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숭의여대 안에 보이는 저 자연석 빗돌의 정체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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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 남아있는 저들의 기념물 6]

숭의여대 안에 보이는 저 자연석 빗돌의 정체는 무엇일까?
경성신사 천만궁에 놓여 있던 ‘하이쿠비(俳句碑, 1923년)’의 조성 내력

이순우 특임연구원

‘안중근 의사 동상’이라고 하면 대개 누구라도 남산 중턱에 자리한 안중근의사기념관(1970.10.26일 개관) 앞의 그것을 먼저 떠올리기 마련이다. 안중근 의사의 동상이 처음 이 자리에 등장한 것은 1967년 4월 26일이었다고 하는데, 얼추 잡아도 반세기를 훌쩍 넘어 60여 년에 가까운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는 때의 일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동상의 최초 건립후보지는 ‘서울역 광장’이었다. ????동아일보???? 1957년 8월 5일자에 수록된 「안 의사(安義士)의 동상(銅像), 서울역 광장에 건립」 제하의 기사에는 이러한 내용이 담겨 있다.

건립장소의 미확보로 공사추진이 지연되고 있던 ‘안중근 의사’의 동상은 이번 관계당국의 양해를 얻어 서울역 광장에다 건립하기로 결정 —. 오는 7일 상오 11시 서울역 광장에서 기공식을 거행할 것이라고 한다. 안 의사의 동상은 지난 4월부터 조각가 김경승(金景承) 씨에 의하여 제작중에 있다고 하며 오는 10월 26일 안 의사의 ‘하루핀’역전에서의 의거일을 맞이하여 제막식을 거행할 예정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해 9월 4일 기공식까지 올렸으나 서울역 광장의 소유자인 교통부(交通部) 측에서 돌연 사용승인을 철회하고 공사중지명령을 내리는 바람에 동상 제막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 이를 계기로 관리사무 일체가 문교부(文敎部)의 소관으로 변경되었으며, 자연스레 새로운 건립후보지의 물색이 불가피한 상황에 직면하였던 것이다.

이때 장충단 구역의 옛 박문사(博文寺, 이토 히로부미의 추모사찰) 터와 남산 부엉바위약수터 옆구리의 조선토지조사기념비(朝鮮土地調査記念碑, 1927년 7월 제막) 자리가 대체장소로 유력하게 검토된 적도 있었으나, 결국 안중근 의사의 동상은 숭의여자중고등학교 정문 앞에 세우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이곳이 동상 건립지로 선정된 연유는 아무래도 공간 내력의 측면이 고려된 결과가 아닌가 싶다. 바로 아래쪽이 이른바 식민통치권력의 본거지였던 통감부(統監府)와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의 청사가 잇달아 터를 잡았던 곳이며, 또한 그 위쪽으로는 왜성대공원(倭城臺公園, 남산공원)과 경성신사(京城神社)가 두루 포진한 구역이 아니었던가 말이다.

이러한 결과로 안중근 의사의 동상은 두 해를 넘겨 1959년 5월 23일에 이르러서야 마침내 처음으로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다. 그러나 애당초 이곳은 장소 자체가 워낙 좁고 비탈진 지형이라는 점 때문에 앞서 얘기한 것처럼 얼마 지나지 않아 1967년 4월 26일에 남산야외음악당 동편 위쪽의 광장으로 동상 이전의 결정이 내려진 것이다.

그 이후 1974년 7월 10일에는 이 동상과 관련하여 원형 고증에 대한 논란으로 개작(改作)된 새동상이 들어서는 변화가 있었으며, 원래의 동상은 광주 상무대(光州 尙武臺)에 기증하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동상을 만든 조각가 김경승(金景承, 1915~1992)의 친일행적으로 인해 이를 둘러싼 철거논란이 지속적으로 불거지면서 끝내 지난 2010년 10월 26일에 이르러 안중근의사기념관을 신축 재개관하는 때에 맞춰 이용덕(李容德) 서울대 조소과 교수의 작품으로 대체된 바 있다.

