911년 6월 유하현(柳河縣) 삼원포(三源浦)에서 신흥강습소로 출발 했던 신흥무관학교는 설립 10여 년 만인 1920년에 일본군의 대규모 공격 정보를 입수하고 집단적 이동을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허은, 2013, 민족문제연구소)를 통해 이 시기 상황의 일면을 볼 수 있다. “경신년(1920) 10월 일본 토벌대들이 전 만주를 휩쓸어 애국지사들은 물론이고 농민들도 무조건 잡아다 학살한 경신참변으로, 애국지사들은 가족을 두고 단신으로 길림성(吉林省) 오상현(五常縣)·영안현(寧安縣), 흑룡강성(黑龍江省)으로 흩어졌다.” 당시 이곳들은 북만주 지역으로 중국과 러시아의 접경지였고, 일본군을 피해 소련 지역으로 들어간 독립지사들과도 비교적 연락이 쉬운 곳이기도 했다.

길림성 오상현, 영안현과 접한 액목현(額穆縣)에는 1913년부터 1917년까지 신흥무관학교 교장을 지낸 여준(呂準, 1862∼1932) 등의 신흥무관학교 관계자들이 자리를 잡았다. 특히 여준은 일제의 탄압으로 흩어진 서간도의 독립운동 세력을 규합해 새로운 독립군 양성을 위한 교육기관을 설립하고자 했다. 1922년 액목현 교하(蛟河) 황지강자(黃地崗子)에 설립된 검성(儉成)중학교가 바로 그것이다. 학제는 4년제로, 매일 오전 4시간(8시∼12시)의 학과 수업과 오후 4시간의 노동을 병행했다. 여준은 교장을 맡으면서 학과 과목도 교수했고, 신흥무관학교 졸업생인 오광선(吳光鮮, 1896∼1967, 체육교사), 이완규(李琓圭, 1895∼1950, 교사 겸 학감) 등도 교사로 재임했다. ‘반일노동, 반일학과인 경독양전(耕讀兩全)’을 실천했는데, 특히 학과와 노동 시간 외에 저녁이나 새벽 시간을 이용해 목총을 사용한 군사교련을 진행했다는 점에서 신흥무관학교의 후신 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검성중학교에서도 신흥무관학교에서 부르던 노래가 불렸다. 허은(許銀, 1909∼1997. 이상룡의 손부)이 1919년 8월 29일 국치일에 신흥무관학교 운동장에서 목이 터져라 부른 ‘국치일 노래’는 1925년 봄 검성중학교 부속 소학교에 입학해 1년여를 수학한 지복영(池復榮, 1920∼2007. 지청천의 딸)이 검성중학교 운동장에서 거행된 국치일 기념식에서 부른 ‘국치의 노래’와 같은 것이다. 이것은 1920년대 만주 지역에서 부른 노래들을 모은 가사집 『가곡선집(歌曲選集)』(金漢山金希山 주편, 1920년대)에 「국치기념가」로 실려 있다.

이후 자료로는 확인되지 않으나 광복 전까지 매해 치러진 국치일 행사에서 불렸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유는, 해방 후 독립군가 등 항일독립 노래를 채록해 모은 노래집·가사집 등에 수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복영은 ‘국치의 노래’ 외에도 「신흥무관학교 교가」, 「용진가」 등도 불렀다고 기억하고 있어서, 검성중학교가 신흥무관학교의 독립군 양성기관으로서의 역할과 함께 항일노래도 계승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보성중학 – 신흥무관학교 – 한족노동당 – 임시정부로 계승된 ‘화려강산 동반도는’

국치일은 국외 한인 동포들이 반드시 기념하는 주요 기념일 중 하나였다. 1926년의 일본 외무성 소장 문서(길림총영사 작성)에는 ‘한족노동당 장학부 편찬’ 『국어교과서』(1권, 노동강습용)에 대해 기록되어 있다. 표지와 함께 ‘불량(不良)’한 내용으로 ‘국기, 기념절, 애국가’편을 발췌해 일본어로 번역해 놓았다. 전체 48편 중 ‘제35 기념절’에는 제1경축일 개천절(開天節, 음력 10월 3일), 다음 어천절(御天節, 음력 3월 15일)에 이어 세 번째 기념일로 양력 8월 29일 국치일을 꼽고 있다. 마지막은 양력 3월 1일 독립선언기념일이었다. 국치일 노래에 대한 내용은 전혀 확인되지 않지만, 주요 기념절 중 하나인 만큼 관련 기념식을 진행하며 ‘국치일 노래’를 불렀을 가능성은 높아보인다.

한족노동당(韓族勞動黨)은 1924년 8월 길림성 반석현(磐石縣)에서 495명의 발기로 창립발기회를 개최해 성립했는데, 그해 11월 4일 반석현에서 치러진 창립총회 당시 당원은 무려 818명에 달했다. 발기문과 선언서, 강령을 통해 ‘노동자가 국가의 주인이자 문명의 산모(産母)’이며, ‘노동자의 단결과 실력 함양을 고취하여 세계 대세에 순응’하고 ‘노동계급에게 광복사업에 대한 민중적 자각정신을 환기’하고자 함을 밝혔다. 한족노동당이 위치한 반석현은 통화현과 액목현의 중간 지점이었고 주로 경상북도 출신 독립운동가들이 정착해 있었다. 안동 출신의 이상룡(李相龍, 1858∼1932) 일가가 대표적이다. 이상룡은 신흥무관학교 설립자 중 1인이며 1913년에 신흥무관학교 교장으로도 재임했는데, 학교 폐교 즈음에 화전현(樺甸縣)으로 이동했다가 이후 반석현에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한족노동당 『국어교과서』의 ‘제36 애국가’편에는 전체 4절의 애국가 가사가 기록돼 있다. 일본 외무성 문서에는 그 일어 번역문이 실려 있는데, ‘화려강산 동반도는’으로 시작했다. 이것은 『항일음악 330곡집』의 「애국가12」와 같은 것으로, 바로 신흥무관학교의 애국가(이하 「애국가(화려강산)」)였다. 다음의 <표>로 두 애국가의 가사를 비교해 보았다. 1절 가사는 동일했다. 후렴 ‘길이 보전하세’가 ‘다시 건설하세’로 바뀌는 등 일부 가사가 당대 현실을 반영하듯 변화를 보였다.

이 「애국가(화려강산)」은 신흥무관학교의 「애국가(화려강산)」을 전승받은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교과서에 실어 널리 알릴 정도로 한족노동당의 ‘공식 애국가’로서 자리 잡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적어도 한족노동당이 재만농민동맹(在滿農民同盟)으로 명칭과 조직을 변경하는 1928년 2월까지 한족노동당의 ‘공식 애국가’로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반석현이 위치한 길림성 즉 북만주 일대의 한인 동포사회에 광범위하게 전파되었으리라 판단된다.

이를 반영하듯 「애국가(화려강산)」은 1930년대 말 1940년대 초 임시정부 이동 중 “우리의 애국청년들이 잃어버린 고국을 그리면서 부르던 우리의 애창가”를 모은 가사집 ????망향성????에서 「무궁화 내 배달」이란 곡명으로 수록되어있다.

친필로 이 가사집을 작성한 이국영(李國英, 1921∼1956. 이광의 딸)은 임시정부 이동 중 중국 유주(柳州)에서 1939년 2월 정식 발족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韓國光復陣線靑年工作隊) 대원으로 활약했다. 「무궁화 내 배달」에는 ‘동해물과曲’이라는 표기도 있어서 당시의 애국가 곡조인 「올드 랭사인(Auld Lang Syne)」에 맞춰 노래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곡명에서 ‘애국가’라는 지위는 사라졌지만 당시 ‘애국청년’들이 애창한 노래임은 여전했다.

결국 이 「애국가(화려강산)」이 1910년대 보성중학교에서 신흥무관학교로 전해진 후 1920년대에 한족노동당의 공식 애국가로 역할을 하며 널리 전파돼 1930∼1940년대 임시정부로까지 이어져 꾸준히 항일노래로 불렸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신흥무관학교 관계자들이 창작한 새로운 항일노래

1920년 신흥무관학교가 폐교된 이후에 신흥무관학교 관계자들이 창작한 것으로 확인되는 항일노래는 『항일음악 330곡집』 등에서 총 11곡이 확인된다. 그 수가 많지는 않지만 독립군가·항일노래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가 작사가와 작곡가를 알 수 없다는 점에 비춰보면, 이 인물들이 독립운동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상당했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서로군정서는 서간도의 항일무장운동 단체를 통합해 설치한 군정부(軍政府)가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후 개칭한 것이며, 산하 군대로 조직한 것이 서로군정서 의용대이다. 상당수가 신흥무관학교 졸업생 및 생도로 구성되었던 서로군정서 의용대는 1922년 8월 각지의 순국열사 19인을 추모하는 자리에서 「순국용사추모가」를 만들어 불렀다.