이때 철거된 옛 동상은 어디로 갔나 했더니, 전해 듣기로 최초 건립 장소였던 숭의여자대학교(崇義女子大學校, 서울 중구 예장동 8-3번지 일대) 쪽으로 옮겨졌다는 것이다. 마침 얼마 전에 이곳 교정 안쪽을 둘러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곳에 가보니까 과연 학교 운동장의 끝자락에 안중근 동상과 부속 조형물이 가지런히 배열되어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동상 뒤쪽의 병풍석에는 “…… 본래의 위치인 숭의학원으로 이전하여 설치하게 되었다”는 요지의 안내판(2011년 6월 제작)이 부착된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곳 본관 건물의 앞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 이 학교 자체가 옛 경성신사 터에 그대로 들어선 내력을 지니고 있는 만큼 ― 일본인 신사 시절의 흔적들을 가지런히 모아놓은 공간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 여기에는 몇 점의 주춧돌과 함께 헌납자의 명단이 새겨진 석판 등을 포함하여 여러 종류의 잔존 석물이 배열되어 있고, 그 뒤에는 경성신사 터의 연혁에 관한 안내판과 커다란 옛 사진자료가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그리고 그 옆으로는 제법 큼직한 ‘정체 모를’ 자연석 빗돌 하나가 퍼뜩 시야에 들어온다. 그냥 봐도 무슨 글자인지 알아보기도 어렵거니와 아무런 설명자료도 없다보니 여느 탐방객의 눈에는 그저 궁금증만 자아내게 할 따름이다. 그렇다면 이 비석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이것은 주제넘은 어느 일본인이 남겨놓은 ‘하이쿠비(俳句碑)’이다. 흔히 ‘구비(句碑, 쿠히)’ 또는 ‘배비(俳碑)’라고도 표기되며, 이는 일본전통시가(日本傳統詩歌)의 하나인 ‘하이쿠(俳句)’를 새긴 비석을 가리킨다.

이 대목에서 약간 개인적인 얘기를 덧붙이자면, 몇 해 전에 나는 우연한 기회에 옛 사진엽서 한장을 입수할 기회가 있었다. 남산 기슭 경성신사 천만궁[天滿宮, 일본에서 ‘학문의 신’이라 일컫는 스가와라노미치자네(菅原道眞)를 제신으로 받드는 신사] 경내에 설치된 하이쿠비석의 모습이 엽서 앞면에 가득하고, 뒷면을 살펴보니 유린생명보험주식회사 니가타지부장(有隣生命保險株式會社 新潟支部長)인 야마지 우콘노신(山路右近進)이 보낸 서중문안엽서(暑中問安葉書; 1935년 7월 26일자 니가타우편국 소인)였다.

이 엽서를 손에 넣을 당시에는 당연히 여기에 보이는 하이쿠비석이 지금껏 그대로 남아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질 못했었고 그저 일제강점기의 흔적 하나를 기억하는 연결고리로나 삼을 요량이었다. 그런데 막상 이것의 실물이 바로 눈앞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을 확인하고 보니까 이를 직접 살펴보는 감회가 조금은 남다르게 다가온다.

아무튼 앞면에 보이는 비석의 글씨체가 동일하고, 뒷면을 살펴보니 “입궤기념(立机記念)”과 “와카야마현인(和歌山縣人)”이라는 표시와 아울러 “대정 계해년(즉, 1923년) 4월에 이를 세웠다”는 글자도 또렷하다. 다만, 그 아래쪽에 “야마지 우콘노신(山路右近進)”이라고 이름을 새긴 부분은 땅 아래에 파묻혀 있는지라 글씨를 직접 확인하는 것은 곤란한 상태이지만, 이미 사진엽서를 통해 글자 내용을 파악하고 있으므로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       

야마지 우콘노신의 경성신사 천만궁 하이쿠비석 내용풀이

[앞면] 望まはや名山を永の梅雨晴れに(바라보는구나 명산을, 장맛비가 갠 긴 끝에)
[뒷면] 立机記念(입궤기념)/
大正癸亥四月 建之(대정 계해 4월 이를 세움) 和歌山縣人 山路右近進(와카야마현인 야마지 우콘노신)

이러한 비석을 만든 유래가 더욱 궁금하여 관련자료를 좀 더 뒤져보았으나 이것의 제막에 관한 직접적인 신문기사는 찾을 수 없었고, 그 대신에 발견한 것이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기사 한 토막이다. 『경성일보』 1924년 5월 27일자에는 대전 호남생(大田 湖南生)이 투고한 「[전서구(傳書鳩)] 천만궁(天滿宮)의 구비(句碑, 하이쿠비석)」라는 제목의 글이 수록되어 있는데, 여길 보면 그 시절에 일본인 스스로 이 비석의 존재에 대해 대단한 혹평과 힐난을 퍼부었던 사실이 잘 드러나 있다.