신흥무관학교의 교관 출신 지청천(池靑天, 1888∼1957)은 서로군정서 사령관이던 1920년에 일제와 중국 관헌의 압박을 피해 신흥무관학교 생도들을 이끌고 안도현(安圖縣)의 삼림지대로 이동하던 중에 <광야를 달리는 독립군>의 가사를 지었다고 한다. 신흥무관학교가 폐교되는 시점이 이 무렵이다. 지청천은 1920년대에 대한독립군단 결성과 고려혁명군사관학교를 설립하는 등 수많은 항일투쟁을 전개했으며 1940년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과 함께 총사령관에 취임해 대일 항전을 이끌었다.

신흥무관학교의 교관을 지낸 이범석(李範奭, 1900∼1972)은 1920년대에 청산리전투에서 활약하고 대한독립군단에 참여했으며 1930년대에 낙양군관학교 한인특별반 교관, 1940년대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참모장 등을 지냈다. 국외 독립운동 과정에서 창작한 시가 중 총 4곡이 항일노래와 독립군가로 만들어졌다. 신흥무관학교 졸업생이던 김학규(金學奎, 1900∼1967)도 1930∼1940년대에 걸쳐 3곡의 항일노래를 작사·작곡했다. 조선혁명군, 조선의용대를 거쳐 한국광복군 제3지대장으로 활약했는데, 특히 한국광복군 복무 시절 광복군에 대한 내용의 가사를 한국민요의 곡조를 활용해 2편의 ‘광복군가’로 창작한 것이 특징적이다.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한 것으로 알려진 윤세주(尹世胄, 1901∼1942)는 김원봉(金元鳳)과 의열단을 창설한 데 이어 조선의용대도 창설하며 항일투쟁을 전개했는데, 조선의용대 시절에 유명한 독립군가 <최후의 결전>을 작사하고 <바르샤바 노동자 노래>를 편곡해 곡조를 완성했다. 송호(宋虎, 해방 후 宋虎聲으로 개명)는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한 후 한족회, 군정서 참모 등을 지내다 1940년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편련처장, 1942년 광복군 제5지대장 등을 역임했다. 광복군 편련처장 시절 <광복군항일전투가>를 작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흥무관학교 출신자들이 1920년부터 해방되기까지 다양한 운동계열로 활동영역을 넓혀 치열한 항일독립투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독립군들의 사기를 높이고 결전을 다짐하는 여러 항일노래와 독립군가를 창작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비록 대부분이 ‘노가바’(노래 가사 바꿔 부르기)였지만, 오랜 독립투쟁의 길에서 변화된 시대와 정세에 맞는 언어로 가사를 바꿔 독립투지를 지속적으로 높이고자 했던 것이다.

여기에 더해 1930년대 중반경부터는 독립운동가들의 손에서 ‘순수창작’ 독립군가와 항일노래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위 표에서 이범석이 작사한 「국기가2」가 바로 그러한 경우이다. 한국광복군의 대표 군가 중 하나인 「국기가2」의 작곡자는 바로 한형석(韓亨錫, 1910∼1996) 즉 한유한(韓悠韓)이다. 중국에서 전문 음악교육을 받은 후 ‘구국예술’로써 항일독립투쟁에 투신했고, 한국청년전지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에서 그 유명한 항일가극 『아리랑』을 창작·연출했다. 이외에도 정율성(鄭律成), 이두산(李斗山), 이정호(李貞浩, 1913∼1990) 등도 항일독립전투의 현장에 새로운 독립군가·항일노래를 창작해 수많은 독립군의 항일의지를 높이는데 크게 공헌했다.

독립운동사 속에서 신흥무관학교는 약 10년간 가장 많은 독립군을 배출해낸 독립군 양성기관 즉 만주 무장독립운동의 요람이었다. 신흥무관학교 출신의 독립군은 서간도를 넘어 북만주, 중국 관내까지 활동 범위를 넓혀 나갔으며, 독립운동이 다양한 운동계열로 분화해 감과 동시에 각자의 위치에서 자기 몫을 해내는 독립군으로서 역할을 다했다.

엄격한 규율이 생명인 신흥무관학교에서의 훈련과 생활방식은 이후 각자의 활동 기반이 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생존을 위협하는 곤궁함과 나라 잃은 설움으로 개개인의 항일의지는 늘 시험대에 설 수밖에 없었다. 이런 고난 속에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 항일 투지와 독립 희망을 말하는 항일노래·독립군가를 ‘함께’ 부르는 행위는 『신흥무관학교와 망명자들』(서중석, 2001)의 표현대로 “망명자사회의 사명감을 환기시키고 절망이라는 병을 이겨내며 독립할 그날을 위해 다시 마음을 다잡게 하는” 훌륭한 재료였다. 항일노래는 항일독립 투사들과 국외 한인동포들에게 면면히 이어졌다.

이번 호로 신흥무관학교의 노래를 마치고 차후 항일음악의 다른 주제로 찾아뵙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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