나는 일전에 볼일을 지니고 오랜만에 경성으로 출발하였다. 그리하여 옛 친구를 만나 남산(南山)의 천만궁(天滿宮, 텐만구)을 참배했다. 친구는 걸으면서 야마지(山路)라고 하는 이가 요전에 구비(句碑)를 세우고 득의양양 하고 있는 것이랑 보험회사(保險會社)의 사람이라는 것이랑 아주 자존심(自尊心)이 강하다는 것이랑 경성의 하이진(俳人; 하이쿠를 짓는 사람) 모두가 분개(憤慨)하여 궁사(宮司, 신사의 책임자)를 탓하고 있다는 것 등을 들려주면서 그 구비의 앞에 섰던 것이다.
아연(俄然)! 나의 상상(想像)은 적중(的中)했다. 그것은 일종의 〇〇적인 구비였기 때문이다. “望まはや名山を永の梅雨晴れに(바라보는구나 명산을, 긴 장맛비가 갠 끝에)”, 이 무슨 구절인가? 긴 장맛비가 갠 끝에 명산을 바라보던 본인(本人)은 “긴 장마”와 “개다”는 것을 별개로 분할하여 지은 것이 아닌가? …… 나는 친구에게 이것이 조금도 문법(文法)을 알지 못하는 매우 유치(幼稚)한 하이진(俳人)이라는 것을 역설(力說)했던 것이었다. …… 그런데도 불구하고 스스로 서명(署名)하고, 게다가도 자신의 태구(駄句, 서투른 하이쿠)를 조각(彫刻)해서 세우는 등에 이른 것은 배도상(俳道上)에 있어서 너무나도 참월(僭越, 주제넘은 것)하고 자홀심(自惚心, 자만심)이 센 것이 아닌가? 이 일은 단지 경성하이진(京城俳人)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일 뿐만이 아니라 나아가서는 조선에 있어서 배단(俳壇)의 치욕(恥辱)이다. 나는 야마지 아무개(山路某)에게는 조금도 은원(恩怨)을 지니지 않고 미견(未見, 만나 보지도 못한)의 사람이다. 자신을 돌아보고 속히 이를 철퇴(撤退)하고, 금후(今後)에는 크게 하이쿠(俳句)에 대한 자홀심을 거둬 전심연구(專心硏究)하실 것을 종용(慫慂)한다. (끝)

그렇다면 이토록 자만심에 넘쳐 이 하이쿠비석을 세웠다는 야마지라는 이는 도대체 어떤 인물이었던 것인가? 그의 이력사항에 대해서는 우선 조선중앙경제회(朝鮮中央經濟會)에서 편찬한 『경성시민명감(京城市民名鑑)』(1922 재판), 214~215쪽에 다음과 같이 정리되어 있다.

야마지 우콘노신(山路右近進, 유린생명보험회사 조선지부장)
본적지(本籍地) : 와카야마시(和歌山市) 12번정(番丁) 7번지(番地)
현주소(現住所) : 경성부 황금정 2정목(전화 1356번)
군(君)은 명치 17년(1884년) 4월 2일로써 와카야마현 사족(和歌山縣 士族) 모리사와 시게지로(森澤繁治郞)의 3남으로 태어나 …… 보험업(保險業)에 대한 취미와 포부를 지니고 명치 43년(1910년) 현 보험업에 일신(一身)을 바쳐 내지(內地, 일본) 각소에서 해업(該業)의 개척에 애썼고, 특히 호쿠리쿠(北陸; 일본 니가타, 토야마, 이시카와, 후쿠이 등 4개현을 일컫는 표현)의 경영에 현저한 수완(手腕)을 발휘한 것이 약 3개년이며, 대정 7년(1918년) 2월 선만(鮮滿)을 인수하여 현주소에 도래한 이래 취미(趣味)로서 업무의 여가(餘暇)에 유린암 타케죠(有隣庵 竹城)라는 아호(雅號)로써 상당한 하이쿠(俳句)를 짓고, 위기(圍碁, 바둑)에도 역시 상응 숙달되어 있다.

그의 행적과 관련하여 『경성일보』 1924년 12월 11일자에 게재된 「유린생명 점장 경질(有隣生命 店長 更迭)」 제하의 기사에는 “경성지부장 야마지 우콘노신 씨가 이번에 히로시마지사장(廣島支社長)으로 전근(轉勤)을 명받아 올봄 1월 하순에 부임할 예정”이라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것으로 보면 그는 1918년 2월 이후 대략 7년가량을 조선에 머물렀던 것으로 드러난다.

결과적으로 경성신사에 남겨놓은 하이쿠비석은 그에게 있어서는 경성 재직 시절을 회상하는 더할 나위 없는 자신만의 자랑거리이자 ― 대량배포의 흔적이 역력한 ‘서중문안엽서’의 존재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 보험세일즈를 위한 강력한 홍보수단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1925년 이후 일본 도쿄에서 연속 발간된 ????대중인사록(大衆人事錄)????의 여러 판본에 수록된 야마지 우콘노신의 프로필 내용에서도 “…… 더욱이 카키모토 유린암 타케죠(柿本有隣庵竹城)라는 호(號)를 쓰는 하이진(俳人)이며, 조선 남산공원(南山公園)에 야마지 타케죠(山路竹城)의 기념비(記念碑)가 있다”라는 구절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을 확 인할 수 있다.

한편, 경성신사의 내력과 연혁에 관한 자료들을 정리하다 보면, 이 구역 안에는 야마지의 하이쿠비석 이외에도 꽤나 많은 종류의 일제 기념물들이 터를 잡고 있었다는 사실을 간파하게 된다. 이들 가운데에는 ‘기미만세사건’이 일어난 1919년을 대액년(大厄年; 크게 운수가 사나운 해)이라 하여 이를 액땜하기 위해 저들이 세운 ‘경성신사 기념비’의 존재가 먼저 눈에 띄는데, 이 비석의 제액은 사이토 총독이 썼고 비문은 총독부 문서과장이던 쿠도 소헤이(工藤莊平)가 지은 것으로 알려진다.

경성신사 유래비의 내용 풀이

경성신사유래(京城神社由來)
조선총독 해군대장 종2위 훈1등 공2급 남작(朝鮮總督 海軍大將 從二位 勳一等 功二級 男爵)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제액(題額)
유래기(由來記)
삼가 오직 우리 일본은 신령의 식국(⻝國, 천황이 통치하는 나라)이 되어 도처에 사(社)를 건공하야 신령을 존숭하기로 하고 명치 25년(1892년)경에 경성거류인민(京城居留人民) 등이 이 천조황대신(天照皇大神) 봉재의 의론이 있어서 31년(1898년) 5월에 신궁사청(神宮司廳)에 청하여 신새(神璽)의 수여를 받고 제국영사관(帝國領事館)에 진정 봉안한 바 내궁(內宮)의 100분의 12로 된 신전을 이곳에 정하고 그해 11월 3일 봉천식을 거행하였고, 대정 2년(1913)에 사호(社號)를 경성신사로 칭하고 연년히 10월 17일로써 정하여 항례대제(恒例大祭)를 집행하기로 되었는데 요새부터 씨자(氏子)의 조직이 아주 정돈되어 4년(1915년) 7월에 씨자총대(氏子總代) 이하의 역원을 베풀어서 사무를 조리하고 유지의 방법이라도 세우게 되었더라. 이와 같이하여 한국병합(韓國倂合) 후는 내지인(內地人)과 조선인(朝鮮人)과의 차별이 없이 모두 신덕(神德)을 입게 하여 아주 국력을 증가하고 국운을 발전하기 지극히 존중한 것이라.
대정 8년(1919년) 10월
정6위 훈6등(正六位 勳六等) 쿠도 소헤이(工藤壯平) 찬병서(撰倂書)
(*) 이 비석의 원문자료는 아직 확인된 바 없으며, 여기에 인용된 내용은 『매일신보』 1919년 11월 28일자에 채록된 「경성신사(京城神社)에 기념비(記念碑)」 제하의 기사를 바탕으로 재정리하였다.

그리고 1930년에는 이른바 ‘황태자전하어주가지처(皇太子殿下御駐駕之處) 기념비’가 들어섰으며, 곧이어 1933년에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한국통감에서 물러나던 때에 최후로 남긴 ‘녹천정(綠泉亭)’ 칠언절구를 새긴 시비(詩碑)가 이곳에 잇달아 등장하기도 했다. 여기에서 말하는 ‘황태자’는 나중에 이른바 ‘대정천황(大正天皇)’에 등극하는 요시히토(嘉仁, 1879~1926)를 가리키며, 이 기념비는 일찍이 그가 1907년 10월 16일에 방한(訪韓)하여 4일간을 ‘통감관저(統監官邸)’를 숙소로 삼아 머물 때에 바로 뒤편에 있던 ‘왜성대공원(倭城臺公園, 일명 남산공원)’에 잠시 올라 서울 시가지를 부감(俯瞰)했던 일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것이다.

경성신사 경내에 건립된 각종 기념물 현황

그렇다면 경성신사의 영역 안에 두루 흩어져 있었던 이러한 기념물들은 다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일제가 패망한 뒤에 이러한 일제의 잔존물은 마땅히 정리되고 철거되었을 테지만, 그렇더라도 갑자기 그 존재가 규명된 야마지의 하이쿠비석처럼 나머지 것들도 어느 날 땅 속에서 그 잔편이나마 홀연히 그 모습을 드러낼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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